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셸리> 레드 카펫에서 관객들과 셀프 카메라 촬영 중인 배우 엘르 패닝.(사진제공 Rich Fury©Getty Images Bank)
올해로 42회를 맞는 캐나다 토론토국제영화제는 북미 최대 영화축제다. 상영작품 수도 많지만, 이듬해 초 오스카상으로 정점에 달하는 영화상 시즌 구도가 처음 감지되는 장소라 주목도가 높다. 기본적으로 비경쟁이지만 토론토국제영화제의 관객상 수상작은 오스카 작품상 후보에 빈번히 지명돼 관심사가 되고 있으며 <슬럼독 밀리어네어> <킹스 스피치>처럼 수상까지 이른 작품도 있다. 조금 앞서 오붓하게 열리는 텔룰라이드영화제와 맨해튼 시네필들이 몰리는 뉴욕영화제를 택하는 화제작도 있지만, 규모와 미디어 주목도는 토론토가 앞선다. 올해 상영작은 장편 255편 단편 84편으로 지난해보다 20% 정도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매머드급. 지리적으로 미국과 가까워 할리우드 스타 영화인들의 방문이 많다는 특징도 쾌활하고 적극적인 관객 분위기와 맞물려 붐을 형성한다. 지난 9월 7일부터 17일까지, 선댄스영화제와 칸국제영화제, 베를린국제영화제와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주목받은 영화들이 흘러들어오고 147편이 월드 프리미어를 새롭게 가진 2017년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신작들을 전한다.
“웃어요. 당신은 영화제에 와 있잖아요.”
영화제 본부인 토론토국제영화제(Toronto International Film Festival, 이하 TIFF) 벨 라이트박스 건물 에스컬레이터 앞에 붙어 있는 슬로건에 슬그머니 얼굴이 풀렸다. 토론토의 첫인상은 좀더 분위기 좋은 버전의 미국에 가깝다. 건물도 거리도 큼직해 지도상으로 가늠한 것보다 모든 장소가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은 미국과 비슷한데 시민들의 표정은 한결 느긋하다. 백인을 주류라고 말하기도 머뭇거리게 되는 다문화적 인구가 만들어내는 풍경도 인상적이다. 실제로도 그렇지만 영화제 광고물에 등장하는 인물의 인종도 비백인이 오히려 많다. 일반 관객의 참여, 다시 말해 ‘흥행’을 중요시하는 영화제라는 점을, 기자와 영화산업 관계자에게 나눠준 가이드에서 실감했다. 만석 상영에 큰 의미를 두는 이 영화제는, 배지 발급자에게 허락된 일정 매수의 일반상영 예매권을 사용하지 않을 경우 반드시 박스오피스에 반납하기를 요구한다. ‘무단 결석’은 차회 영화제 참여 시 불이익으로 이어진다는 경고와 함께.
오스카로 통하는 길
TIFF 개막 3일째에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소식이 날아든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이하 <셰이프 오브 워터>)은 일찌감치 관객상 가능성이 점쳐져 입장 경쟁이 치열한 영화였다(결국 관객상은 마틴 맥도나 감독의 <미주리주 에빙 외곽의 세개의 광고판>(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 에 돌아갔다). 영화의 배경은 미국과 소련이 우주 진출 경쟁에 자존심을 걸었던 1960년대 냉전시대. 그러나 극중 무대인 볼티모어는 정치적 상황과 극중 영화 제목을 빼면 역사에서 벗어난 공간처럼 보인다. 목의 흉터로 짐작건대 어린 시절 사고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엘리자(샐리 호킨스)는 청소부로 일하는 정부 산하 비밀 연구소에서 아마존강에서 잡혀온 양서류 인간(더그 존스)을 만난다. 이 지하 연구소의 디자인과 거기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다분히 봉준호 감독의 세계를 연상시킨다. 전기충격봉을 휘두르는 악역 관리(마이클 섀넌)는 다른 종의 생명을 존중하지 않을뿐더러 혐오를 일삼는 백인우월주의자다. 우주비행에 필요한 호흡기관 연구 대상으로 끌려온 이 판타스틱 비스트는 인간과 달리 엘리자에게서 결핍을 보지 않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단호한 연인 엘리자는 고문과 살해 위험 가운데 놓인 그를 구출할 계획을 짜 이웃의 화가(리처드 젠킨스)와 동료 청소부(옥타비아 스펜서)를 끌어들인다. 달리 보면 장애를 가진 인물과 비인간, 게이 노인 예술가, 일하는 흑인 기혼녀가 성공제일주의자이자 인종주의자인 공권력의 담지자와 대결하는 구도다. 관습적인 미의 기준을 벗어난 존재를 기어이 사랑스럽게 만드는 감독 특유의 미감이 최고조로 발현된 이 멜로드라마는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 이후 델 토로의 영화 가운데 가장 내용과 형식이 유기적으로 결합했다는 인상을 준다. <인어공주> <스플래쉬> <미녀와 야수> <아멜리에> 같은 과거 영화들의 제목이 스쳐가지만 무엇보다 냉전의 신경증이 만들어낸 1950, 60년대 몬스터 호러의 유전자를 가진 <셰이프 오브 워터>는 잔혹한 폭력이나 섹스 묘사도 회피하지 않는다.
