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월1일 부산국제영화제 자막팀 사무실을 찾았을 때, 들어가자마자 눈에 띈 건 천장에 매달아놓은 종이 한장이었다. “영화제 앞으로 5일.” 영화제 8년차 스탭인 조소라 자막팀장은 두달 전부터 사무실 문을 잠궈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개막 전날인 10월5일 자원봉사자 발대식에 참여한 박성철씨는 8월 마지막주부터 전산팀 자원봉사 조기 근무를 시작한 사람이다. 영화제 사무국은, 1년 내내 돌아간다. 그러므로 영화제가 준비되는 곳곳을 ‘귀찮은 외부인’ 눈초리받으며 고작 닷새 쫓아다니는 일이 그들에게는 무의미해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영화제 바깥에서 개막 축포 소리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흥미로운 예고편이다.
D-5/ 10월1일 토요일
프린트는 산 넘고 물 건너
“영화제 첫 상영인데 <쓰리 타임즈> 프린트가 아직 도착을 안 했어요. 걱정돼 죽겠어요.” 스크리닝 매니저, 줄임말로 SM이라 불리는 문준희씨는 반쯤 울상이 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2
부산영화제 D-5 따라잡기 [1]
-
완벽주의자, 투박한 진정성으로 성큼 다가서다
박진표 감독은 <너는 내 운명>의 제작 초기에 영화의 ‘비장의 무기’가 황.정.민이라고 답한 적이 있다. 스토리나 스타일의 어떤 요소에 방점을 찍어 답하게 마련인 질문에 특정 배우의 이름이 먼저 튀어나왔다는 사실이 흥미롭게 느껴지면서도, <너는 내 운명>의 전도연 스타일로, “진정?” 하고 되묻고 싶은 마음이 생겼던 것도 사실이다. 황정민은 데뷔작 <와이키키 브라더스> 시절부터 좋은 연기를 보여줬지만, 어떤 배우인가를 골똘히 생각해보아도, 똑 떨어지는 답이 나오는 배우는 아니었다. 당장 이 작품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가늠하기도 힘들고, 그래서 어떤 기대를 걸어보기에는 너무 막연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영화로 옮겨온 것이 벌써 대여섯해. 착실히 작품 목록을 쌓아온 이 배우가 여전히 낯설게 느껴진다면, 그건 아마도 그가 아직 배우로서 자신의 정체를 온전히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당신은
차세대 대표배우 정재영·황정민 [4] - 황정민
-
■ 좌우명
정재영 | 지금의 좌우명은 행복이다. 내 주변 사람이 행복해졌으면 좋겠고, 내가 모르는 사람도 내가 나온 영화를 통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황정민 | 거짓말하지 말자! (사이를 두고) 연기할 때 만큼은.
■ 내가 생각하는 나
정재영 | 우선 너무 게으르다. 부지런하면 연기도, 생활도 지금보다 나아질 텐데 말이다. 그리고 내 장점을 굳이 따진다면 합리적이고자 애쓰는 것이다. 뭐든지 내 안에서 합리화되지 않으면 잘 하지 않는 편이다.
황정민 | 까탈스럽다고 해야 하나, 예민하다고 해야 하나.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백수’인 것 같다. 역할 중에서? 굳이 고르자면,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강수랑 가장 비슷하다. 삶에 대해서, 영화에 대해서 적극적이고 우유부단한 면도 있지만 환경의 변화에 빨리 적응하는 면도 그렇고, 그 당시의 나와 많이 닮아 있었다.
