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무협블록버스터의 욕망
<삼국지: 용의 부활>을 보면서 즉각적으로 함께 떠오르는 영화는 바로 밀로스 포먼 감독의 <아마데우스>(1984)다. 조자룡(유덕화)의 성공을 지켜보며 질투하는 형님 나평안(홍금보)의 모습에는 모차르트를 시기했던 살리에리의 모습이 숨어 있다. 천재를 알아보는 눈은 있지만 그만한 능력이 없는 나평안은 줄곧 그의 뒤에 머물러 있다. 유비의 가족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가 혼자서 살아 돌아오는 그의 모습은, 홍금보의 팬이라면 연출자에게 다소 화가 날 정도로 초라하다. 게다가 이 영화는 <삼국지>라는 거대한 원작을 바탕으로 했음에도 여러 변형들이 눈에 띈다. 성별을 바꿔 조조의 손녀로 나오는 조영(매기 큐)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며, 그들이 걸치는 갑옷은 일본 사무라이영화의 그것에 더 가깝다. <삼국지: 용의 부활>은 전세계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이 장르의 영화들이 전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징표이기도 하다. 이인항 감독은 “고증을 위한 자료를 치밀하게 검토했다”고 말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덧씌우려고 노력했다. 이런 무협 대작들도 지난 5년간 여러 감독과 무술감독, 의상감독들로 인해 반복 재생산되다보니 이젠 다들 차별화에 몰두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전통 경극과 서구 오페라를 따로 생각하지 않는다”며 언제나 자신의 영화에 클래식 오페라의 구도와 배치를 즐겨 쓰는 장이모 역시도 비슷한 생각일 것이다. 심지어 장이모는 <연인>으로 내한했던 당시 “이준익 감독의 <황산벌>(2003)에서 봤던 녹색 갑옷의 느낌이 좋아 전반적인 의상 스타일에 많이 응용했다”며 “무협 대작들은 고정관념과 달리 상상력을 펼치기에 좋은 장르”라고 말했다. 사실 최근 무협블록버스터들에 등장하는 의상과 궁정양식을 두고 실제와 분간할 수 있는 중국 관객도 다른 아시아 관객만큼이나 드물 것이다. <삼국지: 용의 부활>을 조자룡에 관한 이야기로 10년여 정도 준비하며 <아마데우스>를 떠올렸던 이인항 감독도 같은 맥락이다. <포비든 킹덤…>이 <서유기>를 바탕으로 성룡과 이연걸 아래 무술을 익히는 서양 젊은이를 끌어오는 것도 그러한 변화로 읽힌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홍콩차이나 무협블록버스터영화들은 전세계 영화를 통틀어도 가장 거대한 상상력의 격전장이다. 영화가 지닌 고유의 활극적 요소를 이처럼 자유자재로 활용하고 있는 지역도 할리우드를 제외하면 오직 홍콩차이나밖에 없다. 그런 매력으로 인해 왕가위나 리안에 이어 무협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는 허우샤오시엔이나 지아장커 같은 중화권 작가들 외에, 언젠가 타란티노에 이어 스필버그나 폴 그린그래스 같은 감독들이 무협영화를 만들겠다고 뛰어들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무협블록버스터들의 매력과 변화의 욕망 속에는 아시아영화들이 운명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오리엔탈리즘의 향기가 풍긴다. 사실 이제 이를 두고 과거처럼 아시아영화가 빠진 ‘덫’이라고 일방적으로 얘기하기에는 그 주요 소비자들이 중국을 위시한 아시아 관객이라는 점에서 그 양상은 복합적이다. 레이 초우가 자신의 저서 <원시적 열정>에서 장이모의 이전 영화들을 두고 ‘지나친 비판을 삼가야 한다’는 논지로 “장이모 영화의 반질반질한 표층이 중국을 상품화하고 배반하는 ‘신화’라 할지라도, 장이모의 영화는 그 과잉적인 양식 안에서 오리엔탈리즘 자체의 관음증을 비판한다”고 말했던 것을 최근 장이모의 영화들에 적용해도 그리 틀리지는 않다고 본다. 관객은 그저 이전의 무협영화들이 대형화됐다고 느낄 뿐이며, 아이템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중국 본토를 배경으로 다양한 내러티브가 뒤엉키는 풍경에 대해 별다른 거부감이 없다. 