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외국영화 1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셀린 시아마 자체가 올해 하나의 현상”(송효정)이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한편의 영화 이상의 흔적을 아로새겼다. 올해의 외국영화 1위로 꼽은 평자들은 하나같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아니 셀린 시아마로 대표되는 하나의 파도에 주목했다. 여성의 이야기를 온전히 여성의 시선으로 포착한 여성의 영화. “<톰보이> <워터 릴리스> <걸후드>까지 올해 한국에서 개봉한 셀린 시아마의 전작을 모두 아우르는 의미”(김소미)에서 이 영화를 첫손에 꼽은 이가 적지 않았던 이유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셀린 시아마의 전작이 있었기에 도달한 성취이지만 “반대로 국내에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있었기에 <톰보이> <워터 릴리스> <걸후드>를 만날 수 있었다”(이주현). 물론 영화 자체의 타오르는 불꽃과 정념도 우리를 매료시켰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카메라의 시선, 즉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영화의 역사에서 시선이 여성을 착취하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나.”(임수연) “영화의 시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절대로 넘겨서는 안되는 영화”(듀나)인 이 작품은 “여성적 응시가 머릿속의 관념이 아님을 입증했다. 대안적 시대극이자 뮤즈와 작가의 관계를 재정의한 예술영화이기도 하다”(김혜리). “심플한 프레임에서 웅장함이 느껴지고 얼굴 클로즈업이나 뒷모습에서 예민한 떨림이 전해지는”(이지현) 이 영화는 “세계 속 불균형을 담대히 포착했다”(남선우). “극중 억압의 동굴에서 빠져나오는 여성들처럼 연출도 모든 제약과 경계의 초월을 마다하지 않는”(허남웅)다고 할까. 비결은 단순하다. 욕망과 예술의 결합. “기존의 인물 구도, 문법, 음악 등을 모두 여성의 것으로 재구조화해 새로운 권력을 창출해내는 셀린 시아마의 카리스마는 그야말로 독보적이다”(김소미).

셀린 시아마는 “자신을 믿는 자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영화를 시작하고 끝낸다”(김소희). 셀린 시아마라는 한 예술가의 초상으로서 “동시대 (여성)영화사의 최전선에 당당히 위치할 수 있는 영화”(남선우)로 기억될 것이다.

올해의 외국영화 2

마틴 에덴

지금 이탈리아 시네마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탈시네마의 시대를 역행하는 ‘시네마틱’하고 회화적이며 아나크로닉한 작품들, 그러니까 ‘네오 프롤레타리안 리얼리즘’으로 명명할 만한 <행복한 라짜로>나 <마틴 에덴>과 같은 젊은 이탈리아 감독의 영화들이 돌출하고”(송효정) 있다. 그 중 특히 <마틴 에덴>은 “최전선에 선 자가 구태의연한 것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때 나올 수 있는 영화”(이용철)다.

“인물과 몽타주가 이토록 분리되어 있는데, 그것이 더없이 적절한 배치로 여겨지는”(김소희) 진귀한 성취. “로베르토 로셀리니나 에르만노 올미와 같은 이탈리아영화의 전통과 라리사 셰피티코 같은 러시아 뉴웨이브영화에서 영감을 받은 이 젊은 감독은 시네마에 대한 급진적 재정의를 시도한다.”(송효정) 그리하여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은 “역동적인 몽타주와 아카이브 푸티지의 황홀한 미적 결합”(김소미)을 이뤄냈다. “내러티브 면에서 독학자의 용맹과 한계에 대해서 고찰하는 영화이자 외적으로는 영화의 물질성을 보여준 수작”(배동미)인 <마틴 에덴>은 “지금 이탈리아영화의, 아니 현재 전세계 영화의 최전선”(허남웅)이라 할 만하다.

