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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고요한 화면, 3대 국제영화제를 거닌 김현석 촬영감독의 카메라
이우빈 사진 백종헌 2025-11-06

지난 9월, 제82회 베니스국제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이 차이상쥔 감독의 중국영화 <우리 머리 위의 햇살>속 주연 메이윈을 연기한 배우 신즈레이에게 주어졌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우리 머리 위의 햇살>의 촬영감독이 바로 한국인 김현석이란 사실이다. 이로써 김현석 촬영감독은 3대 국제영화제(칸영화제, 베니스국제영화제,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모두 본상을 거머쥐게 됐다. 그가 촬영한 이창동 감독의 <>는 2010년 제63회 칸영화제 각본상을 받았고, 중국의 대표적 6세대 감독인 왕샤오솨이 감독의 <나의 아들에게>는 2019년 제69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을 석권한 바 있다. 각본상, 배우상을 비롯해 그가 촬영을 맡은 작품이 3대 국제영화제의 주요 수상작으로 선정된 것이다. 여러 수상 소식의 나열에 다소 멋쩍어하던 그는 “학교 다닐 적에 김홍준 교수님(현 한국영상자료원장)이 ‘연출자나 촬영감독에게 최고의 영예는 감독상이나 촬영상이 아니라 배우의 연기상’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배우를 잘 찍었다는 것은 촬영의 역량이 제대로 발휘됐다는 뜻과 비슷하기 때문”이라며 수상 소감을 대신했다.

물론 수상 실적만으로 창작자의 궤적을 전부 평하긴 어렵다. 다만 김현석 촬영감독이 <><도희야><도리화가><나의 아들에게><사라진 시간><비욘드 유토피아><어보브 더 더스트><우리 머리 위의 햇살>의 프레임 속에 남겨놓은 자기만의 인장이 한결같이 뚜렷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일순간 스크린을 무척이나 조용하게, 백색소음만이 감도는 정동의 영역으로 만드는 그의 고유한 스타일이 여러 해외 작품의 참여와 해당작의 수상을 이끌었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이에 <씨네21>은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우리 머리 위의 햇살>로 방문한 뒤, 서울에 머무르던 김현석 감독에게 뒤늦게나마 접촉하여 다양한 국가의 촬영 현장을 오가고, 여러 국적의 창작자와 협업 중인 그의 20년 궤적을 청해 들었다.

김현석 촬영감독이 본격적으로 촬영감독으로서 주목받은 계기는 역시 이창동 감독의 <>였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스승이었던 이창동 감독은 그를 한국-프랑스 합작영화인 <여행자>의 촬영감독으로 추천했고, <여행자>는 칸영화제와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성과를 거뒀다. 이전에도 김현석 촬영감독은 이종필 감독의 단편 <불을 지펴라>(2006)를 촬영해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에 진출하고 신상옥 청년영화제 대상(문화관광부 장관상), 촬영상(정일성상)을 받으며 실력을 입증한 바 있었다. 이어서 그는 자연스레 이창동 감독의 <>촬영을 맡게 됐다. <밀양>속 신애(전도연)의 지독한 비애 이후, 달관에 가까운 인간사의 흐름을 한 인간의 신체와 얼굴에 담아낸 <>의 미자(윤정희)의 모습이 바로 김현석 촬영감독의 손끝에서 기록됐다. <>이후 정주리 감독의 <도희야>로 다시 칸을 방문하는 등 경력을 이어가던 그는 커리어의 커다란 전환점, 즉 중국 진출의 기회를 맞이하게 됐다.

