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와 무의미님(이동진 lifeisntcool@naver.com)이 입장하셨습니다. 점입가경(漸入佳境)님(김혜리 vermeer@cine21.com)이 입장하셨습니다.
점입가경님의 말(이하 가경): 지난 2주일은, 어제 본 영화는 그제 본 영화를 능가하고 오늘 본 영화는 어제 본 영화를 압도하는 점입가경의 나날들이었습니다. ^^
의미와 무의미님의 말(이하 의미): 이야, 연초에 영화 운을 제게 빌어주시면서 자신의 소망을 슬쩍 내비치시더니, 최고의 나날을 보내고 있군요. ^.~ 저도 악 소리 나게 좋은 영화가 하도 많아 변별력있는 별점 매기느라 정말 힘들었어요.
가경: 지난 월요일에 2007년 미국영화를 결산하는 제80회 오스카 시상식이 있었죠. 작품상 후보에 들지 못한 영화들을 볼라치면 <조디악> <아메리칸 갱스터> <이스턴 프라미시스> 등이 있군요. 이쯤 되면 올해 미국영화가 얼마나 풍년인지 알 수 있죠. +_+ <본 얼티메이텀>만 해도 아무리 액션블록버스터라고 하지만 연기상, 감독상 후보에 넣은들 이상할 것 없는 영화였잖아요.
의미: 올해 작품상 후보작-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데어 윌 비 블러드> <어톤먼트> <마이클 클레이튼> <주노>- 들은 근 20년간 최고라고 해도 될 거예요.
가경: 요즘 같아선 미국 국기에 그려진 별이 다 영화 별점으로 보일 지경입니다.*.*
의미: 제 경우, 국내 개봉 기준으로 보면 올해 2월이 영화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가장 풍성한 달로 여겨집니다. 이런 달이 1993년 이후 있었나요? (없다고 말해주… -.-)
가경: 연표와 랭킹에는 항상 선배가 강하시잖아요. ^^ 그런데 1993년에는 어떤 영화들이 나왔는데요?
의미: 그건 저의 신문사 입사연도…. -..-
가경: 아, 네. ^^; 그래서 오늘은 트로피는 이미 주인을 찾아갔지만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작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침 국내 개봉 시기도 얼추 맞고.
의미: 마치 기획에 맞춰 우리가 열심히 챙겨본 것 같잖수? ^^ 이번 아카데미는 이변이 없어 맥은 좀 빠졌지만 간만에 정의로운 시상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경: 앗, ‘정의’씩이나요? *^^*
의미: 제가 올해 작품상 후보 5편을 보면서 감탄하다가 갑자기 궁금해져서 21세기 첫해인 2001년 리스트를 한번 찾아봤어요. 그때 작품상 후보 5편은 <글래디에이터> <초콜렛> <트래픽> <에린 브로코비치> <와호장룡>이었어요.
가경: 상을 골고루 나눠가진 해였죠. 아직도 선하네요. 작품상 받고도 감독상 뺏겨서 험악해진 리들리 스콧 감독의 얼굴이…. (먼 산)
의미: 그렇군요. ^^ 그 영화들도 물론 괜찮은 영화들이지만 올해의 리스트와 비교하면 정말 상당한 차이가 느껴지지 않아요? 그해 작품상 탄 <글래디에이터>는 올해라면 감독상 후보에도 못 끼었을 듯.
가경: 평단의 눈으로 볼 때 오스카 후보는 좋은 해도 있고 납득할 수 없는 해도 있지만 지구 온난화 그래프처럼 거시적으로 보면 서서히 인디영화 내지 메이저 스튜디오의 인디 레이블이 투자한 영화의 힘이 커지는 추세죠. 미라맥스가 전성기를 누리는 동안 그런 경향이 가속화됐고요.
의미: 80년대의 오스카 수상작들 면면과 비교해보면 특히 격세지감이 느껴져요.
가경: 분명 80년대 수상 결과들은 오스카가 보수적이라는 선입견을 심는 역할을 했죠.
