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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O>가 처음으로 10대 청소년을 다룬 드라마를 기획하면서 시리즈 제작 경험이 전무했던 A24에 손을 내밀었다. 누구도 시도한 적 없는 방식으로 영어덜트 콘텐츠 타깃을 공략할 목적이었다. 밀레니엄 이후 태어난 이른바 젠지 세대(1997년부터 2012년 출생)의 혼란스러운 일상을 다룬 <유포리아>는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폭력과 섹스, 마약 묘사에 거침이 없다. 가족, 친구, 정체성으로 인한 혼란과 내재된 트라우마를 온몸으로 견뎌내야 하는 아이들은 현실도피 수단으로 마약과 섹스에 탐닉한다.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탐닉이란 단어가 과연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옳은 건지 고민의 장을 열어젖히겠다는 듯이 시즌 첫화부터 시각적인 충격을 선사한다.
막장 범죄드라마처럼 소개했지만 최근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어떤 작품에서도 이렇게 진지하게 젠지 세대의 갈등과 고민을 다루지 못했다. 부모 집에 처박혀 사회로 나오지 못한다는 조롱을 듣고 있는 이 아이들은 별다른 안전망
[특집] 트라우마와 첫경험 사이, <유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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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펭귄>의 시작은 <더 배트맨>(2022)의 결말 시점 일주일 후다. 고담시의 마피아 보스 르미네 팔코네(마크 스트롱)는 리들러(폴 다노)에게 살해되고, 팔코네 가문의 수하 ‘펭귄’ 오즈 코블팟(콜린 패럴)은 혼란을 틈타 고담시의 일인자가 되려 한다. 한편 팔코네 가문의 장녀 소피아(크리스틴 밀리오티) 또한 왕좌를 노린다. <더 펭귄>은 두 안티히어로가 각자의 생존을 위해 악에 악을 거듭하는 범죄 스릴러다. 오즈와 소피아의 입체성을 살리기 위해 <더 펭귄>은 한 에피소드에 플래시백을 통째로 할애해 두 캐릭터의 전사를 간곡히 풀어내는 결정도 불사한다. 화려한 음악과 촬영이 그 위에 얹히고, 배우들은 클로즈업의 독무대에서 보란 듯이 열연한다. 게다가 <대부> <스카페이스>가 보여준 마피아 조직간의 합종연횡이 오즈와 소피아를 통해 오마주에 가깝게 재현된다. 재미없기가 어려운 이 시리즈는 공개 나흘 만에 미국 내 530만
[특집] 미화 없는 악, <더 펭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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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팬데믹 위기로 인해 제작 현장이 폐쇄적으로 변하자, <HBO>는 오히려 이를 기회로 삼을 아이디어를 구상한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방역으로 제한된 촬영 환경을 적극 활용할 수 있다면 뭐든 만들어도 좋다는 제안을 받은 쇼러너 마이크 화이트는 특정 로케이션 촬영지 한 군데에서 찍을 수 있는 컨셉의 이야기를 고안, 5성급 리조트를 찾은 특권계층 사람들이 끔찍한 사건에 휘말리는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화이트 로투스란 이름의 글로벌 리조트 호텔 체인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화이트 로투스>는 동시대 드라마 중에서 가장 날카로운 세태 풍자 코미디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2021년 하와이 배경의 첫 시즌이 방영됐고, 곧장 시즌2 제작이 확정되어 이탈리아 휴양지에서 벌어진 두 번째 참극이 큰 사랑을 받았으며, 최근 종영한 시즌3는 태국으로 장소를 옮겨 진행된다. 모두 동일한 럭셔리 리조트 체인에서 사건이 벌어지기 때문에 휴양지를 찾는 부자 관광객들과 이들을 케어
[특집] 배우의 (재)발견, <화이트 로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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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 데드>를 떠올리고 <더 라스트 오브 어스> 시즌1을 감상한다면 다소 실망할 수도 있다. “아니, 얘가 이렇게 죽는다고?”라는 충격적 단말마를 연신 자아내며 좀비 디스토피아의 끝없는 절망과 자극적 충격을 선사한 <워킹 데드>류의 작품과 달리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그 속의 한 줄기 희망에 유장하게 집중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물론 작품의 설정과 배경은 꽤 잔혹하다. 곰팡이인 동충하초가 인간을 숙주 삼아 퍼지고, 숙주가 된 인간은 좀비처럼 변해 인간을 공격한다. 감염자에게 물린 인간은 곰팡이에 전염돼 인격을 잃고 감염자가 된다. 이에 세상은 순식간에 초토화됐으며 주인공 조엘(페드로 파스칼)은 가족을 잃고 피폐한 일상을 보낸다. 그러던 조엘의 앞에 나타난 이는 소녀 엘리(벨라 램지)다. 으레 좀비 디스토피아 장르의 전통적 ‘희망’의 역할을 지닌 엘리는 감염자에게 물려도 곰팡이에 전염되지 않는 항체의 보유자다. 이런저런 사건으로 인해 조엘
[특집] 그대들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더 라스트 오브 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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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 <HBO>는 어떻게 아성을 쌓았나.
