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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보고] 선댄스의 해는 지지 않는다
글·사진 문석 2005-02-02

1월20일 선댄스영화제 개막… 최근 들어 가장 활기차다는 평가

영화기자에게 선댄스영화제는 참으로 난감한 자리임에 틀림없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감독들의 영화를 거의 아무런 정보도 없이 찾아다녀야 한다는 사실은 스트레스 이상의 압력을 몸에 행사한다. 바쁜 상영일정, 넉넉지 못한 경비, 부실한 인터넷 환경 등 다른 이유도 많겠지만 혹시나 내가 보지 못한 영화가, 또는 영화 시작 10분 만에 뛰쳐나온 영화가 상을 받으면 어찌할 것인가, 라는 영화기자의 ‘고전적’ 불안감에 시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말해, 올해부터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선댄스 조직위가 기존 미국 극영화, 미국 다큐멘터리 부문 외에 세계 극영화, 세계 다큐멘터리라는 두개 부문을 경쟁부문으로 추가했기 때문이다.

총 4개 부문 60편의 경쟁부문 영화를 열흘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다 훑는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또 흥미로운 작품들이 대거 포진해 있는 특별상영, 프리미어, 아메리칸 스펙트럼 등 다른 부문의 작품들에까지 눈길을 주다보면 볼 수 있는 경쟁작의 수는 더욱 줄어든다. 게다가 시립도서관, 라켓클럽, 호텔 등으로 분산돼 있는 상영관들 사이의 거리까지 만만치 않다보니 손오공의 분신술 외엔 경쟁작을 챙길 해결책이 없다. 결국, 상이야 누가 받건 알게 뭐냐는 마음가짐으로 입 닥치고 영화나 보는 수밖에.

다시 활기 찾은 신인감독 ‘등용문’

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파크시티 전경

지난 1월20일 개막한 2005 선댄스영화제는 최근 들어 가장 활기차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0년대 중반까지 쿠엔틴 타란티노, 코언 형제, 스티븐 소더버그, 리처드 링클레이터, 로버트 로드리게즈, 케빈 스미스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감독들을 발굴해 그 명성을 날렸던 선댄스는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다소 침체국면을 겪었다. 물론 대런 애로노프스키, 빈센트 갈로, 크리스토퍼 놀란 같은 감독을 속속 세상에 알렸지만, 작품에서나 비즈니스에서나 사정이 예전만 못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갈수록 미국이라는 지역의 행사라는 인상을 짙게 드리운 선댄스가 부각된 것은 지난해부터다. 불과 40만달러의 제작비를 들여 4천만달러 이상의 수익을 거둔 <나폴레온 다이너마이트>를 비롯해 2천만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가든 스테이트>와 다큐멘터리 <슈퍼 사이즈 미>, 작품성과 흥행력을 겸비했던 <기품있는 마리아>와 <우리는 더이상 여기서 살지 않는다>, 그리고 아트하우스 극장을 뒤흔든 <타네이션>(비경쟁)에 이르기까지 2004년의 선댄스는 유례없는 성과를 거뒀다.

좋은 영화 건지려는 치열한 비지니스 전쟁

올해 최대 화제작 <허슬 & 플로>

이런 사정 탓인지 유타주의 작은 마을 파크시티는 진흙 속의 진주를 발견하기 위한 스튜디오, 평론가, 기자, 관객의 경쟁으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다. 인구 2만명에 불과한 이 도시에 4만5천명의 외부인들이 한꺼번에 몰려온 사정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기사를 쓰고 있는 시점(1월26일)까지 가장 시끄러운 작품은 단연 존 싱글턴이 제작자로 참여한 힙합영화 <허슬 & 플로>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 영화의 시사회는 22일 저녁 7시에 열렸는데 계약은 불과 몇 시간 뒤인 23일 새벽 4시에 파라마운트와 체결됐다. 시사회가 끝난 뒤 ‘대박감’이라는 소문을 들은 파라마운트, 소니픽처스, 뉴라인시네마 등은 LA로 이 소식을 타전해 긴급 심야시사를 갖는 등 법석을 떨었다. 결국 900만달러에 이 영화를 구매하고 존 싱글턴이 앞으로 제작할 영화 두편에 각각 350만달러를 투자한다는 조건을 내건 파라마운트가 최후의 승자가 됐다. 또 미라맥스는 호주에서 온 호러영화 <울프 크릭>과 피어스 브로스넌이 주연한 <마타도어>를, 워너인디펜던트픽처스는 남극의 펭귄을 다룬 다큐멘터리 <황제의 여정>을, 소니픽처스클래식은 현대적인 누아르영화 <브릭>을 구매했으며, 이외에 수많은 영화들이 저비용 고효율의 꿈을 꾸는 스튜디오간의 과열경쟁 속에서 몸값을 올리고 있다.

