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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미의 내면 대신 다리에 탐닉하는 <장화, 홍련>
심영섭(평론가) 2003-07-03

소녀의 육체에 투사된 한 남성의 불안과 욕망

<반칙왕> 이후, 김지운은 점점 엄숙해져간다. 웃음은 자꾸자꾸 걷히고 공포 그것도 장중한 공포, 그로테스크한 아름다움을 지닌, 본인의 말마따나 무섭고도 슬픈 공포, 정서적 뉘앙스가 볼터치되고 스타일리시한 화면이 볼륨업된 A컵짜리 공포를 꿈꾼다. 그러나 너무 이상하게도 <장화, 홍련>을 보며 ‘이게 바로 김지운이지’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김지운의 인장이 돋보이는 지점은 공포가 아니라 여전히 생뚱맞은 김지운식 웃음이었다. ‘너 기억나니?’를 연발하며 계모 역할의 염정아가 혼자 원맨쇼를 하듯 엄숙한 정찬의 분위기를 두 동강내는 장면.

게다가 김지운 감독이 정색할수록 김지운의 영화는 은근히 반칙의 정도도 심해진다. 이야기의 앞뒤 아귀가 맞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던 <조용한 가족>에는 <장화, 홍련>처럼 과잉의 연출로 이야기의 미로를 탈출하려는 정색이 없었다. <반칙왕>은 수오 마사유키류의 코미디를 접수한 것이 분명해 보였지만, 이때도 그는 자신이 인용한 혼성모방을 은폐하려는 강박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장화, 홍련>에 이르러 스타일이 장르의 규칙을 압도하면서 감독은 수많은 공포영화들을 아무런 주석없이 무단 도용한다. 여기에는 <식스 센스> <디 아더스> <싸이코> <캐리> 같은 할리우드 취향이 있는가 하면, <큐어> <오디션> <링> 같은 일본 호러 취향에 <여고괴담>의 점프컷과 <소름>의 이미지도 빠질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하우스호러의 결정판 <샤이닝>과, 한 개인의 내면과 인식의 문제를 정신분열증적 화면에 담아낸 크로넨버그 감독의 <스파이더> 같은 영화도 떠오른다. 이쯤 되면 내가 너무 공포영화를 많이 봤거나, 김지운 감독이 너무 공포영화를 많이 본 게 틀림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장화, 홍련>은 이미 <쓰리>의 공포영화 전략을 그대로 이식한, 김지운 감독 자신의 창백한 모사품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렇다면 김지운 그는 왜,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정품 코미디를 마다하고 반칙감독이 된 것일까?

관객 동원 200만명이라는 스코어가 말해주듯이 <장화, 홍련>의 공포영화로서의 임무는 외형적으로 성공 또 성공이다. <장화, 홍련>은 관객을 무섭게 한다. 그냥 무섭게 하지 않고 까무라치게 놀라게 한다. 귀신의 원한과 살아 남은 자의 죄의식이라는 <메모리즈>의 전략은 <장화, 홍련>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이중의 전략이다. 사실 김지운 감독은 <장화, 홍련>에서 어떻게든 관객과의 게임에서 이겨보려는 듯 이중 삼중의 공포 망으로 필승을 다짐하고 있다.

판타지의 미로에서 길을 잃다

일례로 수미는 꿈에서 깨어났으나 다시 침대가를 돌다 공포의 점프컷으로 달려드는 머리 푼 원귀를 만난다. <장화, 홍련>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인 이 신에서, 수미가 꿈에서 깨어난 것으로 상정한 관객은 이어 등장하는 원귀를 필시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관객의 공포는 배가 되지만, 그러나 다리 사이에서 쓰윽 피를 흘리던 원귀는 또다시 꿈속의 존재일 뿐이다. 이 원귀는 대체 누구인가? 목매단 수미의 엄마 같기도 하고, 그러기엔 이 원귀는 너무 소녀적인 초경의 공포를 체화하고 있다. 원귀의 존재는 일단 차지하고라도 첫 번째 꿈은 대체 수미가 꿈속에서 또 꾼 꿈인가 아니면 두 가지의 꿈이 연달아 반복된 것인가? 이건 관객으로 하여금 꿈속의 귀신을 현실의 귀신으로 받아들이도록 트릭을 쓰는 일종의 반칙이다. 그리고 이건 이미 정보석의 거듭되는 꿈으로 관객을 놀라게 했던 <메모리즈>에서도 이미 써먹은 수법이기도 하다.