의미: 80년대 초반 미국은 이후 오래도록 지속될 지독히 보수적인 시대로 막 진입하는 시기였고, 할리우드는 당시 창의력에서 저점을 친 시기였죠. 그런데 지금의 할리우드와 미국사회는 확실히 다른 것 같아요. 오바마 열풍에서 보듯 미국사회는 변화에 대한 열망이 크고 할리우드는 창의력 측면에서 대단히 원기왕성하죠.
가경: <LA 위클리>는 미국이 세계의 눈총을 받는 가운데 미국영화가 최고의 외교관 역을 했다는 표현도 썼더군요. 정치적으로 암울하면 창의력이 샘솟는 건지…. “불안은 영감을 산출한다”라는 말을 만들어야겠어요. ^^;
의미: 경제적 호황/불황과도 관련이 있겠죠.
가경: 할리우드영화에 대해 늘 존경심을 갖고 있는 편이지만 2007년은 오래 기억될 해인 것이 분명해요. 루마니아가 세계영화를 지배하나 싶더니 그냥 막판 뒤집기로 연말 세계영화 베스트에서도 절반 이상을 차지해버렸죠.
의미: 확실히 요즘 미국영화는 몇해 전의 미국영화들과 예술적 성취나 상업적 활력 모두 다르죠. 흥미로운 것은 새로운 형식 실험 못잖게 고전적인 화법에 충실한 수작들도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이번 작품상 후보에 오른 <마이클 클레이튼>이나 <조디악> 혹은 <아메리칸 갱스터> 같은 영화를 보면 프랜시스 코폴라와 시드니 루멧과 마틴 스코시즈가 경합했던 70년대의 풍경이 고스란히 떠오르잖아요.
가경: 게다가 시드니 루멧 감독은 2007년에도 새 영화를 내 호평을 받았죠. <악마도 알기 전에, 넌 끝장이다>(Before the Devil Knows, You’re Dead)라는. 요즘 미국영화의 수작들은 1970년대 영화사에 자주 등장한 위대한 아메리칸 시네마의 전통이라는 어구를 자연스럽게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정말 <데어 윌 비 블러드> 같은 영화는 무비나 필름이란 단어보다 시네마라는 단어를 먼저 환기시켜요.
의미: 부럽죠. 지금 한국의 대표적인 감독들이 충무로의 60~70년대에 젖줄을 대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역량있는 미국 감독들을 꼽아보다가 그 층위가 참 다양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새삼 놀랐어요. 가장 고무적인 것은 데뷔 10년을 넘긴 중견감독들의 활약이 대단하다는 것인데, 타란티노, 데이비드 핀처, 코언 형제, 토드 헤인즈, 토드 솔론즈, 폴 토머스 앤더슨 등은 지금도 과거의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잖아요? 사실 그 정도 경력이 되면 보여줄 거 다 보여주고 창작력의 고갈을 걱정해야 할 시기인데 말이죠. 클린트 이스트우드나 마틴 스코시즈 같은 원로급들도 아직 대단하고, 스필버그도 여전히 흥미롭고….
가경: 그건 아마 그들의 꾸준한 호흡과 관계가 있을 거예요. 말씀하신 감독 중에도 한두편 태작을 내고도 리바운드에 성공한 감독들이 꽤 있죠. 어쨌든 다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여건과 믿는 제작자가 있다는 사실이 저력인 것이죠. 최근 미국영화의 수작은 감독이 속한 세대를 막론하고 어떤 식으로든 미국의 역사와 문화, 미국영화를 성찰하는 가운데 새로운 에너지를 길어올렸다는 점에서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의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데어 윌 비 블러드>의 공통점이기도 하죠.
가경: 사실 두 영화는 닮은 점이 꽤 많아요.
의미: 심지어 로케이션도 텍사스의 한 지역으로 비슷하잖아요. 다만 <데어 윌 비 블러드>은 극중에서 캘리포니아 베이커스필드로 돼 있긴 해요.
