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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데뷔작 <해피엔드> 이후 6년 만에 정지우 감독이 복귀했다. 30살 교사와 17살 제자의 대담한 연애담으로 알려진 <사랑니>는, 생의 한가운데 선 도도한 한 여성과 치밀히 조직된 이야기를 통해 사랑의 섭리를 성찰하는 수작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사랑니>의 성취를 살피고, 감독의 연출론과 배우로서 큰 전환을 시도한 김정은의 모험담을 직접 듣는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면 이석이 되고 싶어.”(17살 조인영)
도대체 이런 게 언제부터 내 살 속에 들어와 있었을까? 서른살의 어느 날, 내 안에서 희고 날선 것이 불쑥 돋아나더니 몸과 마음을 들볶는다. 유능한 학원 수학강사 조인영(김정은)에게 사랑은 사랑니와 같은 양상으로 찾아온다. 첫사랑의 소년과 이름도 얼굴도 똑같은 열일곱살 제자 이석(이태성)은 인영에게 격심한 매혹이다. “아야!” 여자는 통증에 비명을 지르다 슬그머니 미소짓는다. 아프지만, 황홀하다.
정지우 감독의 <
<사랑니>, 정지우의 도약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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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에서 깨어나 영화로 부활하라
이만희는 전설적인 감독이다. 30년 전 그가 편집실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45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등졌을 때 이미 그의 전설은 시작되었다. 세상은 그의 남아 있는 작품보다는 사라진 작품을, 그리고 그의 삶보다는 그의 죽음을 더 많이 이야기했다.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살아가고, 영화를 할 수 없는 절망으로 죽어간 이만희는 이 땅에서 영화하는 이의 영감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영화적으로 역사적으로 연구되지 않았다. 사실 누가 감히 전설을, 그의 처절한 삶과 안타까운 죽음 앞에 쉽게 그의 작품세계를 논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여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을는지 모른다. 이만희의 영화들이다. 세상은 이만희를 한국 영화언어의 신기원을 세운 <만추>로, 그가 마지막 숨결을 쏟았던 <삼포가는 길>을 만든 예술적이며 리얼리즘 계열의 작가로 기억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바람은 두 가지 문제를 낳는다. 그가
2005 부산국제영화제 미리보기 [9] - 이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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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ion5: POP - 대중영화의 즐거운 수족관이 부산항에 열렸다. 만화경 같은 영화의 순수한 매력 앞에서 시네필과 자갈치 아지매의 경계는 무너진다. 사랑스러운 관상어들을 구경하러, 오이소.
퀸즈 Queens
■ 그 남자들과 그 남자들의 사정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개최되는 게이 단체 결혼식. 그곳으로 향하는 다섯명의 엄마들이 있다. 판사인 헬레나의 아들 위고는 섹스중독증에 걸린 누리아의 아들 나르시소와 결혼할 예정이고, 영화배우 레이제스의 아들은 정원사의 아들과 사랑에 빠졌다. 결혼식이 개최되는 호텔 사장 마그다의 아들은 아르헨티나에서 온 뻔뻔스런 식당 주인 오펠리아의 아들과 백년가약을 맺을 셈이다. <퀸즈>는 주책없을 정도로 대책없는 퀴어코미디다. 엄마들은 아들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며 힘겨워하는 과정을 넘어선 지 오래고, 그들의 목표는 어떻게든 단체 결혼식을 사고없이 치러내는 것. 물론 다섯명의 엄마와 한명의 아빠, 여섯명의 아들에다 개 한 마리가 쉴새없이 떠
2005 부산국제영화제 미리보기 [8] - 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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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ion4: IMAGINATION - 제멋대로 굽이치는 상상력의 쓰나미가 부산항을 덮쳤다.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화-서퍼들은 서핑보드를 들고 파도에 오르자. 한번 타면 내릴 방법은 없지만, 이런 파도는 다시 오지 않는다.
