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Climates 누리 빌게 세일란/ 2006년/ 터키/ 101분/ 개막작
이사(누리 빌게 세일란)는 연인 바하(에브라 세일란)에 대한 열정이 식어버렸다. 휴가를 떠난 두 사람은 친구들과 만나고 해변을 거닐지만 사사건건 다툼을 벌인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중 이사의 눈을 바하가 가리면서 감정은 폭발한다. 아트디렉터 바하는 촬영지로 떠나버리고 이사는 홀로 남는다. 대학에서 강의하는 이사는 바하가 없는 사이 옛 여자친구 세라프를 찾아가지만 그녀와 섹스를 해도 외로움은 채워지지 않는다. 누리 빌게 세일란의 HD영화 <기후>는 미세한 공기를 그대로 전하는 멜로영화다. 파도소리와 바람소리의 주변음으로 채워진 쓸쓸한 롱테이크는 인물들의 내면과 풍경 사이를 절묘하게 오간다. 오랜 페르소나 에민 토프락의 사망으로 인해 누리 빌게 세일란이 아내 에브라와 함께 직접 연기에 임했다.
<버려진 땅> Forsaken Land 비묵티 자야순다라/ 2005년/ 스리랑카·프랑스/ 103분/ 세네피아
내전이 한창이지만 시골 마을 트린코마리에는 나른한 일상이 흘러간다. 잠든 부부의 얼굴, 망고스틴과 거북이로 아이를 꼬드기는 노인, 군용트럭 안에서 술에 취해 노래하는 군인들의 얼굴에서 전쟁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집안 싸움이 오히려 문제다. 동생 부부와 함께 사는 노처녀 누나는 트린코마리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시누이에게 “이곳에서 죽느니 뱀이나 개구리로 환생하는 게 낫겠어”라고 말하는 그는 유령처럼 돌아다니는 탱크를 바라보며 재개될 전쟁을 홀로 예감한다. 여운을 남기는 긴 호흡의 편집과 광활한 공간을 유머러스하게 사용하는 다층적인 미장센이 인상적이다. 주인공 부부의 집을 중심으로 목가적인 풍경을 포착하는 <버려진 땅>은 시간이 흐를수록 씁쓸한 결말을 향해간다. 2005년 칸영화제 황금카메라 수상작.
<마리아> Mary 아벨 페라라/ 2005년/ 이탈리아·프랑스·미국/ 83분/ 오버 더 시네마
<마리아>는 영화와 일상 사이의 거리를 묻는다. 마리(줄리엣 비노쉬)는 토니(매튜 모딘)가 연출한 영화에 막달라 마리아로 출연한다. 배역에 빠져든 마리는 촬영이 끝난 뒤 귀국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는다. 뉴욕에 돌아온 토니는 자신이 예수로 출연한 <이것이 나의 피>의 시사회를 연다. 영화는 삽시간에 종교적 논란에 휩싸인다. 토크쇼 진행자 테드(포레스트 휘태커)는 이 영화의 진실을 찾기 위해 종교학자, 라비, 감독 토니까지 자신의 프로그램에 섭외한다. <마리아>는 사실과 재현을 의도적으로 뒤섞는다. 토니의 영화와 현실을 봉합하고, 테드의 토크쇼와 일상이 뒤섞인다. 게다가 테드의 임신한 아내 엘리자베스(헤더 그레이엄)와 마리가 연기한 막달라 마리아의 운명마저 겹친다. 2005년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작.
<방문자> Host & Guest 신동일/ 2005년/ 한국/ 92분/ 퍼스트컷
곤경에 처했을 때 나타나는 불청객은 은인으로 변할 가능성이 크다. 신동일의 <방문자>는 그 은인이 심지어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가정에서 시작한다. 영화학 시간강사 호준(김재록)은 시쳇말로 암울한 인생이다. 아내에게 이혼당했고, 시간강사 자리마저 사라졌다. 게다가 욕실에 갇힌다. 그를 구해준 사람은 전도사 계상(강지환). 평소 계상을 귀찮아하던 호준은 그제야 그에게 관심을 기울인다. 계상은 양심적 병역 거부로 징역살이를 해야 한다. 미용사의 살인을 미스터리 형식으로 그린 단편 <신성가족>으로 주목받은 신동일 감독의 장편 데뷔작. <방문자>는 반미감정, 병역문제, 실업 같은 굵직한 사회적 이슈를 일상적 유머와 ‘소통’이라는 주제로 단숨에 꿰어낸다. 2005년 시애틀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작.