더 넓은 대지로,중국으로의 발길

<시>

김현석 촬영감독이 중국으로 활동 영역을 넓힌 주요 계기도 <>였다. 2017년 중국의 왕샤오솨이 감독이 일전에 인상 깊게 감상했던 <>의 촬영감독과 협업하고자 김현석 촬영감독을 수소문한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중국전매대학교 영화학과 교수이자 중국의 한국영화 전문가로 통하는 범소청 교수가 이창동 감독 등을 통해 연락”을 해왔다. 화상 미팅부터 대면 만남까지 왕샤오솨이 감독과 공통점을 느낀 그는 <나의 아들에게>의 현장에 촬영감독으로 참여하게 됐다. “중국과 한국의 촬영 체계는 정말 다르다. 중국은 할리우드의 직업 편제와 시스템을 더 철저하게 따르며, 제작진의 역할이 무척 세분화해 있다. 마카오와 상하이, 홍콩까지 해외와의 합작 프로덕션이 예전부터 많은 탓인 듯하다”라고 설명한 그는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중국의 촬영 현장에 적응했다. “DP(Director of Photography) 시스템(촬영감독이 촬영과 조명을 전부 관장하는 프로덕션 체계.-편집자)이 확실하게 자리 잡은 중국의 영화산업에 더 편안함을 느끼기도” 한 것이다. 그는 학생 시절부터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2003), 이명세 감독의 <형사 Duelist>(2005) 등에 조명 스태프로 참여하며 일찍이 영화 조명에 대한 이해를 키운 바 있기 때문이다. 촬영감독의 자율성이 명확히 보장되는 환경에서 그는 초조하지 않게 본인의 스타일을 고수할 수 있었다.

물론 중국의 영화산업에 자신이란 퍼즐 조각 하나를 끼워 맞추는 일이 현실적으로 쉽진 않았다. “처음엔 촬영 퍼스트, 포커스풀러, 그립팀 등 촬영·조명 스태프들을 한국에서 고용했지만, 그렇게 발생하는 비용과 부가적인 업무들을 전부 감당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이에 그는 <나의 아들에게>이후 해외 작품에 참여할 땐 혈혈단신으로 현장을 찾아 중국 제작진과의 협업에 집중하게 됐다. 중국 영화산업의 현황, 제작 체계의 완성도에 대해서도 그는 최신의 현황을 전해줬다. “중국의 영화산업이 상업적 체계를 제대로 갖춘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기술적인 수준에선 한국과도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비약적으로 상승”했다는 것이다. 특히 “아리(ARRI) 등 주요한 카메라 업체의 대규모 지점이 베이징, 홍콩에 있어 최신 기술을 가장 먼저 공유받거나 교육받을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 있으며 “미술 관련 제작진의 역량이 세계에서도 두드러진다”라고 설명했다. 미술감독이 시나리오 집필의 초기 단계부터 감독들과 업무적으로 소통하고, 촬영감독보다도 더 긴밀하게 작품 세계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미술감독들은 정해진 거처 없이 다음 작품의 촬영지 인근에 몇년씩 살며 작품을 준비하기도 한다. 영토가 워낙 넓다 보니 촬영지 사이의 이동이 어렵기도 하고, 긴 시간 동안 로케이션 헌팅과 세트 미술을 준비하기 위해서”이며, “이 덕에 촬영감독이 더 편안하고 정리된 환경에서 촬영을 이어나갈 수 있단 장점”도 있다. 21세기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 한국 영화산업보다 “중국의 영화산업은 조금 더 활력이 도는 편”이기도 하다.

김현석 촬영감독

그는 중국 등 세계 각지의 프로덕션에 참여하는 경로로 영화제작자, 감독들과의 네트워크를 강조하기도 했다. 2019년 호주 브리즈번에서 열린 아시아 태평양 스크린 어워즈에 <나의 아들에게>로 참석했을 당시는 <기생충><벌새>등으로 한국영화의 화제성이 높을 무렵이었고 이때 국제적인 프로듀서들과 이어진 연이 이후 중국에서의 활동에도 좋은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는 “부산국제영화제가 쌓아놓은 아시아 권역의 네트워크, 한국영화에 대한 인지도 등은 지금도 중화권의 유명 프로듀서들에게 큰 관심을 끌고 있다”는 현황도 전한다.

조용하고 담백하게

<비욘드 유토피아>

앞서 말했듯 김현석 촬영감독이 찍은 영화의 스크린은 때로, 혹은 대개 아주 침착하고 정제된 톤 앤드 매너의 기운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이는 산을 타고 강을 건너는 실제 탈북민의 탈북 과정을 바로 옆에서 촬영한 다큐멘터리 <비욘드 유토피아>에서마저 드러나는 대목이다. 탈북민 가족이 야밤의 우거진 산기슭을 급박하게 오르내리는 순간에도 그의 카메라는 요동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킨 채 사건의 긴장감을 응축한다. <비욘드 유토피아>의 매들린 개빈 감독은 시네마베리테의 방법론을 실천하며 인물의 감정을 고스란히 전할 수 있는 촬영감독을 한국에서 찾던 중이었고, <>를 본 기억을 토대로 김현석 촬영감독에게 접촉했다. 그 결과는 제39회 선댄스영화제의 관객상(미국 다큐멘터리 부문)으로 이어졌다.

