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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밀크>는 여성영화다. 지난 2월15일 기자시사회 후 만난 레베카 렌키비츠 감독은 주인공, 제작자, 감독이 대부분 여성이라며 영화 출연진과 제작진을 여성 전사 아마조네스에 비유했다. 렌키비츠 감독에 의하면 모유를 상징하는 제목 <핫밀크>는 낯선 상황을 상징한다. 알 수 없는 병으로 휠체어에 의지하는 로즈와 시중을 드는 딸 소피아는 어느 스페인 해안 도시에서 치료와 휴양 중이다. 로즈는 특별 클리닉에서 고메즈 박사와 상담하며 자신의 과거 트라우마와 마주하고, 소피아는 해변에서 우연히 알게 된 잉그리드와 가까워진다. 오랫동안 쌓여온 소피아의 분노와 좌절이 뜨거운 태양 아래 들끓으며 폭발하는 과정을 카메라는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따라간다. 현지 언론의 호평도 잇따랐다. 독일 공영방송 <에르베베>는 “렌키비츠는 날카로운 칼 같은 단순한 문장을 영혼에 새기고 이 여성들의 내밀한 속내를 펼쳐 보여준다”고 평했다. 렌키비츠는 극작자로 활동하다가 영화 <이다
[인터뷰] 상처를 딛고 일어나는 순간에 관하여, <핫밀크> 레베카 렌키비츠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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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초반에 공개돼 자주 회자된 <드림스>는 감독의 전작 <메모리>에 싹튼 미세한 온기마저 가차 없이 짓밟는다. 멕시코인 발레리노와 미국인 여성 사업가가 국경을 횡단하며 거칠게 사랑하는 동안, <드림스>는 이들의 관계가 정열로 불타올랐다가 마침내 차디찬 폭력으로 돌변하는 양태를 잠자코 바라본다. 무서우리만치 건조히 관음하는 미셸 프랑코의 카메라는 돌아온 트럼프 미 대통령이 내건 반이민자 정책의 핏빛 그림자까지 (의도치 않게) 시의적으로 흡수했다. “‘멕시코는 신과는 멀고 국가와는 가깝다’는 말처럼 미국과의 긴밀한 긴장 관계는 그저 일상이다.” 현재 두 나라 사이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하위텍스트가 선명한 우화인 동시에 <드림스>는 부유한 특권층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사랑 이야기, 그리고 “친밀한 관계 내에 잠재한 모든 종류의 힘의 불균형이 지닌 독성”에 관한 이야기다. 자선 프로젝트를 전개하는 재단 운영자인 제니퍼(제시
[인터뷰] 이곳에는 사랑이 없다, <드림스> 미셸 프랑코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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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의 일에서 손을 놓아야 할 때” (이혜영)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노쇠한 몸에 신음하는 64살의 킬러 조각(이혜영)에겐 여전한 사명과 과거의 추억이 생의 연료로써 은밀히 작동 중이다. 배우 이혜영은 <파과>에서 단순히 베테랑 킬러의 ‘멋’을 옮기는 존재가 아니다. 은막의 스타로서 아우라를 간직한 이 배우는 겉보기에 시든 삶에 깃들어 있는 복잡한 생명력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동안 육체적으로는 부상을 입고, 정서적으로는 동시대가 고전적 의미로서 배우에 부과하는 위기감과 정면으로 맞섰다. 그가 하명중 감독의 <땡볕> 이후 약 40년 만에 <파과>로 베를린국제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았다. <파과>가 남긴 탈색한 금빛 머리로 베를린에 등장한 이혜영에게서 문득 이 도시가 그토록 사랑한 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영광이 비쳤다.
- 액션 누아르의 몸 안에 멜로드라마의 정서를 강하게 품은 영화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어떤 점이 와닿았나.
감정의
[인터뷰] 감정과 기술 사이, <파과> 배우 이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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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번째 수정고에 이르러서야 <파과>는 마침내 빛으로 나아갔다. 코로나19 팬데믹을 마주한 60대 여성 킬러 서사는 구병모 작가의 소설 원작을 출발지 삼아 긴 창작의 여정을 거쳐야만 했다. 인고 끝에 완성된 이 영화가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준 첫인상은 중층의 누아르로서 지닌 매력이었다. 원작보다 액션이 강조된 장르적 완성도에 더해, 기억으로 침잠하는 인물의 멜랑콜리가 편집의 기조와 절묘히 만났다. 독일의 영웅 서사 <니벨룽의 노래>가 묘사하는 ‘인간적 약점’을 조각(이혜영)의 그것에 대입한 민규동 감독은 냉철한 표정을 지닌 킬러의 손톱 밑에서 아프게 까끌거리는 삶의 가시가 <파과>의 진면모라고 바라본다.
