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News & Report > Report > 기획리포트
[포커스] 밑 빠진 독을 막고 있는 두꺼비는 누구?
강병진 2008-06-10

영화계 불황 속에도 근근이 이어지고 있는 투자와 그 속사정

“답이 없다.” 2008년 6월을 보내고 있는 충무로 투자자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10편 중에 9편이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하는 상황에서 투자에 뛰어든다는 게 난센스”라는 한 투자관계자의 말이 정확한 상황 설명일 것이다. “근본적인 타개책이 있을 수 없다. 이런 투자확률에서 왜 돈을 끌어다박겠나. 어차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인데.” 하지만 아무리 투자자들이 몸을 사린다고 해도 밑 빠진 독에는 여전히 일정량의 물이 차고 있다. 정녕 구멍난 밑을 막고 있는 이 두꺼비는 누구일까.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2008년 1월부터 4월까지의 영화산업결산에 따르면 한국영화 개봉작은 총 38편이다. 같은 시기만 놓고 비교할 때 2007년은 34편, 2006년은 33편, 2005년은 21편이다. 한국영화가 아무리 침체에 빠졌다고 해도 작품 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상반기에 개봉한 38편의 대부분은 2007년 하반기부터 제작에 들어간 영화들이다. 또한 이들 중에는 2006년 하반기부터 촬영에 들어갔지만 개봉을 미루다가 이월작으로 개봉한 영화도 있다. 4월까지 개봉한 영화 가운데 <6년째 연애중> <마지막 선물> <대한이, 민국씨> <바보> <도레미파솔라시도> <비스티 보이즈> 등의 작품과 5월 개봉작인 <서울이 보이냐> <날나리 종부전> <방울 토마토>, 그리고 6월에 개봉하는 <무림여대생>은 종종 ’묵힌영화’들로 언급되던 작품이었다. 제작편수가 110편에 달했던 2006년(영화진흥위원회 2007년 <한국영화연감>)의 거품이 아직도 잔여물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좀더 현실적으로 상황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2008년 한국영화 제작편수를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 충무로 관계자들이 예상하는 2008년에 제작될 한국영화 편수는 대략 30편이다. 이 수치는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제도 등을 통해 제작비를 지원받아 제작하는 영화와 그외의 독립영화들을 제외하고 온전히 상업영화의 틀에서 투자를 받고 배급될 영화들의 예상편수다. <울학교 ET> <박쥐> <쌍화점> <순정만화> <영화는 영화다> <마린보이> <차우> <미인도> 등의 영화가 촬영 중이며 <나는 행복합니다> <기억, 상실의 시대> <배꼽> <서양골동양과자점-앤티크> <아내가 결혼했다> <고고 70> <다찌마와리> <강철중: 공공의 적1-1> <연인> <홍당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멋진하루> <비몽> 등이 촬영을 끝내고 개봉대기 중이다. 여기에서 촬영을 준비 중인 <국가대표> <보트> <돌플레이어> <김씨표류기> <마더> 등을 합하면 ‘대략 30편’이란 수치는 얼추 맞는 예상이다. 이 영화들의 면면을 살피면 가뭄을 맞은 충무로로 흐르는 미세한 돈줄을 확인할 수 있다. 돈도 다 같은 돈이 아니다. <박쥐> <마린보이> <기억, 상실의 시대> <아내가 결혼했다> <마더> <강철중…> 등 CJ엔터테인먼트가 투자를 결정한 영화를 비롯해 <쌍화점>과 <고고 70>(이상 쇼박스), <고사> <연인>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상 SK) 등 대기업 투자·배급사의 수혜를 입은 영화들이 한축이라면 <차우>와 <홍당무>(이상 벤티지 홀딩스), <순정만화>(엠엔에프씨), <국가대표>와 <당신이 잠든 사이에>(KM컬쳐) 등 독자배급노선을 시도하는 영화들도 있다. 이 밖에도 <울학교 ET>(소빅창투)처럼 창투사가 메인투자로 나선 경우나 <미인도>(예당엔터테인먼트)처럼 모회사의 투자를 받는 경우, 그리고 <김씨표류기>(강우석 감독)처럼 개인투자자의 자금으로 제작에 나서는 영화도 있다.