단 그런 장면들은 스크린에 오래 눌러앉기보다 우리의 시각과 마음을 번개같이 할퀴고 지나간다. <셰이프 오브 워터>의 캐릭터와 이야기는 단순하고 원형적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본인이 창조한 세계와 인물의 결을 완벽히 파악한 감독만이 만들 수 있는 아름다운 구두점의 이미지들이 있다. 이를테면 엘리자가 비 내리는 밤 통근버스에서 바라보는 차창 위의 습기들이 서로에게 다가가 물방울을 이루는 숏이라든가.
델 토로의 성취와 더불어, 온몸으로 속삭이고 외치는 샐리 호킨스의 마임 연기가 오스카 여우주연상 주자로 거론되는 가운데, 상영작 중 남성배우 연기로는 <가장 어두운 시간>(Darkest Hours) 에서 윈스턴 처칠로 변신한 게리 올드먼이 단연 주목받았다. 이 노련한 배우는 외모적 유사성이 거의 없는 처칠을, 발성과 매너의 철저한 구현으로 모사한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명연보다 <링컨>의 대니얼 데이 루이스를 선택했던 오스카에 돌려주는 올드먼의 대답 같기도 하다. 한편 <가장 어두운 시간>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덩케르크>가 배제한 정치인들의 밀고 당기는 노력을 파고든 동전의 뒷면이기도 하다. 파시스트와 타협을 거절한 처칠의 뚝심과 결과적 승리는 현재 미국과 영국 정치권의 리더십, 혹은 그 부재에 불만을 갖는 대중심리에 호소할 법하다. 한편 이 영화는 <어톤먼트>의 롱테이크로 케르크 전투를 먼저 현대영화에 데리고 왔던 조 라이트 감독이 연출자라 더욱 흥미롭다. 2차대전기 영국 선전영화를 찍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우리의 최선>까지 더하면 2017년은 케르크를 회고하는 삼면경을 갖게 된 셈이다. 이 와중에 이른 개봉이 오스카 레이스에 불리하리라는 예측을 낳고 있는 <덩케르크>는 부두에 위치한 거대한 돔영화관 시네스피어에서 감독이 참석한 특별 무료상영을 통해 토론토에서도 존재감을 유지했다.
오늘의 세계를 말한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와 영국의 브렉시트 투표는, 많은 영화에 의도하지 않은 시사적 함의를 불어넣고 있다. 이번 영화제에서 기자가 만난 최고의 코미디 <스탈린의 죽음>(The Death of Stalin) 도 그중 한편이다. 스티브 쿠건 주연의 <알란 파트리지> TV쇼와 극장판, <비프>(Veep) 등을 만든 영국 풍자코미디의 달인 아만도 이아누치가 쓰고 연출했다. 영화는 모스크바 오케스트라의 피아노 협주곡 공연을 라디오 실황중계 중이던 프로듀서(패디 콘시딘)가 크렘린의 전화를 받으면서 시작한다. 오늘 공연을 LP로 대령하라는 스탈린의 명이다. 운없게 녹음 버튼을 누르지 않은 채 생방송 중이던 프로듀서는 퇴근하는 단원들을 부랴부랴 소집하고 거리의 인민들을 청중으로 끌고와 재녹음을 강행한다. 그러나 레코드와 함께 전달된 피아니스트(올가 쿠릴렌코)의 편지가 스탈린을 호흡 곤란에 빠뜨리면서 소동이 시작된다. 무소불위 권력자에 대한 공포때문에 이상한 소리에도 방문을 열어볼 생각을 하지 않는 경비병들 덕분에 스탈린은 오줌 웅덩이 위에서 발견된다. 시신조차 두려워하는 장관들의 책임회피 기술과 차기 권력을 향한 공작은 3초 간격으로 폭소를 터뜨린다. 난장판을 조직화하는 데 빼어난 이아누치 감독은 캐릭터와 합의 타이밍을 모두 놓치지 않는 배우들에 힘입어 독재정권의 공포정치가 한발 떨어져보면 얼마나 포복절도한 부조리 희극인지 보여준다. 특히 스티브 부세미의 흐루쇼프 연기는 이 배우의 단면만 알아온 관객을 개안시킬 것이다.