가경: 맞다! 실제로 프리 프로덕션 기간에 텍사스의 한 모텔에 묵은 폴 토머스 앤더슨이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열었더니 에단 코언이 지나가더라는.-.- “동네 참 좁다” 하고 헤어졌다네요. 영화를 자주 촬영하는 지방은 아니었다던데 이번에 호평받은 두 영화 덕에 플래카드 거는 건 아닐까요? 그런데 영화관광지를 조성해도 팻말이 울적하긴 하겠네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4명 살해된 곳”,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폭발사고 난 곳” 이건 좀….T-T
의미: 하지만 ‘세계영화기행’이라는 시리즈를 연재 중인 저로서는 그곳에 가면 1타 2피로 비용을 많이 줄일 수 있을 듯해 군침 흘리고 있는 중. ^^
가경: 모텔에 가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모스(조시 브롤린)가 가방 숨긴 환기구 뜯어보려고요? 부디 지배인에게 봉변당하지나 마시길.-..-
의미: 흑, 영화평론가를 위한 나라는 없다니까.
가경: 뭘 그런 새삼스러운? 영화평론가를 위한 지자체도 없어욧!
김혜리 “코언 형제는 자기들의 재능 색깔에 딱 맞는 원작을 취했어요.” 이동진 “영화를 이루는 거의 모든 요소가 탁월한 걸작이죠.”
의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한 영화를 이루는 거의 모든 요소가 탁월한 걸작이죠. 촬영도 좋고 편집도 좋고 스토리도 인정사정없어 예측할 수 없고 캐릭터도 후덜덜이고 게다가 깊이까지!
가경: 코언 형제는 이번에 자기들의 재능 색깔에 딱 맞는 원작을 취했어요. 원작 소설을 각색한 영화는 처음이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마치 처음부터 형제를 위해 씌어진 책 같습니다. 코언 형제는 영화 만드는 재주에서 일찍이 천재성을 인정받아왔지만 세련된 내러티브와 정서적 뉘앙스에선 아쉬움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 원작은 그 공동을 메워 스타일과 내용이 두루 견고한 영화를 만들어냈습니다.
의미: 동감. 이번 영화는 사실 원작자 코맥 매카시의 몫도 상당히 평가해줘야 해요. 예를 들어 저는 이 영화 이후에도 코언 형제에겐 <참을 수 없는 사랑>이나 <레이디 킬러> 같은 범작을 만들 가능성이 상존해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우려를 말할 때가 아니라 코언이 만들어놓은 훌륭한 성찬을 맘껏 즐길 때! ^^
가경: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각색 중에서도 책의 장(章)과 시퀀스가 일치하는 경지의 고지식한 각색을 했죠. 하지만 구성을 떠나서 코언 형제는 매카시의 문체를 영화로 옮기는 적정한 방식도 거의 체득하고 있는 느낌이에요.
의미: 지금 책을 거의 다 읽었는데, 생각보다도 더 닮아 있더군요. 그래도 영화언어로의 번역이 정말 훌륭해요. 이 사람들은 영화를 이미 몸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죠.
가경: 잔인한 액션을 빠르고 간결하게 묘사하는 점이나 함축적인 대화, 기괴한 유머 등등 코언 형제가 잘 다룰 수밖에 없는 원작입니다. 특히 하비에르 바르뎀이 분한 살인마 안톤 쉬거는 영화가 나옴으로써 비로소 온전히 그려졌다는 느낌마저 있어요.
의미: 한 가게 주인에게 안톤 쉬거가 동전 던지기를 제안하면서 나누는 대화장면은 정말 명장면인데, 그 장면의 대화 자체는 원작에 있지만, 그걸 영화적인 리듬과 연기와 생생한 공기로 살려내는 것은 온전히 코언과 배우들의 몫이죠.
가경: 그 대목에선 정말 두손 들었어요. *.* 꼭 <저수지의 개들>에서 귀를 자르기 전의 긴장된 상황 같죠. “몇시에 문 닫아요?”가 협박이라니.