<신들린 제사장들> Les Maitres Fous 장 루시/ 1955년/ 프랑스/ 30분/ 이미지독
인류학자 장 루시가 만든 민족지적 다큐멘터리. 아프리카 서부 지역 아크라의 종교 관습을 다룬 <버려진 제사장들>은 1960년대 시네마베리테의 선구자로 알려진 장 루시의 이력과는 달리 픽션과 다큐의 경계를 넘나드는 혼합형 다큐멘터리의 성격을 보인다. 식민지의 일상을 담담하게 그려내는 초반부와 달리 닭피를 묻히고 땅바닥에 귀를 대거나 옷을 찢는 영매들과 불편한 다리를 질질 끌며 일어서는 신도들의 모습은 연극적 재현처럼 느껴진다. <버려진 제사장들>의 카메라는 기록하기보다는 인물들의 감정을 담아낸다. 하우카를 숭배하는 영매와 신도들은 개를 제단에 바치며 광기에 사로잡힌다. <버려진 제사장들>은 1941년 니제르에서 건축 기술자로 일한 장 루쉬의 경험이 반영됐다. 1957년 베니스영화제 단편부문 대상 수상작.
<퍼펙트 커플> Un Couple Parfait 스와 노부히로/ 2005년/ 일본·프랑스/ 104분/ 아시아 인 포커스
스와 노부히로의 프레임은 세상의 일부만을 담는다. 그의 영화 속에서 중요한 사건과 감정 변화는 프레임 바깥에서 일어나고 그것은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퍼펙트 커플>은 한때 ‘커플의 모범’으로 불리던 15년차 부부 마리(발레리아 브루니 테데시)와 니콜라(브루노 토데시니)가 이혼을 앞두고 겪는 불안을 포착한다. 마리와 니콜라는 서로를 붙잡고 싶지만 아쉬움을 마음속에 담아둔 채 이별을 택한다. 스와 노부히로가 1년 동안 프랑스에서 생활한 경험으로 만든 <퍼펙트 커플>은 기묘한 편집감각, 집요한 롱테이크, 블랙 프레임의 잦은 사용이 인상적이다. 단 12일 동안 촬영된 <퍼펙트 커플>의 아름다운 화면은 카메라 두대로 작업한 여성 촬영감독 카롤린 상페티에 덕이다. 기차역에서의 인상적인 결말도 그녀의 아이디어. 2005년 로카르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작.
<말라노체> Mala Noche 구스 반 산트/ 1985년/ 미국/ 80분/ 세네피언 미드나잇
2만5천달러로 만들어진 <말라노체>는 <아이다호>의 원형이다. 포틀랜드의 허름한 술집을 전전하는 월트(팀 스트리터)는 열여섯살 먹은 멕시코 불법이민자 쟈니(덕 쿠에야트)와 로베르토(레이 몽즈)에게 매력을 느낀다. 나지막한 기타 선율이 흐르고 술집과 모텔을 전전하는 그들의 모습이 몽타주로 보여진다. 1980년대 버전 <브로크백 마운틴>처럼 느껴지는 <말라노체>의 슬픈 베드신은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살결이 스치는 소리로 빼곡히 채워진다. 흑백화면에 극단적인 콘트라스트로 밤거리의 아이들을 뒤따르는 <말라노체>의 화면은 거칠고 낭만적이다. 결말에 월트와 쟈니가 데킬라를 마시며 흥겹게 이야기하다가 로베르토의 죽음을 언급하는 장면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듯하다. 1985년 LA비평가협회 인디·실험영화 부문 작품상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