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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안 변해도 연애는 변하더라
고윤희/ 지금 연애는 하고 있는가.
배종옥/ 아니.
고윤희/ <러브토크>는 어쩌면 <연애의 목적>과 정반대에 서 있는 영화다. 그래서 <연애의 목적>은 어떻게 봤는지 궁금하다.
배종옥/ 내가 좋아하는 취향의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도 재미있게 봤다. 젊은 아이들이 젊은 감성으로 저렇게 연애를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고윤희/ 사실 나는 창피했다. 20대에 썼던 시나리오여서.
배종옥/ 신선했다. 원래 20대에는 그런 연애를 하는 거지 뭐.
고윤희/ 그 시나리오를 스물아홉에 썼다. 그런데 서른이 넘는 순간, 사춘기가 오는 것처럼 사람이 확 변하더라. 그래서인지 지금은 <연애의 목적>이 좋은 영화로 느껴지지 않는다. 쓸 때는 진실한 감정이라 믿었는데 다시 보니 그게 아니었던 거다. 이제는 사랑을 해도 겁이 나고, 방어하고 숨거나 애당초 딱 잘라버리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그러다보니 이젠 <연애의
배종옥·고윤희의 러브토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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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가 다른 게 아니에요. 좋고 끌리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아무 계산없이 즐거운 시간을 쌓는 게 연애예요.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즐기면 되잖아요.” 유림의 유들유들한 대사에 <러브토크>의 써니라면 무어라고 답했을까. 그야 누구도 모를 일이다. <연애의 목적>과 <러브토크>가 말하는 사랑은 빛의 속도로도 서로에게 도달하지 못할 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 하나는 발칙하고 고통스럽게 까발리며 ‘시작하는’ 연애담이고, 다른 하나는 시커멓게 속으로만 머금은 채 체념하다 ‘끝나는’ 연애담이니까. 도저히 대화가 통할 리 없는, 다른 세계다. 하지만 두 상극의 연애담을 만들어낸 여자들을 한자리에 모은다면, 어쩌면 그 대답을 들을 수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연애의 목적>을 쓴 당돌한 고윤희 작가와 <러브토크>에서 마사지 테라피스트 써니를 연기한 배종옥을 한자리에 모았다. 한옥을 개량한 안국동의 한 소담한 와인바에 두 사람은 3
배종옥·고윤희의 러브토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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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짜리 장편 졸업작품을 현실로 만들기까지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망각을 잊는 역설의 길을 걸었던 윤종빈 감독은 그러고나서도 한참을 이어진 가시밭길에 발을 들여야만 했다. 대학생이 졸업작품을 찍는다는데, 그것도 두 시간짜리 장편영화인데, 누가 시간과 돈을 흔쾌히 던지겠는가. 다행히도 그에게는 영화진흥위원회 지원금 1천만원과 미쟝센단편영화제 상금 500만원이 있었고, 여기에 자비 500만원을 보태어 촬영은 마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용서받지 못한 자>가 상업영화 못지않은 재미를 가질 수 있었던 건 꼼꼼하게 닦아놓은 프리 프로덕션 과정과 감독의 의지 덕분이었다.
정학과 파출소 출입 여부를 묻자 반쯤은 침묵으로 긍정해주었던 윤종빈 감독은 독하게도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을 외할머니댁 부근 독서실에 몸을 묻고 보냈다. “당연히 친구들은 욕했다. 그런데 이렇게 살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서 공부를 했다.” 게다가 막무가내의 기질도 조금은 있는 듯했다. 아버지가 원한 법대는
올해의 독립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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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는 대부분 놀라움을 주는 축제다. 평소라면 광고의 홍수에 묻혀버렸을지도 모르는 이름없는 영화와 낯선 감독, 그 신천지에 발을 들이는 경이로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용서받지 못한 자>를 보았던 관객이라면 매우 드물게 경험하는 그런 발견의 순간을 체험했을 것이다. 중앙대 영화과 졸업작품인 <용서받지 못한 자>는 문턱을 낮춘 영화적인 재미와 침묵을 깨는 통렬함으로 부산영화제를 뒤흔들었다. 국제영화평론가협회상과 뉴커런츠 특별언급, 넷팩상, PSB관객상 수상이라는 쾌거는 그에 주어진 부상. “내가 절실하다면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는 윤종빈 감독으로부터 잊혀진 시간을 캐내어 옥돌로 다듬어 내놓기까지 고난과 환희의 순간을 들어보았다.
