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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여편의 영화가 한데 모여 저마다 독특한 색깔을 자랑하는 영화제에서 옥석을 가려낸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 물론 관객의 반응이 뜨거웠거나 예술적 발자취를 깊이 남길 만한 작품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나머지 영화들이 관객으로부터 외면을 받았거나 예술적 가치가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여기에 소개하는 5편이 여타 영화들과 다른 점이라면, 단지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좀더 폭넓은 반응을 얻었다는 사실뿐이다.삶은 쉽게 바뀌지 않아<월요일 아침>감독 오타르 요셀리아니 출연 자크 비두, 아리고 모조 제작국 프랑스“나는 말로 나 자신을 표현하는 데 서툴다. 나는 영화감독이 되지 않았다 해도, 작가가 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것(말로 표현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언어다. 나의 혀는 내가 말하려는 모든 것을 만들어낼 만큼 내게 복종하지 않는다.”올해 베를린에서 최우수 감독상과 국제비평가협회상을 받은 그루지야 출신 오타르 요셀리아니 감독은 자신의 영화관에 대해
베를린에서 발견한 보석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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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지르기장거리 비행 도중에는 때때로 기내 모니터에 지도를 띄워놓고 열심히 날아가는 비행기의 현 위치를 표시해준다. 서해 상공으로부터 중국 대륙과 시베리아를 거쳐 우랄산맥을 넘고 유럽 각국의 국경선을 횡단하는 비행기의 움직임은, 베를린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이 단지 국경뿐만 아니라 여러 겹의 사회문화적 경계들을 가로지르는 여정임을 드러내는 하나의 은유로 보인다.전혀 새로운 관계망 속으로 뚫고 들어가 영화의 에너지를 수신하고 나의 반응을 송신하는 커뮤니케이션은 그 형식과 내용이 평소와 크게 달라질 것이다. 교신의 과정에는 부득이하게 낯섦과 오해라는 잡음도 끼어들 것이다. 그러나 창조적 오독의 자유, 차이에 대한 너그러움을 한껏 선물하는 것은 영화제의 미덕이기도 하다. 올해의 베를린영화제 또한 “영화를 통해서 타자에 대한 관용과 이해를 증진시키는 것”을 목표로 내세웠다.그러나 공항을 드나드는 이들을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보는 관점을 제도화하고 있는 검문검색은, 국경을 넘어 조우한 사람들 사
영화평론가 김소희의 베를린의 상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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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최고의 복싱영웅을 연기해달라는 주문에 윌 스미스는 단호히 대답했다. “No”라고. 올리버 스톤, 스파이크 리, 배리 소넨필드 등 내로라 하는 감독들의 출연제의를 거절했을 때 윌 스미스는 “난 솔직히 알리 역을 맡을 만큼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알리> 촬영현장에서 가진 와의 인터뷰에서 윌 스미스는 이렇게 말한다. “대본은 너무 좋았다. 하지만 대본에 담긴 깊이있는 접근이 나를 더 겁먹게 만들었다.” 하지만 윌 스미스의 문을 두드리는 연출자는 끊이지 않았고 마침내 마이클 만의 노크에 응답을 했다. “마이클 만은 내게 세상을 보는 전사의 관점을 가르쳐줬다. 그것은 내 육신을 극한 상황으로 끌어올려 내 정신과 영혼을 고양시켜주었다.” 알리가 되기 위해 윌 스미스가 가장 먼저 할 일은 복싱을 배우는 것이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조깅을 하고 아침식사가 끝나면 체육관에서 몸을 만들고 권투기술을 배웠다. 점심이 끝나면 이슬람교에 대한 공부를 했고 알리 식으
<알리> 주연배우 윌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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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원씨와 남진아씨는 오랫동안 한 팀으로 손발을 맞춰온 선후배이자 27개월된 아들을 사이에 둔 4년차 부부. 감독과 배우, 제작자, 홍보담당자, 스탭 등 범영화계에서 일과 생활을 나누는 부부를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이들처럼 문자 그대로 같은 일에 몸담고 있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더구나 30kg이 넘는 조명기를 들고 뛰는 조명 일이 워낙 물리적인 ‘힘과 체력’을 요하는 터라 오랫동안 여성 인력에 대한 벽이 높았던 사정을 감안하면, 여간해서 보기 힘든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같은 현장에서 서로 볼 일이 없어졌다는 사실은, 이들에게 대단한 희소식이었다. 