응접실을 영화관으로 만들기. 홈 박스 오피스를 표방한 1972년 신생 케이블 네트워크 <HBO>는 영화 방영 중 중간광고를 없애는 신의 한수를 택했다. 일리가 있다. 영화관엔 상영 전 광고만 있을 뿐 중간광고가 없으니까. 사람들은 약간의 구독료만 더하면 극장에서 금방 막을 내린 영화를 집에서 광고 없이 바로 볼 수 있는 <HBO>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여기엔 운도 따랐다. 마침 1970년대는 미국 내 케이블TV 수요의 폭발적 증대가 이루어진 시기였기 때문이다. 1974년 5만명에 불과하던 케이블TV 이용자는 1978년 150만명으로 급증했고, <HBO>는 1977년부터 흑자를 기록했다. <HBO>의 광고 배제 전략은 영화의 2차 배급을 넘어 ‘영화 같은 시리즈’를 만들어낼 때에도 변동 없이 적용됐다. 그래서 <HBO>는 광고주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고, 광고의 외압을
[특집] 스타일의 핵심 - ‘영화 같은 시리즈’를 둘러싼 여러 전략들, 에 대한 4가지 FA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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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박스 오피스(Home Box Office). 유료 케이블 네트워크 <HBO>는 집에서도 영화관과 같은 경험을 선사하겠다는 포부를 안고 1972년 출발했다. 1975년 무하마드 알리와 조 프레이저의 경기 등 생생한 복싱 중계로 명성을 얻은 <HBO>는 이후 케이블TV가 미국 전역에 확산되자 콘텐츠 제작 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는 시사코미디쇼의 시조 격인 <뉴스는 아닐지도>(Not Necessarily the News), 시트콤 <래리 샌더스 쇼>와 <드림 온>이 수익을 냈다. 그리고 1990년대 후반, 모두가 아는 <HBO>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TV가 아니라 <HBO>입니다”라는 슬로건을 유행시키며 <섹스 앤 더 시티> <소프라노스> <왕좌의 게임> <석세션> 등 ‘영화 같은 시리즈’라 불리는 일련의 작품들이 등장했던
[특집] HBO 해부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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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AI에 따르면, 챗GPT 이미지 생성 기능이 업데이트된 후 1억3천만명이 7억개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특히 지브리풍 이미지를 생성하는 게 유행처럼 번져갔다. 자신의 얼굴을 지브리 그림체로 바꾸거나, 유명 장면을 애니메이션처럼 재현해 SNS에 공유하는 식이다. 그러자 비슷한 질문이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거 법적으로 문제없나요?”
결론부터 말하면 현행법으로는 문제 삼기 어렵다. 지브리 스타일은 법이 보호하는 대상이 아니다. 저작권법은 구체적인 ‘표현’을 보호하지만, 그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스타일’은 보호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하울’이나 ‘토토로’ 캐릭터를 그대로 베끼면 불법이지만, 지브리 느낌만 담긴 새로운 이미지는 불법이라고 보기 어렵다. 왜 스타일은 보호받지 못할까? 창작자 입장에서는 억울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법은 창작을 방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창작이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 스타일을 누구나 쓸 수 있도록 열어뒀다. 특정 스타일을 법으로 독점하는 순간 그 스타일
[기획] 지브리 그림체로 프로필 사진을 만들어도 문제없나요? - 저작권법은 화풍을 보호하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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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이니까 올려봅니다.” AI에 비판적인 초로의 인문학자의 프사(이하 프로필 사진)까지 지브리풍으로 바뀐 것을 보니 모골이 송연해진다. 지브리풍이 함의하는 평화와 선함, 자연과의 공존, 공동체 연대가 정말 갈급했나보다. 그러나 지브리풍으로 도배된 프사는 더이상 한 개인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아니다. 챗GPT가 만든 ‘지브리 스타일’(이하 지브리풍)의 ‘가상’(시뮬라크르)일 뿐이다.