올해의 외국영화 3

페인 앤 글로리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모든 것.”(송효정) 이 한마디로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감히 페드로 알모도바르 영화의 집대성이라 할 만한 작품, <페인 앤 글로리>를 향한 감탄은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쌓아온 창작의 시간 그리고 고통의 궤적과 자연스럽게 겹친다. “삶의 근원적인 상실감을 껴안고 긍정하는 노익장”(김영진)은 “알모도바르의 뇌의 주름과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신체 주름 사이로 겹겹이 포개져 애달프고 숭고한”(홍은미) 형태로 승화한다.

“이야기의 구성이며, 주제의 깊이며, 배우들의 연기며, 색채의 활용이며, 눈을 뗄 수 없는 환상적인 세계가 2시간 내내 펼쳐”(이주현)지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인장을 곳곳에 새긴 캔버스 위로, 고통과 영광의 순간이 이어져 있음을, 그 둘이 결코 떨어질 수 없음을 고백하는 이 영화의 장중함에서 거장의 기품”(남선우)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이 영화의 라스트신에 대한 상찬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카메라가 줌아웃되면서 영화 촬영 현장임이 드러난다. 장 뤽 고다르의 <경멸> 오프닝과 더불어 최고의 소격효과를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보여준 게 아닐까.”(배동미) “영화라는 우주를 향한 사랑이 진하게 배어나는 라스트신이 한해가 가도록 잊기 어렵다.”(남선우)

올해의 외국영화 4

트랜짓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역사의 중요한 지점에 한 개인을 배치하고 관찰한다. 그리하여 영화는 역사가 되고, 역사는 개인이 되어 마침내 삶이 영화가 되는 기적의 순간을 목격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한다. <바바라> <피닉스>에 이은 역사 3부작의 정점이라 부를 만한 <트랜짓>은 “쓸쓸해진 영화의 풍경사이에서, 페촐트는 영화의 주제가 스타일을 얼마나 풍성하게 가꿀 수 있는지 보여주는”(이용철) 걸작이다.

“현시대에 과거의 상황을 믹스 매치시킨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오진우) 이 영화는 “유령과 같은 인물들을 통해 존재조차 불분명한 난민들에게로 관객의 관심을 돌린”(조현나) 끝에 동시대의 문제를 예리하게 해부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프로파간다식의 메시지로 채워진 것도 아니다. 오히려 페촐트의 진가는 그 반대, 환상의 자리에 가 있다. 장면마다 상황은 지연되고 불투명한 것들이 이어지는데 이렇게 “시대와 인물, 사건의 정체가 모두 모호한 가운데에도 아름다움만은 선명하다. <트랜짓>의 이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과정은 곧 시네마틱에 대한 대답”(김소미)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난제와 시대성 뒤로 오직 사랑이라는 불투명하고 강력한 에너지가 휘몰아치는 시간. 영화가 전할 수 있는 최상의 아름다움이 거기에 깃든다.

올해의 외국영화 5

공포분자

올해의 영화 순위에 이 영화를 올려야 할지 많은 고민이 있었다. 지난해까지 <씨네21> 베스트의 기준으로는 최초 개봉작이라고 해도 시간이 너무 지난 영화는 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극장의 의미와 가치가 시험받고 있는 올해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씨네21> 리스트의 폭과 범주도 넓혀가기로 했다. 에드워드 양의 <공포분자>는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지표 중 하나다. 최초 개봉작은 물론 OTT 영화까지 포함하기로 한 선택에 대한 평자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전통적인 개봉 방식의 영화만 꼽든지,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개봉작들도 올리든지. <공포분자>가 겨우 5위에 기록된 건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 영화를 꼽은 평자들은 예외 없이 올해 최고의 영화로 꼽았고, 아니면 아예 리스트에 올리지 않았다. <공포분자>에 대해 긴 말을 보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시대를 초월하는 영화란 이런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런 가치는 시대를 정확히 응시하고 담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영화적 형식으로 성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공포분자> 안에 있다. 34년 만의 극장 개봉작이기에 ‘올해의’ 무언가로 명명하는 것이 마땅한지 고민했으나, 뒤늦게 찾아온 ‘오래된 첫사랑’ 같은 이름을 한번 더 호명함으로써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남선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