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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를 보는 남자
남씨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슴푸레 동이 트는 새벽녘, 몰려드는 한기에 몸을 움찔하며 정신이 들었지만 얼른 눈을 감고 말았다. 다시 살그머니 샛눈을 뜨고 주변을 살폈다. 여기가 어디람? 코 앞으로 지나가는 사람의 광나는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큰 맘먹고 몸을 일으킨 그는 ‘악!’ 소리라도 지를 뻔했다. 낯익은 풍경, 아파트단지 내 상가에 있는 ‘조아저씨 비디오’ 문 앞에 자신이 누워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영화잡지 기자로 밥 벌어 먹고 사는 남씨는 새해에는 술을 끊겠다고 동네방네 떠벌렸는데 결국 한달을 넘기지 못했다. 오늘도 ‘쏜다’는 아무개 선배 기자의 꼬임에 혹해 따라 나섰지만 조용히 분위기만 맞추다가 도망치기로 작정했다. ‘딱 한잔만, 정말 마지막이다’ 주문을 외면서도 선배의 강권에 못이기는 척 폭탄주 한잔을 받아 마신 게 화근이었다. 알싸한 알코올 기운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넥타이를 이마에 질끈 동여매고 테이블 위에 올라가 특유의 허수아비
2000 우수 비디오숍 콘테스트 [8] - 콩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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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엔 없는 테이프가 없다
우수 비디오숍 5 - 으뜸과 버금 신길점, 신원철씨
비디오에 문화라는 단어를 굳이 접목해 쓰거나 대여점을 영화수용 문화의 중심이라고 추어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의 대여점은 포스터를 덕지덕지 붙인 침침한 실내에 먼지 뒤집어쓴 색바랜 테이프가 꽂혀 있고, 콩나물 다듬다 나온 부스스한 주인 아줌마가 지진 나는 액션물 내주면 동전 몇개 건네고 슬리퍼 끌고 돌아오는 것이 현실이다.
대단위 아파트를 낀 시흥 대로변 33평 점포에, 없는 테이프 없이 갖추어 놓고, 넥타이까지 단정하게 맨 양복 차림의 주인이 ‘경영의 노하우를 함께 나누어 한국형 대여점의 모델을 만들 때가 되었다’, ‘고객 감동을 어떻게 이끌어내느냐가 화두다’, 라는 말을 하면 이거 진짜인가 싶다. ‘으뜸과 버금 신길점’(02-847-6312, 02-847-7050∼1) 신원철(46) 사장은 도덕 교과서 같은 말만 한다. ‘으뜸과 버금’ 회장직을 맡았을 때, 그가 말을 꺼내려하면
2000 우수 비디오숍 콘테스트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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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숍에도 일본문화
우수 비디오숍 4 - 씨큐브클럽 상봉점, 전대문씨
지금까지 고객들이 집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었던 비디오숍은 통상 비디오와 만화를 구비한 작으면 10평 이하 크면 30여평 정도의 비디오숍이었다. 소자본의 개인 창업에 안성맞춤인 이 사업에 일본의 대표적인 문화상품 체인점인 씨큐브가 들어온 것이 98년 7월. 현재 씨큐브클럽은 분당에 두개의 직영점과 서울 상봉동에 하나의 가맹점을 운영하고 있다. 99년 9월에 열어 5개월이 지난 씨큐브클럽 상봉점은 70평 규모의 대형매장에 고급 인테리어로 단장을 하고 1만2천편의 비디오와 국내 가수의 CD와 게임 CD, 잡지, 그리고 AV 액세서리를 갖추고 대대적인 판촉을 벌이며 고객 유치에 발벗고 나섰다. 희귀 명작 프로들의 구색을 거의 다 갖췄고 장르구분을 세분화했다. 또 작은 매장에서는 불가능한 감독과 배우에 따른 진열체계도 부분적으로 도입해 대형 매장의 잇점을 최대한 살리고 있는 이 숍은 다소 낙후된 주변 문화환
2000 우수 비디오숍 콘테스트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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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웨어 만점 하드웨어도 만점
우수 비디오숍을 간다 3 - 영화마을 서대문점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이 없다고,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두루 만족시켜주는 대여점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영화도 출시됐구나 감탄할 정도로 희귀 프로를 많이 갖춘 대여점은 침침하고 좁은 매장에 테이프를 그냥 쌓아두다시피 했다. “<쉘부르의 우산>을 10만원 주고 구입했는데 지금까지 딱 두번 대여됐어요. 이러니 뭐 의욕이 나야 매장도 새로 꾸미고 정리도 하지요.” 점퍼 차림의 중년 아저씨 얼굴엔 시름이 가득하다.