오픈AI가 지난 3월25일 공개한 GTP-4o 이미지 생성 서비스 열풍은 2주가 넘어가는 지금도 여전하다.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는 출시 직후부터 거의 매일 SNS 서비스 X(옛 트위터)를 통해 “그래픽처리장치(GPU)는 녹고 있다”라거나 “제발 이미지 생성 서비스 이용을 조금만 쉬어달라. 1시간에 100만명이 가입했다”라며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올트먼은 지난 4월4일, 원래 계획보다 수개월 앞당겨 GPT-5 출시를 예고했다. 브래드 라이트캡 최고운영책임자(COO)도 같은 날 X에 “
[기획] 우리 시대의 무의식 - 지브리풍 챗GPT이미지 생성 열풍과 생각의 무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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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기술은 우리의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어, 상상하지 못했던 미래로 데려간다. 오픈AI가 GPT-4o를 업데이트하면서 세상이 온통 지브리 스타일로 도배 중이다. 원하는 이미지를 맞춤형으로 그려주는 기술 자체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중립적인 결과물이다. 예측할 수 없었던 건 왜 많고 많은 화풍 중 유독 ‘지브리’ 화풍이 (특히 한국에서) 대유행일까 하는, 사용 방식이다. (<데스노트>의 사신 류크의 대사를 빌린다면) “역시 인간은 재미있다”. 이 카오틱한 존재의 행보를 AI 따위가 따라오려면 한참 멀었다.
몇 가지 짐작 가능한 이유는 있다. 우선 ‘지브리’ 스타일은 아날로그의 끝자락에 있다. <바람이 분다>의 4초짜리 군중 장면을 만들기 위해 1년 3개월을 투자하는 비효율의 극치다. 아이러니하게도 대중은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도구를 활용하여 그것으로부터 제일 먼 결과물에 당도했다. 그 거리가 멀수록 신기하고 매력적이므로. 여기엔 아날로그적인 수작업의 결과물 중
[기획] “챗GPT야, 이 사진을 지브리풍으로 바꿔줘” 놀이는 왜 논쟁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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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레틱>은 스콧 벡, 브라이언 우즈 감독이 10여년간 머릿속에서 굴리며 애정을 키워온 영화라고 들었다. 작품과 연을 맺은 계기는.
기존 촬영감독을 대신해 스콧 벡, 브라이언 우즈 감독의 전작 <65>의 재촬영을 도운 적이 있다. 그때 두 감독을 알게 됐는데, 어느 날 <헤레틱> 시나리오를 전해주더라. 그 후 제작이 진전되지 않는 것 같더니 2023년 미국작가조합, 영화배우조합의 파업이 전화위복이 되었다. A24는 독립영화 제작·배급사라서 파업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아 작업에 속도를 낼 수 있었다.
- 종교와 믿음이라는 거대한 테마를 집 한채 안에서 다루는 실내극이다. 시나리오는 어떻게 읽었나.
너무 대사밖에 없더라! 지문도 거의 없어 도대체 어떻게 찍으라는 건지 의문이었다. 두 감독에게 “그냥 라디오 드라마로 만들지 그래? 팟캐스트에서 2시간 동안 읽고 끝내는 건 어때?”라고 농담도 했다. (웃음) 하지만 그런 텍스트도 다르게
[인터뷰] 영화적 어둠을 구현하는 정교한 과정에 대하여 - <헤레틱> 정정훈 촬영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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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레틱>은 이단자를 뜻하는 원제 <Heretic>을 그대로 음차한 제목이다. 영화의 등장인물은 두 소녀와 한 남자. ‘시스터’ 반스(소피 대처)와 팩스턴(클로이 이스트)은 기독교계에서 이단으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일명 모르몬교를 전도하기 위해 리드(휴 그랜트)의 집을 방문한다. 남자는 모르몬경은 물론이거니와 지상의 모든 종교 경전을 독파한 양 교리들간의 유사성을 꼬집으며 소녀들의 신앙을 조롱한다. 현대 종교는 서로 참조하며 분화한 상품에 지나지 않으니 당신들의 독실함 또한 무력하다고 꾸짖는다. 반스와 팩스턴은 배교를 부추기는 언설에서 나아가 감금까지 시도하는 리드에게서 도망치려 하고, 리드는 그런 두 사람을 두개의 문 앞에 데려다놓는다. 길 잃은 어린 양을 인도하려다 그 우리에 갇히고만 선교사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 반스는 뜻을 굽히지 않고 싶어 하지만 팩스턴은 타협을 탈출구로 여긴다.