군대에서 담배를 배워 온 선배가 있었다. 여자처럼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가지고 있던 그는 이십대 중반이 되어서야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이유를 한번도 말하지 않았고, 험한 일 한번 해본 적 없는 고운 손가락 사이에
올해의 독립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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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대학의 영화동아리는 흔히 충무로라 불리는 기성 영화계에 가장 강력한 비판자였다. 볼 수 있는 영화가 많지 않고 영화 관련 서적도 드물었던 시대엔 영화과보다 앞서 영화를 탐식하던 곳이었다. 영화동아리 구성원들에게 설문을 돌린 것도 그들이 영화과 학생들보다 더 마니아적 성격이 강할 것이라는 예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결과는 영화과 학생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슷한 세대임을 감안해도 그들의 시각과 결론은 아주 많이 닮았다. 특별히 마니아라는 점이 두드러지는 응답이 드물다는 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원하는 정보를 언제든 얻을 수 있는 환경에서 영화동아리의 마니아적 성격도 그만큼 탈색된 것이 아닐까.
한국영화에 대한 대부분의 질문에서 영화동아리 응답자들과 영화과 응답자는 거의 비슷한 답변을 했고 순위만 한두 계단 차이를 보였다. 가장 높이 평가하는 감독은 박찬욱, 최고의 한국영화는 <올드보이>와 <살인의 추억>, 상업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은 강우석
젊은 영화광들이 말하는 한국영화의 오늘과 내일 [5] - 영화동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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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아카데미(이하 아카데미)는 개교 이후 충무로에 감독과 현장인력을 가장 많이 배출한 단일 교육기관이다. 연출, 프로듀서, 촬영을 전공하는 아카데미 22기 재학생 19명 전원에게 설문을 청했다. 아카데미 학생들이 가장 높이 평가한 감독은 홍상수다. 다른 설문 그룹에서 박찬욱과 봉준호가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던 것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결과다. 홍상수를 최고로 꼽은 응답자들은 “영화언어에 대해 가장 정확한 해석을 내린다”고 평가했다. 최고의 한국영화에 대한 답변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두 그룹과 달리 흥행작 위주가 아닌 작가의 개성이 두드러진 작품들이 다수 포진됐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수위를 차지했고, 박찬욱 감독 작품 중에도 <복수는 나의 것>이 선택됐다. <살인의 추억>을 제외한 작품들은 역대 흥행순위와는 거리가 멀다. 상업적 감각과 대중영화의 성취에 대한 응답은 다른 설문 그룹과 유사한 결과가 나왔다.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젊은 영화광들이 말하는 한국영화의 오늘과 내일 [4] -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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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과 학생들이 현재와 미래의 감독으로 점지한 인물은 박찬욱 감독과 봉준호 감독이다. 설문에 응한 영화과 학생들은 감독에게 집중된 초반 다섯개의 질문에서 두 사람을 모두 5위권 내로 진입시키는 애정을 과시했다. 박찬욱 감독은 ‘가장 높이 평가하는 감독’으로 꼽혔고 봉준호 감독은 ‘최고의 한국영화, 한국영화 베스트5, 2000년 이후 데뷔한 감독 중 가장 주목받을 감독’으로 선정됐다. <살인의 추억>과 <올드보이>는 설문 전 분야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높은 순위를 점했다. 두 사람은 작가주의와 웰메이드한 상업영화 사이를 교묘하게 넘나드는 공통분모를 지녔다. ‘상업적인 감각을 가진 감독’을 묻는 문항과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감독’ 항목에서도 수위를 차지한 강제규 감독과 김기덕 감독보다는 박찬욱 감독, 장진 감독의 약진이 눈에 띈다. 두 질문의 핵심은 흥행과 제작기간이지만 박찬욱 감독과 장진 감독의 선전은 응답자들의 취향을 보여준다. 봉준호 감독
젊은 영화광들이 말하는 한국영화의 오늘과 내일 [3] - 대학 영화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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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영화광들이 집단으로 출몰하고 동거동락하는 세곳의 ‘서식처’는 영화산업의 시스템에서 비껴 있고 그래야 옳다. 그러나 자유롭게 상상하고 사유하는 ‘게토’는, 어쩔 수 없이 한국영화의 에너지이자 꿈이기도 하다. ‘젊은 영화광들에게 묻는 한국영화의 오늘과 내일’의 설문조사 결과는 평단과 충무로로 대별되는 기성 세대의 인식과 평가를 살짝 배반하면서도 슬쩍 공유하는 흥미로운 풍경을 보여준다. 세 부류의 취향이 일정한 패턴을 보여주면서도 현장에 가장 근접한 영화아카데미는 영화의 이상 혹은 목적이라는 대목에 이르러선 다른 두 부류와 뚜렷한 ‘노선 차이’를 드러낸다.