미소 띤 얼굴, 단정한 옷차림의 젊은 주인이 상주하고 있는 점포는 밝고 깔끔하다. 테이프도 반짝반짝, 잘 정리해 두었다. 그러나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탓인지 오래 전에 나온 비디오는 찾아보기 어렵다. “가끔 청계천에 나가 옛날 프로를 사는데 좀 유명하다 싶은 영화는 가격을 얼마나 높이 부르는지 살 엄두가 나지 않아요. 더구나 나 혼자 만족하려고 사놓는 결과밖에 안 되구요.
2000 우수 비디오숍 콘테스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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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가호호 방문 대기업형 서비스 정신으로
우수 비디오숍 2 - 영화마을 개포점, 김제성씨
매일 자동차로 비디오를 회수하고 한달에 홍보전단 20만장을 돌리는 비디오숍이 있다. 영화마을 개포점. 비디오테이프도 없는 것 없이 다 갖추었고 아르바이트생도 상냥하고 매장도 30평 규모로 넓은편에 속한다. 퇴근길에 빌려보고 다음날 회수 차량이 오면 그때 돌려 주면 그뿐이다. 없는 게 없어 마니아, 영화감독, 영화배우나 유명 탤런트도 차를 몰고 자주 찾아온다는 이 비디오숍은 비디오 3만장에 만화 4천여권, LD와 CD까지 구비해 놓았다. 진열할 공간이 부족할 만도 한데 보통 2겹인 진열장을 3겹으로 짜넣어 공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2만5천 가구를 회원으로 확보해놓고 월매출액이 2천만원에 이른다. 영화는 잘 모르지만 경영 감각은 빠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이 비디오숍의 경영자 김제성씨를 만나보았다.
-언제 어떻게 이 일을 시작했나.
=96년 7월에 시작했다. 그전엔 삼성
2000 우수 비디오숍 콘테스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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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은 영화수용문화의 중심인 비디오숍의 우수 운영자들을 후원하고 전국 곳곳에 숨은 우수 비디오숍들을 발굴해 독자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우수 비디오숍 콘테스트를 마련했습니다.
서울지역을 대상으로 한 제1회 우수 비디오숍 콘테스트의 결과를 발표하면서 <씨네21>은 지난호에서 비디오대여업계의 현황과 전망을 살펴보는 기획 '비디오숍에도 봄은 오는가'를 실었습니다.
이번호에는 이번 '2000 씨네21 우수 비디오숍 콘테스트'에서 뽑힌 30개 숍 가운데서 나름대로 성공적인 운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5개 숍을 탐방하고 운영자를 소개합니다.
또 비디오숍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한 대여문화 백양백태를 콩트로 엮어보았습니다. 첫 번째 우수 비디오숍 콘테스트를 관심갖고 지켜봐준 비디오숍 운영자 및 독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한국영화 컬렉션, 이보다 많을 순 없다
우수 비디오숍 1 - 경희대 앞 미래영상, 손태영씨
통신을 통해, 혹은 비디오를 컬렉션하는
2000 우수 비디오숍 콘테스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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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에 대해 다 동의하는 분위기인데 혹자에 따라서는 더 세게 갈 수 있지 않을까, 정색하고 욕을 한다든지 동성애 느낌이 드는 면을 더 줄 수도 있고, 하여 본인이 더 욕심을 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사람도 있어요.
