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파도가 밀려올 때 어떻게든 그 속을 씩씩하게 헤엄치는사람.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전직 영화 프로듀서 이찬실은 직업과 사람을 잃고 스스로 “망했다”고 정의할 수밖에 없는 위기에 빠져 있다. “가진 게 없을 때 눈이 더 밝아지는” 이 뭉클하고 지혜로운 수난기에서 단연 빛나는 배우는 첫 장편영화 주연작을 알린 찬실 역의 강말금. “평소엔 좀 골골대도 막상 큰일이 터지면 찬실이처럼 씩씩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계속 삶을 황무지로 만들려나보다”라는 말에서 지금의 찬실을 만든 내공이 묻어나왔다.
-첫 주연작을 제안받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
=일생일대의 사건이었다. 비중상 주연이어도 남성감독이 모성에 대한 판타지를 갖고 그린 어머니 캐릭터는 삶의 주인공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오롯이 내 인생 내가 사는 여성을 연기하고싶었다. 특별히 시켜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 당시에 동료들과 낭독 공연에 열을 올리기도 했는데, 마침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만났다.
-김초희 감독의 정감가는 부산 사투리를 일부러 모방했나. 감독과 배우 사이의 중간점에서 창조된 인물이 작품에 큰 생동감을 준다.
=감독님과 리딩하면서 좋았던 것이 귀로 들리는 리듬과 딕션에 굉장히 예민하다는 점이었다. 마침표가 있는 모든 문장마다 말 맛이 다 다르게 나오길 바라셨다. 처음엔 연기하는 입장에서 ‘이런 걸 의식하다보면 부자연스러울 수도 있겠는데…’ 싶었지만 감독님을 믿고 즉석에서 재미있게 수정해나갔다.
-<82년생 김지영>을 만든 김도영 감독의 단편영화 <자유연기>에서는 육아에 지친 아마추어 배우를 연기했다.
=김도영, 김초희 감독처럼 재능 있는 여성들의 작품 속 얼굴이 되어서 기쁘다. 게다가 두 작품은 주인공의 실제 모델들이 모니터를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배우로서는 오히려 복잡한 생각 없이 몰입할 수 있었다.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처지와 감정도 많아서 거리낌이 없기도 했다.
-<자유연기>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모두 아코디언 연주를 보여준다.
=극단 생활을 할 때 무작정 돈을 모아 아코디언을 샀다. 그날 저녁, 소주 한잔하면서 ‘내가 너를 가구로 만들지 않겠다’라고 약속했다. (웃음) 그로부터 4~5년간 하루에 30분씩 꾸준히, <집시의 시간>에서 주인공이 슬플 때 연주하는 고란 브레고 빅의 음악, <아비정전>에 나오는 등을 연습했다.
-고향 부산에서 6년간 회사 생활을 하다가 서른에 서울에서 극단 생활을 시작했다. 그 무렵엔 어떤 계기가 있었나.
=대학 시절 국문과에 다니면서 극회 활동을 했는데, 자연스레 배우를 꿈꿨다. 하지만 집안 분위기도 보수적이었고 4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그런 마음을 입 밖에 내기 어려웠다. 차라리 아무 데나 취직하자는 마음으로 회사 생활을 시작해서 29살까지 세월을 흘려보냈다. 한동안은 책을 사서 책장에 꽂는 재미로 살기도 했다. <토지>를 읽을 때였는데, 18권쯤 되니 암울한 1940년대를 살아가는 인물들에 너무 이입했는지 우울감이 심해졌다. 그 무렵에 그렇게나 자주 울었다. 아침에 출근할 때도 울고, 밥 먹다가도 울고…. 나중에는 눈물이 쏟아질 것 같으면 사무실 밖에 나가서 한 바퀴 돌고 왔다. ‘회사를 그만두는 게 맞는 것 같은 데 그만둘 힘도 없다’고 직장 상사에게 고백했더니 서울로 발령을 내주더라. 서울에 온 뒤로는 10년 동안 미적거렸던 꿈을 위해 생존해야 해서 우울감이 절로 사라졌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때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를 보고 큰 힘을 얻었던 것 같다. 극장에서 5번이나 봤다.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나.
=수줍고 조심스럽게 연기를 시작한 과거의 꼬리 같은 것이 아직 내게 남아 있다. 실력을 들킬까봐 두렵기도 하지만, ‘좀더 열리자, 더 열리자’ 스스로 그렇게 주문한다. 이제는 완전한 40대가 되어 새로운 국면을 맞은 것 같다. 자기가 맡은 신을 충분히 해내는, 좋은 조연배우가 되고 싶다.
영화 2019 <찬실이는 복도 많지> 2018 <우상> TV 2019 <아름다운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