함부르크 강습소 The Hamburg Cell
■ 가해자 시점에 동승, 9·11 테러의 재구성
아랍계 혈통인 듯한 한 남자가 공항에서 공중전화를 건다. 여자가 받는다. 그는 “사랑해”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는다. 그 위로 ‘2001년 9월11일’이라는 자막이 뜬다. <함부르크 강습소>는 현대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인 9·11 테러를 소재로 삼은 극영화다. 레바논의 부유한 가정 출신인 지아드는 함부르크대 유학 중 이슬람 무장단체 지하드에 우연히 가입, 열성 단원이 된다. 이 영화는 당시 재판기록과 각종 증거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됐다. 철저한 테러 준비과정과 5년이라는 길고 외롭고 혹독한 시간을 버티게 한 이들의 신념이 영
2005 부산국제영화제 미리보기 [7] -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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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받은 땅 What a Wonderful Place
■ 이스라엘의 로버트 알트먼식 블랙코미디
<선택받은 땅>은 신에게 ‘선택받은 땅’ 이스라엘의 인생군상을 로버트 알트먼의 화법으로 풀어내는 작품이다. 경찰일을 그만두고 러시아 여자들을 인신매매해 아랍과 이스라엘의 집창촌과 마피아에 팔아넘기는 프랑코. 그의 손에 의해 팔려왔지만 몸을 파는 일을 거부하고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러시아 여인 야나. 아내의 부정행위를 알게 된 소심한 농장주인 젤트처. 그의 땅에서 농부로 일하며 ‘왕의 날’을 준비하는 타이 노동자들. 영화는 그들을 중심으로, 인신매매 단체와 팔려온 여인들과 그들의 가족을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하며 현대 이스라엘의 고루한 초상을 블랙코미디의 기운에 실어낸다. 2005년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남우주연상 수상작인 <선택받은 땅>은 신랄한 리얼리즘 속에서도 시적인 정서를 절대 놓치지 않는다. 기자로도 활동했고 다큐멘터리 작업으로 영화를 시
2005 부산국제영화제 미리보기 [6] - 현실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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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ion3: REALITY - 세상을 굽어보는 등대의 불빛이 부산항을 비춘다. 높은 곳에 올라 울고 웃으며 변해가는 대양의 사람들을 바라보고픈 관객이라면, 등대로 오르는 계단을 겁내서는 안 된다.
해바라기 Sunflower
■ 아버지와 아들과의 30년 전쟁
아버지는 아들에게 폭군이다. 아버지의 자애는 아들에게 폭력이다. 엄마에게 매타작을 당하면서도 골목에서 새총질을 멈추지 않는 열살배기 시앙 양. 존재조차 몰랐던 아버지가 나타나면서 이 꼬마에게도 시련이 찾아든다. “너는 내 두 번째 기회야!” 문화혁명의 격류에 휘말려 10년 하방생활을 해야 했고, 이로 인해 더이상 붓을 들 수 없게 된 아버지는 강제로 시앙 양을 화가로 키우려고 하고, 이때부터 아버지와 아들의 30년 갈등이 시작된다. 로큰롤과 마약으로 대표되는 문화개방의 파고를 실제 겪으며 혼란의 성장기를 보냈던 감독은 <샤워> <지난날> 등의 전작에 이어 이번에도 새것과 헌것의 충돌을 응시한다
2005 부산국제영화제 미리보기 [5] - 현실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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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ion2: ROOKIE - 새로운 재능의 조류가 싱싱한 활어들을 부산항으로 밀고왔다. 영화 미식가들이라면 신인들이 낚은 펄펄 뛰는 횟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참을 수 없는 비릿함도 색다른 별미다.