어쨌든, 가장 단순하게 뭉뚱그리면 이들은 고결한 작가주의나 취향없는 상업영화 어느 한쪽을 편애하지 않고 이를 동시에 꿈꾸는 가치기준을 자신있게 들이밀고 있다. 단적으로, 박찬욱을 이 시대의 화두처럼 내세운 반면 홍상수(나아가 김기덕까지)를 부재시킨다. 그리고 김동원의 <송환>은 홍상수보다 더 완벽하게 소외된다. 상업
젊은 영화광들이 말하는 한국영화의 오늘과 내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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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의 세계가 아마추어 집단을 거울처럼 비춰보고 성찰하는 게 유용할까? 대학 영화과와 영화동아리, 영화아카데미는 말하자면 아마추어다. 하지만 그들은 영화광(혹은 시네필)이기도 하다. 영화광은 프로페셔널이 아니지만 그들과 그들 너머까지의 세상을 동경하고 수집하며 미래로 삼는다. 그들을 사로잡은 지금의 감독과 영화로 미래의 감독과 영화를 가늠하는 건 그래서 가능하지 않을까. ‘젊은 영화광들에게 한국영화의 오늘과 미래를 묻는다’는 취지의 설문을 시작하고 그 결과를 들여다보면서 왜 더 일찍 이런 걸 해보지 않았을까, 새삼 자문하게 됐다. 설문은 불친절하고 투박했지만, 젊은 영화광들의 답변에선 우리가 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인다. 우려와 탄성이 동시에 흘러나오기도 한다. 독자로 부를 수밖에 없는 개별적인 영화광들과 프로페셔널들과 더불어 그들의 생각과 취향을 음미해보려고 한다. 설문에 성심성의껏 응해준 6개 대학 영화과 151명, 6개 대학 영화동아리 회원 41명, 영화아카데미 22기 19명에게
젊은 영화광들이 말하는 한국영화의 오늘과 내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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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사랑의 기억을 지운다?
주인공은 뉴욕에 살고 있는 조엘(짐 캐리)이다. 그는 옆집 사람이 자기 차를 찌그러뜨렸다고 여기면서도 그냥 참고 넘어갈 만큼 소심하고 착한 사람이다. 영화는 잠에서 깨어난 그가 회사로 가던 중 무작정 몬타우크행 기차를 타고 바닷가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 순간에도 조엘은 자신이 왜 일상을 벗어나 몬타우크행을 선택했는지 스스로 납득하지 못한다. 그러나 거기서 조엘은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럿)을 만나고, 그녀의 활달한 성격 덕분에 금세 친해져, 그 다음날은 찰스강에 같이 놀러가서 꽁꽁 언 강바닥에 누워 별을 바라보며 멋진 추억도 만든다. 게다가 그녀는 농담처럼 “우리는 분명히 결혼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 조엘과 그걸 보는 세심한 관객을 동시에 당황시킨다. 그리고 날이 밝아 클레멘타인을 집에 데려다줄 때, 그녀는 갑자기 조엘의 집에 가도 되겠냐고 묻는다. 그러자 조엘은 좋다고 말한다. 짐을 챙기겠다며 집으로 들어가는 클레멘타인. 잠시 뒤 한 남자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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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우드에서 가장 기괴한 작가 찰리 카우프만과 뮤직비디오계의 발명가 미셸 공드리가 만나 완성한 두 번째 영화 <이터널 선샤인>이 11월10일 개봉한다. 사랑했던 남자를 기억에서 지워버린 여자와 그 기억을 지우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남자의 따라잡기 힘든 현란한 숨바꼭질이 펼쳐진다. <이터널 선샤인>의 탄생과정과 그것을 세상에 내놓은 카우프만-공드리의 합작 세계, 그리고 흥미롭게 재단되어 있는 영화의 구조를 미리 들여다본다. 그래, 세상은 요지경인데 사랑만이 불변이다. 카우프만과 공드리가 전하는 이 전언을 따라가보자.