현재 중국 본토는 세계적으로 야외 로케이션의 묘미와 광활한 풍광을 감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지역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불려나오는 또 다른 감독은 바로 일본의 구로사와 아키라다. ‘자연 속의 활극’이라는 점에서 호금전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는 그는 ‘영화의 셰익스피어’가 되고자 꿈꿨던 사람이다. <맥베스>를 각색한 <거미집의 성>(1957), <리어왕>을 각색한 <란>(1985)은 셰익스피어 희곡의 시적이고 유장한 대사들을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여 지극히 일본적인 스펙터클로 옮겨놓은 작품들이었다. <햄릿>을 무협영화와 접목한 펑샤오강의 <야연>은 물론, 장이모의 <황후花>(2007) 역시도 <햄릿>을 연상시킨다. 심지어 <야연>에서 온통 검은 갑옷을 두른 친위대가 말을 타고 질주하는 모습은 <반지의 제왕>에서 사자(死者)들이 등장하는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장이모는 오래전의 구로사와 아키라가 그러했던 것처럼 중국의 강호에서 셰익스피어를 꿈꾸는 사람일 것이다. <무극>(2005)이 실패하긴 했지만 첸카이거 감독도 그만한 꿈을 품은 사람이다. 그는 일찌감치 칸영화제에 초청돼 (과거 호금전의 <협녀>가 수상하기도 했던) 기술고등위원회상을 수상한 <황제와 암살자>(1999)를 통해 구로사와 아키라의 <카게무샤>(1980)와 <란>을 연상시키는 광활한 전투장면의 바로크적 쾌감을 연출했던 주인공이다. <란>의 제작자였던 일본의 이세키 사토루가 <황제와 암살자>에 참여한 것도 다른 이유가 아닐 것이며, <영웅>을 만들겠다고 결심한 장이모가 가장 먼저 <황제와 암살자>의 촬영지와 세트들을 둘러보는 것으로 프로덕션을 시작한 것도 다른 이유가 아니었을 것이다. 현재 일본에서 소규모 사무라이영화들을 제외하면 구로사와 아키라식의 대규모 로케이션 활극의 전통이 완전히 끊겼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들 무협블록버스터들은 아시아를 대표하는 문화상품이 되겠다는 자부심에 들떠 있기도 하다. 올해 홍콩필름마트를 가득 채운 중국/홍콩 부스들이 꾸는 꿈도 그러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서방세계의 시선에서 아시아영화란 결국 무협영화이기 때문이다.
홍콩차이나영화 부활의 이면
올해 홍콩필름마트에는 흥미로운 컨퍼런스가 하나 열렸다. ‘CEPA: 광둥필름마켓의 변화’는 체결 2년째를 맞고 있는 홍콩과 중국간의 긴밀한 경제협력관계협정(CEPA) 아래 홍콩과 중국 광둥성간의 광둥어 동시개봉을 추진하자는 움직임이었다. 여전히 전체 시장에서 베이징어와 광둥어간의 혼선이 있고, 광둥성의 중심인 광저우가 중국에서 세 번째로 큰 영화시장임을 감안하면 그것은 획기적인 변화라 할 수 있다. 또한 이제 중국영화와 홍콩영화라는 구분이 사실상 무의미한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CEPA 체결 이후 홍콩의 대중국 수출이 2배 이상 늘었고, 최근 개봉한 <집결호> <명장> <장강7호> 등이 막강한 흥행 파워를 발휘했다는 사실을 떠올려볼 때 이들 무협블록버스터 장르가 세계시장에서, 아니 적어도 중국시장에서만큼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도 경쟁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중국국가광파전영전시총국(SARFT)에 따르면 홍콩과 마카오를 제외한 중국 본토의 지난해 영화 수입은 4억5500만달러로, 전년대비 26% 성장했으며 중국이 지난해 영화 수출로 벌어들인 돈도 무려 2억7300만달러에 달한다. 중국 경제가 고속 성장을 거듭하면서 영화시장도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고 그 중심에 일련의 무협블록버스터들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홍콩차이나 영화산업의 양극화와 변함없는 검열은 점점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가령 양가휘, 판빙빙 주연의 <로스트 인 베이징>(2007)은 성적 묘사에 관한 규정을 어겼고, 당국의 허가없이 국제영화제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리위 감독에게 2년간 영화 제작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것은 여전히 성장의 이면에서 검열로 신음하는 영화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임은 물론, 무협블록버스터들이 당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허울 좋은 성장만 할지도 모른다는 지적과도 맞닿아 있다. 