의미: 저는 앞뒷면 고르라던 그 동전 가져다가 가보로 간직하고 싶었답니다. 하비에르 바르뎀은 흔히 <양들의 침묵>의 앤서니 홉킨스 이후 최고의 악역이라고들 하는데, 저는 한니발보다 더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가경: 유머감각이 조금 부족한 게 흠이지만, 헤어스타일에 유머가 있어서 괜찮아요. <언브레이커블>의 새뮤얼 잭슨, <판타스틱 소녀백서>의 스티브 부세미와 함께 헤어스타일 3대 천왕으로 뽑았습니다. 제 마음대로…. -_- 쉬거는 개인적 성격이 거의 드러나지 않죠. 왜 죽이는지, 감정도 후회도 표현이 안 되고요. 그의 성격이 유일하게 표출되는 장면이 무고한 점원들과 나누는 무시무시한 대화장면들이죠. 희생자들의 반응을 진지하게 음미하는 처형자랄까.
의미: 무원칙이 원칙인 킬러죠. 제 대화명은 하워드 혹스의 <소유와 무소유>에서 따왔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안톤 쉬거 때문이에요. 안톤 쉬거라는 인물은 일종의 삶에서의 우연에 대한 공포가 의인화된 캐릭터에 가깝다고 봤어요. 악은 삶에 필연이 없다고 말하는 존재라는 거죠. 이 영화에서 제일 무서운 대사는 모스의 부인이 동전을 던지라고 강요당할 때 “동전으로 (내 운명을) 결정할 순 없어요. 당신이 결정해야죠”라고 하는 장면에서 쉬거가 “동전도 나와 생각이 같을걸”이라고 답하는 대목이었어요. 무시무시하죠.
가경: 그 대목은 극악한 장면이었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코언 영화 계보 안에서 보면 마찬가지로 “어떤 행위든 그 결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다”는 익숙한 이야기죠. 한 남자가 “이정도 위반은 괜찮겠지?” 하며 선택한 행동에서 모든 일이 시작되는 건 코언 영화에서 다반사잖아요. 영화에서 관객이 동일시하는 스토리의 운전자는 돈가방을 갖고 달아난 모스지만 주제의 저변으로 내려가면 정작 대립하는 인물은 늙은 보안관(토미 리 존스)과 안톤 쉬거죠. 그런데 영화 내내 세 주요 인물이 한 프레임에 나오는 일이 거의 없던데요. 있을 법하면 슬쩍 비껴가고. 하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은 그걸 깨닫지 못할 만큼 세 사람이 맹렬히 대치하고 있다고 느꼈어요.
의미: 심지어 모스와 쉬거가 만나는 장면은 완전히 다르게 바꿨죠. 원작은 둘이 말도 나누는데 영화에선 얼굴 마주치는 장면도 없으니까요. 그들이 모텔 방문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장면의 긴장감은 어마어마하죠. 장르적으로는 그때부터 밤거리에서 둘이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까지가 가장 뛰어났어요.
의미: 관객은 대체 셋이 언제 만나 결전을 벌일까 무의식적으로 기다리게 되는데 장르영화로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결말은 허를 찌르죠. 순전히 장르적 관점에서만 즐긴다면 스릴러에서 중요한 건 결말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교훈을 이만큼 화끈하게 실천하고 훌쩍 뒤돌아가버리는 영화도 없을 것 같습니다. -_-#
의미: 결정적으로 이 영화는 가장 중요한 두번의 살인을 전혀 묘사하지 않고 넘어가죠. 저는 이 작품이 장르영화의 형태를 띠면서도, 거의 매 장면이 처음 묘사하는 것 같은 신선한 디테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 정말 놀라웠어요. 구체적으로는 쉬거가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다리 난간에 앉은 새들에게 총격을 가한다거나 헝겊에 휘발유를 묻혀 자동차를 터뜨려 시선을 돌린 뒤 치료약을 ‘쇼핑’한다거나.
