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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하면 여장을 한 남자배우라는 루머까지 떠돌았을까.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에서 먹먹한 귀로 운동장을 달리던 육상부원 시은의 질주는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체육복 아래 가는 몸에서 유독 도드라진 어깨 골격과 우윳빛 대리석 같은 광대뼈가 그려낸 것은 미소년이되 미소년 아닌 기묘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리고 데뷔작에서 서늘한 눈빛을 제 것으로 만든 이영진이 두 번째 영화를 고른 기준은 무조건 ‘여고괴담 정반대’였다. “보이시한 건 일단 제쳤어요.” 한 가지 얼굴로 굳어지는 게 가장 두려웠다는 이 루키 배우는, 그렇게 <아프리카>의 ‘진아’를 선택했다.
진아가 되기 위해 이영진은 훌쩍 나이를 먹어야 했다. 79에서 81년생, 고만고만한 나머지 배우들이 또래를 연기하는 반면 진아 역만 20대 중반으로 설정되어 있는데다 남자에게 이용당하고 버려진 과거의 소유자이기도 하기 때문. 우연히 굴러들어온 권총 때문에 좌충우돌하는 네 여자들 사이에 지원(이요원 분)이 타고
`둔녀`의 불면의 밤, <아프리카>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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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튬 드라마 두편의 여주인공이 나란히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던 지난 1999년.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기네스 팰트로가 판정승을 거뒀지만, 진정한 트로피의 임자는 <엘리자베스>의 케이트 블란쳇이라는 주장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푸른 숲과 황금빛 햇살을 닮은 소녀에서 밀랍인형처럼 창백하고 근엄한 군주로 거듭나는, 진폭 큰 변신에 성공한 그녀에게, 관객이 특히 평단이 열광했다. 그러나 케이트 블란쳇 자신은 덤덤했다. 최고의 여배우라는 할리우드의 찬사를 뒤로 하고, 그녀가 달려간 곳은 연극무대. 영화제가 사랑한 배우라는 프리미엄을 포기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고, 사람들은 경고했지만, 그녀는 단호했다. “Shut up!” 이 한마디를 남기고 표표히 사라졌다는 후문.
누구는 그녀에게서 젊은 시절의 미아 패로를 떠올리고, 누구는 전성기 때의 메릴 스트립을 떠올린다. 그러나 케이트 블란쳇을 여느 배우에 비교하려는 시도는 무모하다. 창백하다 못해 투명한
창백한 여신, 케이트 블란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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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봐온 얼굴이라 해도, 이제 익숙해진 웃음이라 해도, 방심은 금물이다. 더구나 어디로 튈지 모를 전도연 앞에서는. 긴 생머리에 앞머리를 눈썹 위로 가지런히 잘라 모으고, 배꼽 위로 살짝 올라간 티셔츠와 검은 진의 캐주얼 복장으로 나타난 전도연은 또 달라 보였다. 전에 없이 짙어진 아이라이너로 그늘을 드리운 눈매까지, 어딘지 당돌해 보인다. “난 꼭 오색빛이야. 뽀사시한 조명으로 해주면 안 돼요?”라고 특유의 애교스런 목소리로 코에 주름을 지우며 웃기 전까지는. 그 화사한 웃음 사이사이에도, 고개를 비스듬히 누이고 웃음을 멈출 때마다 소녀 같고 누이 같던 친근한 청순함 대신 미묘한 도발의 생기가 튀어나온다. <해피엔드>에서 불륜의 사랑을 나누던 유부녀보다 한수 높은, 팜므파탈의 위험한 에너지 같은. 이 여자, 아무래도 사고 한건 치려나보다. 투견장의 돈가방을 두고 마초들과 한판 대결을 벌일 <피도 눈물도 없이>의 수진이다.