■ 시간이 나면
정재영 | 난 정말 취미가 없다. 일이 없을 때는 집에서 누워서 TV 보고, 인터넷으로 뉴스를
차세대 대표배우 정재영·황정민 [3] - 정재영vs황정민
-
삐딱함 속에 숨은 천 가지 표정의 힘
그 남자는 거기에 있었다. 우리가 알아채기 오래 전부터, 낯은 익지만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는 친구처럼, 그렇게. 그리고 의식하지 못하는 틈에 우리는 그와 통성명과 악수를 했고, 말을 트고 수다를 떨었으며, 소주잔을 부딪치고 어깨를 맞걸었다. 그와 우리의 거리가 한자리 숫자의 휴대폰 단축번호만큼이나 가까워진 과정은 그토록 자연스러웠다. 그러니 그를 예전부터 막역했던 사이로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해서 정재영의 공식 첫 주연작이 지난해의 <아는 여자>였다는 사실이나, 그가 <웰컴 투 동막골>과 부산영화제에서 폐막작으로 상영될 <나의 결혼원정기>까지 세편에서만 주연을 맡았다는 기록은 믿기 힘들다. 가장 친하다고 생각한 친구가 알고보니 몇달 전 한국에 온 외국인이었다는 얘기를 들은 것처럼. <킬러들의 수다> <실미도> <귀여워>처럼 ‘공동 주연’ 성격의 영화가 있었지만,
차세대 대표배우 정재영·황정민 [2] - 정재영
-
-
말 만들기를 좋아하는 것은 언론의 속성이다. 소위 ‘빅 쓰리’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한국영화계의 대들보인 최민식, 송강호, 설경구를 가리키는 이 말은 가장 연기력이 출중한 탓에 가장 많은 캐스팅 제의를 받고, 가장 개성있고 난이도 높은 영화에 출연하며, 산업적 영향력 또한 가장 크게 발휘하는 이들 세 배우가 여타 배우들과는 다른 ‘지위’에 있음을 은연중에 암시한다. 그런 언론의 속성을 발휘해서 감히 이야기한다면, 정재영과 황정민은 ‘넥스트 빅 쓰리’로 포괄할 수 있는 배우들이다. 빈 자리 하나가 누구의 것이 될지 아직 징후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요 몇년새 <바람난 가족> <여자, 정혜> <달콤한 인생> <너는 내 운명>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등의 황정민이나 <피도 눈물도 없이> <실미도> <귀여워> <아는 여자> <웰컴 투 동막골> <박수칠 때 떠나라>를
차세대 대표배우 정재영·황정민 [1]
-
“손 냄새 나는 게 우리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닉 파크라는 이름을 빼고 아드만 스튜디오를 말할 수 있을까. 1985년 닉 파크는 아드만 스튜디오의 설립자가 강의하던 영화학교로 찾아가 자기 작품을 보여주고는 일자리를 제의받았다. <월레스와 그로밋>의 첫 단편인 <화려한 외출>의 5분짜리 데모 테이프였다. 이후 <동물원 인터뷰>와 <월레스와 그로밋>의 두 단편으로 오스카 세개를 거머쥐면서 스타가 됐고, 장편 <치킨 런>의 성공은 그와 아드만의 미래를 더욱 넓혀주었다. 물론, 코앞에서 만나본 그는 거만은커녕 약간 수줍고 매우 섬세해 보이는 모범 예술가였다.
-월레스, 그로밋의 이름은 어떻게 지었나.
=아주 나이 많은 어떤 할머니가 뚱뚱한 큰 개를 기르고 있었는데 그 개 이름이 월레스였다. 이름이 재밌어서 써봤다. 그리고 동생이 전기 기술자인데 보청기 뒤쪽의 꼬인 줄 같은 전기줄을 그로밋이라고 부르더라. 발음이 좋아서 선택했
아드만 스튜디오에서 만난 <월레스&그로밋> [3] - 닉 파크 인터뷰
-
촬영세트, 거대한 고독의 바다
드디어 촬영이 진행 중인 세트다. 여긴 거대한 고독의 바다다. 첫 번째로 들어선 세트는 실사 스튜디오에 비해선 작았으나 제법 컸고 무엇보다 어둠침침했다. 애니메이터 메를린 크로싱엄이 홀로 사람 가슴 높이로 세팅된 미니어처와 그 앞쪽의 카메라, 그리고 모니터와 하단의 컴퓨터 사이를 외롭게 오가고 있다. 워낙 섬세하고 느리게 촬영이 진행되니 조명팀은 한번 세팅해놓고 사라지고 사운드는 사전 녹음으로 처리하니 애니메이터의 고독한 작업일 수밖에. 악역 빅터가 총쏘는 장면을 촬영 중인데 모니터에 총의 동선을 점으로 표시해놓았다. 한번 찍고 총을 점 표시 순서대로 조금씩 옮겨 찍으며 한 프레임씩 쌓아가는 지난한 과정이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이 맡은 분량의 감독과 촬영, 배우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셈이다. “오늘(월요일 오후 2시께) 촬영한 게 3초 정도인데, 금요일까지 8분 분량을 마쳐야 한다”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난처한 표정을 이방인들 앞에
아드만 스튜디오에서 만난 <월레스&그로밋> [2]
-
스톱모션애니메이션의 명가 아드만 스튜디오가 <월레스와 그로밋>이 아닌 <치킨 런>을 첫 장편으로 세상에 내놨을 때, 갸우뚱했던 기억이 있으신가? 아마 <월레스와 그로밋>의 세 단편을 맛본 이들이라면 이들의 애교 만점 콤비 플레이를 1시간 넘게 지속 관람할 날을 손꼽았을 터. 그날이 오긴 왔다. 2001년 제작에 착수한 <월레스&그로밋: 거대 토끼의 저주>가 11월4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지난 봄, 아드만 스튜디오의 초청으로 영국의 항구도시 브리스틀을 찾았다. 물론 <월레스&그로밋…>의 제작현장을 목격했고, 아드만의 ‘보물’ 닉 파크 감독을 인터뷰했다. 그때 완성된 초반 20분 분량을 관람했으나 최종 완성까지 때를 기다렸다. 조용한 긴장감이 흘러넘치던 당시 스튜디오 목격담과 닉 파크 인터뷰, 그리고 완성된 <월레스&그로밋…>의 ‘실체’를 이제야 공개한다.
