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의 엔딩 크레딧에서 컴퓨터그래픽(CG)를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시간적인 분량의 차이는 있지만 이제 CG를 사용하지 않는 한국영화는 거의 없다. 오히려 빠지면 이상할 CG슈퍼바이저라는 타이틀 옆엔 종종 장성호(30)씨가 나란히 오른다. 슈퍼바이저란 현장과 작업실을 연계해서 유기적으로 작업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 <퇴마록>의 날아다니는 월향검부터 <해피엔드>의 둥둥 떠오르는 근조등까지 그가 디지타이저 위에서 타블레트 펜 하나만으로 만들었다기엔 너무나 감쪽같다. 보이는 것을 갑자기 사라지게 하거나 없는 것을 근사하게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그는 ‘마술사’다.
장성호씨는 대학 시절중 3년간 세미콜론이라는 CF프로덕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가 영화하겠다고 나선 건 대학 4학년이던 95년. 영화판이 좋아서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귀천도>로 현장에 들어왔지만 그렇다고 충무로가 경제적인 사정까지 책임져줄 만한 환경은 아니었다. 1년 가까운 작업기간 동안 보수라곤 구경조차 못한 그는 남는 시간을 이용해서 전에 하던 일러스트 작업이나 포스터 디자인을 계속해야 했다. “광고하는 이들 중엔 실력있는 이들이 꽤 있어요. 그들이 영화현장에 오고 싶어도 머뭇거리는 건 작업 난이도가 더 높은데도 수입은 10분의 1 수준이라는 현실 때문이지요.”
5년 동안 그의 작업실을 거쳐간 충무로 작품은 벌써 10작품을 넘는다. 그를 가장 괴롭히는 건 경제적인 것보다 촉박한 작업 일정이다. 작품마다 다르지만 심할 경우 일주일 내에 작업을 마쳐야 할 때도 있다. 짧은 시간에 좋은 결과가 나올 확률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건 그가 더 잘 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CG가 아니에요. 지금 환경에서 <쥬라기 공원>을 따라간다는 건 허풍이죠.” 가장 힘들었던 작업은 <이재수의 난>의 첫 장면. 디지털 6mm로 찍어 키네코 작업을 하는 도중 원테이프를 잃어버리는 사고가 발생했고, 깍깍대던 실제 까마귀는 어디론가 날아가버렸다. 원래 간단한 작업이었던 CG작업이 갑자기 까마귀와 한라산 능선과 안개까지 만드는 천지창조라는 과제로 변했다. 그가 한숨을 돌린 건 극장에 걸린 후 주위에서 ‘까마귀가 살아 있더라’는 소식을 들은 뒤다.
어렸을 적 아버지의 손을 잡고 극장을 여유있게 드나들던 그는 가장 인상깊게 본 영화로 데이비드 린치의 <엘리펀트 맨>을 꼽는다. 좀더 충분한 작업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장성호씨는 앞으로 애니메이션에 집중할 생각이다. 일곱 식구와 함께 작업하는 공간인 모픽도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는 팀과 합치기 위해 좀더 널찍한 곳으로 옮길 생각이다. 온전한 CG작업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기자재를 마련하려면 적어도 20억원이 들기 때문에 이를 개인이 부담하기란 불가능하다. 장성호씨는 이러한 경우 정책적인 지원이 필요함에도 요즘 영진위의 지원책을 보고 있노라면 작업환경 개선은 아직 먼 것 같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1970년생·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 졸업·영화 <귀천도> <박봉곤 가출사건> <구미호>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 <키스할까요> <퇴마록> <이재수의 난> <해피엔드> <행복한 장의사> CG작업·현재 <반칙왕> 예고편, <킬리만자로> 합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