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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적 펑크의 자장 속에 꿈틀대는 희망
스스로가 스팀펑크(Steam-Punk) 장르에 속해 있음을 고백하는 <스팀보이>의 제목은 모호한 <아키라>에 비해 참으로 직설적이다. 스팀펑크는 증기기관을 중심으로 실제보다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가상의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대체역사 장르. 사이버펑크 계열의 SF작가들에게 적극 수용되어졌던 이 장르는 오랫동안 일본 아니메의 환대를 받아왔다(증기를 내뿜으며 걸어다니는 하울의 성!). 근미래를 다룬 작품들을 만들어왔던 오토모가 스팀펑크의 세계 속으로 빠져든 이유는 “<메모리즈>를 계기로 “증기기관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조금만 더 인터뷰의 조각들을 찾아본다면 “증기기관이야말로 진정한 인간혁명의 시작”이라거나, “내가 상상해왔던 세계를 능가하는 시대”라는 답변들을 찾을 수 있다. 오토모가 <스팀보이>에서 그리는 것은 순진할 정도로 테크놀로지에 대한
<스팀보이>와 오토모 가쓰히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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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 시대 발명가 소년의 활극 <스팀보이>
우연의 일치겠지만 오토모가 <스팀보이>를 기획한 1994년은 <아키라>가 마침내 제작비를 완전 회수한 해였다. 새로운 꿈을 품어볼 만한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역사는 반복된다. <스팀보이>의 제작과정은 <아키라>와 여러모로 닮아 있어서, 그 고난의 세월을 묘사하려면 한권의 책을 온전히 바쳐도 불가능할 것이다(참조/ 박스2). 거쳐간 회사만도 ‘스튜디오 4℃’에서 ‘선라이즈’와 ‘프로덕션 IG’까지, 일본 최고의 아니메 제작사들이 줄줄이 개입한 뒤에야 <스팀보이>는 완성되었다. “이 영화는 <아키라>의 후속편이 아니다. 관객이 그같은 기대를 가지지 않고 봐주었으면 한다”는 오토모의 빈번한 언급에도 불구하고, 10여년 동안 차곡차곡 쌓여왔던 대중의 기대치는 과중한 압력을 받은 증기기관처럼 스팀을 뿜어대고 있었고, 그들이 바랐던 것은 <아키라>의 뒤
<스팀보이>와 오토모 가쓰히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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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메의 성서가 되어버린 <아키라>로부터 16년. 오토모 가쓰히로의 두 번째 장편 아니메 <스팀보이>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제작기간 10년, 일본 아니메 역사상 최고인 제작비 24억엔, 역시 아니메 역사상 최고의 작화 수 18만장. <스팀보이>는 무시무시한 규모로 완성된 일본 아니메 기술력과 자본력의 극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키라>와 <스팀보이>를 중심으로 고집스럽게 자신의 세계를 지켜온 완벽주의자의 세계를 살펴보고, 도쿄에서 날아온 서면 인터뷰를 싣는다.
2003년 여름. 영국의 어느 지방도시. 아이맥스 극장 앞에 20대 젊은이 서너명이 모여 있다. 극장에는 “<아키라> 아이맥스 재개봉”이라는 문구가 큼직하다. 두리번거리던 젊은이 중 하나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한다. 6명의 젊은이들은 하얀 알약을 하나씩 삼키고 극장으로 들어섰다. 극장 안에는 10대 후반에서 30대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스팀보이>와 오토모 가쓰히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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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민 | 연기자로서 감독과 교감한다는 말들을 하죠. 감독과 교감한다는 건 어떤 건가요. 문소리씨의 경우엔 어떻게 교감하시는지, 벽을 느낄 때는 어떻게 푸시는지 궁금한데요.
문소리 | 중요한 건 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를 알아내는 것이죠. 시나리오 보면서 짐작할 수 있는 것 말고 이면의 것, 위아래의 것을 알고 찍는 게 중요하거든요. 교감하려고 하고 소통하려고 해요.
오기민 | 이건 아니라고 했는데, 동의 못했는데, 감독 요구 때문에 간 적도 있나요.