닉 파크 감독의 인터뷰 대기 장소
아드만 스튜디오에서 만난 <월레스&그로밋> [1]
-
영화 속 괴짜 과학자들은 평생 인정받지 못하다가도 불쑥 괴상한 기계를 발명하곤 한다. 그 뒤 생길 수 있는 일의 경우의 수는 3가지다. 떼돈을 벌거나, 인생을 종치거나, 애먼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거나.
<인생은 오백오십 살부터>보다 더 인기있고, <무중력 상태에서 할 수 있는 또 다른 쉰세 가지 일들>보다 더 잘 팔리며, <알고 싶지 않았지만 억지로 알게 된 섹스에 대한 모든 것>보다 더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역시 그런 발명품의 현대판이라 할 수 있다.
비현실적이지만 그래서 갖고 싶기도 한 영화 속 발명품들. 어디 한번 구경해보실텨? 나도 과학자가 되겠다고 뒷북치시지만 않는다면 대환영이다.
애들이 줄었어요/ 전자자기축소기
이 영화는 하도 옛날 디즈니영화라(세상에 1990년의 영화닷!), 발명품의 작동 원리를 관객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 같은 것은 애초에 하지도 않는다. 때문에 어
황당하지만 갖고 싶은 영화 속 발명품들
-
고통과 두려움 사이, 피터팬의 어른되기
조창호 감독의 <피터팬의 공식>
소년이 정액을 만들어낼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그 몸은 그때부터 성장통을 겪는다. 여자를 훔쳐보다가, 여자의 냄새가 밴 물건을 찾아내고, 여자의 육체에 감싸이는 직접적인 감촉을 욕망하게 된다. 통증이 견딜 수 없는 순간에 이르렀을 때 소년은 그것을 견디거나, 해결하기 위해 선택을 한다. 조창호 감독의 장편데뷔작 <피터팬의 공식>은 자위할 때의 신음소리가 너무 작은 내성적인 소년의 성장통에 관한 영화다.
