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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루저들을 연민하는 카메라
“여덟살이 최고야. 12살 이후에 겪는 일들은 죄다 모욕이지.”(8 is great. Everything after 12 is an insult) 열두살을 갓 넘긴 소년에게, 열두살을 오래전에 넘긴 젊은이가 말하자 소년은 입을 다문다. 그 소년의 집은 뉴욕 도심 밖 구질한 동네에서 모텔을 운영한다. 어니스트가 방과후 숙제보다 먼저 할 일은 모텔방 청소다. 그는 집나간 아빠 대신 두 남매를 억척스럽게 키운 엄마와 마음을 닫고 글쓰기에 취미를 붙였다. 뚱뚱하고 쪼다 같아서 좋아하는 소녀에게 남자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모텔의 장기투숙자로 찾아든 한국계 청년 샘으로부터 소년은 남자가 되는 법을 배우고자 한다.
한국계 미국이주민 2세인 마이클 강 감독의 <모텔>은 못난 소년의 성장영화다. 누구나 겪는 사춘기의 예민한 순간을 드러내기에 열등감만큼 좋은 도구는 없다. 중국계인 어니스트는 가정환경, 신체적 조건, 성격 중 어느 한 가지에서도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 결산 [6] - 부산의 발견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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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기억을 찬란하게 빚어내는 마술사
자그마한 몸집에 눈동자만 커다란 야마시타 노부히로는 1976년에 태어난 젊은 감독이다. 부끄러워지면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곤 하는 야마시타는 “여자들과 말도 잘 못하고, 주로 남자와 여행을 테마로 영화를 만들어왔다”. 그런데도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된 그의 신작 <린다 린다 린다>는 소녀들의 마음이 조그맣게 빛나는 순간을 오래도록 들여다보곤 한다. 아무도 오지 않는 옥상에 혼자 만화카페를 차려놓고, 풀장을 떠다니고, 함께 장을 봐 밥을 해먹는, 지극히 사소한 기억. 프로듀서가 기획했다고는 해도 <린다 린다 린다>는 공기 속의 물방울처럼, 그순간 알아보지 않는다면 사라져버릴 무언가를, 소중하게 여기는 영화다.
영화는 여고생밴드 ‘파란마음’이 위기에 처하면서 시작된다. 멤버 한명은 기타리스트 케이와 심하게 다투었고 또 다른 한명은 손을 다쳐 연주를 할 수 없다. 어찌할까 고민하던 케이는 지나가던 한국인 유학생 송(배두나)을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 결산 [5] - 부산의 발견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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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갑옷을 입은 로맨티스트
지난해 말, 타이에서 개봉한 <시티즌 독>은 일찌감치 부산행이 결정된 영화다. 올해 초 방콕영화제에 참석했던 김지석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는 감독인 위시트 사사나티앙을 만나 초청 의사를 수차례 전했을 정도로 애착을 보였다. 로테르담과 토론토를 거쳐 프린트를 들고 부산에 다다른 그에게 “올해 출장이 잦은데 회사에서 허락을 해주더냐?”고 물었더니, “영화제 참석은 회사에서 눈감아준다”고 답한다.
타이 최대 규모의 광고회사 필름 팩토리의 일원인 그가 처음 세계 영화계에 존재를 알린 것은 <검은 호랑이의 눈물>(2000)로 밴쿠버영화제에서 용호상을 수상하면서부터다. 예술대학 동창이기도 한 논지 니미부트르의 <낭낙>의 시나리오 작가로 타이 영화계에 데뷔한 그는 이듬해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데뷔작 <검은 호랑이의 눈물>이 초청되면서 유럽의 환대를 받았고, 이후 펜엑 라타나루앙,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등과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 결산 [4] - 부산의 발견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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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혹한 세상을 묵묵히 지켜보는 관찰자
“보리는 망종(芒種) 전에 베라”는 속담이 있다. 보리를 베어야 그 자리에 밭갈이하고 새 종자의 씨를 뿌릴 수 있다는 뜻이다. 망종이 지나면 머리가 무거운 보리는 약한 바람에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다. 희망을 심기 위해서도 절망을 베어내야 하는 않을까. 조선족 중국 감독 장률(그의 독특한 이력은 <씨네21> 455호 참조)의 두 번째 장편영화 <망종>은 쓰러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베어내는 의식을 치르는 한 여자의 삶을 다룬 영화다.
