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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시네마/ 슬로베니아/ 얀 치트코비치/ 2001년/ 68분/ 35mm 흑백파국으로 치닫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관계에 내재된 안타까움을 들여다보는 작품.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라는 헌사가 말하듯, 인간 실존에 대한 예리하고도 따뜻한 동정이 작품 전반에 유유히 흐른다. 예정된 날짜보다 하루 이른 퇴원. 재활치료를 하루 남기고 의사들의 파업으로 퇴원한 알코올중독자 이반은 조심스레 새로운 삶을 꾸릴 다짐을 한다.그러나 다음날 아침 아내의 부탁대로 빵과 우유를 사러 나간 이반은,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빵과 우유를 사서 집으로 향하는 길, 그 길엔 사소한, 그러나 나약한 그에겐 위해가 될 만한 많은 것들이 도사리고 있다. 슬로베니아에서 태어나 체코에서 영화공부를 한 신예감독 얀 치트코비치의 첫 장편영화.그는 이 작품으로 올해 베니스영화제 신인감독상을 받았다. 단선적 줄거리가 소박한 질감의 흑백화면 속에 담겨져 있는 이 작품은 이반이 사온 우유가
빵과 우유 Bread and Mi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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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영화의 창/ 일본/ 시오타 아키히코/ 2001년/ 92분/ 35mm고교생 남녀의 사도-마조히즘을 다룬 데뷔작 <월광의 속삭임>(1999)으로 주목받았던 시오타 아키히코의 신작. 아버지 없이 호스티스인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가는 등교거부 여학생 사치코의 이야기다. 아버지의 가출, 어머니의 자살기도, 학교 친구들의 무관심, 어머니 애인의 강간미수 등 사치코의 십년여 생은 고통으로 얼룩져 있다.초등학교 6학년 때 선생님과의 스캔들 역시 그녀를 따라다닌다. <해충>이 이 소녀를 그리는 방식은 일기쓰기, 편지쓰기, 혹은 사진찍기와 같다. 절제된 대사와 명상적인 이미지들, 그리고 갖가지 ‘텍스트’들로 불행한 한 소녀의 내면을 모자이크해나가는 것이다. 문자텍스트는 이 영화에서 검은 바탕의 자막화면으로 중간중간 삽입되는데, 여기에는 사치코가 쓰는 편지, 그녀가 읽는 책의 한 구절, 그녀가 다이어리에 적는 간밤의 꿈 내용,그리고 “다시 학교를 가기로 결정했다” 같은 마음의
해충 Harmful Ins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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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시네마/ 이탈리아, 벨기에, 영국, 슬로베니아/ 다니스 타노비치/ 2001년/ 98분감독의 말을 빌리면, “보스니아 내전을 최대한 정확히 담아낸” 영화. 올해 칸영화제에서 마켓 시사 뒤, “보스니아판 <공동경비구역 JSA>”라는 말이 돌았을 만큼 <…JSA>와 비슷한 구석이 있지만, <노맨스 랜드>는 전쟁의 속살을 파헤친 블랙코미디 느낌이 짙다. 때는 1993년. 포연이 자욱한 보스니아 전선에 보스니아 병사 치키와 세르비아 병사 니노가 양 진영 사이 고립된 장소에서 맞부딪친다.더욱이 그들 앞에는 부상당한 또 한 사람의 보스니아 병사 체라가 강력한 지뢰를 깔고 누워 있다. 보스니아-세르비아 양군은 UN에 지원을 요청하지만 UN 상부는 불개입을 결정한다. 한편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도 치키와 니노는 “전쟁은 너희들이 먼저 시작했어” 하고 말다툼을 벌인다.마침내 UN군과 방송사 취재팀과 상부가 한꺼번에 현장에 도착해 북새통을 이루지만, 지
노맨스 랜드 No Man’s 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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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시네마/ 우루과이/ 후앙 파블로 레벨라, 파블로 스톨/ 2001/ 92분
세상 어디든, 희망도 미래도 없는 젊음의 풍경은 다 비슷한 모양. 낯선 나라 우루과이에서 날아온 독립영화 는 별볼일 없는 청춘들의 자화상을 희미한 25와트 전구 불빛에 비유하고 있다. 일도 없고, 야망도 없고, 의지도 없는 세 친구가 있다.
초인종 누르고 달아나기 놀이를 하거나, 개똥 밟은 것이 길조인지 흉조인지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그들. 근무태만으로 실직 위기에 처했지만 개의치 않는 하비,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이탈리아어 과외 선생에게 몸이 달은 레체, 사람들 사이를 서성대다 포르노에 마음을 붙인 세바는 ‘따로 또 같이’ 희망 없는 오늘과 내일을 공유한다.
<천국보다 낯선>을 연상시키는 쿨한 흑백영화로, 유머와 재기가 넘치는 작품. 6년 동안 숙성시킨 이 프로젝트는 어렵사리 빛을 봤다. 휴버트 발스 펀드의 지원으로 16mm에서 35mm로 블로업하는 등 6천만원의 초저예산으로 제작했다.