가경: 어느 장면을 꼬집어 말하기 어렵게 모든 장면의 구도가 정확하면서도 참신했고, 물 흐르듯 연결됐어요. 늙은 보안관의 아내가 남편을 “다치지 말아요. 남도 다치지 말고요” 하면서 배웅하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대사들도 좋았고요. 전, 이 영화에서 호연한 많은 배우 중 토미 리 존스에게 반했습니다. 그 얼굴 자체가 텍사스예요.T-T
의미: 이 영화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고스란히 얼굴에 담고 있죠. 저는 하비에르 바르뎀을 <나는 네 침대를 사랑한다>라는 요상한 제목의 스페인영화에서 처음 만났어요. 그 다음 작품으로 <하몽하몽>을 봤는데 두 영화에서 참 강렬해 보이더군요. 거의 테스토스테론 덩어리였죠. 그러다 최근에 <씨 인사이드>와 이 영화를 나란히 보니 진짜 대단한 배우란 생각이 들더군요. 맞다. <당신의 다리사이>라는 영화에서도 좋았어요. 근데 어째 제목들이 하나같이… -.-
가경: 그 영화들 하비에르 바르뎀 때문에 본 게 아니죠?
의미: 아니지.^^
가경: 이 영화에서 잘못된 붓질을 발견하긴 아주 어려운데 사운드트랙조차 감탄스러워요.
의미: 음향편집까지 최고죠. 코언 영화 중 뭘 최고작으로 꼽으세요?
가경: <파고>와 이번 영화입니다.
의미: 저도 이번 영화가 최고 같아요. 하나 더 꼽는다면 <밀러스 크로싱>입니다. 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파고>보다 더 낫다고 봤어요. <위대한 레보스키>와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도 무척 좋아해요.
가경: 참, 이 영화 속 하늘은 시종 아름다운데 그 하늘은 밑에서 일어나는 일에 극도로 무관심하더군요. ^^
의미: 이 영화는 세계의 무심함과 개인의 무력함에 대한 영화라니까요.
김혜리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영화가 20분도 지나기 전에 항복하게 만드는 영화였어요. 다니엘이 황야에서 혈혈단신 갱에 내려가 은을 채취하고 혼자 기어올라와 오직 바람만이 존재하는 땅에 주저앉아 끼니를 때우고 다시 혼자 구멍으로 내려가고 다리가 부러지고…. 그 대사없는 긴 도입부는 마치 초기 다큐멘터리의 명작을 보고 있는 듯했어요.” 이동진 “화법은 확실히 이전 영화들과 다르지만, <데어 윌 비 블러드> 역시 틀림없이 <리노의 도박사>와 <부기 나이트> <매그놀리아>를 잇는 작품입니다. 폴 토머스 앤더슨이 난폭한 각색을 한 것도 다 이유가 있어요. ^^ 그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장대한 비극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내는 데 큰 재능을 가진 감독이죠.”
가경: 정직히 말씀드려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데어 윌 비 블러드>는 한번 보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정말 미흡하게 느껴져서 마음에 걸리네요.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도 <데어 윌 비 블러드>는 <펀치드렁크 러브> 다음 영화로는 예상하기 힘들었던 작품인데요.
의미: 저는 오히려 <펀치드렁크 러브> 때가 의외였다고 봐요. 사실 <펀치드렁크 러브>는 앤더슨의 필모그래피에서 유독 튀는 영화니까요. 화법은 확실히 이전 영화들과 다르지만, <데어 윌 비 블러드> 역시 틀림없이 <리노의 도박사>와 <부기 나이트> <매그놀리아>를 잇는 작품입니다. 앤더슨이 난폭한 각색을 한 것도 다 이유가 있어요. ^^ 그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장대한 비극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내는 데 큰 재능을 가진 감독이죠. 일종의 파우스트적 거래를 하는 캐릭터들을 영화주인공으로 삼는다고 할까요.
가경: 하긴 이 영화의 주인공 다니엘 플레인뷰(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누가 봐도 <시민 케인>의 찰스 포스터 케인, <백경>의 에이허브 선장, <자이언트>의 제임스 딘을 연상시키는 인물이죠. 선배는 일찍부터 앤더슨의 팬이었지만, 저는 이 감독에 대해 지금까지는 유보적 입장이었어요. 그의 전작들에는 형식 면에서 천재성을 과시하는 느낌이 있었거든요. 그러나 <데어 윌 비 블러드>는 대신 고전적인 우아함을 가졌어요.