<스탈린의 죽음>이 권력을 위임한 국민의 시야 밖에서 시대와 국적을 불문하고 정치인들이 벌이는 어이없게 실망스러운- 그래서 공포스러운- 행태를 코미디로 말한다면, <플로리다 프로젝트>(Florida Project) 는 6살 아이들의 일상을 통해 제출한 현재 미국 빈곤층의 삶에 대한 보고서다. 올해 칸국제영화제 감독주간에서 공개된 이후 지지자를 늘려가고 있는 이 영화는 두 트랜스우먼의 고단한 크리스마스이브를 아름답게 담아낸 <탠저린>(2015)의 숀 베이커 감독이 높아진 기대 앞에 내놓은 신작이다. 어린아이들의 놀라운 회복력과 생명력을 항상 찍고 싶었다는 감독은, 그 장소를 금융위기 이후 홈리스 아닌 홈리스로 내몰린 빈곤층이 살고 있는 싸구려 모텔로 정했다.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찾아낸 로케이션인 ‘매직 캐슬’은, 꿈과 희망을 약속하는 디즈니월드 근처의 모텔. 건설이 중단된 공공주택 단지와 <심슨 가족>의 색깔로 칠해진 관광상점 사이에 있는 이곳은 한때 관광객 숙박업소였지만 지금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의 쪽방이다. 교육기관이나 부모의 돌보는 손길이 제대로 닿지 않는 6살 주인공 무니와 두 친구는 가난을 인지하지 못하고 자기들을 둘러싼 모든 것을 장난감으로 활용한다. 주차된 자동차에 침을 뱉고, 보고 들리는 모든 것을 흉내내고, 짓다 만 아파트에 불을 놓는다. 무니 역의 브루클린 프린스는 가련한 어린이의 전형과 거리가 먼, 악의 없는 무례함과 자생력으로 똘똘 뭉친 다이너마이트다. 숀 베이커 감독은 <탠저린>에서 달성했던 페이소스와 코미디의 절묘한 균형을 지켜냄과 동시에, 무심한 자연과 인간이 지은 조악한 건축물이 어우러져 만든 풍경이 스스로 발언하게 만든다. 그래서 사회고발 드라마라기보다 시에 가까운 영역으로 영화를 데려간다. 전작을 아이폰으로 찍어 화제가 된 숀 베이커 감독은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35mm 필름으로 촬영해 “모든 포맷을 모든 감독이 항상 필요에 따라 이용할 수 있길 바란다”는 신념을 실천하기도 했다. 아이들을 포함한 매직 캐슬 주민들의 안위를 염려하는 유일한 인물인 관리인으로 분한 윌럼 더포는 유일하게 얼굴을 인지할 수 있는 배우임에도 환경 속으로 녹아드는 연기를 보인다. 이 영화가 연전의 <비스트>(Beast of Southern Wild)처럼 아역 연기와 작품성에서 주류 영화상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는 TIFF에 온 기자들의 주요 화제 중 하나였다. 영화제 초반 나의 베스트로 자리잡은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폐막 때까지 그 자리를 다른 영화에 내주지 않았다.
레드 핫 퀴어 토론토
TIFF에서는 장르영화도 환대받는다. 특히 이 구역 오타쿠(geek)들이 다 모인다는 미드나이트 스크리닝은 특유의 흥겨운 관람 무드로 명성이 자자하다. 과연 지하철을 타고 찾아간 <시체들을 그을려라>(Let the Corpses Tan) 의 심야 스크리닝은 낮 상영에서 느낄 수 없던 흥분으로 술렁였다. 대학가의 한 블록을 칭칭 감아도는 입장 대기줄에 서 있자니 상자에 가득 담긴 초콜릿을 든 쾌활한 젊은이들이 다가와 당 보충을 권한다. 착석을 완료하자 한껏 차려입은 프로그래머가 스탠드형 옷걸이와 함께 무대에 올랐다.