여기에다 감독은 또다시 필승을 다짐하듯 희대의 귀신의 시점숏을 등장시킨다. 영화 초반부, 막 귀향한 동생 수연은 으스스한 음향효과와 함께 자신의 방문을 여는 미지의 손을 발견하게 된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수연. 그러나 영화 후반부 수연은 수미가 만들어낸 환영, 수연의 죽음을 방조한 새엄마 은주에게 복수하는 원귀의 모습을 띠고 옷장에서 나오게 된다. 필시 죽은 귀신일 수밖에 없는 수연의 공포와 시점숏은 수연을 마치 살아 있는 인간처럼 보이게 만드는 김지운의 또 다른 트릭이다. 만약 <식스 센스> 같은 영화에 귀신의 시점숏이 들어간다면 어떻겠는가? 하긴 <메모리즈>에서 세탁표에 적힌 전화번호를 찾아 헤매는 김혜수를 보며 ‘세상에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귀신도 있구나’라며 신기해했었으니까. 이미 죽은 꽃, 말라버린 꽈리를 따먹는 수연의 모습에서 수연이 죽어버린 아이라는 은유는 충분했다. 물론 수연의 시점조차 그저 수미가 만들어낸 환영이라고 치부하면 영화는 아주 간단해져버린다. 그렇다면 싱크대 밑에서 원귀를 보았다는 간질들린 여자의 객관적 시선과 발언은 어떻게 확보될 수 있을까? <장화, 홍련>은 겹겹이 둘러처진 이야기와 환상의 미로에 갇히는 좌충우돌을 거듭한다. 귀신에게도 인간적인 속성과 관점을 부여하고 꿈 너머엔 또 꿈이, 귀신에게는 또 다른 귀신이, 환상 속에는 또 다른 환상이 존재한다. 이건 현실과 비현실을 지우는, 타자와 자아의 경계를 뛰어넘는 장르의 전복이라기보다 반칙과 트릭으로 가득 찬 장르의 교란에 가깝다. 이건 분명한 깜짝쇼이다.

뒤돌이켜 보면 김지운의 영화가 매혹적이었던 까닭은 가장 잔인한 상황에서도 가장 가벼운 웃음을 흘리게 만드는 허허로운 기운이 사람을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기실 김지운의 많은 영화에는 그로테스크한 가족사진이 핵심 이미지를 이루고 있고, 그 콩가루 집안에서 김지운의 주인공들은 살의의 욕망이라는 종착역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레슬링이라는 순화된 기호로 표출되지만 <반칙왕>의 임대호의 부장에 대한 욕망 역시 살의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잔인한 살의의 몸짓에 대항하는 김지운식 방어기제가 웃음이라면, 아마도 그 뒷면에 도사린 것은 그 잔인함에 몸을 떠는 공포일 것이다. 김지운은 세상이 소통 가능한 곳이라고 믿지 않는다. 김지운의 가족들은 따로 놀고, 모든 비극은 의사소통 부재에서 시작된다. 의미의 단절은 오해를 낳고 오해는 죄를 낳고 죄는 죄의식을 낳는다.

