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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의 펜 타고 날래. 시나리오 지망생들 “꿈을 향해 써라”

“기억에 남는 대사가 하나도 없어요.” “도무지 어떤 관객을 대상으로 썼는지 알 수가 없네요.” 한 묶음의 종이를 들고 강단에 서있는 발표자를 향해 청중의 십자포화가 날아간다. 질문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발표자의 얼굴은 붉게 상기된다. “음, <맨 인 블랙>같은 느낌으로 코미디 반, 액션반 인 일종의 킬링타임용 영화인데…” 궁색한 답변은 “어디서 웃어야 할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라는 가차없는 비판에 금방 오그라들고 만다. <우측사진설명> 한겨레문화센터 시나리오 작가학교 출신으로 올해 시나리오 공모전에 수상한 작가들.(오른쪽부터)

안슬기(34) <다섯은 너무 많아>로 영화진흥위원회 독립디지털 장편 제작 지원작 선정

박신우(27) <금붕어>로 제9회부산국제영화제 선재펀드 수상

오승희(32) <퍼플 레인>으로 중앙일보 시나리오 공모전 가작 수상

김선아(33) <당신이 죽은 사이에>로 경상북도 시나리오 공모전 최우수상 수상

하수진(34) <박해일과 이유정>을 제6회 막동이 시나리오 공모전 대상 수상.

수강생이 직접 작품을 쓰고 그에 대한 토론을 하는 워크숍 형태로 진행되는 한겨레문화센터 시나리오작가학교 수업시간은 이처럼 주저없는 공격과 열띤 토론으로 늘 후끈후끈 하다. 두 시간짜리 수업이 30분씩 연장되는 건 다반사. 그럼에도 수십 개의 과목 중에 수강 신청이 가장 먼저 마감되고 대기자까지 줄을 서게 하는 인기 강좌다. 지난해까지 30명으로 마감되던 정원을 올해부터 2배인 60명으로 늘였는데도 여전히 자리가 부족하다. 수강생들은 대학생에서 방송작가, 조연출로 일하는 현업 종사자에서 대학원의 시나리오 전공 학생까지 다양하고 연령대 역시 88년생 ‘고딩’에서 39년생 ‘노땅’까지 천차만별이다. 이들의 꿈은 단 하나, 자신의 시나리오가 스크린에 화려하게 뜨는 것이다.

어느덧 우리 문화의 주류 장르가 된 영화가 이제는 블랙홀처럼 문학 지망생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영화산업이 급성장하면서 억대의 시나리오료를 받는 스타 작가들이 탄생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가속도가 붙는 느낌이다. 그러다 보니 문청들에게 꿈의 무대였던 신춘문예도 점차 그 화려한 명성을 시나리오 공모전에 넘겨주고 있다. 올해 <퍼플 레인>이라는 작품으로 일간지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가작을 수상한 오승희(32)씨 역시 몇년 동안 직장 생활을 하면서 소설 습작을 하다가 ‘전업’한 케이스. “소설에 대한 그룹 스터디를 할 때 사람들이 제 글만 보면 꼭 영화 같다고 하는 거예요. 곰곰이 따져보니 어릴 적부터 영화를 좋아했던 게 문학보다 내 삶에 큰 영향을 끼친 것 같아 그 날로 시나리오 작가학교에 등록했죠.” 최근 다니던 직장까지 접고 시나리오 전업작가의 세계에 ‘올 인’했다.

한겨레문화센터 시나리오 작가학교를 7년째 이끌고 있는 시나리오 작가 심산씨는 “막연히 글쓰는 재미나 호기심으로 들어왔다가 포기하는 사람이 절반 가까이 되지만, 전에 비해 질적으로 우수한 인력이 많이 몰리고 있다. 빈곤한 충무로의 작가군이 두터워질 날도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고 ‘밝은 미래’를 점쳤다.

영화화 확률 0.1% ‘바늘구멍’그래도 통과하는 낙타 있다

한겨레문화센터와 함께 비정규 교육기관으로 시나리오 작가들을 길러내는 대표적인 곳으로 92년 개원한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산하의 영상작가 전문교육원이 있다. 직접 작품을 써보는 워크숍 형태로 운영되는 이 곳에서 배출된 작가들로는 김기덕 감독을 비롯해 <정사> <반칙왕>의 김대우 작가, <여고괴담> <비밀>의 박기형 감독, <조폭 마누라> <이것이 법이다>의 김문성 작가, <올드보이>의 황조윤 작가 등이 있다.

