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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맘충의 역습 - 모성 복수극의 새로운 국면 그린 <비밀은 없다>

“광기의 모성애를 담은 영화.” <비밀은 없다>에 대한 한 기사의 제목이다. 완전한 오독이지만, 이것이 일반적인 반응인 것 같다. 사실 <비밀은 없다>는 광기에 대한 영화도, 한국 사회가 흔하게 상상하는 모성에 국한된 영화도 아니다. 익숙하지 않은 기이한 여성들이 종횡무진하는 영화로서, 지금까지 없었던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는 작품으로서, 그리고 ‘페미니즘 리부트’의 시대에 때맞춰 도착한 페미니즘 텍스트로서, 우리는 <비밀은 없다>의 ‘어머니 연홍’을 좀더 적극적으로 읽어낼 필요가 있다.

한국 대중문화에서 볼 수 있는 지배적인 어머니의 이미지란 두 가지이고, 그 둘은 모두 배우 김혜자의 얼굴로부터 읽어낼 수 있다. 하나는 드라마 <전원일기>에 등장하는 자애롭고 지혜로운 ‘어머니 김혜자’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의 전통적인 모성 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재현하는 <마더>(2009)의 김혜자다. ‘마더 김혜자’는 모성을 언어화되지 않는 광기로 그려내면서 그 주변을 배회하는 수많은 모성 괴물들과 친연성을 보인다. 아들과의 분리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올가미>(1997), <소름>(2001) 등의 모성 공포물과 연결되고, 자식을 위해 맹목적으로 달려든다는 점에서 <에미>(1985)와 <오로라공주>(2005)를 비롯한 다양한 모성 복수극들과 만난다.

그러나 최근 한국 사회에는 제3의 어머니 이미지가 등장했다. ‘맘충’이다. 이들은 이 시대의 철없고 개념 없는 ‘김치녀’의 다른 초상이라는 점에서 진정한 모성에 등극하지 못한다. 그리고 어머니의 외피를 가졌으되‘진정한 어머니’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벌레’(蟲)로 전락했다. 맘충은 지나치게 간섭하고 ‘고나리질’을 하는 팬덤의 다른 이름이거나, 굳이 아이를 쳐들고 나와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는 이기적 존재들이다.

이처럼 한국 사회는 ‘진정한 어머니’에 대한 명확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그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존재는 쉽게 혐오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맘충의 등장은 모성 이데올로기의 오작동을 폭로한다. 모성은 자궁에 자연적으로 부착된 본성이며, 그렇게 때문에 여성은 곧바로 모성으로 치환되었던 시기가 끝나버린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숭고함과 괴물성만이 동전의 양면으로 존재하던 때를 지나 ‘찌질한 엄마’의 이미지가 상용화되기 시작했다. 이건 사회가 규범적 어머니를 재생산하는 과정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적어도 ‘위대한 모성’이란 더이상 여성의 설정값이 아닌 셈이다.

이것은 미친년 이야기가 아니다

<비밀은 없다>의 연홍은 제3의 어머니, 맘충에 가깝다. 어른이 되지 못한 어머니, 멍청한 어머니, 따라서 딸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어머니. 연홍이 모성 복수극의 다른 어머니들과 완전히 달라지는 지점은 여기다. 윤여정 주연의 <에미>에서 <오로라공주>와 <친절한 금자씨>(2005)를 지나 <공정사회>(2012)와 <돈 크라이 마미>(2012) 등으로 연결되는 모성 복수극은 대체로 전통적인 모성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고 있다. 이들 영화에서 이 성스러운 본성이 실패하고 미끄러지는 것은 1차적으로는 어머니의 부족함 때문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이 사회가 타락했기 때문이다. 21세기 모성 복수극의 원형을 제공한 ‘에미 윤여정’이 말하듯이 “에미는 새끼를 지켜야 한다”. 그러나 언제나 “환경이 아쉽다”. 그럼에도 어머니들은 “딸에게 용서를 빌”어야 한다. 그 환경을 초월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성 복수극들은 이 사회의 제도와 법이 어떻게 어머니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못하는가를 강조하면서 그 제도와 법 외부에서 복수를 감행하는 어머니를 묘사하는 데 집중해왔다. 그리고 그렇게 이성의 언어를 초과하여 존재한다고 상상되었기 때문에 모성 복수극은 한편의 ‘미친년 이야기’가 되곤 했다. 하지만 맘충은 자격 미달의 존재이며 따라서 이 사회가 포착할 수 없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도 아니다. 그래서 연홍은 다른 엄마들과 달리 미치거나 광기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가 딸의 장례식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정치쇼를 보면서 내뱉는 말과 그 톤을 기억해보자. 나지막하게 깔리는 “염병”. 이건 미친 여자의 대사가 아니다.