일부 무협블록버스터들이 마치 국책영화처럼 완성되는 것도 이와 맥락을 함께한다. 더불어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소룡에 관한 대작 전기영화인 <브루스> 계획을 발표했다가 최근 난항을 겪고 있는 관금붕 감독의 얘기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올해 홍콩필름마트에서 만난 그는 “이소룡이 하늘을 날았다면 펀딩이 쉽지 않았을까?”라며 웃었다. 언뜻 보기에 풍부한 자금이 유통되는 것 같은 이 장르의 시장에도 이른바 특수효과가 가득하고, 대규모 군중신이 꼭 들어가는 무협영화들만 혜택을 누리는 것 같다는 얘기였다. 시대 고증 등 여타의 무협블록버스터들만큼 제작비가 투여될 예정이지만, 실존 인물의 이야기에다 어딘가 작가적인 냄새가 풍기는 <브루스> 같은 경우 투자자들에게 크게 어필하지 못한 것이다. 영화진흥위원회 국제진흥팀의 아시아 담당 매니저인 박희성씨도 “<영웅>이 기록적인 성공을 거둔 이후 중국시장에는 거의 정부 차원에서 밀어주는 듯한 이런 무협블록버스터들이 늘 ‘기본’은 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며 “현재 홍콩차이나 영화시장이 허리가 없는 다소 기형적인 형태로 성장하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어쩌면 이들 무협블록버스터들의 가장 큰 과제는 세대교체다. 앞서 말했듯 이들 영화를 트렌드의 귀환이라고 볼 때 이연걸, 유덕화, 양조위, 견자단 같은 배우는 물론 원화평, 정소동, 원규 같은 무술감독은 이미 90년대 전성기의 주인공들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삼국지: 용의 부활>에서 아버지들보다 현격하게 카리스마가 떨어져 보이는 관우의 아들 관흥, 장비의 아들 장포가 애들처럼 다투며 나서는 장면은 감독이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실소를 불러일으킬 만큼 상징적이다. 거기서 오호장군의 마지막 생존자 조자룡이 느끼는 가장 큰 당혹감은 촉나라의 운명을 믿고 맡길 차세대가 없다는 사실이다. 유비를 연기한 악화가 과거 호금전의 <대취협>(1965)에서 정패패의 상대역을 맡기도 했던 쇼브러더스의 대배우이고(<와호장룡>에 정패패를 캐스팅한 것과 대구?), 관우를 연기한 적룡이 과거 장철 무협영화의 대표적인 남성상이자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적룡임을 감안하면 그 격차는 너무 커 보인다. 이처럼 캐스팅으로만 보자면 이인항 감독이 <삼국지: 용의 부활>을 통해 홍콩 무협영화의 전통에 대해 바치는 경배는 꽤 사려 깊다. 그래서 “빈손으로 태어나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조자룡의 죽음은 마치 다음세대의 출현을 촉구하는 선언처럼 들렸다. 그렇게 배우건 무술감독이건 ‘늘 보던 얼굴’의 결정판은 바로 <적벽>이다. 오우삼 감독의 필생의 작품이자, 이들 무협블록버스터 흐름에서 가장 최대 규모의 종착역이라 할 수 있는 <적벽> 이후 우리는 또 어떤 작품들을 만나게 될까. 2008년 홍콩차이나영화는 사상최대의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그래픽 노블 같은 무협영화를 만날 것이다”
<풍운2>를 제작 중인 유니버스 엔터테인먼트 부사장 에반 람
이제 막 제작발표회를 가진 <풍운2>는 ‘진관희 스캔들’로 화제가 됐던 장백지의 남편 사정봉의 영화라 눈길을 끌었다. 기자회견에서 사정봉이 장백지와 <10,000 BC>를 함께 관람하기도 하는 등 둘 사이에 문제가 없음을 밝히면서 영화에 대한 호감도가 덩달아 오르기도 했다. 현재 사정봉은 유위강이 제작하는 또 다른 무협블록버스터 <수호전>에도 캐스팅된 상태다. <풍운2>는 만화 원작의 <풍운>(1998)으로부터 이어지는 10년 만의 속편으로, 전편의 곽부성과 정이건도 그대로 출연하며, 메가폰은 전편의 유위강 감독에 이어 이번에는 팡 브러더스가 잡아 타이에서 크랭크인할 예정이다. 엠퍼러미디어와 더불어 홍콩을 대표하는 영화제작사인 유니버스가 제작에 나서 1200만달러 정도의 순제작비를 예상하고 있으며, 무술감독은 한국영화 <비천무>(2000)에 참여하기도 했던 마옥성이 맡는다.