로버트 카마이클의 엑스터시 The Great Ecstacy of Robert Carmichael
■ 21세기 <시계태엽장치 오렌지>
이라크 전쟁이 한창인 시절, 영국의 자그마한 항구도시에는 비틀거리는 소년들이 있다. 그들은 급우들의 돈을 빼앗고, 폭력을 행사하고, 소녀를 강간하며, 엑스터시와 대마초를 사탕처럼 소비한다. 중산층 홀엄마와 살아가는 로버트 카마이클은 학교 연주회를 위해 첼로를 켜는 반듯한 소년. 하지만 카마이클의 마음 역시 서서히 썩어져간다.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던 어느 날, 카마이클은 두명의 친구와 함께 유명 요리사의 집에 몰래 잡입하고, 비린내나도록 끔찍한 악마성을 드러낸다. <로버트 카마이클의 엑스터시>는 21세기의 <시계태엽장치
2005 부산국제영화제 미리보기 [4] - 신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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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레타 너구리 저택 Princess Raccoon
■ 82살 스즈키 세이준의 만화경 같은 오락가극
1940, 50년대 일본에서 인기를 끌었던 오락가극 <너구리 저택>을 리메이크한 작품. 자기애에 불타오르는 군주 아즈치 모모야마는 한 예언가로부터 아들인 아메치요가 아버지보다 더 미남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부와 명성은 물론 미모마저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 그는 친아들인 아메치요를 산에 가져다버리기로 한다(이미 자신의 아름다움을 추종하지 않는 아내를 산에 버린 적이 있는 인물이다). 버려진 아메치요는 산에서 당나라에서 온 너구리 공주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너구리는 인간과 사랑에 빠질 수 없다는 것이 너구리 세상의 불문율. 두 사람의 로맨스는 곧 수많은 장벽에 가로막히고 만다.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은 형식으로만 이루어진 정신없는 만화경이다. 하지만 그 형식조차도 일관성이 없다. CG로 만들어진 세계는 일본의 전통적인 병풍 그림을
2005 부산국제영화제 미리보기 [3] - 작가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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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ion1: AUTEUR - 작가주의의 깊은 심연으로 향하는 잠수함이 부산항에 도착했다. 해구의 어둠이 두렵지 않은 시네필 다이버들이라면, 이제 은밀한 탐사에 동참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장한가 Everlasting Regret
■ 끝없는 후회를 슬픈 가곡처럼 회고하는 관금붕의 장한가
당나라 백거이의 장편 서사시 제목인 <장한가>는 1947년에서 1981년까지 격동의 상하이에서 살았던 한 여인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이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아름다운 소녀 왕치아오는 우연한 기회에 사진사 장씨의 눈에 띄어 미스상하이선발대회에 나가 2등에 입상한다. 청초한 제비꽃처럼 수수하던 소녀는 자신의 성적 매력을 깨닫는 순간 장미로 화한다. 왕치아오에게 아름다움은 양면의 날. 남자들은 왕치아오의 곁에 끊임없이 다가와 한순간에 사라진다. 정부 관리는 브라질로, 거부의 아들은 미국으로 떠나고, 왕치아오의 단짝 친구 역시 변화하는 중국의 정세를 거부하며 홍콩으로 간
2005 부산국제영화제 미리보기 [2] - 작가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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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부산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영화의 보고(寶庫)가 열 번째 수문을 연다. 10월6일부터 14일까지, 해운대와 남포동 일대에서 9일 동안 치러지는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 알려졌듯이, 열돌을 맞은 축제의 첫장은 대만의 거장 허우샤오시엔의 <쓰리 타임즈>가 쓰고, 마지막 장은 황병국의 <나의 결혼원정기>로 채워진다. <쓰리 타임즈>는 거장이 지금까지 빚어낸 스타일을 한꺼번에 맛볼 수 있는 종합선물세트라는 평가를 받았던 영화. 올해 부산에서 상영되는 프린트는 칸영화제 경쟁부문 상영(120분 버전) 때와 달리 감독의 재편집을 통해 만들어진 135분짜리 최종본이다. 개막작에서 거장이 펼쳐 보인 미학적 스펙트럼을 엿볼 수 있다면, 폐막작인 <나의 결혼원정기>는 신붓감 찾아 머나먼 여정을 떠나는 두 노총각의 우여곡절을 따르는 대중영화다. 두 작품 모두 개·폐막작 예매 첫쨋날과 둘쨋날에 표가 동이 났다.
올해 영화제에 초청된 작품 수는
2005 부산국제영화제 미리보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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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팅다운 마케팅이 시작되다_1990년대
긴 겨울 지나 바야흐로 봄이 오는 것일까. 싹이 트기 전에 누군가는 밟힐 것이라 했고, 활공하기 전에 누군가는 떨어진다고 했는데, 견디고 또 견디니 볕이 드는구나.