남진아씨로서는 “계집애가 무슨 조명이냐, 분장이나 해라”던 일각의 시선을 버텨내고 바라던 조명감독에 첫발을 디디면서 늘 좋은 후원자였던 남편, 같은 꿈을 꾸는 여자후배들을 볼 면목이 생겼고, 최성원씨로서는 같은 입장에서 일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끊임없는 자극을 주고받을 든든한 동료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 두게 된 셈이니 말
조명기를 든 부부 최성원. 남진아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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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그들은 헤어졌다, 현장에서 제작자가 조명협회를 의식해 비회원을 잘 쓰지 않던 시절이었지만, 97년에만 <오디션> <미스터 콘돔> 등 3편을 했으니 두 사람의 운이 나쁜 편은 아니었다. 98년 <남자 이야기>를 찍으면서 결혼하고, <퇴마록>을 끝으로 남진아씨는 최성원씨와 “헤어졌다”. “더이상 배울 게 없다고 그러더라.” “조명 퍼스트 초반, 조명에 대해 좀 알 것 같은 자신감이 하늘을 찌를 때였지, 뭐.” 농담으로 돌아보지만, 막내 시절부터 최고의 선배이자 남편인 최성원씨가 남진아씨에게는 늘 든든한 후광인 동시에 부담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오랫동안의 촬영장 동거를 청산한 것도, 최성원 감독의 스타일에 너무 익숙하다는 것 외에 입봉을 생각하는 입장에서 남편 덕본다는 말을 듣기 싫은 자존심 탓이 크다. 최성원씨가 98년의 <짱>에서 99년의 <간첩 리철진>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거짓말
조명기를 든 부부 최성원. 남진아 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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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말 제한상영가 등급 신설과 제한상영관 도입을 골자로 하는 영화진흥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지만, 아직까지 제한상영관의 성격과 운영에 관한 사회적 합의는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와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이 26일 오후 서울 대학로 흥사단 강당에서 연 <성인영화전용관의 도입과 등급분류 문제>를 주제로 한 공청회는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공개적인 첫 토론회였다.이날 공청회에서 참석자들은 제한상영관이 표현의 자유를 보호할 수 있다는 데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을 보였으며, 제한상영관의 포르노극장화에 대해서는 뚜렷한 견해차를 드러냈다. 신국원 총신대 교수는 “옥외선전과 비디오출시가 금지되는 불리한 조건과 형법상 음란죄 조항이 엄연히 살아있는 현실에서 누가 제한상영관을 개설해 운영하려고 하겠느냐”며 제한상영관의 실효성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를 표시한 뒤, “제한상영가 영화의 성적 표현 수위를 지금 비디오로 출시되는 성애영화 수준으로 놓
`성애영화-포르노` 표현수위 논란 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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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man a-cappella 겨울나들이> JM 아뮤즈 코리아 발매원 맨 아카펠라란, 말 그대로 한 사람의 아카펠라다. 사람의 목소리만으로 모든 노래와 코러스, 효과음을 만들어내는 아카펠라 음악을, 인공위성처럼 여러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의 뮤지션이 여러 번의 더빙으로 녹음한 것. JM이란 신인 뮤지션이 선보이는 이 음반은 조하문의 <눈오는 밤>, 미스터 투의 <하얀 겨울> 등 겨울에 관련된 과거 히트곡들과 이은하의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이현우의 <헤어진 다음 날> 등을 고음에서 저음, 미성을 기본으로 조금씩 얇아졌다 두꺼워지는 목소리의 풍성한 질감으로 재해석해 들려준다.<Orlando Cachaito Lopez> 워너뮤직 발매루벤 곤살레스, 이브라힘 페레 등이 잘 알려진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에는, 그 밖에도 흘려듣기 아까운 재능들이 많다. 베이스주자 올란도 카차이토 로페즈도 그중 하나다.