배우가 영화에 따라 달라지는 건 일
<피도 눈물도 없이>의 전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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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이 끝나고 후반작업중인 영화 <버스, 정류장>의 배우들과 몇몇 스탭들과 낯선 사람들까지 합류해 촬영을 하고 있다. 보충촬영인가? 어떤 장면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재촬영을 하는 건가? 그런데 감독이 다르다. 그럼 영화 <버스, 정류장>이 아닌 다른 영화인가? 그것도 아니다. 영화의 두 주인공인 재섭(김태우)과 소희(김민정)가 출연하고 특히나 소희의 교복을 보니 더욱 그렇다. 또한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까지 영하의 추위 속에서도 현장을 지키고 있으니 다른 영화는 분명 아니다. 그럼 뭘까?바로 영화 <버스, 정류장>의 뮤직비디오 촬영현장이다. 영화를 지휘하던 이미연 감독은 영화의 후반작업중이고 이곳 현장에는 “영화와는 다른 장면, 다른 상황에 놓인 두 주인공을 통해 영화 <버스, 정류장>만이 가지고 있는 정서적 울림을 감성적으로 전달하고자 한다”라며 이형곤, 김병서 공동감독이 뮤직비디오 촬영에 여념이 없다. 이 뮤직비디오는 본편에서 만들어내는 감
영화 <버스, 정류장>의 뮤직비디오 촬영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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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ory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태어난 그 순간부터, 잔 다라(수위니트 판자마와트)는 아버지 쿤 룽의 미움을 받으며 자란다. 그가 기댈 사람은 어머니 대신 그를 돌보기 위해 온 와드(비파치 차로엥푸라) 이모뿐. 아내를 잃고 관직도 그만둔 채 성적 욕망에만 탐닉하던 쿤 룽은 와드를 후처로 삼고, 옛 연인 분렁(종려시)을 불러들인다. 아버지의 방종한 욕망이 지배하는 집안에서 일찍 성에 눈뜬 잔은, 동급생에게 첫사랑을 느낄 무렵 새엄마 분렁을 통해 성애의 쾌락에 빠져든다.■ Review 타이영화로는 <방콕 데인저러스>에 이어 두번째로 한국에 소개되는 <잔다라>는, 1940년대 타이를 무대로 ‘남자의 일생’을 다룬 영화다. 어머니의 숨을 거두며 태어나, 아버지로부터 ‘저주받은’이란 뜻의 타이어 ‘잔라이’에서 이름을 얻은 아이 잔. 아내가 죽은 뒤 무절제한 쾌락의 규방으로 들어간 아버지 슬하에서, 그의 증오를 먹고 자란 아이의 성장사와 그에 겹쳐지는 성애의 견
[Review] 잔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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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ory 여대생 지원(이요원)과 배우 지망생 소현(김민선)은 고단한 일상을 뒤로 하고 훌쩍 여행을 떠나기로 의기투합한다. 소현의 남자친구에게서 빌린 고급 승용차를 몰고 강릉으로 가던 두 사람은 우연히 차 안에서 권총 두 자루를 발견하게 되고. 급기야 이 총 때문에 원치 않은 사건 속에 휘말리게 된다. 그 총은 바로 강력계 형사 김 반장과 조직의 중간 보스가 도박판에서 판돈 대신 잃은 권총으로, 두 사람은 총을 되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지원과 소현의 뒤를 쫓기 시작한다. 지원과 소현의 탈주 행각에 영미(조은지)와 진아(이영진)가 합세하게 되고 과연 여성 4인조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Review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레닌의 말이 아니더라도 물리적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힘센 자와 약한 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라는 기존의 파워관계에 일격을 가할 수 있는 총은 한바탕 소동을 불러일으키는 좋은 영화의 소재가 된다. 한 소심한 남자가 우연히 총을 얻게 된 뒤
[Review] 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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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ory 회사원 남우는 눈 내리는 겨울날, 고향 친구 준호의 연락을 받는다. 남우는 준호와 재회하고, 오랜만에 회포를 푼다. 남우는 그 자리에서 준호와 함께한 고향 바닷가 마을, 유년기의 추억에 잠긴다. 남우는 어부였던 아버지를 바다에 잃고, 할머니, 어머니와 살고 있었다. 조용하고 어두운 남우의 벗은 활달한 성격의 준호와 떠돌이 고양이 요. 맘 좋은 이웃집 아저씨가 어머니에게 연정을 품기 시작하고, 유일한 친구인 준호네가 서울로 이사가기로 하면서, 남우의 외로움은 깊어간다. 그러던 어느날, 신비로운 구슬을 손에 넣은 남우는 등대 속에서 환상의 세계를 만난다. 환상 속의 소녀 마리는 그렇게 남우 곁에 다가와 묘한 설렘을 심어놓는다.■ Review <혜화동>이라는 노래가 있었다. 어릴 적 넓게만 보이던 좁은 골목길에 다정한 내 친구 나를 반겨 달려 오는데, 하던 대목이 유난히 짠하게 가슴에 맺히던 노래. <마리이야기>는 <혜화동>의 그 노래말과
