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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말부터 SNS를 가득 채운 풍경이 있었다. 챗지피티가 만들어준 지브리 스타일의 사진들. 처음에는 누군가 올린 이미지를 보고 ‘오, 진짜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같네’ 하고 무심히 지나쳤다. 그런데 어느새 타임라인에 지브리풍 이미지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다들 즐거워 보였다. 그들은 지브리풍의 따뜻한 색감 속에서 사랑스러운 인물로 다시 태어난 자신을 대체로 마음에 들어했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라는 노래처럼,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이 한순간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이 되는 모습을 재미있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네달 가깝게 이어진 현실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바라보는 지브리 세상은 유독 더 아늑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그럼에도 나는 의문이었다. 도대체 왜? 왜 자기 사진을 AI에게 주고 바꿔 달라고 하고 그것을 SNS에 공유하는 것일까?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지브리 스타일을 좋아하는 걸까? 그러다가 질문이 바뀌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다른 이들의 지브리 스타일
[임소연의 클로징] AI블루와 파면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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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면은 핫한 신작보다 이미 검증된 구작을 보길 희망하는 독자들을 위해 준비했다. 안방 극장에서 취향 따라 즐길 수 있는 다양한 <HBO> 작품들을 소개한다.
대체역사물을 바란다면
연방정부 세력과 분리주의를 추구하는 자유주의 군대 FSA(Free State Armies)로 나뉘어 2차 내전이 벌어진 가상의 역사적 상황을 다루는 4부작 <DMZ>를 추천한다. 로사리오 도슨이 8년 동안 아들을 찾아 헤매는 의료진으로 등장한다. 동명의 인기 만화 시리즈가 원작이라 재미를 보장한다. 분쟁 발발 당시 뉴욕시 대피령으로 아들을 잃어버린 알마가 갱단의 두목이자 새로운 세계를 지배하려는 파르코에 맞서 희망의 아이콘이 되는 이야기다. 앨런 무어의 원작에서 이어지는 세계관 확장 스토리 <왓치맨>도 대체역사물로 분류 가능하다. 원작 만화에서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가상의 미국이 배경인데, 여전히 첨예한 인종차별 갈등을 겪고 있다. 오클라호마주 털사가 주요 배경
슈퍼히어로냐 고전이냐 - 당신을 위한 큐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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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놈들이 벌이는 나쁜 짓을 구경하는 것만큼 우리에게 순수한 보는 재미를 제공하는 콘텐츠가 또 있을까? 그 주인공들이 돈은 많지만 평판은 좋지 않은 거대 미디어 그룹의 창업주 가족이라면, 게다가 지금 그들이 경영권 승계 과정 중에 있다면, 그리고 심지어 그 모습이 현실에서 벌어진 특정 재벌 기업의 수난사를 떠올리게 한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드라마를 보기 좋게 진열해놓았다 하더라도 방금 설명한 이 작품에 먼저 손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왕좌의 게임> 이후 비어 있던 드라마 명가 <HBO>의 정당한 후계자 자리를 계승받았다고 평가받는 <석세션>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당연한 말이지만 <석세션>에 대한 세상의 찬사가 단순히 그 재미로부터만 비롯된 건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그들이 에미상과 골든글로브를 비롯한 여러 권위 있는 시상식에서 거의 독점했다시피 수집한 수많은 트로피들은 다른 작품들에 골고루 분배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따지
다시 ‘그레이트’를 꿈꾸는 거대 그룹, 혹은 미국에 대하여, <석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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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오브 드래곤>은 2010년대를 통틀어 가장 큰 인기를 끌었던 <HBO> 시리즈 <왕좌의 게임>의 프리퀄이자, 용과 기사가 등장하는 정통 하이 판타지다. 용을 조종하는 신성한 혈통 타르가르옌 가문의 인물들이 왕좌를 두고 각종 정치적 암투와 혈투를 펼치는 이야기가 골자다. <왕좌의 게임> IP의 창조주인 조지 R. R. 마틴의 원작 소설 <불과 피>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위의 줄거리 요약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하우스 오브 드래곤> 시즌1 역시 위 요약에 부합했다. 주인공인 라에니라 타르가르옌 공주(에마 다시)가 아버지에 이어 왕위 계승자에 오른다. 어릴 적 친구이자 새엄마가 된 알리센트 하이타워(올리비아 쿡)와 그 맏아들인 아에곤의 추종 세력은 호시탐탐 왕위를 노린다. 근친을 통해 가문을 유지할 정도로 혈통에 의존하는 군주 정권의 가치관이 가족 내외의 여러 갈등을 부르고, 죽음을 불사하는 인물들의 명예와