연홍은 ‘미친년’이라기보다는 ‘멍청한 년’이고, 그렇기 때문에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며” 앞뒤 재지 않고 질주한다. 그것은 이 사회가 그려내는 맘충적 속성의 데칼코마니다. 그러면서도 연홍은 동시에 이 사회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있다. 다시 한번 “염병”. 이건 자신이 놓인 상황이 얼마나 ‘염병스러운지’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 여자의 언어다. 이 더러운 경상도의 정치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라도 출신임을 숨겨야 했던 것과 같은 수많은 ‘적응의 기억’으로부터 그녀가 체화하고 있는 것은, 그 누구도, 아이의 아버지까지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지배적 규범의 민낯이다.

가부장제 매트릭스 붕괴시키기

연홍이 복수하는 방법 역시, 그러므로 다르다. 연홍은 그 누구도 물리적으로 처단하지 않는다. 기존의 복수하는 어머니들은 법과 제도라는 남성적 상징계를 통해 대변되지 못하기 때문에 제도 밖에서 개인적이고 물리적인 복수법을 택했다. 칼로 난자하거나 고환을 제거하거나 차로 깔아뭉개버리는 식이다. 연홍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녀는 대신 남편 김종찬과 그의 선거로 대변되는 남성 중심적 상징계를 내파하기로 결정한다. 한명의 남성을 처단하는 것이 자신을 맘충으로 만들고 딸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이 사회의 구조를 뒤엎는 데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영화의 사악한 남자들과 달리 김종찬이 오히려 순진한 것은 중요하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채로 체제의 운영에 복무한다. 알지도 못하면서 딸의 청부살인을 사주하듯이.

그리하여 연홍은 “어디 한번 끝까지 살아보”라며 섹스 동영상을 업로드해 김종찬의 삶을 작살내버린다. ‘맘충의 역습’이라는 바이러스가 이 상징계에 업로드되는 순간, 가부장제의 매트릭스는 붕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운영체제가 무너진 이후에는 새로운 운영체제, 즉 새로운 성체계(gender system)가 올 것이다.

눈앞에서 가부장제라는 운영체제가 그 ‘비밀’을 드러내며 내파되는 것을 목도하는 쾌감이 <비밀은 없다>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한다. ‘비밀은 없다’란 말은 이 허구의 세계를 지탱하는 어떤 필연성, 원칙, 고귀함, 유의미한 규범, 혹은 그럴듯한 우주의 질서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세계의 설정값으로 주어진 착한 딸, 지혜로운 어머니, 든든한 아버지 따위는 없는 것이다. 대신 언제나 규범으로부터 미끄러지지만 나름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딸, 어머니, 아버지 혹은 수 많은 다른 존재들이 있을 뿐이다.

페미니즘이 일종의 붐을 형성하고 있는 지금. 대한민국의 다양한 창(윈도+스크린+브라운관+스마트폰 액정)의 표면에서는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IMF 이후 20년 가까이 펼쳐진 ‘한남영화’에 대한 반성문인 <아가씨>(2016)의 등장에 이어서 10대 소녀들을 그린 <우리들>(2015)과 영국 여성참정권 운동을 다룬 <서프러제트>(2015)가 연이어 개봉하더니, TV에서는 <디어 마이 프렌즈>(tvN, 2016)가 방영되었다. 여기에 발맞춘 듯 <씨네21>은 페미니즘에 대한 특집을 마련했다. 그리고 이 이상한 영화, <비밀은 없다>가 개봉한 것이다. 물론 흥행에 대한 기대는 처참히 무너졌다. 하지만 좌절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쩌면 한국 여성영화의 역사는 <비밀은 없다>와 다양한 텍스트들이 엉켜 있는 2016년 6월부터 다시 쓰여질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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