<도희야>

<>와 <도희야>의 서늘한 이미지들도 마찬가지다. 김현석 촬영감독의 화면은 픽스 캠은 물론이거니와 실제론 카메라가 흔들리는 핸드헬드숏, 인물들의 감정이 서사적으론 고조하는 신에서도 이상할 정도로 고요하다는 인상을 자아낸다. 그는 “촬영 현장에 들른 고양이가 자연스레 움직일 정도로 조용한 촬영을 준비한다. 허우샤오시엔의 영화 등 동물이 화면에 개입하는 작품들도 실제로 촬영 현장의 물리적인 동요가 적은 편”이라며 “조명 역시 인물의 동선과 집중력을 방해하지 않도록 최대한 숨겨두었다가 연출자가 원할 때, 배우의 연기에 필요할 때 바로 작동할 수 있도록 준비해둔다”라고 촬영의 기술을 설명했다.

격한 감정의 발로가 필요한 장면일지라도 얕은 심도의 얼굴 클로즈업을 쉽사리 쓰지 않는 것도 그의 화면이 보여준 공통점이다. <도희야>에서 주연들의 똑바른 클로즈업은 이야기의 결말 부분이 되어서야 등장했고, <>역시 미자의 몸짓과 손짓이 전반적으로 드러나는 풀숏의 이미지가 영화를 지배했다. 그는 “사실 클로즈업 관련은 그간 협업한 감독님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여행자>의 우니 르콩트 감독부터 함께한 여러 감독이 클로즈업만 찍으면 몸에 두드러기가 날 정도로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이었다고 웃으며 설명하는 한편 “트래킹숏을 쓰더라도 카메라가 움직였다는 것을 눈치채기 어려울 만큼 몰래 촬영”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우리 머리 위의 햇살>

이처럼 화면 속 여백이 주는 정서, 그 존재감을 최대한 숨기는 카메라의 힘은 <우리 머리 위의 햇살>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이야기는 아주 강렬한 감정의 골을 다룬다. 주인공 메이윈이 전남편 바오슈와 범죄, 윤리, 사랑, 집착의 과정을 겪으며 보여주는 정서의 파동이 크지만, 카메라는 자연광을 활용하여 인위적인 일체의 감정을 배제하는 등 “최대한 담백하고 일상적인 태도로 강렬한 이야기를 담아냈다”. 인위적인 요소가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준비 과정이 쉬운 것은 아니다. <우리 머리 위의 햇살>에서 주요한 서사적 공간으로 기능하는 메이윈의 집 시퀀스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촬영 허가 문제 등으로 밤 장면을 대개 데이 포 나이트(여러 가공을 통해 밤 장면을 낮에 촬영하는 프로덕션 방식.-편집자)로 촬영했지만, 외부의 광선과 내부 조명을 최대한으로 조절해 어색하지 않게 만들었다. 또한 인물들의 동선이 감정과 대화에 맞게 흘러가도록 기존에 있던 집의 문 위치를 절묘하게 바꿔 공간을 디자인”했던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아무래도 DP 시스템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어 조명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었던 덕”이기도 하다.

중국영화계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거둔 이후, 중국의 영화산업이 밀집된 베이징으로 이사할 생각도 했지만 “한국에 있는 강아지를 돌보기 위해 서울을 떠나진 않고 있다”라는 그의 차기작은 한국영화로 예정돼 있다. 단편 <이름들>등으로 주목받았던 신이수 감독의 장편 복귀작 <상속자>다. 예전부터 신이수 감독과 연을 이어온 그는 시나리오 기획 단계부터 감독과 협업하며 내년 상반기로 예정된 촬영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20년간 한국-프랑스 합작영화로 시작해 한국, 중국, 미국 영화에까지 발을 넓힌 뒤 오랜만에 한국영화로 돌아오는 그의 또 다른 빛과 움직임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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