문소리 | 있죠. 하지만 끝까지 의논해요. 주먹다짐 직전까지 의논해요. 과감하게 얘기하기도 하고 애교 떨며 얘기하기도 하고. 그래도 감독이 아니라고 하면, 아니라고 생각해도, 연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신이 생각하는 걸 내 몸에 넣어서 해 보겠다는 거죠. 다른 걸로 더 찍으면 안될까요, 제안하기도 하구요. 많은 남자 감독들이 여배우와 소통하기 어렵다고 해요. 그게 누구 잘못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과감
영화인 7인 특강 전문 [6] - 문소리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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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는 무슨, 담소나 나누죠. (웃음) 제가 강의 제안을 많이 받아요. 교사인 친구들한테도 강연 요청에 시달리곤 하는데, 모든 강연을 정중히 거절하는 입장이예요. 저 보고 지적인 이미지라고들 하시는데, 진짜 지적인지는 어느 누구도 확인한 바 없으나(웃음), 그런 이미지 때문에 강연 요청에 시달리는 것 같아요. 제가 어느 누구에게 강의를 할만한 연배도 아니고, 일가를 이룬 것도 아니잖아요. 이제 시작했고 박차를 가하고 있는 와중이라, 이런저런 얘기를 하기엔 모자라죠. 그래서 10년 20년 하고 난 뒤에 생각해 보겠다는 말로 거절했는데, 씨네21에는 거절 못했어요. 애정이 있기도 하고, 친분을 통한 압박도 있었고, 그래서 거절을 못했어요. 일방적인 강연이 아니라 서로 궁금한 것들을 나누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네요.
오늘 강연 제목이 ’다양한 장르와 다양한 캐릭터’로 돼 있던데, 다양한 장르 안에서 다양한 캐릭터 소화한 배우로 판단해 주셨던 것 같네요. 나에 대해 무슨 할말이 있을까,
영화인 7인 특강 전문 [5] - 문소리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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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남쪽>으로 영화 데뷔하는, 드라마 PD 안판석
방송국 스타 PD 15년 만의 외출
‘노났다’는 말이 있다. 누군가 횡재했을 때 사람들은 “노났네” 한다. 2003년 1월, 안판석은 15년 동안 다녔던 직장에 사표를 냈다. <짝> <장미와 콩나물> <아줌마> <현정아 사랑해> 등을 연출하면서 MBC 드라마 간판 프로듀서로 활동했던 그가 일을 그만둔다고 하자, 동료들은 그가 거액의 계약금을 받고서 외주 프로덕션에 스카우트된 줄 알았고, 다들 “노났구먼∼”이라고 한마디씩 했다. 회사를 그만둔 직후, SBS에서 <흥부네 박터졌네>를 연출할 때까지만 해도 주위의 반응은 그랬었다. “영화하겠다고 말하기는 뭣해서 그냥 나왔는데 전에 프리 선언하고 그만둔 사람들이 여럿 있어서 그렇게들 생각하더라.”
그의 나이 마흔다섯. 두툼한 봉급 마다하고 영화판으로 뒤늦게 뛰쳐나온 그의 갈증은 무엇이었을까. “드라마를 불끄고 집
그가 감독이 됐다 [3] - 안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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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다이>로 영화연출 데뷔하는, 배우·설치미술가 이상현
<거짓말>의 제이는 잊어도 좋다
혹시, 그러니까, <거짓말>의 이상현이냐고? 맞다, 그 이상현이다. 그렇다고 와이를 묶고 때리고 쑤시던 <거짓말>의 제이를 떠올리면 안 된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이상현은 SF영화 <해피다이>로 데뷔를 준비하고 있는 감독 지망생이다. 설치미술가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날리다가 일약 배우로 변신한 바 있는 그이기에 영화 연출을 맡는다는 게 뜬금없이 느껴지진 않는다. 게다가 어린 시절부터 집 대문에 극장 포스터를 붙이게 해주고 받은 초대권으로 극장을 공부방처럼 들락거렸고, 한국의 대학에서 사진을 배운 덕에 조각 전공으로 독일에서 유학할 때도 친구들의 단편영화 작업에서 카메라를 잡았던 그가 아닌가. 물론 시네키드로 살았다는 사실이 쉰 넘은 나이에 입봉을 준비하는 그의 사정을 모두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사람들에게 내 뜻을 전하는 데 가장 강력
그가 감독이 됐다 [2] - 이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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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감독이란 단어는 뭔가 미숙하지만 싱싱하고, 빈약하지만 푸릇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런 신인감독만 있는 건 아니다. 자신의 분야에서 이미 일가를 이뤘지만 영화연출이라는 새로운 도전의 출발점에 선 박광정, 이상현, 안판석이 그들이다. 연극, 미술, TV분야에서 성공이라는 고지를 정복한 이 중년 남자들이 자세를 낮춰 일개 신인 영화감독이 된 사연은 각기 다르다. 하지만 오랫동안 품고 있던 꿈을 늦게나마 끄집어냈다는 점만큼은 매한가지다. 살찐 소파 속에 안주할 수 있는데도 벌떡 일어나 황량한 극지로의 여정에 나선 이들이기에 용기와 패기가 20∼30대 신인감독에 떨어진다 말할 수 없을 것. 게다가 셋 모두 영화와 매우 밀접한 영역에서 일해왔기 때문에 감독으로서의 능력이 절반쯤은 검증된 게 아닐까. 세월의 풍파를 겪었지만 완숙하고, 풍성한 세계를 품고 있는 중고 신인감독 3인방을 소개한다.