그래도 투자를 받을 만한 이유가 있는 작품들

그렇다면 투자를 안 하는 게 돈을 버는 길이라고 말하는 투자자들의 이야기는 새빨간 거짓말일까? 그러나 어려운 상황에서도 수혜를 입은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속내를 살펴보면 투자자들의 말이 그리 틀리지는 않다. 말하자면 투자할 만한 가치를 지닌 영화가 이 정도라는 뜻이고, 그외에 제작기획서를 들고 투자자를 찾는 영화들은 투자가 꺼려지는 작품이라는 이야기다. <울학교 ET>를 제작하고 있는 커리지필름의 최용기 대표는 “상황은 좋지 않았지만, 시나리오가 가진 현실적인 소재와 김수로에게 딱 맞는 캐릭터를 보고 소빅창투가 50% 이상의 메인투자를 결정했다”고 말한다. “물론 예산에서 아직 부족한 부분은 있다. 하지만 메인투자자가 확신을 갖고 부분투자를 모으는 중이다. 다른 영화에 비해 비교적 운이 좋은 편인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주피터필름이 제작한 <아내가 결혼했다>는 한국영화가 한창 호황이던 2006년에 투자계획이 세워진 경우다. 주피터필름의 주필호 대표는 “이미 2년 전 원작을 구매할 단계부터 CJ와 함께 계획을 세웠다”며 “이후 원작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손예진과 김주혁이란 배우가 붙으면서 투자가 어느 정도 수월해졌다”고 말했다. KM컬쳐의 <국가대표>는 ‘<미녀는 괴로워>의 김용화 감독’이란 타이틀이 크게 힘을 붙여줬다. KM컬쳐의 심영 이사는 “<오! 브라더스>와 <미녀는 괴로워> 등의 영화로 쌓은 인지도와 신뢰도가 크게 작용했다”며 “여기에 투자자들의 평가가 좋았던 시나리오와 주연배우로 캐스팅된 하정우의 역할이 컸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지금 투자가 결정된 영화들은 대부분 감독과 배우, 소재와 시나리오 등 매우 기본적인 요소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투자가 집행됐을 뿐, 특별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지금의 시장상황에 발빠르게 적응을 시도한 경우도 있다. 이룸영화사가 제작하는 <미인도>는 모회사인 예당엔터테인먼트의 메인투자를 받는 영화다. <미인도>를 기획한 이성훈 프로듀서는 “모회사의 투자를 받으면서 배급사와의 거래에서 유리해졌다”고 말한다. 배급사 입장에서는 배우와 감독, 시나리오만 보고 초기투자를 집행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영화의 진행과정을 지켜보면서 투자를 고려할 수 있기 때문에 부담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영화의 편집본이나 완성본을 보고 투자를 결정하는 추세에서도 안정적인 모양새로 볼 수 있는 사례다.

창투사들, 영화보다는 코스닥과 외화펀드에 투자하기도

‘대략 30편’이란 예상은 지금 충무로 투자환경의 야박함을 드러내는 수치이기도 할 것이다. 오픈엔디드픽쳐스 서영관 대표는 “예전처럼 메인투자자들이 50% 이상을 투자하는 경우는 없어졌다”며 “메인투자자가 20, 30%를 투자하고 나머지 70%는 제작자에게 알아서 챙겨오라고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말한다. 박경필 영상투자자협의회 회장은 “최근 2, 3년간 흥행분석을 해놓은 투자데이터들도 이제는 참고할 만한 자료가 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으며 센츄리온기술투자의 이세형 전무는 “창투사의 대부분 추세가 영화보다는 코스닥 등록을 앞둔 IT기업에 투자를 집중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한 투자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투자를 집행하는 경우에도 원금보장을 조건으로 내걸거나, 투자 형태를 띤 대출 형식으로 자금을 대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으며, 아예 한국영화가 아닌 외화펀드에 투자하는 창투사도 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대략 30편’이란 수치는 한국영화계의 거품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는 점을 반영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제작사 입장에서 지금 공공의 적은 투자자가 아니라 관객이다. 관객을 사로잡지 못하면서 투자자를 욕하는 건 문제가 있다”는 한 투자관계자의 말도 곱씹어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이제는 캐스팅이 아니라 아이템 싸움이다”

관계자들이 말하는 ‘2008 투자의 법칙’

“이제는 로맨틱코미디가 그리 구미를 당기지 않는 것 같다. 기존에 안정적인 흥행을 하던 장르가 아니라 독특하고 기발한 아이템을 찾아야 한다. 투자자들이 이제는 송강호나 장동건 아니면 캐스팅에도 크게 구애받지 않는 것 같다. 이제는 아이템 싸움이다. 평범하지 않은 아이템을 재밌게 풀어낸 시나리오가 필요하다. 물론 내가 잘난 척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 최용기 커리지필름 대표

“시나리오를 평가할 때, ‘수우미양가’가 있다면 적어도 ‘우’ 이상이 될 때까지는 투자사를 찾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4, 5번씩 보여주면서 수정하고 다시 보여주고 이런 과정을 반복해봤자 전체적으로 크게 수정하지 않는 이상 투자자의 입장에서는 더 식상하게 느낀다. 시나리오 개발단계에서 일반인과 영화인 모니터를 꼼꼼히 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개발해서 한방에 투자를 받는 게 제작사의 입장에서도 바람직한 형태인 것 같다.” - 심영 KM컬쳐 이사

“어떤 작품을 놓고서 이 작품이 무조건 된다고 믿는 건 제작사나 프로듀서의 생각일 뿐이다. 투자사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위험한 요소들을 제작사가 미리 희석시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제작비를 절감하는 것도 단순히 수치를 맞추는 게 아니라, 그렇게 절감한 제작비로도 충분한 퀄리티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설득시켜야 한다. 이제는 연출, 캐스팅, 시나리오 외에 제작여건 자체의 개선의지를 피력할 필요가 있다.” - 이성훈 <미인도> 프로듀서

“메인투자자가 30%의 예산을 댈 테니, 나머지 70%는 제작사한테 알아서 가져오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건 영화사에서 하기 힘든 영역이다. 어떤 제작자는 자기 지분을 아예 털어버리고 외상으로 영화를 만든다고 하더라. 영화가 잘되면 그나마 본전이고, 안 되면 완전 망해버린다. 그렇게까지 무리해서 영화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 주필호 주피터필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