의미: 이 영화가 스타일을 앞세우지 않는다는 점에선 그런 면이 어느 정도 있을 거예요.
가경: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영화가 20분도 지나기 전에 항복하게 만드는 영화였어요. 다니엘이 황야에서 혈혈단신 갱에 내려가 은을 채취하고 혼자 기어올라와 오직 바람만이 존재하는 땅에 주저앉아 끼니를 때우고 다시 혼자 구멍으로 내려가고 다리가 부러지고…. 그 대사없는 긴 도입부는 마치 초기 다큐멘터리의 명작을 보고 있는 듯했어요. 인간과 자연, 자본과 노동에 대한 굉장히 단순하면서도 엄숙한 기록이요.*.*
의미: 뭐, 거의 장 피에르 멜빌의 ‘전문가’ 영화를 보는 거 같죠? 사실 폴 토머스 앤더슨은 첫 장면에서 엄청 욕심을 부리는 스타일이죠. ^^ 이 영화의 초반 15분이 그처럼 독특한 신으로 짜인 것 못지않게, <부기 나이트> 오프닝은 <악의 손길>이나 <플레이어>의 오프닝 같은 엄청난 롱테이크 장면으로 시작됐고, <매그놀리아>는 우연에 대한 기이한 이야기 셋을 빠르게 들려주며 정말 폼나게 시작하죠. 하다못해 <펀치드렁크 러브> 역시 주인공이 전화하는 텅 빈 사무실의 여백을 최대한 강조해서 프레임의 대부분을 비우는 숏으로 시작하잖아요.
가경: 제가 그런 점들을 좀 싫어했다고요…. --;
의미: 폴 토머스 앤더슨은 배우들을 정말 최적으로 활용하는 것 같아요. 좋은 감독들은 다 그러지만. 대니얼 데이 루이스처럼 완전히 검증된 배우를 최적의 층위에서 써먹는 것도 놀랍지만 버트 레이놀스, 톰 크루즈, 마크 월버그 같은 배우들에게서 최고의 연기를 꼽아내는 능력이 더 대단한 것 같아요. 배우 자신도 모르는 얼굴을 찾아내서 보여주는 식견이라고 할까요.
가경: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연기는 거의 묘기라고 해도 좋을 지경인데요. 이런 배우를 기용하는 건 사실 연출자로서 조금 위험한 결단이긴 하죠. 매 순간 명연임을 각인시키는 연기랄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보는 듯.
의미: <갱스 오브 뉴욕>처럼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잡아먹는 경우가 생기죠.
가경: 솔직히… 이번 오스카에서도 데이 루이스보다 토미 리 존스가 받았으면 하는 생각이 조금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황야에 서 있는 비쩍 마르고 사지가 길쭉한 실루엣부터 이 영화와 완벽하게 일체가 됐음을 부인할 수 없죠. 다만, 그의 연기를 보면서 굉장한 성대모사를 구경하는 듯한 기분을 씻을 수가 없었어요.
의미: 무슨 의미인지 감이 와요. ^^ 저는 이 영화에서 그의 장면 중 두 부분에서 특히 탄복했어요. 하나는 그를 괴롭히는 목사 엘라이(폴 다노)의 강요에 세례식에서 “나는 내 아이를 버렸소”라고 외치는 장면인데, 그 대사를 세번 외칠 때 표정과 말투와 리듬이 정말 짜릿짜릿했어요. 마지막 단어를 ‘child’에서 ‘boy’로 살짝 바꿔 변주하는 세 번째 외침에선 정말이지…. 또 하나는 마을 주민들을 설득하는 연설장면이었어요.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그 장면에서 데이 루이스는 겉에 두른 예의와 감춰진 욕망, 배어나오는 집념이 절묘하게 얽힌, 정말 정확하고도 풍부한 연기를 했어요.