- 액션과 감정을 모두 심도 있게 소화할 60대 여성 페르소나가 필요한 작업이다. 캐스팅 과정도 만만치 않았겠다. 이혜영 배우를 만나기까지의 과정은 어땠나.
처음 소설을 읽었을 때 나는 틸다 스윈턴이 떠올랐다. 그래서 봉준호 감독님에게 소설을
[인터뷰] 상실과 회복의 누아르, <파과> 민규동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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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징 스타 배우들에게 세 가지 공통 질문을 던졌다. 애착 아이템을 진지하게 추천하거나 롤모델에 대한 애정을 절절히 고백하는 눈빛에 기자들이 웃고 울었다는 후문. 은근히 성격과 취향이 보이는 이들의 답변을 한데 모았다.
1. 갖고 싶은 초능력
2. 나의 촬영장 필수 아이템
3. 작업해보고 싶은 감독, 배우
김지안
1. 시간을 조종하는 능력! 시간을 멈출 수도 있고, 과거로 돌릴 수도 있고, 미래로 갈 수도 있는 가장 실용적이고 유용한 초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시험 기간이 일주일밖에 안 남았을 때 벼락치기를 할 수도 있고, 아침에 늦잠을 잤을 때 필요한 시간을 더 만들 수도 있으니까. (웃음) 만약 미래로 가서 어른이 된 내 모습을 본다면 지금의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 있기를.
2. 무선 이어폰을 꼭 챙긴다. 연기를 하기 전에 미리 감정선을 다스리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서 플레이리스트에 담아둔 우울한 가사의 곡을 듣기도 하고, 필요할 땐
라이징 스타 6인의 3문3답, 제가 가지고 싶은 초능력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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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실용댄스대회 우수상(10살), 대한민국청소년영화제 연기 우수상과 전국학생음악콩쿠르 성악부문 특상(11살), 뮤지컬 <보니 앤 클라이드><프랑켄슈타인> <킹키부츠> 초연 무대의 아역까지(12~13살). 진작 장래희망을 배우로 확정할 법한 경력이지만 놀랍게도 어린이 최민영의 꿈은 축구선수였다. 그러다 중학교 진학을 앞둔 어느 겨울. 최민영은 TV에서 노래하는 한 가수를 본 후 불현듯 “그게 어떤 곳이든 조명 아래 서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확고한 꿈을 가졌다. 변성기 이후 뮤지컬 무대에서 TV드라마로 자연스럽게 활동 영역을 옮긴 최민영은 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 <미스터 션샤인> 등에서 남성배우들의 아역으로 분했고, 예술고등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해 극 연기를 배웠다. “재학 당시 희곡 <오장군의 발톱>을 통해 처음 연극을 접했다. 뮤지컬을 시작으로 드라마, 연극, 영화를 순서대로 경험하니 어느 것 하나 빠뜨릴 수 없이
[인터뷰] 주체성을 가지고, 사력을 다해, 최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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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임한다. 많은 분들이 지금의 내 나이가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때라고 말하지만 나는 30대, 40대가 되어서도 늘 청춘이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싶다. 그래서 각각의 나이대에 할 수 있는 역할을 놓치고 싶지 않다.” 진호은은 연기에 관해 이야기할 때만큼은 유독 단호해졌다. 스크린을 통해 보여준 해사한 인상의 중심에 이렇게나 단단한 배우로서의 심지가 깃들어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순간이었다. 넷플릭스 시리즈 <지금 우리 학교는>의 양궁부 민재, <3인칭 복수>의 중경, <백일장 키드의 사랑>의 형도 등 진호은은 주로 교복 입은 앳된 학생으로서 시청자들과 마주했다. 여러 인터뷰를 통해 “청춘물을 하고 싶다”고 밝혀온 그의 바람과 맞닿은 궤적이기도 하다. 지난해 공개된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도 청춘물의 테두리 안에서 논할 수 있는 작품이지만, 규호를 통해 진호은이 보여준 간절한 사랑의 언어는 남달랐다. 극 중 규