<가마다 행진곡>(가제)으로 영화연출 데뷔하는, 배우·연극연출가 박광정
영화가 부
그가 감독이 됐다 [1] - 박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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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UFO 떴다
누구나 다 아는 전설이 팀 버튼식으로 변하기까지
팀 버튼은 의뭉스럽다. ‘1799년 뉴욕’이라는 설명을 달아 마치 <슬리피 할로우>가 역사적인 시공간을 배경으로 한 영화인 양 착각하게 하지만, <슬리피 할로우>는 지상에 없다. 팀 버튼의 주인공들이 현실세계에 안착하지 못하듯 그는 언제나 현실 밖에 이상한 나라를 만들어왔다. 누군가의 지적대로, 그 나라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자기폐쇄적인 세계(singular self-enclosed world)다. 마치 이미지의 독재자처럼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의 믿음대로 그 나라를 통제한다. 독일 표현주의 영화가 그러하듯, 팀 버튼의 영화는 무엇보다 먼저 화면 그 자체를 살펴야 한다. 표면을 읽음으로써 심층을 헤아리는 게 팀 버튼의 영화에서는 가능하다.
스타일화한 자연주의, 모순된 세계를 찾아서
팀 버튼 사단이 다시 뭉쳐 만든 <슬리피 할로우>는 더 깊어진 팀 버튼의 비전을 보여
이상한 동화나라의 팀 버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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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같다는 게 나만의 고유함이 아닐까”
-<슬리피 할로우>의 시나리오에 끌렸던 이유는. 이야기 자체가 좋아서인가, 아니면 비주얼의 가능성 때문인가.
=둘 다다. 디즈니의 58년작 만화 <슬리피 할로우의 전설>을 봐서 그런지 이 이야기가 낯익다. 사실 시나리오를 보기 전까지는 워싱톤 어빙의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았다. 대부분의 미국 아이들이 그렇다. 그렇지만 목없는 호스맨에 대해서는 다들 잘 안다. 시나리오가 해머프로덕션의 공포 영화를 연상시키는 것도 맘에 들었다. 난 동화나 상징성을 띤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 시나리오에는 내가 좋아하는 전래동화의 감동이 있었다. 이 카보드 크레인이란 사내는 자기 머리 속에서만 살지만 호스맨은 머리가 없다는, 대조적인 설정이 특히 좋았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봤을 것 같은데.
