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을 겸업하는 배우들은 대개 스타 출신으로 기억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로버트 레드퍼드, 케빈 코스트너, 멜 깁슨은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을 연출해 감독상까지 거머쥔 인물들이다. 21세기 들어 일어난 현상은 다르다. 지금은 감독으로 성공하기 위해 꼭 배우의 이름을 걸 필요가 없는 시대다. 2016년, 17년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스포트라이트>와 <문라이트>를 각각 연출한 톰 매카시와 배리 젠킨스는 배우로 경력을 시작한 사람들이다. 흥행작쪽으로 오면 연출로 성공한 배우들이 여럿 보인다. <겟 아웃> <어스>의 조던 필, <콰이어트 플레이스>의 존 크래신스키, 그리고 <인시디어스3> <업그레이드>의 리 워넬이 그들이다. 모두 배우로서 이름을 각인시키지는 못한 경우다. 워넬은 <쏘우> 시리즈의 각본과 기획에 참여하면서 제임스 완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다 영화사 ‘블룸하우스’의 주력 연출가로 떠올랐다. <쏘우>(2004)에서 배우로 고군분투했던 그는 <인비저블맨>의 감독으로 확실한 자리를 잡았다. <업그레이드>에서 미친 과학(자)의 이야기를 다뤘던 그로선 신작 <인비저블맨>으로의 이동이 자연스럽다. 미국 내에선 영화에 대한 관객의 사랑만큼 평단의 지지도도 더불어 올라가는 중이다.
‘드라큘라’에 관한 영화들이 대개 그러하듯, ‘투명인간’을 다룬 영화들은 허버트 조지 웰스를 원작자로 기록하지 않는다. 웰스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제임스 웨일의 <투명인간>(1933)을 리메이크했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인물의 외모와 행동, 전체적인 분위기와 이야기 등에 그들이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웰스나 웨일로선 섭섭한 마음이 들 법하다. 웨일의 영화와 같은 원제목을 내건 <인비저블맨>의 크레딧 어디에도 그들의 이름은 없다. <인비저블맨>은 크레딧에서 워넬의 각본을 따랐다고 선명하게 밝혔다. 사실 <인비저블맨>은 그간 나왔던 투명인간 이야기와 맥락이 가장 다른 예다. 새로 나온 영화라서 신선한 게 아니라, 이야기 자체가 앞서 나온 것들을 따르는 척하다 전례에 없는 길로 들어선다. 먼저, <투명인간>과 <인비저블맨>의 출발점은 다르지 않아 보인다. 명장 웨일은 <투명인간>의 도입부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간단명료하게 표현했다. 시골 여인숙에서 피아노를 치던 남자가 즐겁게 연주를 마치고 환호하는 동네 사람들 앞에서 인사한다. 옆에 앉은 남자가 피아노 장치에 동전을 슬쩍 넣으면 다시 자동 연주가 시작되고, 돌아앉았던 남자는 머쓱해한다. 그는 피아니스트인 양 속였지만, 그렇게 드러나는 거짓은 웃음이나 조롱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숏에서, 여인숙 문이 열리고 눈바람 치던 바깥에서 한 남자가 불쑥 들어온다. 붕대가 그의 얼굴 전체를 뒤덮고 있고 검은 안경을 썼다. 그의 몸이 실체를 지녔음에도 여인숙 살롱에 모인 사람들은 일거에 얼어붙고 침묵에 빠진다. 안경과 붕대 아래로 보이지 않는 그의 존재가 어떤 공포, 두려움을 안겨준다. 그것이 <투명인간>의 한 주제이자 성공 요인이다. 적어도 이 부분은 웰스의 소설보다 웨일의 묘사가 뛰어나다.