공모전 두들기고 각색작업 참여

제작자마다 아는 영화인들을 만나면 “좋은 시나리오 없어요?” 노래를 하는 충무로지만 아직까지 초보작가가 영화의 크레딧에 이름 석자 올리는 일은 바늘구멍 들어가는 데 성공한 낙타가 되는 것에 가깝다. 한해 충무로에서 제작되는 평균 제작편수 60편에 비해 각종 시나리오 공모전에 출품되는 작품수는 어림잡아도 3천여 편. 게다가 신인보다는 검증받은 작가를 선호하는 게 인지상정이다보니 작가 지망생이 자신의 이름을 스크린에 새길 수 있는 확율은 0.1%도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영진위 DB 구축 끼·재능 연결

그럼에도 연영과 출신도 아니고 충무로에 연줄도 없는 작가 지망생들이 영화에 다가가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공모전이다. 영화진흥위원회가 매년 실시하는 극영화 시나리오 공모전을 비롯해 언론사, 영화사 등에서 해마다 수십개의 시나리오 공모를 한다. 올해 막동이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대상을 차지한 하수진(34)씨는 수상 뒤 추천을 받아 현재 촬영 중인 <키다리 아저씨>(제작 유빈 픽처스)의 각색 작업에 참여하며 충무로에 첫발을 디딜 수 있었다. 하씨의 경우도 그렇지만 공모에 낸 자신의 시나리오가 영화화되면서 데뷔하는 일은 지극히 드문 예다.

여러 공모전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실미도>의 작가 김희재씨는 “수상이 곧 데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낙선이 곧 실패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탈락 작품이라도 아이디어나 어떤 재능이 눈에 띄는 작가들은 러브콜을 받을 수 있는게 공모전의 장점”이라고 말한다. 공모전이 소화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나는 작가 지망생들과 제작사를 직접 연결해주기 위해 영진위는 지난 6월 말 ‘한국영화 시나리오DB’라는 중계 사이트를 구축했다. 완성된 시나리오나 트리트먼트(시나리오와 시놉시스의 중간단계)라면 누구나 올릴 수 있는 이곳에는 지금까지 170편의 작품이 올라왔으며 최근 황인호씨의 <아리조강 납치사건>이 시네월드에 팔렸다.(아래사진 한겨레문화센터 시나리오작가학교 수업을 듣고 있는 수강생들)

억대연봉 스타급 열손가락 꼽아

당연한 말이지만 공모전 수상이나 충무로 진입이 성공가도를 열어주지는 않는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상업영화에서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는 비율이 높은 충무로에서 간판급 전문작가는 열 손가락을 채우지 못한다.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 <광복절 특사>등에서 작가로 활동하다가 감독으로 전업한 박정우씨, <실미도> <누구나 비밀은 있다>의 김희재씨, <파이란> <블루>의 시나리오를 썼고, 조역배우로도 활동중인 김해곤씨, <정사>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등을 썼으며 감독 입봉을 준비하는 김대우씨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같은 A급 작가가 되고 흥행에 성공하면 1억원이 넘는 연봉을 챙길 수 있지만 아직도 시나리오 작가의 임금은 몇백만원에서 출발한다.

크레딧에 이름이 올라가는 작가가 되더라도 때로 1년 이상 매달리는 작업에 평균잡아 2-3천만원의 보수는 높지 않다. 준비하던 작품이 엎어지는 것이 성사되는 때보다 훨씬 잦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시나리오 작가의 대열에 합류하려는 지망생들의 열기는 식지 않는다. 다행스러운 건 배우와 아이디어 만으로 제작비가 만들어지던 전과 달리 ‘책’(시나리오)이 중요성이 갈수록 강조되는 최근의 변화다. 덕분에 실력있는 시나리오 작가군의 형성과 철철이 가뭄인 양질의 시나리오 생산, 시나리오 작가들의 처우 문제는 닭과 달걀처럼 함께 맞물려 머지 않아 충무로의 체질개선을 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쓸 사람은 넘쳐나는데 ‘쓸만한 책’ 없다고?

쓰고자 하는 사람은 넘쳐나는 데 ‘쓸만한 책’이 없어 늘 아우성치는 충무로. 시나리오 작가는 최근 국정감사에서 보고된 현장 스탭 처우 문제에 아예 포함되지도 못할 만큼 전문화되지 못한 영역으로 남아 있다. 할리우드처럼 작가와 감독의 분화가 덜 되있는 데다 팀이 아닌 개인으로 작업하기 때문에 하나의 시나리오가 여러 작가를 거치는 동안 작가 한 사람의 자리(크레딧)는 소리없이 사라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시나리오 작가 김형기씨는 “시나리오 작가의 전문화와 시나리오의 질적 향상을 위해서는 제작사들이 좀 더 과감하게 시나리오 개발에 투자해야 한다”고 말한다.