미국에서 열리는 영화제 중 가장 큰 규모의 행사답게 비즈니스가 가장 큰 관심거리가 되긴 하지만, 그건 어차피 ‘장사꾼’들의 논리일 뿐이다.

<녹색 의자> <여자, 정혜>에 뜨거운 반응

사실, ‘0’이란 숫자의 개수는 독립적이고 진취적이며 새로운 영화를 발견하고자 하는 이곳의 일반 관객에겐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기대 이상으로 진지하고, 예상보다 훨씬 지적이며, 40∼50대가 주축을 이루는 것에 비해 엄청나게 열정적인 선댄스의 관객은 주말의 모든 상영관을 매진시켰고, 상영 뒤 열리는 감독과의 대화시간을 세미나장으로 만들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세계 극영화 부문 경쟁작으로 초청된 두편의 한국영화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토요일인 22일 밤 9시 메인상영관인 이집션 극장에서 첫 공식상영을 가진 박철수 감독의 <녹색의자>는 과감한 노출과 적나라한 대사로 관객의 적극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제프리 길모어 영화제 집행위원장이 “관객의 반응이 너무 뜨겁다”고 말했을 정도. 이윤기 감독의 <여자, 정혜>도 23일 인근 솔트레이크시티에서의 상영을 시작으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모르몬교도라 일요일 오후 1시30분이 부담됐을 텐데도 170개의 의자가 꽉 찼으며, 한 관객이 ”이런 영화를 만들어줘서 감사하다”라는 말을 하며 눈물을 쏟았을 정도로 뜨거운 분위기였다. 프리미어 부문에 초청된 김기덕 감독의 <빈 집>과 심야프로그램으로 초청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도 미국 배급사의 지원 속에서 관객의 눈길을 모으고 있다.

그리고, 아직 할 얘기는 많다. 키아누 리브스, 데이비드 시머, 글렌 클로스, 대니얼 데이 루이스, 제프 대니얼스, 케빈 베이컨, 패리스 힐튼까지 경호원을 사이에 두지 않은 채 길거리에서 마주칠 수 있다는 놀라움이나, 선댄스와 나란히 열리는 슬램댄스를 비롯, 트로마댄스, 섬(thumb)댄스, 셰프(chef)댄스, 프리덤 시네마 페스티벌 등 희한한 행사, 그리고 무엇보다 희한하고 기발하고 똘똘한 내일의 영화에 관한 보고까지. 하지만 아직 첫 시사를 열지 않은 작품도 있는 마당에 어찌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겠는가. 별 도리가 없다. 입 닥치고 영화나 보는 수밖에.

<녹색의자>는 어떤 영화?

맛있는 섹스 그리고 원조교제

박철수 감독이 ‘비밀리에’ 만든 <녹색의자>가 선댄스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공개됐다. 유부녀가 남자 고등학생과 ‘원조교제’를 한 혐의로 구속된 실제 사건에서 착안해 박철수 감독이 특유의 스타일로 조리한 작품이다. 영화는 문희(서정)가 사회봉사명령 100시간을 선고받고 출소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문희는 기다리고 있던 ‘원조교제’ 상대 현(심지호)과 함께 여관으로 가 며칠 동안 격렬한 섹스를 나눈다. 현의 변함없는 사랑을 확인하면서도 일말의 죄책감과 불안감을 갖고 있는 문희는 현에게 헤어지자고 말한 뒤 절친한 친구 진(오윤홍)의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이곳에 현이 결합하면서 세 남녀의 이상한 동거가 시작된다.

<녹색의자>의 초반부는 ‘섹스하고 먹고, 먹고 섹스하고’라는 말로 정리될 수 있을 정도다. 문희와 현은 여관 안에서 끊임없이 관계를 가지며, 그 중간중간에 음식을 맛있게 먹는다. 성욕과 식욕이라는 모티브를 사용한다는 점이나 일정한 여성주의적 시선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박 감독의 대표작 <301 302>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소재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선지 곳곳에 숨겨놓은 독특한 유머 탓에 선댄스 관객은 시종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박철수 감독은 관객과의 대화에서 “선댄스는 이번이 세 번째(<301 302>와 <산부인과>가 비경쟁 부문으로 초청됐었음)인데, 처음 초청 연락이 왔을 때 심사위원을 하라는 줄 알았다”며 농담을 던진 뒤, “섹스영화라면 섹스영화겠지만, 성을 상품화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버라이어티>의 데릭 엘리는 “파격적인 유머의 기묘한 혼합, 그리고 드라마와 시적인 순간은 자기분석적인 섹스영화를 기대했던 이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도 있겠지만, 주인공의 나이 차이와 육체적 연결을 솔직하게 바라봄으로써 경쾌하고 특정한 판단을 내리지 않는 길을 가려 노력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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