[Review] 마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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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ory 사창가의 깡패인 벙어리 한기(조재현)는 벤치에 앉아 남자친구를 기다리고 있던 여대생 선화(서원)를 보고 조심스레 다가가 옆자리에 앉아 보지만, 그녀로부터 싸늘하고 경멸적인 시선만을 받을 뿐이다. 한기는 남자친구를 만난 선화에게 달려들어 갑작스레 키스를 퍼붓다 지나던 군인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한다. 그는 모종의 계략을 꾸며 선화를 자신이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창가로 끌어들인다. 선화가 손님을 받는 창녀방 옆에 자리한 밀실에서 은밀하게 그녀가 몰락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한기는 점점 괴로워하게 된다. 한기의 부하 명수(최덕문)에게서 한기의 계략에 대해 알게 된 선화는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한 명수를 이용해 사창가를 탈출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긴다. ■ Review <수취인 불명>(2001)으로 비교적 고른 평가를 이끌어낸 김기덕은 좀더 사회적, 역사적인 공간 속으로 그의 캐릭터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안전한 행보를 계속 유지해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
[Review] 나쁜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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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ory 1945년 영국 채널 제도의 져지섬. 늘 안개로 덮인 외진 곳의 저택에 젊은 부인 그레이스(니콜 키드먼)가 희귀병을 앓고 있는 두 아이 앤, 니콜라스와 함께 살고 있다. 햇빛에 닿으면 물집이 생기고 목숨까지 위험한 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 때문에, 집안의 모든 창문에는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어느날 하인들이 모두 떠나버린 저택에 밀즈 부인 일행이 찾아오고, 그레이스는 전에 이 집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그들을 받아들인다. 그레이스는 꼭 지켜야 할 수칙을 알려준다. 방문을 열고 닫은 뒤 다른 문을 열기 전에 반드시 열쇠로 잠글 것, 등불 이외에는 다른 조명을 사용하지 말 것 등등. 그뒤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아무도 없는 이층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고,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피아노가 저절로 연주되기도 한다. 앤은 작은 남자아이와 무섭게 생긴 할머니를 보았다고 말한다. 그레이스는 믿으려 하지 않지만, 집안에서는 점점 더 기괴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어두운 저택 안으로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디 아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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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월트 디즈니`, `한국의 데츠카 오사무`라는 칭호를 붙일 수 있는 인물을 꼽아본다면? 60~70년대 <호피와 차돌바위>의 신동헌·신동우, <로버트 태권 브이>의 김청기 등이 먼저 떠오르지만 일가를 이루지는 못했다. 80년대 후반에 단편을 내놓은 이용배, 오성윤 등 서울무비 팀과, 시사만화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뛰어든 박재동 감독이 기대를 모으고 있지만 아직 장편 애니메이션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이성강(40) 감독은 아직은 아니지만, `한국의…'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유력한 후보중의 한명이다. 지난 99년 단편 <덤불속의 재>가 애니메이션의 칸영화제라고 할 수 있는 앙시 에니메이션 페스티벌 본선에 국내 최초로 진출했다. 오는 11일 개봉하는 그의 첫 장편 <마리 이야기>는 최소한 화면과 녹음, 일관성있고 안정된 이야기 방식이라는 면에서 만큼은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이성강 감독 `따뜻한 얘기 하고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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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달 6일 개막하는 제5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가 11일 개봉한다. 이미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관객을 만난(<한겨레> 지난해 11월 13일자 참고) 이 작품은, 첫눈에 반한 여대생(서원)을 `창녀`로 만드는 뒷골목 남자(조재현)의 비틀린 사랑을 다룬 작품이다.우연히 만난 여대생 선화에게 입을 맞추었다가 심한 모욕을 당한 한기는 선화를 함정에 빠뜨려 사창가의 창녀로 전락시킨다. 한기의 마음엔 선화에 대한 애증이 공존한다. 이 `나쁜 남자`는 잔혹한 수법으로 선화를 사창가에 얽어매 두지만, 어느 순간 “깡패가 무슨 사랑이야!”라고 절규하며 속내를 드러낸다. 사창가에서 벗어나려 안간힘 쓰던 선화는 한기가 그를 놓아주려 할 즈음, 그 또한 그에 대한 애증을 함께 느낀다. 둘은 과거의 사창가로 다시 돌아가지 못할 처지가 됐지만, 그렇다고 그때까지 살아온 방식에서 벗어나지도 못한다.`여대생`이던 선화가 이전의 삶을 체념하고 `창