서커스의 사회자처럼 한껏 멋부려 영화를 소개하고 모자를 던져 옷걸이에 거는 마이클 잭슨 스타일의 트릭에 도전한다. 매번 하는 의례란다. 휴대폰 에티켓에 대한 일상적 멘트와 함께 혹시 시간여행자가 있으면 삐삐도 꺼달라는 애교를 덧붙인다. TIFF의 프로그래머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듯하다. 프로그래머가 퇴장하자 연단을 치우는 스탭을 향해 관객이 “땡큐!”라고 고함을 쳤다. 곧이어 스폰서 광고와 트레일러가 시작되자 모든 관객이 박수로 박자를 맞추며 벌써 파티를 시작했다(TIFF는 본편 앞에 붙는 홍보물이 매우 많다). 그중 자원봉사자들이 출연한 미드나이트 전용 트레일러는 남녀노소 자원봉사자들이 피, 동물 내장, 페인트를 웃는 얼굴로 뒤집어쓰는 영상으로 구성돼 있었다. TIFF의 자원봉사자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게 분명하다. 즐기기겠다는 결심으로 무장한 동료 관객 덕분에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입안에서 살사 소스 맛이 났다. 취재기자들이 최근 언론을 위한 시사를 일반상영과 분리한 영화제쪽 결정에 불만을 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싶었다.
<로우>(2016), <멜라니: 인류의 마지막 희망인 소녀>(2016) 등으로 재부상하고 있는 좀비영화는 이번 TIFF에서도 여러 편 선보였다. 이 가운데 캐나다 퀘벡의 로뱅 오베르 감독이 연출한 프랑스어 영화 <굶주린 자들>(Les Affame′s) 은 역병에 이미 초토화된 세계를 뒤덮은 망연자실의 정서를 파고든 고요한 좀비영화다. 물론 호러니만큼 침묵은 종종 굉음으로 파괴되며 관객을 펄쩍 뛰게 만든다. 보통 좀비를 피해 시골로 도망친 도시인들이 주인공인 이 장르의 관행과 달리 <굶주린 자들>은 정부의 보호에서조차 도시보다 2순위로 밀려난 농촌 주민들의 생존 투쟁을 그린다. 비단 좀비의 창궐 탓이 아니라, 오베르 감독이 바라보는 농촌은 목가적인 낙원이 아니라 살기 고되고 척박한 땅이다. 생존자들은 더러 서로와 서로의 가족을 알고 있다. 작가의 야심을 완수하기엔 숏과 숏 사이의 긴장이 충분하지 않지만 감독이 좀비라는 소재를 소화하는 방식은 개성적이다. <굶주린 자들>의 좀비들은 조지 로메로의 그들보다 빠르고 대니 보일의 그들보다 느리다. 동시에 지성이 남아 있어 먹이를 잡기 위해 계략도 짠다. 좀비들이 넋놓은 얼굴로 가구 등을 한데 모아 마치 봉화대처럼 쌓아올리는 거대한 탑은 관련된 사건 없이도 등골에 냉기가 흐르게 한다. 생존자들이 각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소지하는 물건들은 캐릭터의 중심을 이루며 전투 신은 희귀하게도 잘려나가는 좀비의 사지를 프레임 밖으로 밀어내고 마구잡이로 몸부림치는 인간에 주목하고 있다. 서사적으로는 처음과 끝의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은 이 영화는 하나의 랜드스케이프로서 좀비 재앙을 바라본다.
