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감에서 10편 뽑았다. 극장에서 대접 제대로 못 받고, 관객과 제대로 대면하지 못한 영화로 10편 뽑았다. 눈에 활기 불어넣고 결국엔 가슴치게 만드는 영화가 어디 10편뿐이랴. 즐감에서 자신만의 상영작을 직접 프로그래밍해보시라.
<레드>
감독 로베르트 슈벤트케 / 출연 브루스 윌리스, 메리 루이스 파커
호시절 다 갔다고 낙담하는 아저씨들을 향한 대책없는 회춘가. 전직 CIA 요원인 프랭크(브루스 윌리스)가 꿈꾸는 건 과거의 영광도, 두둑한 연금도 아니다. 오십줄에 들어선 이 대머리 아저씨가 총탄 세례를 뚫고 전진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소설에나 나올 법한 불꽃 같은 로맨스를 위해서다. DC 코믹스의 동명 만화가 원작. 바주카포에 맞서 권총을 들고, 꽃꽂이하다 기관총을 뽑는 머리 희끗한 노인들의 못 말리는 액션이 끝내준다. 단, 프랭크 수법을 좇아 국민연금관리공단에 전화 걸어 여직원에게 돈 못 받았다고 수작 걸지는 말 것. 사랑은커녕 말년에 옥살이한다.
<더 코브: 슬픈 돌고래의 진실>
감독 루이 시호요스 / 출연 리처드 오배리
돌고래 수가 급격하게 줄고있다는 흔한 환경보고서가 아니다. 이 영화의 부제는 ‘슬픈 인간의 진실’이라고 써야 옳다. 일본의 어촌마을 다이지에서 벌어지는 돌고래 사냥은 은밀하게 자행되어온 또 하나의 홀로코스트다. 그물망에 걸린 돌고래가 피를 뿜으며 죽어갈 때, 바다에 떠오르는 건 끝모르는 인간의 폭력과 탐욕이다. 살해 위협 속에서도 돌고래들을 생명의 바다로 되돌려보내기 위해 갖은 애를 쓰는 활동가 오배리의 사연을 무신경하게 넘기지 말자. 참고로 한국의 한 지자체는 지난해 다이지로부터 돌고래를 사들여 떼돈을 벌고 있다. 2009년 선댄스, 2010년 오스카 수상작.
<h3> <도약선생>
감독 윤성호 / 출연 박혁권, 박희본, 나수윤
된장찌개에 햄을 넣는다면, 치즈 케이크에 고추장을 얹는다면. 윤성호 감독의 영화 레시피는 별난 조합의 연속이다. 장대높이뛰기 선수들이 주인공이라고 해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혹은 <국가대표>의 짠한 스토리를 떠올렸다간 30분이 채 되지 않아 환불 요구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전영록 코치(박혁권)가 전수하는 트레이닝에 따라, 혓바닥을 쭉 내민 사자 자세 혹은 갈급한 사슴의 마음으로, 엉뚱한 끝말잇기 시합을 잠자코 지켜보다 보면 “수평에너지가 수직에너지로 전환”되는 도약의 쾌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머리를 맑게 하고, 심장은 드높이고 싶은 20대에게 추천한다.
<테이킹 우드스탁>
감독 리안 / 출연 디미트리 마틴, 이멜다 스턴튼
신화는 성찰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전설의 록 페스티벌 우드스탁이 어떻게 시작됐는지를 다루지만, 리안은 망원렌즈로 거대한 열광을 클로즈업하는 것에 그닥 관심이 없다. 무에서 유를 빚어낸 아름다운 성공스토리로 우드스탁을 포장하는 대신 리안은 당시 젊은이의 혼란에 돋보기를 가져다댄다. 무엇이 유대인이 모여 사는 화이트 레이크를 음악과 대마초에 흠뻑 빠진 히피들의 천국으로 변하게 만들었는가. 축제가 끝나고 거대한 쓰레기 더미로 남은 마을을 바라보며 엘리엇(디미트리 마틴)이 ‘아름답다’고 되뇌이는 까닭은 왜일까. ‘fucking’과 ‘beautiful’ 사이를 오가는 로드무비.