가경: 굉장한 감독과 굉장한 배우가 서로 잡아먹을 듯 힘을 겨루는 영화였습니다.-_- 주인공 다니엘 플레인뷰의 캐릭터 이야기를 잠깐 할까요? 인간혐오증을 지닌 그는 가슴에 뚫린 그 공동을 돈으로 메우려는 사람이죠. 그가 가진 유일하게 따뜻한 면모는 채굴현장에서 아버지를 잃은 아기를 자기 아들로 키우면서 드러나죠. 하지만 그 관계 역시 “사랑한다”는 말을 하거나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요. ‘패밀리맨’ 이미지를 팔아 사업을 확장하는 데 아이를 이용하기도 하고요.
의미: 하지만 저는 다니엘이 지닌 따뜻한 면을 진짜 드러내는 건 아이보다는 동생이라고 주장하면서 나타난 헨리와의 관계라고 봤습니다.
가경: 하지만 이 영화에서 직설적으로 정서적 온기를 보여주는 단 하나의 장면은 아기를 거둔 젊은 플레인뷰가 기차 안에서 아기에게 눈길을 던지자 아기가 작은 손을 뻗어 남자의 얼굴을 만지는 초반부 신이죠. 물론 아기가 다니엘의 인성이나 삶을 바꾸진 않지만요. 저는 그가 아기를 버렸을 때, 세상과의 연줄도 끊어버린 셈이라고 봤어요. 동생은 그때 아이의 대용물로 나타나 그 포기를 쉽게 만들어준 거고요.
의미: 다니엘이 헨리를 죽이기까지 하는 이유는 자신의 마음을 열어보인 유일한 사람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죠. 반면에 아이는 죽일 필요가 없어요. 석유가 처음 분출할 때 다친 아이를 방기하는 순간, 이미 다니엘은 아들로부터 스스로 마음을 닫아건 것이니까요. 처음부터 아이는 그에게 정서적으로 전혀 중요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요. 전 반대로 동생인 헨리가 대용물이 아니라 아이가 (존재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던 핏줄의) 대용물이었다고 생각해요. 아이는 헨리가 나타나자 본능적으로 그런 다니엘의 마음을 알아차렸고, 그래서 불을 지른 거죠. 석유채굴에도 성공했겠다, 다니엘 입장에선 그런 아이가 이제 필요 없어진 거고요.
가경: 흠, 전 그가 아기를 처음 얻기 전부터 이미 타인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고 거기에는 가족과의 절연이 포함돼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내가 아예 원하는 사람으로 기를 수 있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아이를 사랑할 수 있었던 거고요.
의미: 다니엘은 사실 핏줄 혹은 피에 집착하는 사람이라고 봤어요. 이 영화 제목의 ‘블러드’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의미가 있는데, 그건 유혈이면서 핏줄이면서 (가짜 세례극의) 보혈 그리고 파국까지 함축하는 이미지죠.
가경: 핏줄에 집착한다면 왜 친자식을 가지려 하지 않았을까요? 이 영화의 미스터리 중 하나는 이처럼 고독한 남자의 일대기를 그리면서 여성이나 애정 관계가 전혀 나오지 않으며 다니엘을 거의 무성애자처럼 묘사한다는 거예요.
의미: 자신이 핏줄에 집착한다는 사실 자체를 헨리가 출현한 다음에 깨달은 거죠. 철저히 냉정한 남자의 마음속의 작은 구멍 같은 것이랄까요.
가경: 최근 호평받은 영화 속의 무감동한 남자들은 정말 독립된 글의 주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 가족과 분리된 상처나 여인에 대한 사랑이 묘사되지 않는 점은 다니엘 플레인뷰와 찰스 포스터 케인의 큰 차이죠. 사실 교회에 굴복한 시점을 넘어가면 이 인물은 거의 자기 증식의 욕망만 남은 자본의 알레고리처럼 보일 정도예요.