[인터뷰] 연기를 중심으로, 아주 먼 곳까지, 진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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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한 말씨와 말간 미소. 색깔을 빌려보자면 장규리는 단연 투명에 가깝다. 어떤 것에도 쉽게 물들지 않지만, 또 쉽게 변모할 수 있는 것이 마치 장규리 같다. 무거운 극 중 분위기를 화사하게 전환시키는 <지금 거신 전화는>의 나유리는 산뜻한 톤 앤드 매너만큼이나 아나운서라는 전문직을 잘 드러내는 게 중요한 미션이었다. “내향형인 내가 외향형의 유리를 표현하기 위해 주변 친구들의 모습을 많이 관찰했다. 특히 츄의 명랑한 모습에서 많은 힌트를 얻었다. 이외에도 유리의 프로페셔널한 포인트를 잘 내세우고 싶었다. 그때 드라마팀에서 MBC 정다희 아나운서를 연결해주었다. 여러 차례 수업을 통해 유리가 지닌 직업적 면모를 체득하려 했다. 하지만 단기간에 커버하는 게 쉽지 않아서 그 자리에서 정다희 아나운서님에게 연락처를 물어봤다. (웃음) 그 뒤로 음성파일을 주고받으며 섬세한 피드백을 들었다. 번거로운 일인데도 정다희 아나운서님이 따뜻하게 답해주셨다.” 주어진 과업 속에서 자신이 할
[인터뷰] 맑고 투명한 자리가 남기는 빛, 장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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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를 시작한 이래 오예주는 자신에게 놀라고 있다. 평상시 꽤 차분한 성격에 낼 수 있는 에너지 레벨이 늘 중간급이라고 생각해왔지만 극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다른 사람이 된다. <KBS 드라마 스페셜 2024-발바닥이 뜨거워서>에서 그가 맡은 하늘은 혼자 돌봐온 아픈 언니에게 그간 쌓인 감정을 터뜨려야 하는 주인공이었다. 언니의 열리지 않는 방문 앞에서 참다못해 울부짖을 때 엄청난 쾌감을 느꼈다. “살면서 그렇게까지 소리 질러본 적이 없었고 그게 가능할 거라고도 생각 못했다. 묵혔던 것들이 다 쓸려 나간다는 느낌이 이런 건가 싶었다.” <사랑은 외다무다리에서>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성인까지를 처음으로 연이어 연기했다. 10대 윤지원과 사회 초년생 윤지원에 극명한 차이를 두어야겠다고 자신도 모르게 직감했다. 대본을 읽었을 때부터 “직장 내의 배신과 부모의 죽음까지 한꺼번에 겪은 인물의 삶은 그 전과 후로 나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캐릭터의 아픔을 먼저 들여다볼
[인터뷰] 새로운 내가 데려갈 미래, 오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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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표는 신재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문장부호다. 그는 감독에게 질문하는 걸 어려워하지 않는다. 현장에서 동료 배우들과 아이디어를 맞추는 일도, 주변 친구들과 피드백을 주고받는 것도 즐긴다. 타고난 자신감인가 싶지만 “내 연기가 항상 부족하다고 느끼니까 무모할 정도로 묻는다”라는 답변에서 겸손이 읽힌다. “일하는 자신에게 특히 엄격한 편”이라 스스로에겐 화살 같은 질문을 던진다. 찔려서 상처 입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성장한다고 믿는 쪽이다. <검은 수녀들>의 애동은 더 많은 물음표를 품을 수밖에 없는 캐릭터였다. 그동안 <무빙>의 방기수, <지금 우리 학교는>의 박창훈, <링크: 먹고 사랑하라, 죽이게>의 이진근 등 주로 “악역으로 알려지면서 생긴 어떤 인식을 지우는 데 혈안에 돼 있던 차에 만난 선인 역할”이라 잘해내고 싶었다. 말마따나 애동은 부마자인 소년 희준(문우진)을 구하겠다는 수녀들의 질주 중간에 투입되는 조력자였다. 그렇지만 “말
[인터뷰] 묻고 또 물으며, 신재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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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묘>의 고등학생 무당 자혜로 그 얼굴과 연기력을 대중에게 각인한 김지안 배우의 실제 성정은 우리가 봤던 자혜의 모습과 다소 반대다. 평소 “평화롭고 차분한” 곳에 있기를 좋아한다는 김지안 배우는 단어 한마디 한마디를 곱씹으며 말하고, 당돌하기보다는 쑥스러움 가득한 몸짓과 언어로 상대방을 지그시 관찰하는 편이다. <세자매>에서 문소리 배우의 아역 미연 역을 연기하며 보여준 내면의 깊은 아픔, <선산>에서 김현주 배우의 아역인 서하 역을 맡으며 드러낸 진중한 감정선은 고등학교 2학년이지만 어느덧 연기 구력 10년을 넘어선 김지안의 내재적인 관록을 입증한 바 있다.
