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 감독이 한국영화아카데미가 제작하는 3D 단편영화 <유령>을 촬영 중이다. <시>와 <로맨스 조>의 이다윗, <전설의 주먹>에서 호흡을 맞춘 박정민과 박두식, 그리고 최근 버스커버스커의 2집 뮤직비디오에 출연하며 ‘아오이 유우의 도플갱어’라 불렸던 손수현이 출연해 온라인 카페 채팅방을 둘러싼 소외된 학생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구체적으로는 바로 지난해 세상을 들썩이게 했던 이른바 ‘신촌살인사건’을 영화화하는 것. 류승완 감독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그 사건을 다양한 시선으로 조망하기 위해 3D라는 방법을 택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끝나고 열흘 정도 <유령>에 매달린 그는 아마도 그 결과물을 가장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일 것이다. 내년 상반기 극장 개봉을 목표로 그를 이어 곧 김태용, 한지승 감독도 촬영을 시작해 3D 옴니버스영화로 완성될 예정이다.
“아주 어지럽고 좋아요. (웃음)” 검은색 3D 입체안경을 쓴 류승완 감독이 서울 고덕동 주공아파트의 한 단지에 자리한 촬영현장으로 안내한다. 야심한 시각, 곳곳에 조명기가 설치돼 있는 놀이터가 얼핏 여느 현장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처음 찾은 3D 입체영화 촬영현장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역시, 다른 현장에서 흔히 보던 조그만 모니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모니터다. 모니터의 귀퉁이에는 자그마한 검은색 테이프가 붙어 있다. 그것이 바로 모니터의 표면으로, 심도를 파악하는 기준점이 된다. 그렇게 촬영장소인 아파트 놀이터의 전경을 담아낸 모니터를 3D 입체안경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가운데, 김영노 스테레오그래퍼(stereographer)가 3D 리그(rig) 컨트롤러를 조절함에 따라 그네가 튀어나오고 정글짐이 뒤로 물러나는 마술이 펼쳐진다. 어지럽다는 류승완 감독의 농담 섞인 얘기처럼 3D로 펼쳐진 다른 공간감이다. 뭐랄까, 연기하는 인물이 없는데도 그 깊이의 조절만으로 숏의 정서가 전혀 달라지는 기분이다. 무척 학구열이 불타게 만드는 현장이랄까.
신촌살인사건, 모호하고 극단적인
<유령>은 지난해 4월30일 저녁,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에서 박모씨의 사주를 받은 고등학생 이모군(16)과 대학생 윤모씨(18)가 대학생 김모씨(20)를 흉기로 무려 40여 차례 찔러 살해했던 이른바 ‘신촌살인사건’을 영화화했다. 그들은 고등학생 홍모양(15)이 망을 보는 가운데 칼과 쇠막대로 폭행하여 살해한 뒤 시신을 근처 풀숲에 유기했다. 당시 피해자 지인들의 인터넷 제보로 사건의 정황이 알려지게 됐는데, 그들 모두 인터넷 ‘사령카페’ 소속 회원들이었다. 박모씨는 사령카페에 가입한 뒤부터 자신을 ‘악령계에서 인증을 받은 진짜 마녀’로 자칭하고 다니며 자신이 영적인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고, 그녀의 남자친구인 김모씨 역시 호기심에 사령카페에 가입했지만 비정상정인 분위기 때문에 발길을 끊었다고 한다. 그렇게 김모씨가 여자친구 박모씨로 하여금 카페 활동을 그만두게 하려고 하면서 갈등이 지속됐던 것. 박정민과 이다윗은 살해 작업을 실행에 옮기는 사령카페 회원으로, 박두식과 손수현이 각각 살해당하는 회원과 그 여자친구로 출연한다.
당시 사건은 담당 경찰도 그 실체를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의문투성이였다. 수십 차례 찔러 살해한 방식 등 납득하기 힘든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진 아이들인지, 왜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행동으로 옮기려 했는지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모호해져갔다. 그렇게 그 사건은 인터넷 오컬트 문화를 배경으로 일어난 우리 사회의 지극히 어두운 단면으로 기억됐다. 배우로 참여한 박정민, 이다윗, 박두식, 손수현 역시 그 사건을 접했을 때의 충격이 기억나는 듯했다. “그래서 더 표현하기 힘든 연기”라는 게 그들의 공통된 얘기였고, 박정민은 특별히 ‘아이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자신이 출연한 <파수꾼>(2010) 촬영 때가 떠오른다고 했다. 그렇게 그들은 운명의 장소인 놀이터에서 맞닥뜨리게 된다. 남자친구와 싸우는 손수현을 보고 위장용 안경에 군복을 입은 박정민이 달려들려고 하자 이다윗이 살짝 막아선다. 그런 그를 마치 무술하듯 위협해 떼어놓고 저벅저벅 걸어가는 박정민의 모습은 (류승완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택시 드라이버>(1976)에서 대통령 선거캠프에 찾아간 트래비스(로버트 드 니로)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고 보면 흠모해온 여자로부터 거절당한 채 극도의 고독과 절망 속에서 권총을 사고 체력을 단련하여 급기야 사회를 청소하겠다고 결심하는 트래비스의 비정상적인 행동도 한편으로 무척 오컬트적이다.