[음반] one man a-cappella 겨울나들이 / Orlando Cachaito Lop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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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 라카토쉬 밴드 내한공연예술의전당 콘서트홀/ 3월9일(토) 8시/ (주)스타넷아시아/ 1588-7890, 02-501-5330전설적인 집시 바이올리니스트 야노슈 비하리 가문 출신으로 클래식과 집시음악에 재즈의 즉흥 연주를 접합시킨 작곡가 겸 바이올리니스트 로비 라카토쉬의 내한공연. 라카토쉬는 집시음악 특유의 열정적인 흥취와 풍부한 상상력이 깃들어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번 공연에서는 제1, 2 바이올린, 콘트라베이스, 피아노, 기타 등 5중주 편성으로 공연을 하며, 라카토쉬는 제1 바이올린을 맡는다.윤도현밴드, 최건 Joint Concert트라이포트 홀/ 3월2일(토) 4시·8시/ 알지비엔터테인먼트(주)/ 02-2266-6618<크라잉넛, 화얼 Joint Concert> 트라이포트홀/ 3월1일(금) 6시/ 알지비엔터테인먼트(주)/ 02-2263-6693중국과 한국의 록과 록, 펑크와 펑크가 어깨동무하는 2개의 콘서트. 1989년 천안문 반정부시위 당시, 광장에서
[공연] 로비 라카토쉬 밴드 내한공연 / 윤도현밴드, 최건 Joint Conc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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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도둑클라이브 바커/ 황금가지 펴냄/ 9천원클라이브 바커는 끔찍한 고어영화 <헬레이저>의 감독이며 <피의 책>을 쓴 영국 출신의 공포소설가다. <시간의 도둑>은 ‘어딘가(용궁이나 낙원 등)를 다녀왔더니 엄청난 시간이 흘렀더라’라는 민담을 현대적인 공포 판타지로 탈바꿈시켰다. 학교가기 싫었던 소년 하비가 릭투스란 남자의 유혹으로 ‘휴일의 저택’에 가서 한달쯤 놀다 돌아와보니 30년이 흘렀다. 하비는 빼앗긴 시간을 되찾으려 시간의 흡혈귀와 싸운다.책벌레클라스 후이징 지음/문학동네 펴냄/8천원18세기의 실존했던 인물 타니우스는 책에 대한 광적인 집착 때문에 절도와 사기는 물론 살인까지 저지른다. 두 세기를 지나 라인홀트라는 현대의 책벌레가 한 고서점에서 그의 생애와 만나게 된다. 그 역시 책을 위해 범죄를 저지르다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다. 책벌레임이 분명한 작가 클라스 후이징은 <책벌레>에서 추리소설적 기법으로 문자와 독서, 책과 글쓰기에
[책] 시간의 도둑 / 책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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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원짜리 손바닥만한 해적판으로 일본만화를 보던 시절, <북두의 권>(혹은 <북두신권>)은 꽤 인상적인 만화였다. 하도 인기있다 보니 판본도 여러 가지여서 800원짜리, 1500원짜리로도 나왔고, 특히 1500원짜리는 오히려 판형이 지금 나오는 정식 라이선스본보다도 컸다. 1500원짜리 <북두의 권> 표지에 크게 “도쿄대 학생들이 뽑은 최고 인기만화”라는 쓰여져 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중국에서 전해진 비전의 암살권 `북두신권`을 이어받은 주인공 켄이 핵전쟁 뒤 피폐해진 세상을 살아나간다. 모든 것이 무너진 뒤 무정부 세계를 지배하는 건 폭력과 힘뿐이다. 약한 사람은 폭력배 무리 앞에 굴복하고 시키는 대로 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북두신권의 계승자 켄과 같은 사문의 사형제들에게는 상당히 편리한 세상인 셈이다. 그들은 자신의 힘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위해 사용한다. 어떤 사람은 정의를 위해, 또 어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들이 자신의 힘
<북두의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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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살 소녀와 서른두살 남자, 그들이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는 곳, 그리고 사랑이 시작되는 곳. 영화 <버스, 정류장>의 홈페이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일단 <버스, 정류장>에 다다랐으면 버스와 정류장 사이에 자리잡은 `쉼표`처럼, 버스를 기다리며 잠시 숨을 돌려보자. 모든 세부내용이 아주 느린 속도의 플래시로 나타나므로 한 호흡 늦춘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겹지만은 않은 기다림이다. 파스텔톤으로 천천히 물감이 번지듯 펼쳐지는 이미지와 문자들이 마치 예쁜 수채화나 순정만화를 보는 것 같다.특히 주목할 만한 콘텐츠로는 정류장 코너 아래에 제작과정을 현장사진으로 보여주는 제작일지와 제작이슈가 있다. 또 15살이나 나이 차가 나는 주인공 소희와 재섭의 사랑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올리고 다른 네티즌들의 의견을 볼 수 있는 토론방이 있다. 전체적으로 글자가 흐릿하게 디자인되어 가독성이 떨어지는 건 흠. 감각적인 모니터 화면 위로 흐르는 루시드 폴의 음악을 듣고 있노라