<나쁜남자> `깡패가 무슨 사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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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마을에 사는 초등학생 남우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다. 식당을 하는 어머니, 할머니와 함께 사는 내성적인 남우의 절친한 친구는 같은 반 학생 준호다. 그러나 준호마저 서울로 전학을 가려 한다. 남우는 어느날 폐쇄된 등대 안에서 환상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구름처럼 생긴 큰 개와 몸이 흰 털로 뒤덮힌 소녀 마리를 만난다. 그뒤 몇차례 이 환상의 세계와 대면하고, 가까운 사람이 멀어져 가는 데 따른 안타까움에 비례해 마리에 대한 동경이 커진다. 그런 마음의 파고가 절정에 이를 때 마을에 폭풍우가 몰아친다. <마리 이야기>는 남우가 만난 환상의 세계를 한 축에 놓고,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상적 이야기를 대칭적으로 배열한다. 환상에서나 현실에서나 이렇다할 큰 사건은 없지만 두 세계의 병치는 성장기 소년의 내면을 섬세하게 짚어내는 역할을 한다. 소년에게 환상은 일종의 성장병인 동시에 성장의 진통을 달래주는 치료제이기도 하다. 어쩌면 환상 아닌 실재였을지도 모른다. 소년 말고 누가
<마리 이야기> 성장과정 그린 팬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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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와 야수> 새 버전 IMAX 영화관 개봉, 원작 변형 논란애니메이션으로는 유일하게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던 디즈니의 명작 <미녀와 야수>가 1월2일 새로운 편집으로 IMAX 영화관에 선보였다.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와 <ET> 등의 새 편집판이 지난해 개봉에서 거둔 성공을 뒤이으려는 이 새 버전은 애초에 영화가 디지털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큰 화면에서 되살아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손길을 거치며 변형된 원작에 대해서는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재생 작업을 거치면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원작에 없었던 6분짜리 노래 <Human Again%gt;이 더해졌다는 점이다. 야수의 성에 사는 마법에 걸린 주전자와 촛대 등 집안 집기들이 누추해진 성을 깨끗이 청소하면서 자신들이 주문에 걸리기 이전 사람이었을 때를 회상하면서 부르는 노래다. 이 노래는 1991년 작고한 이 영화의 작곡자 하워드 애시먼(<인어공
[LA통신] 커진 화면, 줄어든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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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방디 유니버설, 합병통해 메이저로 부상할 가능성 높아져 작가영화 제작에 적신호2001년은 프랑스영화 재생의 한해였다. 1986년까지 40%를 상회하다 이후 27%까지 떨어졌던 프랑스영화 시장점유율이 처음으로 다시 40%를 넘어섰고 1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모은 프랑스영화가 19편이나 됐다. 극장을 찾은 관객 수도 2000년에 비해 11%가 늘어났고 프랑스영화를 본 관객의 80% 이상이 만족감을 표시했다.지루하고 말 많은 영화로 소문나 외국시장에서 경쟁력이 없던 프랑스영화가 <아멜리에>를 선두로 미국시장에서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물론 축제 분위기 속에서 우려의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대성공을 거둔 영화들의 대부분이 프랑스영화 평균제작비인 1500만∼4천만프랑을 훨씬 넘어서는 블록버스터 오락영화인지라 중소규모 작가영화들의 제작여건은 더 악화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 또 프랑스 오락영화의 대성공에 밀려 외국의 작가영화들은 찬밥신세를 면치 못한 점을 들어 앞으로 이런 영화들의
[파리통신] 2001, 좋았던 마지막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