어촌의 작은 고등학교 수영부에서 유일하게 ‘아시아대회 출전급’ 실력을 갖춘 한수(온주완)는 어느 날 수영을 그만둔다. 그날, 그의 엄마가 인생이 허무하다며 자살 기도를 했다.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자란 고3짜리 아들에게 ‘미안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살충제를 마신 엄마는, 의식없는 육체로 병원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삶의 동인을 잃은 듯한 한수에게 두 여자가 나타난다. 옆집에 이사
강추! 부산영화제의 한국영화 7편 [4]
-
‘믿거나 말거나’식의 유쾌한 3색 범벅
박성훈 감독의 <썬데이 서울>
<썬데이 서울>은 가십 기사와 반나체 사진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잡지다. 그러나 그 세대에 속하는 69년생 박성훈 감독은 <썬데이 서울>을 신문기자들이 놓치고 지나간 사건의 이면을 취재하여 재미있는 르포 기사도 썼던 잡지로 기억하고 있다. 도색영화로 오인받을지도 모르지만, 그 제목을 선택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사기꾼과 양아치 기질이 농후한 두 청년이 목격한 세개의 사건으로 이루어진 영화 <썬데이 서울>은 평범한 척 시치미 떼고 시작하여 허풍인지 진담인지 헷갈리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첫 번째 이야기는 패기없고 나약한 고등학생 도연(봉태규)의 성장담이다. 학급 짱에게 수모를 당하며 살던 도연은 열여덟살 생일을 맞이하면서 몸에 털이 나고 닭고기를 탐하는 이상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충격에 빠진 도연에게 부모는 우리 가족이 사실은 늑대인간이며, 동족하고만 짝짓기를
강추! 부산영화제의 한국영화 7편 [3]
-
낯선 도시, 세 남녀의 아픔과 체념은 계속되고
이윤기 감독의 <러브토크>
<러브토크>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아시아 신인작가상’(뉴커런츠상)을 받은 <여자, 정혜>의 이윤기 감독의 두 번째 선물이다. <여자, 정혜>의 주인공이 상처와 고독 사이의 긴 통로를 떠다니는 내면의 풍경이었다면, <러브토크>는 피할 수 없는 체념에 익사할 듯한 사랑을 추가했다. 대신 형상이 뚜렷했던 상처가 어슴푸레한 기운의 기억으로 바뀌었다. 사랑은 관계의 배치이니 인물이 늘었다. LA에서 화려함과 퇴폐가 공존하는 마사지 테라피 숍을 운영하는 써니(배종옥), 뚜렷한 목적없이 타인의 도시로 건너와 써니의 아래층에 유령처럼 사는 지석(박희순), 지석이 붙잡지 못한 사랑의 대상으로 유학과 라디오 상담 프로그램 ‘러브토크’의 진행을 병행하는 영신(박진희). 써니가 영신의 ‘러브토크’에 머뭇거리며 접속을 시도하면서 세명의 관계는 고리처럼 묶여 돌
강추! 부산영화제의 한국영화 7편 [2]
-
세상의 모든 프로그래머와 관객은 자국영화가 빛을 발하기를 간절히 바랄 것이다. 10주년을 맞이한 올해 부산영화제는 어떨까. 프로그래머와 관객이 꿈꾸는 바람, 한국영화의 새로운 재능을 발견할 수 있는 장으로 화할 수 있을까. 다행히도 올해 <씨네21>이 ‘발견’한 한국영화들은 어느 때보다 풍요롭다. 특히 ‘새로운 물결’ 부문의 작품은 한국 영화계가 마르지 않는 우물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듯 든든한 행보를 보여준다. <썬데이 서울>은 상업과 예술의 경계를 벗어난 키치적 감수성의 탈(脫)장르 오락영화이며, <용서받지 못한 자>는 휴가 나온 병사의 현재와 과거를 하나의 올무로 엮어 한국 남성의 원죄의식을 폭로하는 놀라운 데뷔작이다. 내성적인 고교 수영선수의 성장을 그린 <피터팬의 공식>은 10대영화의 상투성을 비웃듯 잔인한 성인식의 진실을 관객에게 던져준다. ‘한국영화 파노라마’ 부문의 세 작품 역시 주목할 만하다. <여자, 정혜>의 이윤기
강추! 부산영화제의 한국영화 7편 [1]
-
아시아영화는 지금 세계영화의 중심에 서 있다. 아시아영화에 대한 관심도 날로 커지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당연한 질문들을 떠안는다. 아시아영화의 현재는 과연 어떤 모습인가? 그 안에 속해 있는 한국영화는 또 어디쯤 있는 것인가? 도대체 어떤 영화적 토양과 인재들이 지금 아시아영화의 부흥을 가져온 것인가? 세세하게, 그러나 쉽게 그 진원과 방향을 가늠해볼 수는 없을까? <아시아영화기행>의 출발점은 바로 여기다. <아시아영화기행>의 기획과 제작을 총지휘한 인디컴 시네마의 김태영 대표는 “아시아영화가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데, 왜 그런지 그 원인을 추적해보고, 그 과정에서 한국영화도 재점검하려고 했다. 한국영화가 좀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국가들이 어떤 준비를 하고, 또 어떤 생각으로 영화를 육성하는지, 각 상황을 취재해보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취지에서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란에서 중앙아시아, 뉴질랜드를 거쳐 한국까지
<아시아영화기행>은 인디컴
아시아 영화 기행: 총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