<버스, 정류장>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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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강력계 형사 설경구는 살인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의심을 받고 있던 두명의 조폭을 잡아들인다. 문제는 심증만 있는 상태라서 범인들의 자백 없이는 기소가 불가능하다는 사실. 어떻게 해서든 조폭들의 자백을 받아내야겠다는 생각에 평소 하던 대로 폭력을 동원해 자백을 강요했지만, 조폭들은 완강히 거부하며 자백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동료 형사 한명이 이런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각각의 조폭을 독방에 격리시켜 놓고 이렇게 말하자는 것이다. “만약 네가 자백을 안 했는데, 다른 녀석이 자백을 하면 그 녀석은 풀려나고 너는 10년의 징역을 살게 돼. 반대로 네가 자백을 하고 그 녀석이 안 하면 너만 풀려나는 거지. 만약 둘이 다 자백하는 경우에는 각각 5년형을 받게 될 거야, 대신 둘 다 끝까지 자백을 하지 않으면 다른 죄목으로 그냥 1년만 살게 해주지.” 자, 만약 당신이 그 조폭들 중 하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상대방 조폭이 자백을 했을 경우를 가정해보자, 만약 당신이 자백을 하지
<뷰티풀 마인드>의 주인공 존 내시와 게임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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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만 해도 만화를 보려면 ‘만화가게’에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고우영이나 강철수의 만화를 사러 서점에 가기도 했지만, <공포의 외인구단>이나 <카멜레온의 시>를 보기 위해서는 당연히 만화가게로 가야 했다. 이미 나무의자는 푹신한 소파로 바뀌기 시작했고, 커피에 라면도 끓여주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명칭은 ‘만화가게’였다.<박인하의 즐거운 만화가게>의 표지에 그려진 박재동 화백의 그림은, 20여년 전의 만화가게 풍경이다. 교복을 입고 하교길에 들르던, 딱딱한 나무의자와 신간 만화를 창가에 고정하던 고무줄이 있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만화가게. 만화를 보다보면, 누군가의 엄마가 들어와 자식의 귀를 잡아채 나가고, 때로는 만화 대신 TV나 비디오를 보기도 하던 곳. ‘만화가게’라는 명칭에는, 만화와 지나가버린 과거를 그리워하는 추억이 서려 있다. 요즘에도 대학가나 유흥가에는 만화‘카페’가 꽤 있지만, 동네에서 만화가게를 찾기는 힘들다. 그 대신 들어선
<박인하의 즐거운 만화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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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을 보는 데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TV에서 우연하게 본 애니메이션 시리즈물이 맘에 들었다 해도 1화부터 꾸준하게 녹화할 수 있는 근면한 성격이거나 학원에 가지 않는 초등학생 정도로 한가하지 않은 이상 시리즈물의 전화를 보기 힘들다. 나중에 비디오로 보면 되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국내에서 출시되는 애니메이션 비디오는 보통 60분(2화 분량) 기준으로 10개 미만으로 나오기 때문에 26화 이상인 시리즈물은 <드래곤볼>이나 <포켓몬스터> 정도의 인기가 아니면 전편이 제대로 출시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따라서 CATV에서 방영된 <지구방위가족> <레인> 같은 소수 마니아층 성향의 작품, 혹은 방학이나 연휴 때 방영되는 <공룡아 불을 뿜어라>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단편으로 끝나는 특선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게 되면 그 작품을 다시 보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들여야 하는, 거의 저주에 가까운 일이 발
[anivision] <숲은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