지루한 용의 시간, <하우스 오브 드래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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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O>가 처음으로 10대 청소년을 다룬 드라마를 기획하면서 시리즈 제작 경험이 전무했던 A24에 손을 내밀었다. 누구도 시도한 적 없는 방식으로 영어덜트 콘텐츠 타깃을 공략할 목적이었다. 밀레니엄 이후 태어난 이른바 젠지 세대(1997년부터 2012년 출생)의 혼란스러운 일상을 다룬 <유포리아>는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폭력과 섹스, 마약 묘사에 거침이 없다. 가족, 친구, 정체성으로 인한 혼란과 내재된 트라우마를 온몸으로 견뎌내야 하는 아이들은 현실도피 수단으로 마약과 섹스에 탐닉한다.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탐닉이란 단어가 과연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옳은 건지 고민의 장을 열어젖히겠다는 듯이 시즌 첫화부터 시각적인 충격을 선사한다.
막장 범죄드라마처럼 소개했지만 최근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어떤 작품에서도 이렇게 진지하게 젠지 세대의 갈등과 고민을 다루지 못했다. 부모 집에 처박혀 사회로 나오지 못한다는 조롱을 듣고 있는 이 아이들은 별다른 안전망
트라우마와 첫경험 사이, <유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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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펭귄>의 시작은 <더 배트맨>(2022)의 결말 시점 일주일 후다. 고담시의 마피아 보스 르미네 팔코네(마크 스트롱)는 리들러(폴 다노)에게 살해되고, 팔코네 가문의 수하 ‘펭귄’ 오즈 코블팟(콜린 패럴)은 혼란을 틈타 고담시의 일인자가 되려 한다. 한편 팔코네 가문의 장녀 소피아(크리스틴 밀리오티) 또한 왕좌를 노린다. <더 펭귄>은 두 안티히어로가 각자의 생존을 위해 악에 악을 거듭하는 범죄 스릴러다. 오즈와 소피아의 입체성을 살리기 위해 <더 펭귄>은 한 에피소드에 플래시백을 통째로 할애해 두 캐릭터의 전사를 간곡히 풀어내는 결정도 불사한다. 화려한 음악과 촬영이 그 위에 얹히고, 배우들은 클로즈업의 독무대에서 보란 듯이 열연한다. 게다가 <대부> <스카페이스>가 보여준 마피아 조직간의 합종연횡이 오즈와 소피아를 통해 오마주에 가깝게 재현된다. 재미없기가 어려운 이 시리즈는 공개 나흘 만에 미국 내 530만
미화 없는 악, <더 펭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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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팬데믹 위기로 인해 제작 현장이 폐쇄적으로 변하자, <HBO>는 오히려 이를 기회로 삼을 아이디어를 구상한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방역으로 제한된 촬영 환경을 적극 활용할 수 있다면 뭐든 만들어도 좋다는 제안을 받은 쇼러너 마이크 화이트는 특정 로케이션 촬영지 한 군데에서 찍을 수 있는 컨셉의 이야기를 고안, 5성급 리조트를 찾은 특권계층 사람들이 끔찍한 사건에 휘말리는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화이트 로투스란 이름의 글로벌 리조트 호텔 체인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화이트 로투스>는 동시대 드라마 중에서 가장 날카로운 세태 풍자 코미디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2021년 하와이 배경의 첫 시즌이 방영됐고, 곧장 시즌2 제작이 확정되어 이탈리아 휴양지에서 벌어진 두 번째 참극이 큰 사랑을 받았으며, 최근 종영한 시즌3는 태국으로 장소를 옮겨 진행된다. 모두 동일한 럭셔리 리조트 체인에서 사건이 벌어지기 때문에 휴양지를 찾는 부자 관광객들과 이들을 케어
배우의 (재)발견, <화이트 로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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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 데드>를 떠올리고 <더 라스트 오브 어스> 시즌1을 감상한다면 다소 실망할 수도 있다. “아니, 얘가 이렇게 죽는다고?”라는 충격적 단말마를 연신 자아내며 좀비 디스토피아의 끝없는 절망과 자극적 충격을 선사한 <워킹 데드>류의 작품과 달리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그 속의 한 줄기 희망에 유장하게 집중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물론 작품의 설정과 배경은 꽤 잔혹하다. 곰팡이인 동충하초가 인간을 숙주 삼아 퍼지고, 숙주가 된 인간은 좀비처럼 변해 인간을 공격한다. 감염자에게 물린 인간은 곰팡이에 전염돼 인격을 잃고 감염자가 된다. 이에 세상은 순식간에 초토화됐으며 주인공 조엘(페드로 파스칼)은 가족을 잃고 피폐한 일상을 보낸다. 그러던 조엘의 앞에 나타난 이는 소녀 엘리(벨라 램지)다. 으레 좀비 디스토피아 장르의 전통적 ‘희망’의 역할을 지닌 엘리는 감염자에게 물려도 곰팡이에 전염되지 않는 항체의 보유자다. 이런저런 사건으로 인해 조엘
그대들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더 라스트 오브 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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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 <HBO>는 어떻게 아성을 쌓았나.