=감독님하고 조율한 부분인데 감독님이 표현하려고 하는 게 오히려 어색함에서 오는 섬세한 뉘앙스랄까 이런 게 있는데. 물론 그렇게 생각하신 분들이 있을 테고. 오히려 이영애의 연기력 여하에 따라 달라졌다고 하면 할말이 없겠지만 저도 더 갔으면 좋겠는데 감독님은 줄여서 가고 오히려 낯선 게 더 재미있지 않겠느냐 하세요. 감독님이 한번 더 한번 더라는 닉네임을 저한테 주신 이유도 그래요. 저는 캐릭터에 대한 기준을 모르겠는 거예요. 이게 좋은 건지, 저게 좋은 건지. 그래서 감독님은 확신을 하고 오케이를 주셨는데 내 선에서는 이게 정말 맞는 것인지에 대한 모호함이 현장에서 많이 있었죠. 그래서 전 계속 테이크를 많이 가고 싶어했고 감독님 선에서는 왜 자기를 못 믿느냐는
이영애의 재발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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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세게 가길 원했는데 감독님이 줄여 가자고…”
낯을 많이 가릴 거라는, 또는 지적으로 난감한 질문을 잘 피해갈 거라는 선입견은 이영애의 다갈색 눈동자 앞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지그시 상대방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때로는 까르르 웃음을 던지고 때로는 신중하게 한마디 한마디 내뱉는 한명의 배우가 있을 뿐이었다. 자신이 오히려 불쑥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모든 질문에 막힘없이 답을 하는 그에게서 엉뚱하고 장난기 많은 금자씨의 단면을 보았다. 박찬욱 감독이 양보해서 더 세게 찍을 수도 있는 걸 약하게 간 것이 아니냐는 음모성 질문부터 왜 스캔들이 없느냐는 잡담성 질문에까지 웃음을 머금고 일일이 친절하게 응대하는 것을 보고 웃으면서 복수하는 금자씨의 여유를 보았다. 인터뷰 중간에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절한 금자씨> 전야제 표를 잃어버렸다는 아버지에게 친절하게 일러주는 장면에서 여느 상냥하고 귀여운 여염집 딸을 보았다. 그는 소속사
이영애의 재발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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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금자씨>에서 13년간 갇힌 금자씨 이영애는, 스스로 후광을 발하며 한밤중 어두운 교도소를 은은하게 빛낸다. 그 빛은 옹색한 감방 창살을 넘어서 교도소 밖까지 미친다. 중세교회의 스테인드 글라스 그림을 패러디한 이 장면은, 여신 같은 이미지로 지상에 현현한 CF모델로서의 이영애를 패러디하는 듯하다. 그러나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CF모델로서의 이영애가 아니라 데뷔한 지 13년 된, 그리고 재능이 흘러넘치는 배우 이영애의 후광이다. 이영애는 대중의 선입견에 갇혀 있지만, 배우로서의 연기력과 잠재력은 관객의 편견을 넘어서 비추고 있다는 것이 이 장면의 또 다른 메시지가 아닐까.
여신처럼 보이는 우아한 자태와 산소만 먹고 사는 듯한 살결과 그리고 길게 늘어뜨린 옷자락 때문에 종종 배우 이영애가 보이지 않거나 잊혀질 때가 있다. 노희경의 드라마 <내가 사는 이유>의 작부 애숙이나, 드라마 <대장금>에서의 장금, 또는 허진호 감독의 <
이영애의 재발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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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인력이 16년이라는 시간을 끌게 만들었다”
“오토모씨가 쓰러졌어요. 병원에 입원하셨답니다”라는 비보를 들은 것은 서면 인터뷰의 답변을 받기로 했던 날로부터 겨우 이틀 전이었다. 혹여나 인터뷰가 성사되지 못하면 어쩌나 고민하는 동안, 병원에 누워 있는 오토모 가쓰히로의 구술을 받아 정리하고 있다는 영화사의 소식이 전해졌고, 인터뷰는 어렵게 도착했다. ‘어떻게’가 아니라 ‘무엇을’이 중요하다는 오토모 가쓰히로 감독의 병상에서 쓴 인터뷰.
-<아키라> 이후 16년 만의 장편애니메이션이다. 산고 끝에 개봉시킨 감회는.
=시간이 걸린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자금 조달 사정 때문이다. 또한 애니메이션계의 인재가 부족한 상황 때문이기도 하다. 한 부분 한 부분 미묘하게 표현돼야 하는 수작업이 많은 관계로, 능숙한 기술을 가진 인재들을 확보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스팀보이>는 어떻게 떠올린 프로젝트인가.