3D 리그 컨트롤러(IOD 컨트롤러)를 들고 있는 김영노 스테레오그래퍼
3D 미학과 새로운 감각적 경험
3D 입체영상 현장을 이해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숙지해야 할 용어들이 있다. 먼저 ‘리그’란 3D 입체영상을 촬영하기 위해 2대의 카메라를 정밀하게 결합시키는 특수장비를 말한다. 그것만으로도 거의 30∼40kg에 달하기에 필연적으로 기동성의 문제를 야기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3D 단편실사영화인 최익환 감독(현 한국영화아카데미 원장)의 <못>(2009)을 촬영하기도 했던 김영노 스테레오그래퍼는 “과거 <아바타>의 경우 거의 모든 촬영이 스튜디오 안에서 이루어졌기에 그런 문제가 없었지만, <유령>처럼 다양한 로케이션 촬영을 하는 영화들은 염두에 둬야 할 문제”라고 말한다. 그렇게 두 카메라를 ‘싱크’시키면서 2개의 렌즈로 촬영을 하게 되는데, 렌즈간 거리를 ‘축간거리’(IOD, Interocular Distance)라 부르며, 그 거리를 넓힐수록 강한 입체감이 생긴다. 그 입체감의 기준점이 바로 ‘0점’(convergence)이다. 만족스런 입체감은 돌출감과 깊이감의 균형에서 온다. 스테레오그래퍼는 현장과 모니터를 주시하면서 리그 컨트롤러를 조정하고 그 3D 정보를 감독과 촬영감독에게 전달한다. 그렇게 한컷의 촬영이 끝나면 감독과 배우들이 촬영분량을 확인하기 위해 모두 3D 입체안경을 쓰고 모니터를 쭉 둘러싸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마치 거대한 모니터 앞에서 숨은그림찾기를 하는 사람들 같다.
<유령>이 첫 테이프를 끊은 3D 옴니버스영화는 한국영화아카데미의 카파플러스(KAFA+, 전 ‘영화인교육센터’) ‘NEXT D’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3D 입체영화가 이제 ‘교육’ 차원이 아닌 상업적인 ‘확산’ 일로에 있는데, 기존 유명 감독들이 참여해서 극장 개봉을 하게 되면 한국 영화계에도 중요한 계기가 되리라 생각했다”는 최익환 원장은 “그들에게 무작정 프로젝트를 맡긴 게 아니라, 관심 있는 감독들과 긴 협의과정을 거쳐 감독과 PD, 그리고 주요 스탭들이 일정기간 의무적으로 3D 교육을 이수해 뚜렷한 방향성을 갖고 시작하도록 했다”고 말한다. 김영노 스테레오그래퍼 또한 “3D 입체영화는 예산이 많이 든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준비와 숙련도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이번 옴니버스영화를 통해서 3D로 만드는 극영화도 20억원이나 30억원 정도, 즉 기존 극영화들 수준으로 만드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인식을 주면 좋겠다”고 말한다. 실제로 각 에피소드에 책정된 예산은 4억원 수준으로 총제작비가 12억원 정도다.
3D 입체안경을 쓰고 촬영분량을 확인하고 있는 류승완 감독, 손수현, 박두식(오른쪽). 축간거리의 조정을 통한 깊이...
이번 영화가 극장 개봉을 하게 되면 <나탈리>(2010)와 <미스터 고>(2013)에 이어 촬영과정부터 3D로 진행한 세 번째 국산 극장개봉 3D 입체영화가 된다(<7광구>는 2D 촬영하여 컨버팅). 말하자면 한국 영화계는 아직 3D 흥행작을 내놓지 못했다. 3D 시스템은 비싸다는 익숙한 선입견도 여전하다. 하지만 류승완 감독은 “한국 영화계의 많은 창작자들이 3D만의 매력과 미학을 점점 더 많이 알아갈 것”이라 내다본다. 김태용 감독 또한 이번 프로젝트와 별개로 준비 중인 장편 <신과 함께>를 3D로 작업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익환 원장은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 “영화기술의 ‘넥스트’가 뭘까 계속 고민 중이다. 기술적 진보만이 정답은 아니지만 미학의 발전과 함께 가는 건 분명하다. 그걸 어떻게 산업적으로 안착시킬 수 있을지, 3D 입체영화를 한번 제대로 ‘경험’해보자는 취지”라고 말한다. 물론 “그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관객의 새로운 감각적 경험”이라고 덧붙인다. 그래서 여러모로 2014년이 한국 영화계의 실질적인 3D 원년이 되지 않을까, 하는 전망도 그리 틀린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한국 영화계 또한 입체적으로 진화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