=맞다. 물론, 비주얼로만 영화에 접근하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캐스팅이나 세트 제작 등 고려할 게 많으니까. 하지만
이상한 동화나라의 팀 버튼 [3] - 팀 버튼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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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무 완수하는 영웅, 팀 버튼답지 않은 캐릭터
한편 <슬리피 할로우>는 외골수 팀 버튼의 영화로서는 놀랄 만큼 개방적이다. 미스테리의 얼개를 입은 앤드루 케빈 워커의 각본은 그의 어떤 전작보다 강한 스토리에 대한 집착을 영화에 심어놓았다. 썩어 부푼 시체, 잘린 머리를 채운 자루, 구더기 끓는 주검 같은 역한 이미지들도 <쎄븐>의 작가였던 그의 취향이다. 품위있는 위트가 살짝 발라진 대사에서는 각본을 가다듬은 톰 스토파드(<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지문이 묻어난다. 크레인 역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팀 버튼 영화의 히어로다. 크레인은 팀 버튼이 붙잡고늘어져 온, 정상성의 세계에 몸을 밀어넣으려다 거절당하는 아웃사이더 캐릭터와 사뭇 다르다. 누구 못잖은 정신적 외상도 있고 컴플렉스도 깊은 인간이긴 하지만, 걸핏하면 졸도하고 큰 소리라도 날라치면 방금 구출한 여자 뒤에 숨는 심약한 남자지만, 어찌됐건 크레인은 비명을 지르거나 도망치는 일 없이 기
이상한 동화나라의 팀 버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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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 속 풍차로 돌진하는 돈키호테
“난 꿈은 잘 꾸지 않는다. 그저 낮 동안에도 넋이 몸을 스르륵 빠져나가 남들이 내게 하는 말이 들리지 않고 대체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
팀 버튼(42)은 그렇게 본인의 몸 안에도 다소곳이 갇혀 있지 못하는 영혼의 소유자다. 그런 그가 영악한 두뇌들이 연산을 거듭해 내놓는 영화들의 각축장인 할리우드에서 <피위의 대모험>(1985)과 <유령수업>(88)으로 관객 동원력을 인정받고, 급기야 블록버스터 <배트맨>(9?)으로 흥행 감독의 왕관까지 쓴 것은 확실히 통쾌하고도 아리송한 일이었다. 더구나, 버튼의 영화에는 스튜디오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굳이 구부리고 꺾은 자국도 거의 없다. 그의 초기 단편 <빈센트>나 <프랑켄위니>에 담긴 극히 사적인 내용과 병적인 상상력은, 상업 영화에서 도리어 더 큰 화폭과 풍성한 팔레트를 만난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팀 버튼의
이상한 동화나라의 팀 버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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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소의 계보1 - <비비스 앤 버트헤드>
이런 무정부주의적 냉소도 다 계보가 있다. 93년부터 97년 사이 기분나쁜 웃음으로 MTV를 장악했던 <비비스 앤 버트헤드>의 얼간이 듀오가 이 꼬마들의 선배격이다. 결국 레지스탕스가 되고마는 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꼬마들에 비해서는 백해무익한 건달들이긴 하지만. 미국 서부 교외 하이랜드의 허름한 집에서 사는 비비스와 버트헤드는 배운 것 없고, 할 일 없고, 돈도 없는 10대 고등학생. 낡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를 보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죽이고, 특히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품평하는 게 낙이다. 세상만사를 ‘짱’(cool) 아니면 ‘꽝’(suck)으로 이분하는 이들에게 교양있는 취향이나 판단, 합리성, 윤리적 혹은 정치적 가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변두리에서 잘 교육받지도 못하고, 앞으로도 그닥 잘되리란 희망없는 상황에서, 이들이 바라는 게 있다면 섹스나 한번 해봤으면, 그리고 파괴본능에 몰두하는 것 정도. 그래서
<사우스 파크>와 쓰레기 문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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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한 카타르시스의 태풍, “오 마이 갓!”
사시사철 봉우리에 눈을 얹은 로키산맥을 끼고 미국 콜로라도주 한켠에 자리잡은 가상의 마을 사우스 파크. 이 마을은 미국 애니메이션이 가닿은 표현의 신천지다. 내용의 새로움이라기보다 그 표현의 수위와 강도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사우스 파크>는 동글동글한 2등신 꼬마 4명이 주인공인 애니메이션이다. 백인 깡촌 마을에서 살아가는 스탠, 카트먼, 카일, 케니는 이제 겨우 초등학교 3학년인 동갑내기들. 하지만 아동용이라고 방심해선 안된다. 집, 가족, 학교, 선생님, 친구 등에 둘러싸인 평범한 일상은 곧 모순과 폭력의 지뢰밭이 된다. 아이들은 입만 열면 욕설이 튀어나오고, 엄마와 선생님과 정부와 의사 등 그 모든 기성의 권위는 발밑에 까뭉개지고, 흑인과 동성애자와 그 모든 소수자들이 놀림감이 되는 성인 만화? 그런것을 미국 TV와 극장은 어떻게 허용한 거지?
하지만 흥미진진한 것은, 기성의 모든 가치를 뒤집어 보이는 이 애니메이
<사우스 파크>와 쓰레기 문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