-거의 10년 만에 만들어지는 속편이다. 꽤 많은 시간이 걸린 이유는. =<풍운>은 골든하베스트에서 만든 작품인데 아무래도 판권문제 등이 쉽지 않았다. <풍운>은 당시 개봉하면서 홍콩에서 한달여 동안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고, 중국 본토에서도 잠정적으로 1억명 이상이 관람했다고 알려져 있는 히트작이었는데 이후 골든하베스트가 침체하면서 자체적으로 속편을 제작할 여력도 없었다. 그러다 유니버스 관계자들끼리 저녁식사를 하다가 문득 만화 원작의 영화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나왔고 <풍운>의 속편이 가장 좋겠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풍운>은 당시 화려한 시각효과로 눈길을 끌었다. 속편은 어떨까. =팡 브러더스가 그래픽 노블처럼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씬 시티>나 <300> 같은 느낌의 영상을 만들어낼 것 같다. 그래서 사실 <풍운2>는 최근 <연인> <황후花> <명장> 같은 무협 대작들과는 성격이 좀 다르다. 엄격하게 구분될지는 모르겠지만 무술영화라기보다는 판타지영화라고 생각한다. 물론 <엑스맨>식의 파워풀한 액션도 있을 테지만. <귀역>(2006)으로 홍콩영화제 최고 특수효과상을 수상한 적 있는 팻 페이스 프로덕션이 특수효과를 맡을 예정인데, 이들은 최근 <명장>의 특수효과를 맡기도 하면서 최근 홍콩영화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특수효과회사로 떠오른 곳이다. 또 최근 <명장> <연의 황후> <화피>에 연달아 미술감독으로 참여했던 해중문이 <풍운2>에도 참여한다.
-특이하게도 모든 촬영이 타이에서 이뤄진다고 들었다. =팡 브러더스에게 익숙한 곳이기도 하거니와 타이도 아시아 다른 국가들 못지않은 영화 제작환경이 갖춰져 있다. 물론 중국 자본도 여기 들어오지만 딱히 중국 본토에서 로케이션할 일은 없으니까 상관은 없다. 또 <풍운>이 동남아 지역에서 큰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풍운2> 역시 각본만으로도 이미 이쪽 수입사들로부터 제작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개봉은 내년 10월 정도를 예상하고 있다.
-중국 영화시장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합작으로 많은 대작들이 만들어지긴 하지만 여전히 제한적이다. 최근 완화하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지만 완전하지 못하다. 팡 브러더스의 경우 주로 공포영화를 작업했기 때문에 중국에서 그리 소개될 기회가 없었지만, 아마 <풍운2>를 통해서는 많이 알려질 것 같다. 많은 감독들이 이런 대작들에 욕심을 갖는 건, 대작 그 자체로 아시아시장 전체에서 통하기 때문에 매력적이기도 하지만 중국을 향한 진입장벽을 쉽게 넘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