어찔하고 은밀한 패티시적 욕망

그러나 <장화, 홍련>에 이르러서는 그 모든 죄의식이, 웃음이라는 배출구를 타지 못한 죄의식이 여성이라는 육체에 투사되는 기이한 진풍경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따지고보면 원전인 <장화홍련전>이 가지고 있는 텍스트의 풍부함, 그것은 가부장제 사회가, 유교사회가 사춘기 소녀들의 성적 성숙과 일탈을 감당해내지 못할 때 생기는 거대한 얼룩이었다. 단지 아들을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전처의 소생을 죽일 수 있고, 단지 아이를 뱄다는 음모만으로도 죽음에 이를 수 있는 가부장제의 지독함이 오히려 <장화, 홍련>의 풍부한 텍스트의 층위를 이루었다. 그러나 <소름>처럼 피흘리는 자궁으로서의 집, 실재계에서 올라와 현실에 날카로운 상처를 휘두르는 손톱, 그리고 그 손톱 밑에 낀 핏자국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장화, 홍련>은 그저 자폐적인 판타지에서 머무르고 만다. 아주 조금 근친상간과 자매간의 레즈비언적 욕망을 내비친 뒤, <장화, 홍련>은 서둘러 원전 <장화홍련전>에서 가장 고전적이고 보수적인 이데올로기 하나를 뽑아내 영화의 마지막까지 끌고가는 것이다. 대체 남편과 정분난 젊은 여자를 죽일 듯 미워하면서도 스스로 젊어지려고 노력하는 ‘사랑과 전쟁’의 아줌마들과 아버지의 사랑을 빼앗기고 새엄마에게 동화와 이화작용을 거듭하는 이 소녀는 무엇이 다른 것일까? 김지운 감독은 <월하의 공동묘지> 이후 <하녀>까지 거듭되는 수수방관형 가부장의 모습과 그 가부장의 울타리 안에서 원귀가 된 귀신의 텍스트를 값비싼 앤티크 스타일의 명품으로 치장시킨다. 그러나 <장화, 홍련>의 이데올로기는 단 한 가지일 뿐이다. ‘여자들끼리 싸우게 놔두라. 남자는 죄가 없다.’

가부장제하에서 경험하는 여성에 대한 가장 피상적 결과물로 <장화, 홍련>은 수미의 시각에서 바라본 내면의 공포 대신 여성의 다리에 대한 김지운 감독의 페티시적 욕망만을 가득 채운다. 주변의 실체를 가리는 익스트림 클로즈업 기법과 함께 초반부를 가득 장식하는 소녀들의 다리. 김지운의 영화에서 ‘다리에서 시작하여 얼굴로 가는 팬숏’이 얼마나 많이 등장하는지 한번 세어보시라. <커밍아웃>에서 역시 뱀파이어가 된 그녀는 목 대신 허벅지를 깨문다. 여학생의 세일러복에 탐닉하는 일본의 포르노처럼 김지운은 소녀의 다리와 초경의 이미지에 탐닉한다. 다리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커밍아웃>과 <메모리즈>를 거쳐 <장화, 홍련>에도 어김없이 반복되는 김지운식 공포의 핵심이다. 소녀들의 성적 성숙에 대한 불안은 <캐리> 같은 공포영화 이후 유구한 것이지만, <장화, 홍련>에서 물속을 황홀하게 휘젓는 다리, 마치 그녀의 정체성을 확정짓는 듯한 페티시적인 욕망의 기운은 어찔하게 은밀하다. 그것은 사회적 성찰을 거부하는 자폐적인 집, 피흘리는 자궁 안에 봉인되어져 있다. 그것은 황홀하지만 지나치게 위험해서 감히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관능의 덫이다. 분열증적인 내러티브의 미로를 거쳐 스타일에 대한 강박을 짊어진 채 공포 장르에 대한 과잉의 컨벤션으로 해소되어지는 저 차가운 열정의 입자들. 소녀의 육체에 투사된 한 남성의 불안과 욕망은 정체정 분열이라는 피의 대가를 소녀에게 치르고야 거두어진다.

어쩌면 김지운의 주인공들에게 어색한 몸짓의 수줍음과 웃음이 사라지기 시작했을 때, 김지운은 이미 추락하기 시작했던 것은 아닐까? <장화, 홍련>은 여성의 피로 여성관객을 손짓하지만, 여성의 이름과 여성의 내면과 여성의 불행을 내세우지만, 아니다. ‘아버지의 법이 허락하는 모든 것’인 그것은, 명백히 김지운 감독의 정액으로 쓰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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