응접실을 영화관으로 만들기. 홈 박스 오피스를 표방한 1972년 신생 케이블 네트워크 <HBO>는 영화 방영 중 중간광고를 없애는 신의 한수를 택했다. 일리가 있다. 영화관엔 상영 전 광고만 있을 뿐 중간광고가 없으니까. 사람들은 약간의 구독료만 더하면 극장에서 금방 막을 내린 영화를 집에서 광고 없이 바로 볼 수 있는 <HBO>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여기엔 운도 따랐다. 마침 1970년대는 미국 내 케이블TV 수요의 폭발적 증대가 이루어진 시기였기 때문이다. 1974년 5만명에 불과하던 케이블TV 이용자는 1978년 150만명으로 급증했고, <HBO>는 1977년부터 흑자를 기록했다. <HBO>의 광고 배제 전략은 영화의 2차 배급을 넘어 ‘영화 같은 시리즈’를 만들어낼 때에도 변동 없이 적용됐다. 그래서 <HBO>는 광고주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고, 광고의 외압을
스타일의 핵심 - ‘영화 같은 시리즈’를 둘러싼 여러 전략들, 에 대한 4가지 FA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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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박스 오피스(Home Box Office). 유료 케이블 네트워크 <HBO>는 집에서도 영화관과 같은 경험을 선사하겠다는 포부를 안고 1972년 출발했다. 1975년 무하마드 알리와 조 프레이저의 경기 등 생생한 복싱 중계로 명성을 얻은 <HBO>는 이후 케이블TV가 미국 전역에 확산되자 콘텐츠 제작 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는 시사코미디쇼의 시조 격인 <뉴스는 아닐지도>(Not Necessarily the News), 시트콤 <래리 샌더스 쇼>와 <드림 온>이 수익을 냈다. 그리고 1990년대 후반, 모두가 아는 <HBO>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TV가 아니라 <HBO>입니다”라는 슬로건을 유행시키며 <섹스 앤 더 시티> <소프라노스> <왕좌의 게임> <석세션> 등 ‘영화 같은 시리즈’라 불리는 일련의 작품들이 등장했던
[특집] HBO 해부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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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네필로서 감독님의 영화 원년을 채웠다고 할 수 있는 주요 감독들, 그중에서도 동시대에 살아 있는 감독들은- 마틴 스코세이지, 스티븐 스필버그 등- 이제 대부분 직접 만나신 것 같습니다.
노란문 영화 동아리 시절의 저를 생각하면 정말 신기한 일이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님과 영화제 만찬 자리에서 식사할 기회가 있었고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님 다 뵈었으니까. 아직도 비현실적이에요. 조지 밀러 감독님도 여러 번 만났고요. 전 동세대 감독들과의 만남도 좋았어요. 특히 올리비에 아사야스, 웨스 앤더슨, 에드거 라이트, 타란티노 형님. <기생충> 오스카 캠페인 기간에 행사장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님을 가까이서 실제로 뵌 것도 기억에 나네요. 그런데 한분 남아 있어요. 미야자키 하야오 옹. 원체 밖으로 다니시는 분이 아니라 어쩔 수 없죠.