피의 영화라면 1990년대 초 에이즈에 대한 사회와 정부의 관심을 촉구한 액티비스트들의 활동을 다룬 로뱅 캉피요 감독의 <120 비츠 퍼 미니트>(120 battements par minute) 가 TIFF에서도 관객의 열기를 이끌어냈지만 이미 <씨네21>이 취재한 칸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과 퀴어팜상을 받았으니 따로 쓰진 않기로 한다(그러나 이보다 심장의 박동과 유사한 리듬을 가진 영화가 있을까?). 퀴어영화로는, 칠레 출신 세바스티안 렐리오 감독이 베를린국제영화제 각본상 및 테디 베어상 수상작 <판타스틱 우먼>(Fantastic Woman) 과 신작 <불복종>(Disobedience) 두편을 동시에 TIFF 스크린에 올렸다. 트랜스젠더 오페라 가수인 다니엘라 베가가 주연한 <판타스틱 우먼>의 제목에 대해, 인터뷰 테이블에서 만난 감독은 “제목의 ‘판타스틱’은 최고로 멋진 여성이라는 의미와 함께, 트랜스우먼인 마리나가 환상의 자아를 현실로 만들었다는 뜻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30대의 마리나는 인생 후반 그녀에게서 참사랑을 발견한 남성 올란도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그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사법기관과 유족들로부터 애도할 기회조차 부정당하고 의심어린 눈초리를 받는다. 급기야 마리나에게 혐오적 폭력까지 가해진다. 영화는 마리나가 이 시련에 맞서는 태도와 사랑하는 이를 잃은 다음에도 살아갈 태세를 추스르는 과정을 서두르지 않는 스토리텔링과 강렬한 회화적 이미지의 조합으로 사려깊게 따라간다. 세바스티안 렐리오 감독의 첫 영어영화인 <불복종>에서는 레이첼 바이스와 레이첼 맥애덤스가 북런던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성장한 두 친구로 분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랍비는 남녀로 나눠 앉은 성도들을 향해 여성의 위치는 천사와 몬스터 사이임을 설교한다. 랍비의 딸 로니트(레이첼 바이스)는 홀아버지를 등지고 마을을 떠나 뉴욕에서 포토그래퍼로 생활하던 어느 날 비보를 듣고 내키지 않는 귀향길에 오른다. 로니트를 맞아주는 유년의 친구이자 아버지의 수제자 도비드(알레산드로 니볼라)와 에스티(레이첼 맥애덤스)의 표정은 어째 석연치 않고, 로니트는 두 사람이 부부가 됐다는 사실에 보통 이상의 놀라움을 표한다. 구속을 박차고 나간 레이첼 바이스가 ‘불복종’의 주체인 줄 알았던 관객은 레이첼 맥애덤스에게 점점 시선을 빼앗기게 된다. 가발과 단정한 옷안에 갇혀 있던 에스티는 “네가 사는 뉴욕의 방을 수없이 그려보았고, 언제나 시차를 헤아렸다”고 말하며 로니트가 고향을 떠난 숨겨진 이유로 우리를 인도한다. <불복종>은 <모스트 원티드 맨> <스포트라이트>에 이어 ‘여자친구’ 역에 머물기엔 넘치는 배우 레이첼 맥애덤스의 진수를 알리는 영화다.
1920년대 실화에 기초한 <마스턴 교수와 원더우먼들>(Professor Marston and Wonder Women) 은 섹슈얼리티의 탐구가 21세기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줬다. 올해의 슈퍼히어로영화로 꼽힐 가능성이 농후한 <원더우먼>의 실제 기원을 소개한 영화이기도 하다. 1920년대 하버드대 및 여성들의 등가물이었던 레드클리프대 심리학 교수였던 윌리엄 몰튼 마스턴(루크 에반스), 그의 아내이자 동료학자인 엘리자베스(레베카 홀), 수제자인 또 다른 여성(코니 브리튼)은 합의하에 완벽한 삼각형의 관계를 이루고 학계의 추방을 무릅쓰며 이성애 가족제도에 제어되지 않는 사랑과 가정생활을 추구한다. 마스턴이 창조한 도발적 캐릭터 원더우먼은 두 여인이 지닌 지성과 바이섹슈얼한 욕망, 그들이 감수한 사회적 위장, 세 사람이 탐닉한 성적 유희를 반영한 피조물이었다. 안젤라 로빈슨 감독의 연출은 TV영화의 밝고 단정한 문법 안에 머무르지만, 페미니즘의 여러 이슈를 건드리는 재치 있는 대사와 희생자 서사에 투항하지 않는 담담한 태도가 끝까지 관객의 주의를 놓치지 않는다. 영화는 결국 사회와 청소년에 유해하다는 항의로 마스턴이 <원더우먼> 코믹스의 작가 자리를 빼앗기고 나서 원더우먼도 슈퍼파워를 잃었음을 자막으로 부언하고 있다.