투명인간이 소외된 투명인간 영화
<인비저블맨> 또한 보이지만 잘 보이지 않는 존재의 두려움으로 시작한다. 절벽 위 웅장한 저택에서 벌어지는 탈출극은 성공적인 도입부로 기능한다. 새벽 3시를 지나 세실리아(엘리자베스 모스)가 아슬아슬하게 탈출을 준비할 동안 애드리안(올리버 잭슨 코언)은 침대에서 곤히 자는 중이다. 그녀의 공포 어린 표정에서 애드리안이 나중에 투명인간이 될 거라고 짐작된다. 투명인간 영화의 공식을 따라,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명확하게 보게 되는 건 영화의 결말에 다다라서다. 영화 내내 그를 볼 수는 없으나 그의 존재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기서 ‘존재감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표현은 좀 이상하다. 나는 애드리안이, 다른 투명인간이 그러듯이 공기 중으로 점차 사라지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다. 이 영화에는 실험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그의 존재감이 계속 남아 있다는 건 무슨 말일까. 세실리아가 공포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나는 애드리안이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기에 역으로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이 말은 곧 <인비저블맨>이 투명인간의 시점 아래 진행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유니버설이 1930, 40년대에 내놓은 <투명인간> 시리즈부터, 인상적인 투명인간을 남긴 존 카펜터의 <투명인간의 사랑>(1992), 폴 버호벤의 <할로우 맨>(2000)에 이르는 영화의 주인공은 투명인간 자신이다. 과학자이건 실험대상이건 그들은 투명인간이 된 이후 대부분 인격의 분열을 겪는다. 소위 미친 인간이 되어버린 그들은 타자와 세상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다 파국을 맞는다. 반면, 스릴러보다 로맨스에 더 가까운 <투명인간의 귀환>(1940)과 <투명인간의 사랑>의 주인공에게만 행복한 결말이 허락된다. 세실리아와 애드리안이 한 침대에 누운 것으로 보아 그들도 한때는 연인이었을 텐데, 왜 <인비저블맨>은 비극으로 흐르는 걸까. <인비저블맨>의 주요이야기는 투명인간의 개인적 경험과 상관이 없는 까닭에, 그가 처한 고독이나 곤혹스러운 상황은 극중에 전혀 소개되지않는다. 옷을 입지 못해 추위에 떨거나, 식도로 넘어가는 음식이 비쳐 밥도 마음대로 못 먹는 처지 같은 인간적 면모는 <인비저블맨>에서 제거되어 있다. 기실, 몸이 투명한 상태로 바뀌는 게 아니라 첨단 슈트를 입은 결과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어서 그는 SF영화의 빌런에 더 가깝다. 즉, 영화가 감정이입을 차단한다. 투명인간 영화는 시각 기술의 수준을 드러내기 마련인데, <인비저블맨>은 슈트의 표현 외에는 시각효과에 큰 공을 들이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투명인간이 소외되는 투명인간 영화인 셈이다. 질문은 거기에서 비롯된다.
세실리아의 모습을 보면서도 애드리안의 존재에 신경을 썼던 나는 결말과 마주하자마자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본 <인비저블맨>은 다른 영화였다. 세실리아는 단지 많은 장면에 등장하는 인물이 아니라 영화 전체를 장악하는 인물이었다. 기존의 투명인간이 남자주인공의 심리극임을 기억하면 이건 중요한 전환점이다. <인비저블맨>은 남자의 심리를 도려낸 자리에 여성의 그것을 채워넣는다. 이제 그의 존재에 떠는 대신, 그녀의 심리가 과연 무엇인지 파악하는 게 과제다. 두 번째 보면서도 나는 이것이 익숙한 누아르의 한 형태라고 착각했다. 세실리아로 분한 엘리자베스 모스가 바버라 스탠윅(<이중 배상>)의 충실한 후예인 1980, 90년대의 악녀들–캐슬린 터너(<보디 히트>), 멜라니 그리피스(<침실의 표적>), 샤론 스톤(<원초적 본능>)- 의 현재형이라고 여겼다. <인비저블맨>에서 관객을 마침내 놀라게 만드는 건 애드리안이 아닌 세실리아다. 그녀가 슈트를 입은 순간이 영화의 진짜 주제를 전달하기에 영화의 제목은 ‘인비저블 우먼’이 되어야 한다. <인비저블맨>은 거대한 맥거핀의 영화다. 딴 데 눈을 팔다 정신을 차릴 즈음 영화는 본모습을, 그것도 아주 살짝 보여줄 따름이다. 그 ‘살짝’이 문제였다. 나는 세실리아가 과연 어느 지점에서 반란을 도모했는지 찾느라 고민했다. 세실리아를 팜므파탈의 자리에 놓으면, 많은 장면들이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세실리아와, 그녀를 대변하는 영화가 일부러 무언가를 보여주려 애쓰는 장면들이 즐비하다. ‘다락방의 핸드폰이나 거실에 뿌려놓은 커피’ 같은 것들이 엉뚱하게 읽히기도 한다. 그녀가 갖다놓은 게 아닐까, 그녀의 상상이 아닐까. 그러다 영화의 마지막 숏을 다시 봤을때에야 나는 그러한 시도가 부질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녀는 스크린 정면에서 미세히 어긋나게 시선을 둔 채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실리아의 슈트가 상징하는 것
세실리아는 애드리안에게 질문한다. 뛰어난 과학자로서 돈과 권력을 쥔 그에 비해 그녀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래서 왜 자기를 선택했는지 묻는다. 세실리아의 외모는 팜므파탈의 전형성에서 많이 벗어난다. 외모보다 더 벗어난 것은 그녀의 행동이다. 팜므파탈은 자신의 육체에 남자의 욕망이 걸려들도록 이끈다. <길다>에서 리타 헤이워스는 새벽 5시에 기타를 치며 <메임을 원망해>(<Put the Blame on Mame>)를 노래한다. 잠을 깬 남자는 블라인드 너머로 그녀를 응시한다. 어처구니없을지 몰라도 그게 누아르인데, <인비저블맨>은 팜므파탈의 정황 외에 정작 인물에게 혐의를 두기 힘든 영화다. 누아르에서는 하나만 명심하면 된다. 그녀와 눈을 마주친 순간, 바로 그 순간이 범죄의 시작이다. 그녀에게 빠지고 치명적인 매력이 더해지면 결말은 정해진 거다. 그런데 <인비저블맨>은 그러지 않을 것처럼 끝까지 완벽하게 포장한다. 애드리안과 세실리아의 실제 관계가 어떠한지 알 수 없으나, 영화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군다. 도대체 세실리아의 정체는 무엇인가. 나는 <투명 여인>(1940)을 떠올렸다.