- 2020년에 <사이트 앤드 사운드> 2월호 편집을 맡으면서 알리체 로르바케르, 아리 애스터, 한
봉준호가 만난 사람들, 영화들 – 봉준호 감독 인터뷰 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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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치의 장벽 위에서 벌인 영화의 소동
- <미키 17>까지 나온 상황에서 감독님께 종합적인 질문을 드리자면, 지금 돌아보건대 해외 프로덕션에 기반한 작업으로 규모와 방식을 점차 확장해나가는 과정에 결정적인 분기점이 있다고 보시나요? <설국열차> 전후로 작품을 계획하는 시야가 달라졌다거나 하는.
<설국열차>는 제작진, 투자배급사(CJ 엔터테인먼트)까지 사실상 한국영화인데 다만 ‘미국 할리우드 배우들이 찍는 방식’으로 찍은 거예요. 인류 생존자가 타고 있는 기차인데 거기에 남북한 사람들만 타고 있으면 어색하잖아요. 그래서 북미 배우들이 주요 역할에 있다 보니까 처음으로 미국배우조합(SAG)의 영향을 경험했죠. 계약 조건부터 현장을 찍어나가는 방식까지 구체적인 차이가 있었죠. 예를 들면 아역배우들도 연령대별로 세분화해서 촬영 가능 시간과 휴식 시간을 정하는. 미국 배우조합이 스튜디오와 몇십년간 줄다리기를 해서 만든 세밀한 규정을 학습한 셈입니다.
1인치의 장벽 위에서 벌인 영화의 소동 – 봉준호 감독 인터뷰 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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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미키 17>의 개봉 일정을 따라 전세계를 순회하셨죠. 관계자들 사이에서 과로하는 ‘준호 17, 준호 18’ 아니냐는 전언이 떠돌았습니다.
런던, 베를린, 파리에서 연달아 <미키 17> 스크리닝을 하고, 미국 LA와 뉴욕에서도 여러 홍보 스케줄이 있었고…. 서울에서도 두 차례에 걸쳐 배우들이 들어와서 스케줄을 다 마쳤죠. 개봉 후인 3월 중순쯤인가, LA 오스카 뮤지엄에서 제 섹션을 만들어서 상설 전시를 여는데(아카데미영화박물관 ‘감독의 영감’전, 2027년 1월까지) 거기 다녀왔고요. 전시 오프닝 행사를 마치곤 바로 도쿄에 가서 일본 개봉 홍보를 했어요. 일본이 원래 개봉을 늦게 하잖아요? 3월28일에 일본 개봉 일정 맞춘 행사까지, 그동안의 긴 홍보 일정을 마무리하고 귀국했습니다.
- 4월4일은 어떻게 보내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웃음) 저는 열심히 생중계 봤죠. 매우 즐겁게. 어떤 분들은 즐겁지 않은 날이었던 것도 존중하고요. 정치적 관점
빛을 위한, 깊은 어둠의 필요 - 봉준호 감독 인터뷰 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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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백색인>과 <지리멸렬>을 거쳐 1995년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하고 2000년에 <플란다스의 개>로 장편 데뷔한 봉준호 감독의 30년은 오늘의 우리가 지시하는 ‘한국영화’에 긍지의 색채를 입힌 결정적 시간이다. 일상의 부조리를 만화적인 유머로 비튼 신선한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는 그 흥행 실패조차 2000년대의 새 감수성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해석되고, 곧이어 등장한 <살인의 추억>(2003)은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비옥함을 대변하는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한강에 잠복한 돌연변이 <괴물>(2006)은 봉준호식 풍자와 점액질의 장르가 천만 관객의 것임을 확인시켰고, <마더>(2009)는 범죄의 속살 위에 구세대 모성의 정념과 광기를 입혀 우리가 그를 낭만주의의 감독이라 확신할 충만한 토양으로 기능했다. 첫 해외 프로젝트인 옴니버스영화 <흔들리는 도쿄>(<도쿄!> 중)를 거쳐 첫 영어영
봉준호의 영감과 시간 - 영화 만들기의 30년, 봉준호의 현재를 묻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