의미: 이 영화는 미국사회를 이뤄냈다고 미국인들이 믿고 있는 두 가지 근저를 마구 흔들고나서 질문하는 영화로 볼 수도 있어요. 하나는 자수성가라는 말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적 아메리칸 드림이고, 또 하나는 그 꿈을 지켜주는 기독교죠. 그런데 이 영화는 결말에서 그 한쪽과 다른 한쪽이 만나서 어떻게 참극이 빚어내는지를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가경: 석유와 근본주의적 기독교…. 이건 뭐 바로 이라크 전쟁의 원인으로 떠오르는 두 가지이기도 하잖아요.
의미: 이 영화의 경우, 근본주의적 기독교라고 볼 순 없어요. 영화 속 제3계시교는 일종의 극단적인 (그래서 기독교에서 이단이라고까지 말하는) 분파죠.
가경: 그렇군요. 죄송. 달리 넓게 보면 <데어 윌 비 블러드>는 구약의 창세기와 같은 이야기죠. 아벨을 죽이고 땅 위에 번성한 카인의 이야기. 따져보면 피가 흐르는 장면은 막판에나 나오는데, 영화의 잔상은 온통 피투성이였던 것만 같습니다.
의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데어 윌 비 블러드> 이야기를 연이어 하니 우울하네요.
가경: 아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사운드트랙을 언급했지만 <데어 윌 비 블러드>의 사운드도 최고였습니다. 라디오헤드의 조니 그린우드가 음악을 맡았다는데 드문 유형의 영화음악이었어요. 기계음, 바람소리, 오리지널 스코어, 브람스 음악까지 다양한 소리가 한몸이 되어 흐릅니다. 아들이 쳥력을 잃는 사고를 당한 다음부터는 주관적 청각을 써서 디자인한 음향도 몇 대목에서 인상적 효과를 냈고요.
의미: 스트라빈스키를 듣는 듯한 느낌도 있었어요. ^^ 더구나 클라이맥스에서 그 아들의 대사와 관련된 ‘사운드적인’ 충격이란!
가경: 이 영화 제작비가 2500만달러라는 거 믿어지지 않습니다. 에고, 언제부터 장엄미를 접하면 돈이 많이 들었으리라 넘겨짚는 편견이 생긴 건지….
의미: 거기서 대니얼 데이 루이스 몫까지 제하면 얼마겠냐고요오오. 근데 확실히 영화를 보면서 존 휴스턴의 <시에라 마드레의 황금>이 자연스레 떠오르긴 하죠?
가경: 음음, <아귀레, 신의 분노>도요.
의미: 다니엘 플레인뷰가 그 영화의 험프리 보가트보다 더 피눈물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은 들지만요.
가경: 요컨대 저는 테렌스 맬릭의 <천국의 나날들> 이후로 <데어 윌 비 블러드>만큼 연출과 연기, 스펙터클과 성격 연구, 혐오와 매혹의 감정이 팽팽한 균형을 이루는 영화를 본 기억이 없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의미: 폴 토머스 앤더슨의 세계에 온전히 입문하신 걸 쌍수를 들어 환영합니다!! 제3경배교! ^_^
가경: 엔딩 크레딧 끝을 보니 이 영화는 알트먼에게 헌정됐더군요. 그가 작고한 해 아카데미에서 작품상까지 탔다면 꽤 멋졌을 텐데 아쉽죠.
의미: 특히 <매그놀리아>는 확실히 알트먼에게 진 빚이 크죠.
가경: 앤더슨은 유작 <프레리 홈 컴패니언>에서 노쇠한 알트먼의 연출을 도왔다고 합니다. 알트먼 인터뷰집 서문도 썼고요. 폴 토머스 앤더슨도 장수하며 다작하겠죠?
가경: 아직 39살밖에 안 됐어요. 그래도 혜리씨한테는 오빠야.^^
의미: 나이 이야긴 지루하지만 <어톤먼트>의 조 라이트 감독은 35살이군요. 미스코리아가 어느 날 나보다 어려지더니 다음엔 신춘문예 당선작가가 나보다 어려지고 이젠….-_-
의미: 국군 아저씨가 국군 애들로 바뀐 뒤부터는 모든 게 순식간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