“당신은 그/그녀의 머릿속에서 지워졌습니다. 이제 그/그녀는 더이상 당신을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이런 내용이 담긴 서신 하나를 받는다면, 그 누군가의 삶은, 혹은 이야기는 이제부터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이터널 선샤인>의 감독 미셸 공드리가 친구 피에르 비스무스에게 들은 아이디어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가 이 단상으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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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통해 역사와 현재를 말한다
<금발의 초원>은 20대의 꿈을 꾸는 80대 노인의 사랑 이야기다. <시니바나>(2004)는 양로원에 들어간 노인들이, 마지막 열정으로 은행금고를 터는 이야기다. <히미코의 집>(2005)은 게이 노인들이 모인 집에서 벌어지는 이해와 용서의 이야기다. <시니바나>가 영화사의 제의로 만들어진 영화라 해도, 이누도 잇신의 영화에서 일관되게 ‘노인’이 중요한 상징으로 등장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누도 잇신의 영화에서, 노인은 역사의 체현자로서 존재한다. “영화에서는 주인공의 시간이 보인다. 거기에 노인이 등장하면, 단지 그 인물의 시간만이 아니라 영화의 시간이 확장된다고 생각한다. 그가 살아온 만큼의 역사가, 그 영화에 더해지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영화의 폭이 넓어진다. <금붕어의 일생> 역시 1년2개월을 통해, 금붕어의 긴 역사가 보인다.”
역사는,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증명이다. 역
이누도 잇신 감독을 만나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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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본 한국 관객은 4만5천명. 1천만 시대를 자랑하는 한국영화에 비하면 모래알 같은 숫자이지만,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열광적인 팬의 지지로 1년 뒤 재개봉까지 하는 기적을 이루었다.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영화이며 감독이었지만, 영화가 개봉한 뒤 입소문을 통해 꾸준히 관객을 불러모았고 본 사람들은 누구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거대한 해일이 될 수는 없었지만, ‘작은 영화’가 한국 영화계에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는 알려주었다. 상업적인 주류영화와 예술적인 작가영화라는 구분이 아니라, 관객에게 무엇인가를 전해주는 다양한 ‘작은’ 영화들이 풍성해질 때 한국 영화계도 한 걸음 도약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오로지 재개봉을 찾아준 관객을 만나기 위해 서울을 찾은 이누도 잇신 감독을 만났다. 둥그런 얼굴의, 선량한 표정의 이누도 잇신과의 만남은 그의 영화처럼 즐겁고,
이누도 잇신 감독을 만나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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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미안하다는 나의 고백이다”
<사랑해, 말순씨>는 박흥식 감독이 데뷔작으로 준비했던 시나리오다. 감독의 자전적 경험에 많이 의존한 이 시나리오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와 <인어공주>를 먼저 내놓은 뒤에 만들어지게 됐다. 박흥식 감독은 <사랑해, 말순씨>를 “성장기의 상실에 관한 영화이면서 불행한 공기에 대한, 불행이 시작되는 공기에 대한 영화”라고 말한다. 과연 그는 지금 관객들과 자신의 소년기가 어떤 교감을 나누길 바랐던 것일까? 기자시사회가 있던 10월24일 저녁 박흥식 감독을 만났다.
-영화를 본 30대 후반들은 공통적으로 <사랑해, 말순씨>의 시대 고증이 좋다고 한다.
=예산문제 때문에 정확히 하진 못했다. 촬영지인 전주의 느낌은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에 더 가깝다. 슬레이트 지붕, 시멘트 골목, 마루와 장독대가 있는 가옥구조, 창호지 문 등에서 옛날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질 수는 있는데
<사랑해, 말순씨> 찬반양론 [3] - 박흥식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