=<메모리즈>의 에피소드
<스팀보이>와 오토모 가쓰히로 [4] -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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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적 펑크의 자장 속에 꿈틀대는 희망
스스로가 스팀펑크(Steam-Punk) 장르에 속해 있음을 고백하는 <스팀보이>의 제목은 모호한 <아키라>에 비해 참으로 직설적이다. 스팀펑크는 증기기관을 중심으로 실제보다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가상의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대체역사 장르. 사이버펑크 계열의 SF작가들에게 적극 수용되어졌던 이 장르는 오랫동안 일본 아니메의 환대를 받아왔다(증기를 내뿜으며 걸어다니는 하울의 성!). 근미래를 다룬 작품들을 만들어왔던 오토모가 스팀펑크의 세계 속으로 빠져든 이유는 “<메모리즈>를 계기로 “증기기관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조금만 더 인터뷰의 조각들을 찾아본다면 “증기기관이야말로 진정한 인간혁명의 시작”이라거나, “내가 상상해왔던 세계를 능가하는 시대”라는 답변들을 찾을 수 있다. 오토모가 <스팀보이>에서 그리는 것은 순진할 정도로 테크놀로지에 대한
<스팀보이>와 오토모 가쓰히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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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 시대 발명가 소년의 활극 <스팀보이>
우연의 일치겠지만 오토모가 <스팀보이>를 기획한 1994년은 <아키라>가 마침내 제작비를 완전 회수한 해였다. 새로운 꿈을 품어볼 만한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역사는 반복된다. <스팀보이>의 제작과정은 <아키라>와 여러모로 닮아 있어서, 그 고난의 세월을 묘사하려면 한권의 책을 온전히 바쳐도 불가능할 것이다(참조/ 박스2). 거쳐간 회사만도 ‘스튜디오 4℃’에서 ‘선라이즈’와 ‘프로덕션 IG’까지, 일본 최고의 아니메 제작사들이 줄줄이 개입한 뒤에야 <스팀보이>는 완성되었다. “이 영화는 <아키라>의 후속편이 아니다. 관객이 그같은 기대를 가지지 않고 봐주었으면 한다”는 오토모의 빈번한 언급에도 불구하고, 10여년 동안 차곡차곡 쌓여왔던 대중의 기대치는 과중한 압력을 받은 증기기관처럼 스팀을 뿜어대고 있었고, 그들이 바랐던 것은 <아키라>의 뒤
<스팀보이>와 오토모 가쓰히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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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메의 성서가 되어버린 <아키라>로부터 16년. 오토모 가쓰히로의 두 번째 장편 아니메 <스팀보이>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제작기간 10년, 일본 아니메 역사상 최고인 제작비 24억엔, 역시 아니메 역사상 최고의 작화 수 18만장. <스팀보이>는 무시무시한 규모로 완성된 일본 아니메 기술력과 자본력의 극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키라>와 <스팀보이>를 중심으로 고집스럽게 자신의 세계를 지켜온 완벽주의자의 세계를 살펴보고, 도쿄에서 날아온 서면 인터뷰를 싣는다.
2003년 여름. 영국의 어느 지방도시. 아이맥스 극장 앞에 20대 젊은이 서너명이 모여 있다. 극장에는 “<아키라> 아이맥스 재개봉”이라는 문구가 큼직하다. 두리번거리던 젊은이 중 하나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한다. 6명의 젊은이들은 하얀 알약을 하나씩 삼키고 극장으로 들어섰다. 극장 안에는 10대 후반에서 30대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스팀보이>와 오토모 가쓰히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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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민 | 연기자로서 감독과 교감한다는 말들을 하죠. 감독과 교감한다는 건 어떤 건가요. 문소리씨의 경우엔 어떻게 교감하시는지, 벽을 느낄 때는 어떻게 푸시는지 궁금한데요.
문소리 | 중요한 건 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를 알아내는 것이죠. 시나리오 보면서 짐작할 수 있는 것 말고 이면의 것, 위아래의 것을 알고 찍는 게 중요하거든요. 교감하려고 하고 소통하려고 해요.
오기민 | 이건 아니라고 했는데, 동의 못했는데, 감독 요구 때문에 간 적도 있나요.
문소리 | 있죠. 하지만 끝까지 의논해요. 주먹다짐 직전까지 의논해요. 과감하게 얘기하기도 하고 애교 떨며 얘기하기도 하고. 그래도 감독이 아니라고 하면, 아니라고 생각해도, 연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신이 생각하는 걸 내 몸에 넣어서 해 보겠다는 거죠. 다른 걸로 더 찍으면 안될까요, 제안하기도 하구요. 많은 남자 감독들이 여배우와 소통하기 어렵다고 해요. 그게 누구 잘못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과감
영화인 7인 특강 전문 [6] - 문소리 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