<마더 앤 차일드>
감독 로드리고 가르시아 / 출연 나오미 왓츠, 아네트 베닝
카렌(아네트 베닝)은 호의를 받아들일 줄 모르는 여자다. 누군가의 접근을 그녀는 두려움없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반면, 엘리자베스(나오미 왓츠)는 호의를 극대화할 줄 아는 여자다. 그녀의 거리낌없는 접근에 누구든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딸을 버린 엄마 카렌의 죄의식과 엄마를 모르는 딸 엘리자베스의 욕망을 나란히 병치하면서 진행되는 이 가족드라마의 엔딩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까, 라고 의심하는 남자와 달리 ‘당신’은 나를 사랑합니까, 라고 캐묻는 여성들의 러브스토리로 봐도 좋다.
<h3> <트루맛쇼>
감독 김재환 / 출연 박나림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바보상자에 출연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긴 아니다. 여기 대박 친 맛집 사장님들의 기막힌 수완을 보라. 아니, 1천만원만 내면 맘껏 클로즈업해주는 방송사들의 넓은 아량을 보라. <트루맛쇼>는 달콤한 가짜와 씁쓸한 진실을 뒤범벅한 ‘초특급 리얼 다큐멘터리’다. 경천동지할 신메뉴 아이템까지 직접 식당에 제공하는, 방송사들의 구린 ‘거짓말’을 폭로하기 위해 직접 식당까지 차린 제작진의 배포 또한 놀랍다. 골리앗의 팬티를 들추는 다윗의 악취미에 브라보!
<적인걸: 측천무후의 비밀>
감독 서극 / 출연 유덕화, 유가령
서극이 돌아왔다. 무협의 세계로 귀환했다. <칠검>(2005) 이후 5년 만이다. 들려주는 것보다 보여주는 것에 능한 그의 솜씨는 녹슬지 않았다. 당나라 시대 여황제 측천무후(유가령)의 즉위식을 앞두고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명민한 수사관 적인걸(유덕화)이 나선다. 서극은 <적인걸>이 정통 무협이 아닌, 추리극이라는 점 때문에 이끌렸다고 했지만, 여전히 촉수를 자극하는 건 액션장면들이다. 판타스틱한 비주얼로 서사를 이끌어가는 서극 월드만의 만유인력을 느껴보자.
<고백>
감독 나카시마 데쓰야 / 출연 마쓰 다카코, 오카다 마사키
익히 들었을 것이다.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만든 <고백>의 논란과 파장을. 딸을 죽인 학생에게 기어코 복수하는 여교사라니. 하지만 충격적인 소재만이 공포를 조장하는 건 아니다. 포인트는 따로 있다. 되돌릴 수 없는 증오와 천천히 진행되는 광기가 건조하고 차가운 내레이션 위에서 걷잡을 수 없이 뒤섞일 때, 화면 구석까지 분사되는 죽음의 바이러스는 보는 이를 시종 숨막히게 만든다. 이곳이야말로 진짜 지옥이며, 지옥 문을 나설 수 있는 구명의 밧줄 따윈 없다는 극단의 고백 앞에서 삶은 뭐라 대꾸할 것인가.
<엄마 까투리>
감독 정길훈 / 목소리 출연 이소은, 김현심
‘희생’은 아동문학가였던 고 권정생 작가의 일관된 작품 주제였다. <강아지똥> <몽실언니> 등의 대표작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상의 밑바닥에 이름없는 누군가의‘희생’이 있다고 그는 믿었다. 권 작가의 유작을 원작으로 삼은 <엄마까투리> 또한 새끼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꿩 이야기다. 원작의 엄마까투리와 9마리의 꺼병이들은 아이들이 좋아할, 동그랗고 큰 눈을 가진 귀여운 3D 캐릭터로 변모했다. 평생을 허름한 오두막집에서 살면서 ‘사랑’을 실천한 권 작가의 분신 같은 인물도 등장한다.
<미안해, 고마워>
감독 임순례, 박흥식, 송일곤, 오점균 / 출연 김지호, 서태화
‘동물’영화라고 했다간 큰일난다. 네편의 단편들을 묶은 이 옴니버스영화는 눈요깃거리로‘동물’을 다루지 않는다. 여기, 등장하는 개와 고양이는 부족하기 짝이 없는 군상을 비추는 거울이고, 그들의 허기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채 달래주는 귀한 존재들이다. 우연인지, 약속인지 연출을 맡은 네명의 감독 또한 말없이 사람들을 챙기는 동물들의 순한 심성을 고스란히 빼닮은 이들이다. 그러고보니 <혜화,동>의 유기견과 <무산일기>의 백구도 떠오르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