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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 순수를 넘어선 숭고

줄리엣 비노쉬, 줄리 델피, 이렌 야곱… ‘3인의 여배우 특별전’ 1월7일부터 부산 영화의전당에서

<투 데이즈 인 뉴욕>

폴란드의 거장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은 <베로니카의 이중생활>(1991)을 기획하면서 처음에는 이렌 야곱이 아닌 줄리엣 비노쉬를 주인공 역할로 캐스팅했다고 한다. 당시 비노쉬는 레오스 카락스의 <퐁네프의 연인들>(1991)을 촬영하던 중이었는데, 촬영이 길어지면서 이 역할은 자연스레 야곱에게로 넘어갔다. 뒤에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은 프랑스의 국가 이념을 주제로 한 시리즈물을 완성하면서, 비노쉬와 야곱을 각각 ‘자유’ 편과 ‘박애’ 편의 타이틀 롤로 캐스팅한다. 여기에 ‘평등’ 편을 맡게 된 줄리 델피까지, 세 여배우는 90년대 유럽 예술영화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부산 영화의전당에서는 2014년 첫 기획전으로 삼색 시리즈의 여배우들을 모아 ‘3인의 여배우 특별전’을 개최한다. 행사는 1월7일부터 2월5일까지 영화의전당 내 시네마테크에서 진행된다.

<나쁜 피>

<마리아에게 경배를>

줄리엣 비노쉬, 강인한 캐릭터

1985년 장 뤽 고다르가 연출한 <마리아에게 경배를>에서 줄리엣 비노쉬는 단역이지만 처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이번 특별전에는 <마리아에게 경배를>을 비롯해 80년대 필모그래피의 중요 축을 차지하는 작품인 <랑데부>(1985)와 <나쁜 피>(1986)가 모두 상영된다. 앙드레 테시네의 <랑데부>를 통해 비노쉬는 당시 가장 유망한 신인 여배우로 주목받는다. 이 영화 속 비노쉬의 모습은 21살에 불과했던 이 여배우가 얼마나 당차고 신선한 에너지를 뿜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연극배우이자 인문학 교사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비노쉬는 어려서부터 연기 수업을 받았다. 그 기량이 이 작품에서 유감없이 드러난다. 덕분에 1986년 프랑스 국내 연기상인 로미 슈나이더상을 수상했고, 이후 <프라하의 봄>(1988)에 캐스팅돼 대니얼 데이 루이스와 연기하는 영광을 얻었다. 물론 80년대의 비노쉬를 언급하면서 카락스와의 인연을 빠트릴 수 없다. 성공적인 데뷔를 했지만 그녀가 확고한 캐릭터를 얻은 것은 전적으로 <나쁜 피>와 <퐁네프의 연인들> 덕이다.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그녀는 감독의 뮤즈, 그리고 시네필로서의 발군의 자질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그리고 이 작업을 통해 프랑스 영화계의 ‘앙팡 테리블’(무서운 신인)로 자리매김한다.

2009년 방한 당시 비노쉬는 자신이 외국감독들과 작업을 많이 하는 편이라며 “조금은 덜 프랑스적인 배우”라고 조심스레 소개한 적이 있다. 실제로 90년 이후 그녀의 출연작 리스트는, 길들여지길 거부한 채 끊임없이 새로운 형식으로 채워졌다. <세 가지 색: 블루>(1993)와 <잉글리쉬 페이션트>(1996)가 대표적 작품들이다. 각각의 영화는 베니스와 베를린에서 수상하며 그녀를 국제적 여배우로 올려놓는다. 시몬 시뇨레 이후 37년 만에 처음으로 비노쉬는 <잉글리쉬 페이션트>를 통해 프랑스 여배우가 오스카에서 수상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 그녀의 필모그래피는 ‘강인한 캐릭터와 로맨틱한 시대정신의 조우’로 정리할 수 있다. 할리우드영화 <초콜렛>(2000)에서부터 칸영화제 주연상에 빛나는 <사랑을 카피하다>(2010)까지 다양한 장르를 오가는 거장들의 작품이 그녀를 통해 한곳에 모인다. 미 하엘 하네케 감독의 유일한 흐트러진 작품이라고 평가받는 <미지의 코드>(2000)에서도 그녀는 빛을 발하며, 아벨 페라라의 <마리>(2005)에서는 예수와 마리아의 관계를 인간적으로 조망하는 데 힘을 보탠다. 허우샤오시엔의 <빨간풍선>(2007)이나 키아로스타미의 <쉬린> 역시 빠트릴 수 없는 훌륭한 작품들이다. 이번 특별전에는 최근작 <엘르>(2011)와 <까미유 끌로델>(2013)도 함께 상영되는데, 비노쉬가 출연한 총 열네편의 영화 중 어느 작품을 고르더라도 후회는 없을 것이다. 호기심과 열정으로 가득 찬 그녀의 작품들은, 여전히 그녀가 이 시대 최고의 프랑스 배우란 사실을 증명해준다.