“윗선배들을 배제하려는 건 아니었고, 각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의욕있는 젊은 영화인들의 네트워크 정도였다. 매일 만나다시피했던 것 같은데, 충무로에서 삼겹살 먹고 강남이나 이태원에 있는 나이트클럽에도 가고 그랬다. (웃음) 그러다 모임 내에서 스터디를 하게 됐는데 제작, 배급, 상영 등 자신이 맡고 있는 업무에 대해 발제하는 식이었다. 내 경우에는 <광고학개론>이라든가 <카피라이팅의 기술> 같은 이론서를 구해서 읽기도 했지만 김정률, 이황림 같은 선배들이 내놓은 광고물을 보면서 더 많이 배울 수 있었다.”(심재명)
1990년대 초에 결성된 영화사기획실모임은 그저 단순한 친목도모에서 끝나지 않았다. 신철, 이춘연, 채윤희, 이준익, 석명홍, 권영락,
한국영화 마케팅 30년사 [3] - 199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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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영화광고 시대, 튀어야 산다_1980년대
바야흐로 벗어야 사는 시대인가. 애마부인이 그러하고, 람보가 그러하다. 사용무기는 다르지만, 살색유혹 앞에 당할 자 있으리요. 통금해제와 함께 달려온 애마부인을 영접하고자 유리창을 박살내는 관객의 이 극성을 보라! 태평양 건너 날아온 람보를 염탐하고자 새벽 행렬도 마다않는 관객의 저 아우성을 들으라! 여기에 더해 어우동과 코만도는, 변강쇠와 엠마뉴엘은 또 어떠한가. 불황의 터널을 벗진 못했지만, 극장가는 잠시나마 웃음을 되찾는구나.
“1980년 초인가. 극장 앞에 금성 19인치 TV를 놓고서 외화 수입사들로부터 받은 예고편을 비디오로 받아서 틀었어요. 반응이 꽤 좋아서 정식영업증을 내고는 청계천 등지의 TV 파는 가게 등에도 돌리면서 전시용으로 좀 틀어달라고 했다고. 그러다 <람보> 때인가. 불법복사 하는 놈들이 걸려들어갔는데 어떻게 내 전화번호를 갖고 있어서, 어느 날인가 경찰서에 잡혀간 적이 있어. 영화사에서 받
한국영화 마케팅 30년사 [2] - 19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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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로, 없는 자는 구해야 합니다. 극장 문 열면 손님 쏟아지던 한국영화의 황금광 시대는 1960년대로 막을 내립니다. 배우들이 뿜어내는 광채에 기대어 더이상 영화를 편하게 선전할 수 없게 된 1970년대.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한국영화의 처절한 호객행위는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지난 30년, 항상 정도만 고집할 순 없었습니다. 문지기 노릇하던 험악한 기도 아저씨들이 나서 “자, 아가씨 막회 보고 가요!”라며 윽박도 질러야 했습니다. 편법도 곧잘 썼습니다. 내용과 다른 포장으로 관객을 현혹해 원성을 사기도 했습니다. 온라인으로 보도자료를 보내고, 배우들의 싸이 홈피를 마련하고, 대규모 현장공개와 시사회를 진행하는 2005년 추석. 지난 30년을 버텨낸 충무로의 상술 일부를 공개합니다.
영화선전, 신문만이 내 세상_1970년대
바야흐로 TV시대가 도래하였도다. 연인하고 약속하고 퇴근시간 재촉하던 샐러리맨 어딨으며, 마누라와 외식하고 오랜만에 손 맞잡던 중년 부부 어딨는고. 극장
한국영화 마케팅 30년사 [1] - 197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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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져가는 투자자들의 요구가 더 큰 부담”
<어제>의 촬영지 쓰훼이교 입체교차로에서 만난 장양
장양의 차를 따라 도착한 곳은 쓰훼이교 입체교차로였다. 자전거를 탄 행인들과 고가도로 위를 달리던 운전자들이 가던 길을 멈춰선다. 잔디밭에 들어선 취재진과 긴 머리의 장양 감독을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는 사람들. 열몇개의 다리들이 늘어선 광경이 보이는 이 입체교차로는 장양이 2001년 만든 <어제>에서 부자간의 교감을 보여주는 장소로 쓰였다. 장양은 베이징의 독특한 공간인 사합원, 후통, 동네 목욕탕, 100여개가 넘는 입체교차로 등을 자신의 영화 속에 즐겨 끌어들였다. 그의 작품 <샤워>에서는 좁고 후미진 베이징의 세부에서 벌어지는 자연스러운 생활상이 담겨져 있다. 장양은 영화감독 장화순의 외아들이다. “성장배경 때문인지 부자간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많이 찍었다. 현실에서는 예술의 견해차나 생활문제로 아버지와 오히려 자주 싸웠다. 어렸을 때 말썽을
아시아 영화 기행: 중국 [4] - 중국감독열전 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