유니버설은 1940년에 <투명인간>의 속편을 발표하면서 외전격인 <투명 여인>을 선보였다. SF에 로맨스와 호러를 결합한 <투명인간> 시리즈와 달리, <투명 여인>은 코미디를 섞은 영화다. A. 에드워드 서덜런드가 연출한 이 작품은 과소평가가 아쉬울 정도로 숨겨진 걸작이다. 각본은 전설적인 거장 커트시오드막이 맡았고, 무엇보다 각색자 중에 거트루드 퍼셀이 눈에 띈다. 작가이자 배우로 활동하다 훗날 매카시 시절에 풍파를 겪은 인물이다. 서부극 <데스트리 다시 달리다>(1939)에서 마를레네 디트리히에게 근사한 여성상을 입혔던 그녀는 또 한명의 기막힌 인물 ‘캐롤’을 빚는다. <투명 여인>에 나오는 남자들은 전부 두손 들고 반성해야 하는 존재들이다. 바람둥이 갑부 러셀은 여성을 불장난의 대상으로밖에 여기지 않는다. 여성의 몸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그는 주인공 캐롤이 투명인간인지라 안달이 난다. 투명인간을 실험하는 깁스 박사(드루 배리모어의 할아버지 존 배리모어가 분했다)는 가부장적이다. 12년째 집안일을 돕는 잭슨이 이름을 부르라고 요구해도 가정부 호칭을 고집하며, 그녀가 실험실에 들어오면 부엌이 본연의 장소임을 상기시킨다. 캐롤이 모델로 일하는 직장의 상사는 여성에 대한 혐오로 넘친다. 그는 모델로 일하기 싫은 여자는 장부 정리나 하라고 타박하기가 일쑤다. 거기에다 가게의 단골손님인 부르주아 인간들의 사악한 행동을 견뎌야 하는 캐롤은 어느 날 직장을 박차고 나간다. 그녀가 투명인간 실험에 응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자유로운 모험’때문이다. 모욕감을 견디며 쳇바퀴 도는 삶에서 탈출해 모험을 떠나고 싶은 것이다. <투명인간>의 남자들처럼 캐롤도 복수를 감행하지만, 뜻이 다르기에 그녀의 행동은 건강하고 밝다. <인비저블맨>의 엔딩. 계획을 완수한 세실리아는 투명 슈트를 가방에 넣고 애드리안의 집을 나선다. 그녀의 계획을 증언할 형사에게 뜻 모를 미소를 보낸 뒤, 그녀는 위에 언급한 자세로 잠시 멈춰선다. 아주 옅은 바람이 그녀를 스쳐 지나간다. 나는 그녀가 편한 표정을 짓는 걸 처음으로 보았다. <인비저블맨>의 이야기는 여성이 보편적으로 당하는 잔혹한 상황의 축약판이다. 과학자인 애드리안과 그의 동생인 변호사의 행동은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가 여성을 어떻게 억압하는지 방증한다. 여성이 자기 말에 복종하도록 만들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해 고립시키고, 그녀가 저항하려고 하면 정신병원에 가두기를 서슴지 않는다. 경제적인 지배를 통해 여성이 자립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건 차라리 고전적이다. <인비저블맨>이 팜므파탈의 누아르가 아닌 것은, 무방비의 존재로 추락한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에 주목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1940년대를 살았던 캐롤이 통과한 일이 21세기의 세실리아에게 정확하게 반복되는 현실이야말로 <인비저블맨>의 공포다. 나는 세실리아가 결말에서 슈트를 들고 가는 행위에 대해 생각한다. 범죄의 증거를 없애려는 행동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슈트가, 그녀가 미래에 맛볼 자유와 모험을 상징하는 것이 되기를 바란다. 그때 영화의 제목은 <인비저블 우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