<유로파 유로파>

줄리 델피, 독립적이면서 실험적인

줄리 델피 또한 연극배우인 부모의 영향으로 어릴 시절부터 아방가르드 연극이나 음악, 영화 등을 습득하며 자랐다. 그녀가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 선 것은 1976년으로, 고작 일곱살 때였다고 한다. 아버지의 동행 역할이었고, 이후 고다르의 <탐정>(1985)으로 스크린에 정식 데뷔했다. 이번 기획전에는 그녀의 투명한 아름다움을 여실히 드러내는 1990년작 <유로파 유로파>를 비롯한 총 일곱편이 초대된다. 사실 줄리 델피의 모습은 비노쉬의 섹션에 속한 <나쁜 피>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델피는 주인공 알렉스의 전 여자친구 역을 맡았는데, 비노쉬 못지않은 아름다움을 뽐낸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삼색 시리즈 <세 가지 색: 화이트>(1994)에서 주연을 맡은 이후, 델피는 거장들과 작업하며 점차 배우로서 더 단단해진다. 하지만 그녀는 프랑스영화의 로맨틱 뮤즈 역을 거부하고 90년대 중반 미국으로 건너가는 걸 택한다. 뉴욕에서 영화학교를 다니며 단편을 찍기도 하고, 로스앤젤레스에 살면서 2001년에는 미국 시민권도 취득한다. 미국에서 그녀는 디즈니가 제작한 대작영화 <삼총사>(1993)에도 출연하지만 비교적 독립적이면서 실험적인 작품 위주로 필모그래피를 채워나간다. 대표작이 바로 <비포 선라이즈>(1995)다. 비엔나에서 이뤄진 하룻밤의 낭만적 만남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하고, 후속작 <비포 선셋>(2004)과 <비포 미드나잇>(2013)을 만들어낸다. 이중 <비포 선셋>으로 델피는 다른 두명의 작가와 함께 오스카 시나리오상 후보에 오르고, 이러한 경력을 통해 점차 ‘여성감독’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번에 초대된 <투 데이즈 인 뉴욕>(2012)은 델피의 다섯 번째 장편 연출작이다. 특유의 페미닌한 감성과 함께 영화 전체에 흐르는 독립적 뉘앙스, 저돌적 솔직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더스트 오브 타임>

이렌 야곱, 신중한 행보

이렌 야곱의 영화는 총 다섯편 상영된다. 물리학자인 아버지를 두었지만, 그녀 역시 십대 때부터 연극을 통해 기초를 다졌다. 1987년 그녀는 루이 말 감독의 <굿바이 칠드런>에서 작은 역을 맡는데, 이것이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눈에 들어 이후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 캐스팅된다. 당시 야곱은 24살의 어린 나이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녀 역시 <세 가지 색: 레드>(1994) 다음에 해외 제작 영화나 영어 대사 위주의 작품에 초점을 둔다. 이번에 상영되는 <지금까지의 내 인생>(1999)이나 <스파이 게임>(1999)이 그런 맥락에서 생각할 영화다. 하지만 화려한 초기의 경력에도 불구하고 이후 그녀는 신중한 작품 선택으로 출연작 수가 많지 않다. 다만 1995년 <구름 저편에>에 참여한 뒤 야곱은 필모그래피 선택의 폭을 조금 넓힌다. 드라마뿐 아니라 코미디나 액션영화에도 참여하고, 다양한 국적의 연출자를 택하는 등 거장뿐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감독의 작품에도 출연했다. 그중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더스트 오브 타임>(2008)은 최근작 중에서도 비교적 무거운 편에 속하는 작품이다.

세 여배우 모두 파리 태생이지만 이후 국제적으로 영역을 넓힌 것, 그리고 연기뿐 아니라 기타 예술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낸 점 등 여러 면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80년대 후반, 줄리엣 비노쉬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을 거절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난 사실 스필버그에게 ‘아니요’란 말을 한 적이 없어요. 다만 키에슬로프스키와 카락스에게 ‘네’라고 답한 것밖에는.” 셋 모두 포기하기보다는 스스로 선택하는 인생을 살아온 여배우들이다. 그녀들의 노력에서 아름다움과 함께 숭고한 열정의 미학을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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