80대 거장들의 다큐멘터리
다큐멘터리를 사랑하는 TIFF 관객의 초점은 미국과 프랑스를 대표하는 거장 프레더릭 와이즈먼과 아녜스 바르다의 신작이었다. 정신병원부터 파리의 스트립댄스 클럽까지 현대 서구의 각종 기관(institution)을 연구해온 작가 와이즈먼은 <내셔널 갤러리>에 이어 <뉴욕 라이브러리에서>(Ex Libris: New York Public Library) 에서는 뉴욕 공공 도서관으로 카메라를 가져간다. 본관을 비롯해 뉴욕 전역의 분관을 포함한 13개 로케이션에서 촬영된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는 그의 영화가 언제나 그랬듯이 책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도서관이라는 조직의 메커니즘과 그것을 운영하는 인간들의 필요와 가치관에 대한 드라마다. 영화는 뉴욕 도서관에서 열린 리처드 도킨스의 강연으로 문을 연다. 무신론자들이 공개적으로 신념을 피력해 인구집단으로서 정치인들에게 어필해야 할 필요성을 논파하는 도킨스의 설득력 있는 언어에 이어 카메라는 전화상담 중인 전문 사서들의 업무를 엿듣는다. “예. 선생님, 그런데 유니콘은 상상의 동물이란 건 아시지요?” “제가 당신이라면 18세기 네덜란드 이민들에 관한 리서치는 이런 순서로 범위를 좁혀 가겠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지역주민의 필요에 부응하는 도서관의 다양한 활동을 관찰함으로써 도서관을 종이책을 보존하는 수장고로만 인식하는 편견을 기각시켜나간다. 도서관에서 영어를 못하는 이민들은 언어를 배우고 실업자들은 직업 설명을 접하고, 방과 후 갈 곳 없는 빈곤층 아동들은 교육 프로그램을 만난다. 와이즈먼이 보기에 공공 도서관은, 특히 대도시의 도서관은, 디지털 네트워크에서 소외된 인구에게 정보의 평등을 실현하고 이민들의 적응을 돕는다는 점에서 오늘날 가장 민주적인 기구다. 단지 쉴 곳을 찾는 노숙자이건 누구건 신분증이 없어도 도서관은 축적된 문화적 자산을 공평히 개방하고 기회를 제공한다. 영화제 말미에 TIFF에 도착한 프레더릭 와이즈먼 감독은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뜻한 적은 없지만 공교롭게도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는 트럼프 정권이 대변하는 모든 가치의 안티테제가 되었다고 쓸쓸히 미소지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와이즈먼 감독의 다큐멘터리는 고유한 방식으로 삶의 사기를 진작시켜 주었다. 인간은 여전히 유익함을 타인과 나누고 다음 세대에 전하기 위해 의기투합하고 유효한 방도를 찾고 있다! 세상은 살 만한 곳이다!
한편 아녜스 바르다 감독은 <얼굴과 장소>(Faces and Places) 를 위해 젊은 사진가 JR과 함께 밴을 몰고 프랑스 곳곳을 누빈다. 핸드드로잉 애니메이션으로 연출된 오프닝 크레딧이 보여주듯 33살의 꺽다리 사진가와 88살의 자그마한 노감독은 영화 내내 사랑스러운 듀오 캐릭터로 매력을 발휘한다. 둘 사이의 러닝 개그는 바르다가 JR이 늘 쓰는 선글라스를 벗기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두 사람과 스탭들은 여정에서 만난 일하는 보통 사람들의 얼굴을 찍고 곧바로 밴에 탑재된 프린터로 대형 사진을 출력해 그들이 일하고 생활하는 장소의 벽에 바른다. 퇴거를 거부하고 수십년간 살아온 집, 농장의 헛간, 부둣가의 컨테이너, 카페. 본인의 대형 포트레이트에 감싸인 일터와 집을 바라보는 남녀노소의 눈은 잔잔한 경이감으로 반짝인다. 일종의 환경미술인 셈인 바르다의 작업은 불멸성을 고집하지 않는다. 해안의 암벽에 바르다 감독이 바른 젊은 날 친구의 사진은 하룻밤이 지나자 파도에 씻겨나간다. 마술처럼 이미지의 사이즈를 변화시키고 맥락을 찾아 대상에서 새로운 미와 숭고를 발견하는 일. 다름 아닌 시네마의 일이다.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 <해변의 아녜스> 그리고 <얼굴과 장소> 같은 후기 영화에서 아녜스 바르다가 각본과 우연, 이미지와 내러티브를 직조하는 방식은 나로서는 불가해하다. 에세이 필름이라는 장르의 이름만으로는 이 마법을 설명할 수 없다. 심오하고 난해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너무도 가볍고 투명해서 만질 수 없는 형식이다. 어쩌면 세상의 무수한 진실과 아름다움을 다 찍고 싶은 천진한 야심, 노안에 비친 흐린 세계가 어떤지 관객과 공유하려는 의욕이 곧 아네스 바르다의 스토리이자 형식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나는 이런 생각 따위는 하지 못하고 그저 흐뭇하게 웃고 또 웃다가 마지막에는 극중의 아녜스 바르다 감독이 권하는 대로 호수나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정 말미에 두 사람을 바람맞힌 장 뤽 고다르 감독의 무례에 바르다 감독과 함께 속상해하면서(이 문전박대는 JR의 해몽대로 바르다의 내러티브를 파괴하려는 장 뤽 고다르의 시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엔딩 크레딧에 글썽해진 이유는 서운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의 여정이 나눠준 희열 때문이었다.