한창 학업과 연기 활동을 병행 중인 김지안에게 학교는 연기의 배움터이기도 하다. 중학생 시절엔 “2년쯤 교내 상담소에서 활동하며 다른 학생들의 고민을 듣고 함께 이야기하고 손 편지로 답”하면서 직접 겪지 못했던 다양한 사람들의 성장 배경이나 개인 사연을 추체험했다. “책을 읽거나 다른 매
[인터뷰] 평화롭고 단단하게, 김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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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3부작과 <보이후드>에 이어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이번에는 브로드웨이의 시간에 영화의 그물 망을 놓는다. 뮤지컬 <오클라호마!>의 초연을 앞둔 단 하룻밤에 초점을 맞추는 신작 <블루 문>은 영광의 끝자락을 만끽 중인 브로드웨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조명하는 동시에 스크린에 실시간의 생기를 불어 넣는 링클레이터의 지혜가 집약된 수작이다. 그의 오랜 동반자인 배우 에단 호크가 <마이 퍼니 발렌타인 > <블루 문> 등을 쓰고 미국 뮤지컬의 황금기를 빛낸 작사가 로렌츠 하트의 천재성과 고독, 좌절된 사랑의 번민을 옮긴다. 하트와 함께 전설적 작사·작곡가 콤비로 이름 날린 리처드 로저스 역의 앤드루 스콧은 <블루 문>으로 올해 은곰상(조연배우상)도 수상했다. 애처로운 주인공만큼 얄미운 조연에게도 상패를 내어줄 만큼 <블루 문>의 품은 넉넉하고 따뜻했다. 올해 베를리날레에 참석한 그 누구라도 어루만져주
[인터뷰] 에단 호크와 나, <블루 문>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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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부터 두번을 넘어졌다. 도착 직전, 프레스 메일에는 “2월 베를린의 불친절한 날씨를 주의하세요”라는 알림이 있었고 퍽 친절한 말투로 들렸으나 현실은 냉정했다. 영화제를 다년간 찾은 다수의 베테랑 기자들이 ‘역대 베를리날레 중 가장 춥고 가장 눈이 많이 온 해’라고 한 말은 폐막쯤 이르러서야 기정사실로 판별됐다. 얼어붙고 위험천만한 것은 날씨만이 아니었다. 영화제 폐막일에 총선을 앞둔 베를린은 극우 정당인 독일대안당(AfD)의 돌풍을 지켜보며 깊은 우려에 잠겨 있었다. 차선책인 보수 기독민주당(기민련, CDU·CSU 연합)에서 차기 총리로 유력한 메르츠조차 트럼프 닮은꼴로 불리며 반이민자법으로 극우층에 손짓하는 형국이니 사태를 알 만했다. 영화제 셋째 날 즈음에는 <스크린 데일리>가 외면받고 트럼프와 젤렌스키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인쇄된 독일 일간지들이 더 많은 영화기자들의 선택을 받았다. 눈보라를 뚫고 프레스 오피스 로비에서 만난 통신원의 말이 사뭇 달리 들렸다. “
디스토피아? 유토피아! 김소미 기자의 제75회 베를리날레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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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황금곰상(평생공로상)을 수상한 틸다 스윈턴의 표현대로 영화는, 그리고 영화제는 모두에게 “주소도 없고, 비자도 필요하지 않은 위대한 독립국가이자 인생의 학교”다. 신임 집행위원장 트리샤 터틀의 임기 첫해로 할리우드 스타들을 동원해 화려하게 문을 연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는 익숙한 거장들의 이름에 의존하지 않은 수상 결과로 마지막까지 쇄신의 의지를 내비쳤다. 공식 취재로는 베를리날레를 아주 오랜만에 찾은 <씨네21>도 새로운 눈으로 이곳을 살폈다. 9일간 베를린에 머문 김소미 기자의 베를리날레 에세이와 감독, 배우 5인의 인터뷰를 전한다.
*이어지는 기사에서 베를린국제영화제 기획이 계속됩니다.
제75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마주친 이야기, 그리고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