[기획] A24의 독특한 공포영화 <헤레틱>을 즐기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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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레틱>은 보이는 것만 믿는 자와 보이지 않는 것도 믿는 자의 대결이다. 긴 말싸움과 잠깐의 몸싸움으로 공포를 조성하는 이 영화는 지난해 말 북미 개봉 후 A24 배급작 중 역대 7번째 흥행작이 되었다는 명성을 얻으며 <유전> <톡 투 미> 같은 화제작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콰이어트 플레이스> 시나리오작가이자 <65>를 쓰고 연출한 감독 콤비 스콧 벡과 브라이언 우즈는 오랫동안 제작을 고대해온 작품으로 이런 성과를 거뒀다. 그리고 그 과정을 함께한 촬영감독이 바로 정정훈이다.
말하지 말고 보여주라고들 한다. 하지만 말로 펼치는 난장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가 중요한 영화가 있다. <헤레틱>이 그렇다. 이 수다스러운 영화를 시각적으로도 충만하게 만든 장본인, 정정훈 촬영감독과 화상으로 나눈 대화를 리뷰에 덧붙인다. 다시 한번 리드의 저택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을 즐겨주시길.
*이어지는 글에서 공포영화 &l
[기획] 수다스러움에 속아 넘어가리니, A24의 독특한 공포영화 <헤레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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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대표하는 프리마돈나, 마리아 칼라스의 전기영화 <마리아>는 제81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돼 첫선을 보인 뒤 제82회 골든글로브 시상식 여우주연상-드라마 장르 부문,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 촬영상 부문 후보로 언급됐다. 전기영화 전문 감독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파블로 라라인 감독은 마리아 칼라스의 예술적 성취와 비극으로 점철된 <마리아> 이전에도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의 삶을 그린 <재키>, 다이애나 스펜서 왕세자비가 주인공인 <스펜서>를 연출했다. <재키> <스펜서>를 거쳐 <마리아>로 이어지는 파블로 라라인의 여성영화 3부작에 관해 김소희 평론가가 면밀히 분석한 글을 전한다.
재클린 케네디와 다이애나 스펜서, 그리고 마리아 칼라스. 파블로 라라인은 시대를 상징하는 여성 아이콘의 이름을 영화를 통해 되새겨왔다. <재키>가 <스펜서>로 이어질 때 파블로 라라인의 욕
[기획] 내 죽음을 노래하리 - <마리아>와 파블로 라라인의 20세기 여성영화 3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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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년 만에 신작 <야당>과 함께 돌아왔다.
준비하던 작품이 있었는데 연이어 세편이 엎어지니 10년이 금방 가더라. 연출에 대한 바람은 늘 품고 있었다. 오랜만에 작품을 세상에 내놓고 나니 영화에 대한 열정과 연출에 대한 소중함이 더 깊게 와닿는다.
- 하이브미디어코프의 김원국 대표가 마약사범에 관한 기사를 보내준 게 시작점이 됐다고. 이후 상당히 살을 많이 붙인 듯한데 어떤 자료조사 과정을 거쳤나.
2021년 1월21일 즈음 김원국 대표님으로부터 기사를 건네받았다. 당시 마약에 관해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마약 수사대 형사들을 만나고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도 방문했다. 검찰에 관한 수사도 필요해 검사 출신 변호사들에게도 자문을 구했다. 그때 얻은 정보를 활용해 이야기를 만들었기 때문에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상황이 실제 있었던 일을 기반으로 한다.
- 마약의 위험성을 알리고 사회적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이 이 영화의 목표라고 밝힌 바 있다. 이러한 영
[인터뷰] 절대 휴대폰을 보지 못하게, <야당> 황병국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