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하사탕>의 영호가 영호가 아니라 ‘민’이나 ‘준’ 같은 이름이었다면? <번지점프를 하다>의 서인우가 ‘봉만수’나 ‘왕영구’였다면? 잘못 지은 이름 하나 평생 이지메의 타깃이 되는 지름길이고, 잘 지은 이름 하나 영화를 영생케 하는 방부제 같은 것. 하여 이 땅의 일만이천 영화제작자들과 감독, 작가들은 오늘도 제대로 된 이름 짓기에 골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것이다.
임상수 감독의 시나리오에 주로 등장하는 남자 이름은 ‘영작’.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 조재현도 ‘영작’이었고, 지금 준비중인 <바람난 가족>(가제)의 주인공도 영작이다. “‘영화작가’의 줄임말이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던데 사실 저희 어머니가 지어주신 이름이에요. 그러니까 그게 제가 데뷔도 못하고 빌빌대던 시절이었죠….” 영진위 공모전을 앞두고 있던 실업자 임상수는 어머니에게 시나리오를 우편으로 보내달라는 부탁을 하게 된다. “쪽팔리니깐 가명으로 보내주세요. 이름은 어머니가 알아서 쓰시고요.” 그렇게 그의 어머니가 즉석에서 휙휙 만들어낸 이름이 바로 ‘이영작’. 결과가 궁금하다고? “에이, 떨어졌어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 중학교 동창 이름인 ‘석환’과 ‘성환’을 빌려쓴 류승완 감독은 “감독들이 매번 시나리오에 같은 이름을 쓰는 건 만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라고 말한다. “이현세 만화의 까치, 허명만 만화의 이강토식으로 말이죠. 페르소나랄까. 그래서 지금 쓰는 시나리오 주인공도 석환이에요.”
<반칙왕>의 임대호란 이름은 김지운의 대학동기 이름. “별로 친한 친구는 아닌데 왠지 듬직하고 우직한 스타일을 생각하자 그 이름이 떠올랐던 것 같아요.” <반칙왕>의 장진영이 맡은 ‘민영’의 경우는 <조용한 가족>에서 송강호가 맡은 ‘영민’을 꺼꾸로 뒤집은 케이스. “무슨 뜻이 있다거나 사연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이름에 아무런 이유를 두지 않는 편이죠” 하지만 현재 준비중인 <장화, 홍련>은 ‘장미’라는 뜻의 장화는 ‘미’자를 ‘연꽃’의 홍련은 ‘연’자를 넣을 예정이라고.
의 김현석 감독의 시나리오엔 늘 ‘호창’이 주인공이다.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에서 임창정도 호창이었고 의 송강호도 호창이다. 물론 <사랑하기 좋은날>의 애초 시나리오에도 최민수의 이름이 ‘호창’이었지만 제작사 대표의 이름인 ‘형준’으로 교체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라이터를 켜라>의 박정우 작가만큼 희안방통한 이름들을 쓱쓱 만들어내는 작가도 드물다. 하지만 그가 중요시 여기는 것은 오히려 조·단역의 이름. “잠깐 나와도 이름을 주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구나, 하는 생명력이 생기죠” 재미있는 작명 중 하나는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유해진이 맡았던 ‘용가리’. “왜 양아치들이 “‘용가리’ 형님 오시면 끝이다”라고 위협했는데 막상 와보니 별것 아니었잖아요. <용가리>가 그랬어요. 엄청 기대를 모았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아무것도 없었던….” 이미 동창들 이름은 한번씩 다 써먹어서 밑천이 바닥났고 그냥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짓는 편”이라지만 여자주인공만큼은 ‘경순’ 아니면 ‘연화’다. 경순은 부인의 여자친구 이름이고 연화는 친했던 대학교 동창을 차고 도망간 여자라고. <선물>에서 이영애의 이름도 경순이었는데 감독이 촌스럽다고 바꿨다.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의 종두는 원래 ‘원두’가 될 뻔했고 박찬욱 감독의 <삼인조>에서 성으로만 불리던 ‘안’과 ‘문’은 원래 안성기씨와 문성근씨를 염두에 쓰고 만들어졌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김대박’이나 ‘박매진’ 같은 속보이는 이름인들, ‘한예술’이나 ‘나장인’처럼 머리아픈 이름인들 어떠하랴. 장미라 부르는 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아름다운 그 향기는 변함이 없는 것을.백은하 luci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