최순희는 살인죄로 감옥에 간 남편과 헤어진 뒤 김치를 팔아 생계를 이어간다. 조선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쓰는 그녀는 아들 창호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어느 날 같은 동포인 김씨의 친절에 끌리게 되고, 그녀는 유부남인 김씨와 연애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중국인 부인에게 불륜 사실을 발각당한 김씨는 그녀를 창녀로 낙인찍고, 아들까지 잃는 사고를 당한 순희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 결산 [3] - 부산의 발견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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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은 좁고 사람은 많았다
협소한 PIFF광장을 어쩌면 좋을까. 10주년답게 야외행사 일정도 예년보다 많은 남포동 PIFF광장은 쓰마부키 사토시, 강동원, 성룡, 문정혁(에릭) 등 국내외 스타들이 다녀갈 때마다 압사의 공포가 느껴질 만큼 무시무시하게 붐볐다. 사람들은 야외무대 주변을 둘러싸다 못해 큰길가로, 시장 골목골목으로, 대영시네마와 부산극장 건물 창밖으로 빼곡히 자리를 채웠다. 밀고 밀치는 인파가 일으킨 파동에 사람 키만한 스피커가 떨어질 뻔했다. 강동원은 인사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무대를 내려갔고, “장내가 혼잡해 서둘러 마친다”는 사회자의 설명은 원성을 살 뿐이었다. 해운대 중구청에서 지원한 1개 중대의 경찰병력과 영화제 경호요원, 스탭, 자원봉사자 등 150여명의 인원이 현장통제에 나서도 역부족이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영화제 와서 무슨 봉변인가 싶었다. 규모가 커진 만큼 영화제쪽에서 예상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얼마 전 상주 사태가 있었는데도 경각심이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 결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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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가 9일간의 항해를 마치고 닻을 내렸다. 307편의 영화가 상영됐고 500여명의 게스트가 공식적으로 다녀갔으며 20여만명의 관객이 영화제를 즐겼고 그만큼의 커피캔과 전단지 쓰레기가 남포동 PIFF광장을 뒤덮었다. 열돌에 걸맞게 모든 것들이 그 어느 때보다 많았던 영화축제를 결산한다.
발견! 5인의 신성, 감동! 거장과의 만남
우선 발견의 기쁨. <시티즌 독> <로버트 카마이클의 엑스터시> <모텔> <린다 린다 린다> <망종> 등 부산에서 발견한 재능있는 신인감독들의 작품 5편을 클로즈업했다. 그리고 뜻밖의 만남을 주선했다. 대만 뉴웨이브의 대표주자 차이밍량과 <여자, 정혜>의 감독 이윤기의 첫 만남의 자리를, 이란의 거장 모흐센 마흐말바프와 그의 영화적 동료 모함마드 아흐마디가 만나는 자리를 만들었다.
이것만으로 영화제를 정리하기란 턱없다. 영화와 영화인만이 영화제를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 결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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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아 연대기: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The Chronicles of Narnia: 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
<장화, 홍련>을 본 뒤로 옷장 열기가 무서워졌다면, <나니아 연대기: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을 탐독할 필요가 있다. 2차대전 피난 와중에 런던 외곽의 노교수 집에 머물게 된 네 남매가 옷장 속에서 다른 나라로 이어지는 길을 발견해 신나는 모험을 한다는 이야기. 온갖 동물과 정령, 난쟁이와 거인들이 모여 살던 숲속 나라 나니아를 ‘크리스마스도 없는 영원한 겨울’로 만들어버린 하얀 마녀를 사자왕 아슬란과 함께 물리치고, “아담의 두 아들과 이브의 두 딸이 왕좌를 차지하리라”는 예언대로 나니아를 통치하는 아이들의 활약을 담은 이 이야기는, 속세의 때가 묻은 어른들로서도 옷장 문을 열고 두리번거리게 만들 정도로 매력적이다. J. R. R. 톨킨과 더불어 판타지 소설의 양대 산맥을 이룬 C. S. 루이스의
2005 겨울 해외영화 BIG 3 [3] - <나니아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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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포터와 불의 잔 Harry Porter and the Goblet of Fire
사춘기는 어둡고 긴 터널이다. 범상한 인간들인 우리 ‘머글’에게조차 힘겨운 그 시간이, 호그와트의 마법사 생도들을 뒤흔들기 시작한다. 상급생만 출전할 수 있다는 위험천만한 트리 위저드 토너먼트가 다가오자, 불의 잔은 무슨 이유에선지 자격 미달인 해리를 대표로 지목한다. 해리의 출전을 염려하는 헤르미온느를 보며, 론은 자신이 그녀를 이성으로 느끼고 있다는 걸 깨닫는데, 예언자 일보는 해리와 헤르미온느의 로맨스를 예고해, 그를 더욱 긴장하게 만든다. 삼총사의 흔들리는 우정, 혼란스러운 첫사랑, 트리 위저드 출전 부담으로 힘겨운 해리에게 숙적 볼드모트의 마수가 뻗어온다. 어둡고 힘겨운 시간이 될 거라는, 옳은 길과 쉬운 길 사이에서 방황하게 될 거라는 덤블도어 교수의 말은 그렇게 시시각각 현실이 되어 해리를 옥죄어온다.