완성된 시나리오만 찾는 제작사 전문작가 키우기 과감한 투자를

“쓰겠다는 작가들이 넘쳐나니 제작사들은 완성된 시나리오만을 찾게 된다. 그러나 제대로 시나리오를 만들기 위해서는 보다 체계적인 투자가 필수적”이라는 김씨의 주장이다. 김씨가 일하는 영화사 우리엔터테인먼트을 비롯해 몇몇 제작사에서는 ‘작가실’제도를 도입해 시나리오가 완성될 때까지 작가들에게 일정한 월급과 작업공간을 주면서 안정적인 아이디어 개발을 돕고 있다. ‘작가실’은 작가들을 소속사에 묶는다는 단점도 있지만 시나리오가 완성될 때까지 여러 면에서 ‘맨 땅에 헤딩’해야 하는 작가들이 안정감을 갖고 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김희재씨는 지난해 작가 7명과 함께 시나리오 창작회사 ‘베네딕투스’를 차렸다. 내년 개봉하는 <마파도>에서 베네딕투스의 크레딧을 첫사용하게 될 이 창작집단은 함께 아이디어를 개발하고 작가의 개성과 재능에 따라 일을 분배하는 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젊은 작가의 경우 자신의 재능에 맞는 장르의 일거리를 찾기도 힘들고, 개인적으로 일하면 여러 면에서 고립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창작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창작집단을 꾸리게 됐다”는 게 김씨의 설립의도다.

시나리오 작가 심산씨는 “할리우드 같은 작가조합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태에서 젊은 작가들을 일회성으로 소모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조명이나 촬영, 연출부같은 도제 시스템의 도입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일거리를 찾는데 무엇보다 인적 네트워크가 중요한 데다, 초보작가는 감독이나 제작자와 단독으로 협상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이름있는 작가의 우산 아래서 일과 영화판의 큰 그림을 익혀나가면서 작가들끼리 끌어주고 밀어주는 시스템이 확립돼야 한다”는 게 심씨의 견해다.

<품행제로> <안녕! 유에프오> 각본 <아라한 장풍대작전> 각색한 이해영·이해준 작가의 ‘초보를 위한 조언’

1. 시나리오 작가는 배고프다면서요?

우습게도 이것은 가장 잦은 질문. 혹여 이런 연유로 주저한다면 당장 떨치시라. 아직 작가군은 얇지만 이미 ‘억대 작가’가 실현된 마당에 당신이라고 그 주인공이지 말란 법은 없다. 최소한 시스템은 갖추어졌다. 작가와의 인센티브 계약도 이제는 관행이 됐고, 집필 기간 작가를 지원하는 방식도 개선됐다. 관건은 ‘얼만큼 작업을 효율적으로 운용하는가’다. 매달 월급을 기대할 수 없는 작가에게 중요한 건 계약에 맞는 자기 시스템을 확보하는 일. 시간 한계에 맞춰 정확한 결과물을 뽑아내는 패턴을 익힌다면, 당신은 기본 이상의 연봉을 반드시 보장받을 수 있다.

2. 공모전에 당선되면 작가가 되는 거 맞죠?

아쉽게도 시나리오 공모전 당선이 반드시 작가 데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승패는 어떤 공모전을 택하느냐에 달렸다. 공모전은 대략 두 가지다. 이벤트성과 실질적인 작가(혹은 작품) 발굴을 위한 것. 영화화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주최측의 제작 능력과 마인드다. 영화화 과정에는 수많은 변수가 있으므로 당신의 당선작이 극장에 걸리지 않을 확률은 생각보다 클 수도 있다. 하지만 주최측이 함께 일할 능력 혹은 의욕을 갖고 있다면 적어도 당신은 작가로서의 삶을 보장받을 수 있다. 문제는 당선, 그 후다. 주최측의 성향과 심사위원들의 프로필을 유심히 살펴라.

3. 무턱대고 영화사를 찾아가도 될까요?

어디에도 인맥 안 닿는 지망생이여, 기를 펴라. 모든 영화사는 좋은 시나리오를 찾는데 언제나 혈안이다. 당신은 그들에게 매우 ‘고마운’ 존재다. 주눅들 필요 없다. 회사에 전화를 걸어 작품 접수 담당자를 찾아라. 담대히 회사 문을 박차고 들어가서 도도하게 커피를 요구하고, 자신 있게 작품을 전달해라. 그리고 답변 기한을 약속 받아라. 물론 돌아오는 답이 부정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평가’ 그 자체다. 시장의 평가는 당신에게 부족한 것을 알려줄 것이고, 그 과정은 당신을 직업작가의 길로 한 발 가까이 인도할 것이다.

4. 시나리오 강의를 들으면 정말 잘 쓸까요?

