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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남을 과실, 2005 칸영화제

크로넨버그를 빈손으로 돌려보낸 칸영화제

<어떤 폭력의 역사>

프랑스, 칸- 올해 칸에서는 고참들이 그 여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경쟁부문에서 가장 강렬했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익살스럽고 잔인한 메타 스릴러 <폭력의 역사>는 크로넨버그의 <스파이더>가 2002년 심사위원들에게 무시당했듯 빈손으로 남겨졌다. 도대체 얼마나 좋아야 상을 받을까? <데드 링거>(1988)로 시작해서, 아니, 심지어 <플라이>(1986)에서부터 크로넨버그는 영화마다 영어권에서 가장 대담하고 도전적인 내러티브 감독임을 보여주었다. 하긴 가장 위대한 내러티브 감독이라고 논쟁을 벌이는 허우샤오시엔도 지난 15년간 아무런 상도 받지 못했다.

가을에 개봉될 <어떤 폭력의 역사>가 왜 그렇게 위대하냐고? (분명히 고용저작물로서) 존 와그너와 빈스 라케의 만화를 자유롭게 각색한 크로넨버그 영화는 나름대로 씹을거리를 준다. 잦은 폭력을 통해 액션영화를 모방하지만 매번 폭력적인 매력에 대해 회의를 던지는 것이다.

인형 같은 아이들을 데리고 디즈니식 목가풍의 조그만 마을에 사는 한쌍의 잘생긴 정상인들(비고 모르텐슨과 마리아 벨로)이 에드 해리스의 불구자 깡패가 인상적인 일단의 범법자들에게 위협을 받는다. 긴장감 있고 분위기 있는 <어떤 폭력의 역사>는, 내러티브가 정교하게 꿈과 현실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고 연기가 역할 수행과 섞여지며, 장소는 세트장처럼 느껴지고, 항상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상처에서 피가 뿜어져나오던 50년대 초 공포영화의 초사실주의적 버전이다.

앨프리드 히치콕식 ‘오해받은 남자’ 주제와 끊임없이 의식되는 관객에도 불구하고 <어떤 폭력의 역사>는 깊이 몰입시키지만 제목이 시사하듯 냉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크로넨버그의 톤은 모순적이기엔 너무 혼란스럽게 메말라 있고 무섭기엔 너무 엉뚱하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빈정대는 게 아니고 우스꽝스럽다”고 말했다. 일면 관객을 공격한 미카엘 하네케의 <퍼니 게임>의 성공적인 버전인 이 영화는 언론시사회에서 과도하게 즐기던 관객을 향해 비엔나 프로그래머가 “쓰레기 같은 비평가들아, 그만 웃고 이 영화를 진지하게 봐라”라고 소리치게 만들었다. 당신을 미치게 만들 수 있는 영화다.

실망스런 <만달레이>, 인기절정 <망가진 꽃들>

라스 폰 트리에의 <만달레이>는 달랐다. 칸에 출품할 때마다 논쟁을 일으켰던 덴마크의 악동은 <도그빌>의 실망스런 후속작으로 아무런 자극도 일으키지 못했다. <만달레이>는 안절부절못하는 브라이스 댈러스 하워드가 연기한 그레이스(<도그빌>에서 니콜 키드먼이 연기한 역- 역자)를 따라 노예제도가 있는 앨라배마의 한 플랜테이션으로 간다. 지옥으로 가는 길이 좋은 의도를 가지고 닦여 있다. 그레이스가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아버지의 갱단원들을 이용하는 것이다.

<만달레이>는 인종에 대해 말하려고 하지만 별로 할말이 많지 않다. 그레이스가 강요받는 민주주의에 대한 교훈과 부시의 이라크 모험담이 주는 평행선은 좀더 크게 들리지만 이내 도식적으로 느껴진다. 이 묘기의 거장, 폰 트리에가 자기 반복에 빠지다니. 감독은 틀에 박힌 <도그빌>의 장치를 비효과적으로 사용하고 그의 지루함은 영화 밖으로 전염된다.

가장 환영받은 경쟁부문 작품은 짐 자무시의 <망가진 꽃들>이었다. 이 빌 머레이 영화는 비록 새로운 우수를 깊게 느끼게 하지만 전작들처럼 우습고 생생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자무시가 감상적 유행주의를 절제한 조그만 복귀작이 되었다. 영화에서 머레이는 자식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나이 들고 우울한 독신 남자를 연기한다. 이전 사랑들을 돌아보며 미국을 누비며 과거의 여자들을 찾아다닌다. 번번이 찾아낸 여자들은 점점 더 무섭게 우스꽝스러워져간다(머레이가 무표정한 얼굴의 아이콘적인 스타라면 <망가진 꽃들>은 그의 <일곱개의 우연>(Seven Chances, 버스터 키튼, 1925- 역자)일 것이다, 거꾸로 돌려놓으면). 스타의 명백한 무심함이 <물 속의 삶>을 전복시켰지만 여기서는 무반응과 반응 지연의 대가가 전체 영화를 이끌어간다.

자무시가 가장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모든 영화 언론인들이 장 피에르와 뤽 다르덴 형제 감독의 <아이>에 상을 줬다고 뭐라고 할 수도 없다. 1996년 <약속>부터 시작된 이 형제 감독에 대한 평가는 계속되고 있다. 이제 이들은 본능적인 촬영, 뛰어난 연기, 벨기에의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염려, 기이한 로베르 브레송을 향한 유사성 같은 세계적 영화감독이라면 즉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자기들만의 스타일과 흥미를 보여준다. <로제타>가 <무셰트>를 리메이크한 것처럼 <아이>도 <소매치기>를 보여준다. 아기가 세상에 나온다. 부모는 집없는 십대들이다. 날품팔이 사기꾼 아버지는 <약속>에서 어린 아들을 연기한 제레미 레니에르가 맡았는데 제목에 언급된 아이를 팔았다가 다시 어렵게 찾아야 한다.

전형적으로 <아이>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추격 속에 쌓여가는 일련의 임무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유적이기도 하고 상당히 물리적이기도 하다. 다르덴 형제들이 가진 놀라운 점은 이들의 복잡한 단순성이다. 각 영화는 너무나도 물질주의적인 세상 가운데 일종의 (고상함을 향한?)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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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이담형 (2005. 5. 24. 짐 호버먼은 미국 영화평단에서 대안영화의 옹호자로 가장 명망이 높은 평론가로 <빌리지 보이스>에 기고하고 있습니다. <씨네21>과 <빌리지 보이스>는 기사교류 관계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