트리 위저드 시합과 아이들의 로맨스, 두축의 이야기로 전개되는 <해
2005 겨울 해외영화 BIG 3 [2] - <해리포터와 불의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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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작의 계절이 여름이었던 적이 있었다. 네댓해 전부터는 그렇지 않다. <반지의 제왕>과 <해리 포터>가 나란히 찾아오던 겨울부터 계절의 감각이 달라졌다. 세 번째 <해리 포터>가 불쑥 여름에 찾아왔을 때, <반지의 제왕>이 끝나고 <해리 포터>가 쉬었을 때, 그 겨울이 그렇게 춥고 배고프고 심심할 수가 없었다. 올 12월은 든든하고 흐뭇하다. <반지의 제왕>을 마친 피터 잭슨이 ‘필생의 프로젝트’라는 <킹콩> 리메이크를, <슈렉>의 앤드루 애덤슨이 판타지 우화의 고전 <나니아 연대기: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의 실사 버전을,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의 마이크 뉴웰이 어두운 스릴러로 매만진 <해리 포터와 불의 잔>을 나란히 선보일 참이다. 우연찮게도, 모두 원작 소설이나 영화가 있다는 태생부터, 판타지 어드벤처라는 장르의 골격까지 닮아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
2005 겨울 해외영화 BIG 3 [1] - <킹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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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속에 전동장치, 풍부한 표정의 비밀
캐릭터디자인은 팀 버튼이 그린 최초의 스케치가 원안이 되었다. 생김새만큼이나 움직일 때의 모습을 염두에 두고 각 캐릭터를 발전시켰다. 팀 버튼이 캐릭터디자이너인 카를로스 그란젤에게 자신의 스케치를 던져주며 한 말은 “내 솜씨로는 더 나아지지 않을 거야. 정말 자살이라도 하고 싶을 지경이라고!”가 다였다. 여러 가지 생김새의 주인공들을 그려놓고 선택하는 과정은 생략되었다. 처음 생각한 주요 인물들의 생김새를 좀더 정교하게 다듬는 정도였다. 목소리 캐스팅이 진행되면서, 주요 목소리 배우들의 외모와 인형들의 생김새를 일치시키는 일도 필요했다. 빅터의 경우, 표정이 풍부한 눈과 볼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높은 광대뼈는 목소리를 연기한 조니 뎁의 것이다. 유순하고 심약해 보이지만 인내심이 강한 청년 빅터의 목소리와 외모는 일치한다. 눈썹과 눈, 그리고 수줍음 가득한 입은 인물을 동정적으로 만든다. 목소리와 외양은 마치 실사영화에서처럼 일치되어갔다.
<유령신부> 제작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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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죽음, 복수와 같은 어두운 이야기가 귀엽고 명랑하게 그려지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걸핏하면 눈알이 튀어나오고 컴컴한 눈두덩에서 구더기가 튀어나오는 푸른 피부의 시체 신부를 매력적이고 섹시하게 묘사하는 일 역시 그렇다. 하지만 팀 버튼의 이름과 <크리스마스의 악몽>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 4천만달러의 예산이 든 스톱모션애니메이션이 보여줄 기괴하고 흥겨운 세계를 고대하고 있을 터. 순결함이 느껴지는 살아 있는 신부의 장밋빛 볼보다 섹시함이 느껴지는 죽은 신부의 앙상한 다리와 도톰한 입술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일이 손으로 매만진 인물들이 어떻게 CG로 작업한 3D애니메이션처럼 매끈하게 움직일 수 있을까. 11월3일 개봉을 앞둔 <유령신부>가 공포와 유머의 창의적인 결혼을 성사시킬 수 있었던 비결을 엿본다.