시나리오 작법을 누군가로부터 온전히 전수 받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교육만으로 익힐 수 있는 특정한 기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 작품에 대한 평가와 토론의 장을 마련해주는 워크샵 형태의 강의라면 나쁘지 않다. 어떻게 쓰는가를 듣는 것보다 직접 쓰는 것이 우선이고, 일단 쓰면 ‘끝까지 쓰는 것’이 중요하다. 집필 도중 쉽게 포기하는 초보자를 부단히 쓰고, 끝까지 쓰게 만들며, 영감을 얻어 고쳐 쓰게 만드는 강좌라면 찬성. 단, 잊지 말자. 사람에 따라서는 저명한 누구의 강의보다 뛰어난 영화 한 편이 더 직접적인 선생님일 수도 있다.

5. 시나리오는 감독이 결국 다 고친다면서요?

시나리오는 소설처럼 그 자체로 목적을 갖지 않는다. 제작자나 감독, 배우, 촬영 및 모든 스탭들과 마찬가지로 시나리오도 영화를 만드는 수많은 요소 중 하나라는 사실을 상기하자. 만약 당신이 영화 전체를 그릴 줄 아는 프로 작가를 꿈꾼다면, 과정에서 생기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자. 당신 작품은 언제나 가변적이다. 하지만 그게 꼭 당신이 수동적이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당신은 작가이며, 시나리오 창작의 주체다. 중심에 서서 그들을 치열하게 설득하라. 또 그들로 하여금 당신을 설득하도록 만들어라. 가열찬 설득이야말로 영화의 과정을 풍부하게 만든다.

“영화는 공동작업‥작가는 유연해야” <실미도> 쓴 김희재 작가의 ‘작가론’

“한 영화의 완성에 있어 시나리오 작가는 친부모같은 존재고, 감독은 양부모같은 존재입니다. 작가가 좋은 소양을 가진 아이를 낳아서 입양시키면 예쁘게 키우는 건 감독의 몫이죠.” 현재 촬영중인 <공공의 적 2> 시나리오를 쓴 김희재(35)씨는 최근 충무로에서 가장 잘 나가는 시나리오 작가다. 얼굴의 가는 선과 차분한 말투가 여성적인 느낌을 주지만 그의 작품 목록에는 <국화꽃 향기>, <누구나 비밀은 있다> 같은 멜로보다 <예스터데이> <실미도>같은 선굵은 액션영화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만화작가 생활 10년 값진 혼란 글쓴땐 계산과 약속에 충실해야

배우 설경구, 감독 김상진과 동기인 한양대 연극영화과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한 뒤 만화 스토리 작가로 10년 동안 일했으며 2000년 대학 후배의 제안으로 싸이코 스릴러 의 각색작업을 하면서 충무로에 입성했다. “시나리오가 완성되도 중간에 엎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첫 작품이 영화화됐으니 운이 좋은 편이지요. 만화작업을 하면서 전쟁, 역사물 등 온갖 장르의 이야기를 매체라는 정해진 틀에 쉼없이 써본 게 큰 훈련이 됐다고 생각해요.” 김희재 작가를 스타의 자리로 올려놓은 것은 <실미도>. 김 작가의 손에 들어오기 전 6명의 작가를 거치며 만신창이가 돼 나가 떨어져 있던 대본이었다. “소재가 주는 중압감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장르 공식에 맞춰서 뚜벅뚜벅 써내려간 게 적중했다고 생각해요. 함축성 있는 대사의 매력을 인정해주는 게 작가로서 강우석 감독에게 느끼는 편한 점이죠.”

<실미도>가 개봉한 뒤 그는 ‘아쉬운 점은 없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사석에서라도 감독이나 완성된 작품에 대한 언급을 안하는 게 그의 원칙이다. “시나리오 작가에게 유연성은 무엇보다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해요. 영화는 수많은 사람의 공동작품인데 자신의 생각만 고수할 수는 없죠. 그리고 현장 나가보면 그 많은 사람들이 시나리오 한 줄 때문에 머리를 싸매고 속을 태우는 데 서로간의 신뢰가 없으면 하기 힘든 일이지요.”

“내가 쓴 한 두줄을 화면으로 완성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서 헌신하는 모습을 볼 때, 감독이나 배우가 내 의도보다 뛰어나게 인물이나 상황을 해석해낼 때” 감독은 느끼지 못할 전업작가의 기쁨을 맛본다는 김씨가 도전하고 싶은 장르는 누아르. 개인적으로는 <화양연화>처럼 시나리오보다 영상언어가 압도적인 영화도 좋아하지만 해석의 여지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로맨틱 코미디에는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고. 올해부터 추계예대 영상학부에서 시나리오 작법을 가르치고 있는 그는 시나리오를 쓰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건 ‘계산’과 ‘약속’이라고 말한다. “대중영화 시나리오에는 정확한 계산이 필수적입니다. 멋진 그림 하나 만들자고 무턱대고 코엑스를 폭파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또 시나리오 한줄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는 백명,이백명의 사람들이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도록 약속에 충실하는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사진=윤운식 기자 yw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