25와트 25Wat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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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시네마/ 미국, 프랑스/ 미셸 공드리/ 2001년/ 96
인간의 본성은 자연에 가까운 것일까, 과학에 가까운 것일까. 여기, <존 말코비치되기>의 작가 찰리 카우프먼이 기발한 답을 제시하고 나섰다.
지상과 천상, 법정과 취조실을 오가는 오프닝은 ‘살인사건’이 벌어진 뒤의 상황으로, 이들의 회고와 진술로 그 내막이 밝혀진다. 과학자인 남자와 자연학자인 여자는 연인이었다. 그들은 자연 속에서 자라난 원시인을 발견하는데, 남자는 그를 실험실에 가둬 문명인으로 길들이려 하고, 여자는 그의 천성을 보호하자고 주장한다.
비욕과 롤링 스톤스의 뮤직비디오로 명성을 떨친 미셸 공드리의 장편 데뷔작으로, 패트리샤 아퀘트, 팀 로빈스 등 낯익은 얼굴들이 주연으로 참여했다.
휴먼 네이처 Human N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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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물결/ 일본/ 이치오 나오키/ 2000년/ 82
남편은 목욕중이던 아내가 욕조에 가라앉아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갑작스런 아내의 죽음에 놀란 남편은 아내의 시체를 두고 안절부절못하다 그대로 잠이 든다. 잠에서 깨어보니 아내가 멀쩡히 살아 있다. 남편은 아내가 분명히 죽었다고 믿고, 아내는
그날 일을 기억하지 못한 채 함께 생활하지만, 이들 사이에는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라디오 드라마와 희곡 작가로 활동해온 이치오 나오키의 장편 데뷔작으로, 시나리오 집필, 제작과 편집까지 직접 했다. 남편 역으로 <철남> <동경의 주먹> <총알발레>로 잘 알려진 감독 쓰카모토 신야가 출연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욕조에 빠져 익사하다 A Drowning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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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시네마/ 오스트리아, 독일/ 예시카 하우스너/ 2000년/ 80분
구부정한 어깨, 튀어나온 입, 불안한 눈동자의 리타는 별로 사랑스럽지 않은 소녀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가끔씩 돌출적인 행동을 보이는 그녀는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아웃사이더다.
욕구불만인 리타는 섹스 파트너를 찾아보기도 하지만, 누구와도 어울리는 짝이 못 된다. 일상으로 돌아온 리타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가족과 결별한다.
신예 예시카 하우스너는 가족과 학교, 사회에서 벗어나려는 한 십대 소녀의 위험한 선택에 별다른 판단이나 감정을 개입하지 않고 냉정히 관조한다. <퍼니 게임> <피아니스트>의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제자답게 과격하고 충격적인 화법을 취하고 있다.
사랑스런 리타 Lovely Ri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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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영화의 창/ 일본/ 유키사다 이사오/ 2001년/ 122분
재일교포 3세 작가 가네시로 가즈키의 나오키상 수상작이자 베스트셀러였던 소설 를 영화화한 작품. 원작소설이 쿨하게 포착한 재일교포 3세 소년의 정체성문제를 영상으로 고스란히 복원했다. 스기하라는 조선 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고교에 진학한 재일교포 3세 소년. 국적도 조선에서 한국으로 바꾸었다.
어느날 스기하라는 친구의 생일파티에서 일본인 소녀를 만나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엔 ‘국적’이라는 경계선이 가로놓여 있다. 얼핏 발랄한 소년 소녀의 연애담 형식을 띠고 있지만, 민족의 정체성과 이데올로기 등 묵직한 주제가 조밀하고 촘촘하게 녹아 있다.
고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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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물결/ 인도/ 디그비자이 싱/ 2001년/ 101분
아직도 인도사회에는 야만적인 인습들이 많이 남아 있다. <마야>는 그러한 관습 중 하나인 ‘성인식’에 대한 영화. 12살 소녀 마야는 사촌동생 산자이의 집에서 살고 있다. 어느날 마야는 초경을 하게 되고, 어른들은 “마야가 어른이 되었다”고 말하며 그녀를 친부모집으로 데려가 성인식을 준비한다.
그 의식은 일반적인 축하행사가 아니라 상상을 초월할 만큼 충격적인 통과의례. 인도의 신인감독 디그비자이 싱은 아름다운 풍광과 잔잔한 드라마로 여성들의 몸과 마음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는 야만적인 관습을 고발한다. 성인식장면에서도 <마야>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 더욱 진한 슬픔과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마야 Ma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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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물결/ 중국/ 주웬/ 2001년/ 90분
제1회 부산영화제 뉴커런츠상 수상작인 장밍 감독의 <무산의 비구름>, 중국 6세대의 대표주자인 장위엔 감독의 시나리오를 썼던 주웬의 감독 데뷔작.
매춘부 샤오메이는 희망없는 삶을 접고자 휴양도시 베이더허를 찾아온다. 호텔에서 우연히 얼굴을 본 남자가 그녀의 방에서 자살하고, 그 사건 때문에 지역 경찰 덩은 그녀를 찾아온다. 덩은 그녀가 도시를 찾아온 이유도 알아내고 자살하지 말라면서 그녀를 강간하는가 하면, 일자리를 제안하기도 한다.