착하지만 어딘가 여려 보이는 눈매를 한, 광대뼈가 도드라지는 한 청년이 창문 앞에 앉아 깃털이 달린 펜촉으로 노트에 나비 그림을
<유령신부> 제작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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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실한 인간이다
영화 <모두들, 괜찮아요?>의 촬영현장에서는, 여기 있는 남자들은 모두 극중 상훈 같은 인간들이라는 괴담이 떠돌았다. 일일이 확인해볼 것도 없었다. 과연 이순재가 본처 집을 방문하는 장면을 찍던 날, 본처 자식들의 역할을 맡았던 배우들이 쉬는 시간에 나누던 이야기를 엿들은 바는 이러하다.
성악가 임정현(큰아들 역): 너는 진짜 남선호 감독이 한량이라고 생각하냐? 그럼 어떻게 했어야 하지? 예술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생계수단이라고는 없는데, 예술을 하겠다고 몇년씩 집요하게 매달리면 노는 거냐? 놀지는 않고 돈만 못 번 거지.
배우 박영신(둘째딸 역): 돈이 되는 노동이 있고, 자기가 하고 싶은 노동이 있잖아. 누구는 자기가 하고 싶은 노동을 하고, 누구는 창작행위는 못하고 먹고살기 위한 노동만 해야 하니까 말이 안 되지.
배우 김요진(셋째며느리 역): 그리고 남편이 예술 행위를 할 때, 아내는 부담이 훨씬 더 커. 가사일도
<모두들, 괜찮아요?> 촬영현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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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넘도록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분투한 감독의 자전적 영화 <모두들, 괜찮아요?>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이 영화를 감독한 남선호 감독은 바로 나의 둘째오빠다. 지난 여름 내내 설레는 마음으로 촬영현장을 쫓아다녔던 나는 그가 영화에서 다루는 자신과 가족의 이야기를 훤히 꿰고 있는 덕분에 실제 이야기와 영화 속 이야기가 섞여버린 촬영현장기를 싣는다. <모두들, 괜찮아요?>는 험난한 가족사 속에서 건진 따뜻하고 유쾌한 일상을 다룬 홈코미디영화다.
오빠가 돌아왔다. 12년 동안 줄곧 영화감독 지망생이었던 나의 둘째오빠가 나이 사십에 <모두들, 괜찮아요?>라는 영화로 드디어 지망생이라는 꼬리표를 떼게 되었다. 그동안 커다란 실패도 없었지만 지리멸렬한 좌절에 길들여진 가족은 그 소식을 듣고 우선 제작비가 얼마인지부터 물었다. 그리고 당사자가 듣지 못할 만한 곳에 모여 수군거리다 결론을 맺었다. 오빠는 절대 강제규 감독의 뒤를 좇으려 하지 말고 필히
<모두들, 괜찮아요?> 촬영현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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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2/ 10월4일 화요일
영화제 스탭은 미쳐간다…
“죄송한데요, 그건 저희도 다 몰라요. 네, 네. 그쪽엔 열조 정도 설치했어요.” 영화제 사무국 기획실 안에서 박준표 옥외홍보 담당자가 30분째 핸드폰을 붙들고 있다. 누군가의 질문과 요청에 시달리는 눈치다. 홍보팀 스탭 누구라도 전화를 받는 순간 각오해야 할 상황이기는 하다. 그는 통화한 지 40분 가까이 되어서야 핸드폰을 닫는다. 믿을 수 없는 긴 시간 동안 홍보팀 스탭을 붙든 전화는 국정홍보처로부터 걸려온 것이다. 국정홍보처가 관리하는 국가 홍보 캠페인 ‘다이내믹 코리아’의 광고배너를 내일 해운대 시내 가로등마다 설치해야 하는데 이미 곳곳에 부산영화제 배너가 걸려 있어 난감하다는 것이다. “겹치는 부분을 최소화하도록 노력하겠다는 그쪽의 뜻은 ‘겹치면 떼낼수도 있다’는 뜻이란다. 해운대 시내 가로등에 걸린 영화제 배너는 130여개조(2개 배너가 한조). ‘다이내믹 코리아’ 광고배너는 200개조다. “해운대 가로등이 무한개도
부산영화제 D-5 따라잡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