기다림의 끝
매년, 뜸해야 격년으로 영화제 카탈로그에 작픔을 올리는 노장들이 있는가 하면 비범한 비전을 세상에 보여주고 나서 몇년이나 소식이 없는 젊은 감독도 있다. <자마>(Zama) 는 <머리 없는 여자>(2008) 이후 9년의 침묵 끝에 아르헨티나의 루크레시아 마르텔 감독이 베니스국제영화제와 TIFF에서 공개한 신작이다. <자마>는 와병설, 아마존강 탐험설이 나돈 감독의 잠적기와 어울리게도 기약 없는 기다림과 그것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을 다루고 있다. 안토니오 디 베네데토의 모더니즘 동명 소설에 기초한 <자마>의 주인공은 18세기 파라과이 아순시온 식민지에 파견된 스페인 치안 판사 디에고 드 자마(다니엘 지메네즈 카초). 더위와 무력감에 절여진 그는 전출을 청원하는 편지를 써서 몇 차례나 총독에게 부탁했으나 왕실의 답장은 오지 않는다. 게다가 총독은 등장 신마다 다른 배우가 연기해 관객을 자마의 교란된 시간감각 속으로 끌어들인다. 땀에 젖은 몸에 한사코 모자와 하얀 가발을 얹고 다니는 자마의 가슴에는 악명 높은 도적 비쿠나의 귀가 걸려 있지만 과연 도둑이 죽었는지, 원래 존재하긴 했는지 불분명하다. 가장 불행한 버전의 <고도를 기다리며> 같은 이 이야기는 극단적 기다림으로부터 최면에 걸린 듯한 착란으로 변질되어가는데, 루크레시아 마르텔은 관객이 그것을 ‘사건’으로서 구경하게 만들지 않는다. 대신 전경, 중경, 원경의 구성과 사운드를 절묘하게 구성하고 인물의 화법을 조금씩 무너뜨려 관객의 지각도 열병에 감염시킨다. 자마가 총독에게 절망스런 통보를 듣는 장면에서는 난데없이 하얀 라마가 화면 안으로 들어와 낙담한 주인공의 등을 기웃거리는데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지? 환각인가?’라고 의문을 품는 대신 약간 취한 기분으로 껄껄 웃고 마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은 채 <지옥의 묵시록>에서 커츠 대령의 여정을 경험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고, 마지막 장에서는 짐 자무시의 <데드맨>에서 그랬던 것처럼 반쯤 살고 반쯤 죽은 상태로 연옥을 향해 흘러가는 인물 옆에 의식을 누이게 된다.
TIFF는 거대해서 갈증이 가시지 않는 영화제였다. 알렉산더 페인의 <다운사이징>(Downsizing) 을 마지막으로 관람하고 떠나오는 길에 머릿속을 점령한 것은 본 영화들의 여운이 아니라 게을러서, 소문을 뒤늦게 접해서 미처 보지 못한 상영작들의 긴 명단이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미주리주 에빙 외곽의 세개의 광고판> <레이디버드> <머드바운드> <호스타일> 그리고 <미세스 팡> 그리고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