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역사 되돌아본 작가주의 나들이
아시아 영화의 거장 허우샤오시엔의 주요작품이, 그것도 필름으로 상영된다. 15일부터 25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 26일부터 5월16일까지 부산의 시네마테크부산에서 화인 커뮤니케이션스와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시네마테크부산이 공동주최하는 `허우샤오시엔 특별전'이 그 자리.
데뷔작 <귀여운 여인> 등 초기작 3편은 빠져 있지만, <광음적 고사>에 이어 대만뉴웨이브의 푯대로 나부낀 옴니버스영화 <샌드위치 맨>(1983) 이후 <밀레니엄 맘보>(2001)까지 12편 모두를 만날 수 있다. <펑꾸이에서 온 소년>(1983), <동동의 여름방학>(1984), <동년왕사>(1985), <연연풍진>(1986>, <나일의 딸>(1987), <비정성시>(1989), <희몽인생>(1993), <호남호녀>(1995), <남국재견>(1996), <해상화>(1998) 등이 그것이다. 5월에는 <밀레니엄 맘보>가 국내 개봉할 예정이다. 이건, 사람과 역사를 성찰할 힘을 지닌 매체로서 영화를 신뢰하는 이들에겐, 비록 뒤늦게 찾아오긴 했지만, `행운'이다. 허우샤오시엔 감독은 특별전을 계기로 4월14일부터 18일까지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펑꾸이에서‥>, <비정성시> 등 설레는 12편의 목록
대만 대표하는 거장의 탐미적 영상 한꺼번에
허우 감독도 5일간 방한
허우샤오시엔은 작품의 연대기가 영화 밖의 정치사회적 변화와 일치하는 드문 감독이다. 그는 중국 광둥에서 태어나 4개월만에 대만으로 이주해, 12살 때 아버지를 잃고 “대만의 남루한 변두리에서 싸움질과 도박으로 소일하는 내일없는 건달로 10대를 보낸 사람”(<씨네21>)이다. 21살에 들어간 군대에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그 영화를 자신의 일로 작정했다. 제대후 영화학교에 입학했고, 1980년 `전형적인 로맨스 영화' <귀여운 여인>로 데뷔했다. 에드워드 양과 같은 유학파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어떤 감독이 되어 있을까. 그러나 `만약'은 없다. 그는 옴니버스 영화 <샌드위치 맨>의 첫 에피소드 <샌드위치 맨>을 찍었다.
그 스스로 `진정한 의미에서 나의 데뷔작'이라 부르는 <펑꾸이에서 온 소년>은 <동동의 여름방학> <동년왕사> <연연풍진>으로 이어지는 성장기 4부작의 첫번째 작품이다. 펑꾸이섬의 가난한 어촌마을 소년 아청의 방황을 그린 <펑꾸이에서…>는 허우샤오시엔의 출구없던 소년기의 반영이기도 하다. <동년왕사>는 본토에서 대만으로 이주해온 `외성인'들의 부유하는 삶을 뼈저리게 그려낸다. 곧 통일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리라고 벼르던 아버지를 잃고, 사회의 폭력에 익숙해지는 주인공 아하에게서 허우샤오시엔의 유년을 유추하기는 어렵지 않을 듯. 그리고 어린이들은 청년이 된다. 탄광촌에서 타이베이로 상경한 <연연풍진>의 주인공 완은 고향친구 후엔과 결혼까지 약속하지만, 본토와의 대치상황은 이 주인공들의 삶에 상처를 낸다. 완은 군에 입대해야하고, 약속은 풍화된다.
△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동동의 여름방학>, <동년왕사>, <연연풍진>, <희몽인생>(왼쪽부터). 알앤아이 애드벌룬 제공.
성장의 시간은 그렇게 끝난다. 감독은 `대만의 4·3'이라 할 2·28 사건을 최초로 영화화한 <비정성시>와 함께 대만의 현대사 속으로 들어간다.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이 영화는 1945년 해방부터 장개석군이 진주하기까지 대만의 해방공간에서 이루어진 학살과 상실의 의미를 한 가족사를 통해 묻는다. <희몽인생>은 <비정성시>의 직전으로 돌아가, 인형극의 장인 리티엔루가 살아온 시대의, 1909년부터 1945년까지의 현대사를 파고든다. 현대사 3부작의 마지막 <호남호녀>는 국민당의 `백색테러'를 다룬 작품. 허우샤오시엔은 은폐되고 왜곡된 현대사를 복원하여 젊은 세대에게 전해주는 것을 자기시대 영화작가의 책임이라고 믿고 있었다.
다시 감독은 그 젊은 세대의 현재를 비추는 거울을 만든다. <남국재견>에서 그 현재는 대만과 본토, 양안의 왕래를 뜻하고, 본토의 시장화를 뜻한다. 출구없는 대만젊은이들은 그 본토에서 엘도라도의 꿈을 쫓지만, 허망하다. 상하기 시작하는 과일의 단내를 내며 부패하는 봉건주의의 끝자락을 100년전 상하이의 유곽에서 포착해낸 <해상화>는 일종의 반환점이다. 허우샤오시엔은 역사를 관조하는 정적인 카메라의 극점을 보여준다.
<해상화>의 유곽은 <밀레니엄 맘보>에 이르러 대만 젊은이들의 일탈의 장으로 전환된다. 타이베이 젊은이들의 새천년을 `회상'하는 이 영화의 시점은 2011년. 미래로 물러나서 현재를 지켜보는 이 시선에 `너를 알라'고 권하는 감독의 의중이 실려 있는 듯 하다. 안정숙 기자 namu@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