삶에 질긴 욕구를 지닌 경찰 덩과 죽음의 욕구를 가진 매춘부 샤오메이를 내세워 삶과 죽음, 착취와 피착취 등 대립을 짜나간 솜씨는 꽤 튼실하다.
위정훈·최수임·박은영
해선 Seaf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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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한국영화의 황금기는 신상옥이라는 거장의 등장 그리고 활약과 맥을 같이한다. 그간 김기영, 이두용 감독 등의 회고전을 열었던 부산영화제는 지난해부터 한국영화계의 거목 신상옥 감독의 회고전을 준비해왔고, 올해 그 오랜 숙원을 이루게 됐다. 신상옥 감독의 회고전을 통해 한국영화사를 재조명하고, 일반 관객에게, 젊은 관객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신상옥 감독의 작품세계를 다시금 열어 보여준다는 취지.잘 알려진 대로 신상옥 감독은 신필림을 설립해 다양하고 풍성한 작품을 양산했고, 예술적으로 또 산업적으로 전무후무한 한국영화의 중흥을 주도했다. 신상옥 감독은 최인규 감독 밑에서 조감독으로 생활한 뒤 1952년 <악야>로 연출 데뷔했고, 안양촬영소를 인수해 1966년에 한국 최대의 영화사인 신필림을 세워 1970년까지 운영했다. 박정희 정권과의 마찰로 인해 영화사 문을 닫게 됐고, 1978년에는 아내였던 여배우 최은희씨의 뒤를 이어 납북돼 8년 동안 북한의 영화와 연극 등을
한국영화 통사 제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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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시네마/ 프랑스/ 카트린 브레이야/ 2000년/ 95분한 젊은 여성의 성적 욕망과 모험을 그린 화제작 <로망스>의 감독 카트린 브레이야가 이번엔 성에 눈뜬 사춘기 소녀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댔다. 음식에 집착하는 뚱뚱한 소녀 아나이스에겐 인형처럼 예쁜 언니 일레나가 있다.섹스에 대한 둘의 생각도 판이하다. 아나이스는 섹스에서 자유로워져야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일레나는 첫 섹스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쪽이다. 휴양지에서 만난 이탈리아 청년은 언니 일레나를 유혹하고, 일레나는 자매의 침실에서 첫 섹스를 치른다.일레나가 사랑이라고 믿었던 그 관계가 갑작스런 파국을 맞으면서, 잔잔하고 무난한 성장영화인 듯 보이던 <팻 걸>은 <로망스>에 버금가는 충격적인 결론을 향해 치닫는다. “첫 섹스, 순결과 강간에 대한 영화, 사랑의 언어, 속삭임이 얼마나 거짓된 허상인가”를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연출의 변처럼, 성에 대한 다양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작
팻 걸 Fat 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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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시네마/ 프랑스/ 파트리스 셰로/ 2000년/ 119분올 베를린영화제 금곰상, 여우주연상 수상작. 아내와 아이들을 떠나보낸 남자 제이는 한 여성과 매주 수요일에 만나 한두 시간 동안 섹스를 나눈다.그러나 제이는 그 여성의 이름도, 나이도, 가족관계도,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몇번의 만남 이후 제이는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즉 소외된 관계의 사람들이 어떻게 ‘친밀감’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그러던 어느 수요일, 약속된 시간에 그녀가 나타나지 않자 그녀의 정체를 캐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이 클레어이며, 결혼을 했고, 아마추어 배우임을 알게 된다. 영국 소설가 하니프 쿠라이시의 단편소설 <나이트 라이프>를 각색한 영화.파트리스 셰로 감독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밟는 단계를 거꾸로 밟아가는 남과 여를 통해 사랑의 조건과 지속성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시작하기는 쉽지만 지속하기는 힘든 사랑을 앞세워 ‘소외’의 문제에 파고든다.주연배우 케리 폭
인티머시 Intim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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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슨 웰스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여배우”라 칭송하고, 프랑수아 트뤼포가 “모든 신을 마지막처럼 연기하는, 최고의 여배우”라는 헌사를 바친 그녀. 20세기 유럽영화를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여배우 잔 모로가 올 부산국제영화제의 손님으로 부산을 찾는다.잔 모로는 특히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들로부터 가장 열렬한 구애를 받았던 인물. 루이 말의 데뷔작 <사형대의 엘리베이터>(1958)로 주목받은 이래, 프랑수아 트뤼포,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오슨 웰스, 자크 드미, 루이스 브뉘엘, 조셉 로지, 토니 리처드슨 등과 작업하며, 지적이고 진보적인 ‘신여성’으로서의 이미지를 공고히 했다.에로틱한 묘사가 화제가 되고 자유연애를 부추긴다는 오해를 샀던 <연인들>, 한 남자의 연인으로 머무는 것이 과연 사랑이고 행복인지를 물었던 <줄 앤 짐> 등 잔 모로가 연기한 여성 캐릭터는 도덕이라는 이름을 가장한 세상의 편견 앞에 당당한 모습들이다. 자신의 분신들과 함께
누벨바그의 영원한 뮤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