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무라 겐키 감독은 제작자로서 무척 화려한 필모그래피를 자랑한다. 실사영화로는 나카시마 데쓰야의 <고백>, 이상일의 <분노>,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등을 제작했다. 일본을 대표하는 애니메이션 감독들과 꾸준히 협업하며 다수의 흥행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도 했다.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괴물의 아이><용과 주근깨 공주>,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너의 이름은.><날씨의 아이><스즈메의 문단속>등이 대표작이다. 게다가 일본의 베스트셀러에 오른 소설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이나 영화로 연출한 <백화><8번 출구>등을 소설로 집필하며 작가로서의 경력도 쌓고 있다. 2010년대 이후 일본의 콘텐츠 업계에서 가장 뚜렷한 궤적을 남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장편 연출작 <8번 출구>역시 칸영화제에 게임 원작 실사영화 최초로 초청되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상영하는 성과를 남겼다. 다양한 장르를 오가는 만큼 그는 애니메이션, 게임, 음악 등에서 영향을 받은 여러 아이디어와 제작 방식을 통해 <8번 출구>완성했다.
- 이전 연출작인 <백화>(2022)를 만든 뒤 “다음엔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고 싶다”라고 말했는데, 이 정도로 새로운 영화일 줄은 몰랐다. <8번 출구>기획의 발단은.
<백화>로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을 때,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던 부분은 영상문법에 관한 쪽이었다. 작중에선 치매 진단을 받은 어머니가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상상하는 장면들이 종종 등장한다. 이러한 비현실적 이미지와 현실적 이미지를 하나의 컷 안에 적절히 담아냈다는 감상을 많이 듣게 됐다. 애니메이션 기법 같다는 이야기와 마술적 리얼리즘의 분위기라는 평을 자주 듣기도 했다. 그래서 다음 연출작도 뭔가 영상문법에 있어서 독특한 시도를 해볼 수 있는 기획을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고, <8번 출구>라는 게임이 다가왔다.
- 애니메이션영화의 제작자이기도 하고, 실사영화에 오시이 마모루나 곤 사토시 등 애니메이션 감독의 연출을 적용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애니메이션의 어떤 측면을 말하는 것인지.
곤 사토시 감독의 <파프리카>를 보면 한컷 안에서 어떤 사람이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되어버리는 공포, 공간이 일그러져 다른 곳으로 변해버리는 놀라움이 담겨 있다. 또한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이노센스>엔 인물이 어떤 시공간적 루프에 갇히는 양상이 반복되고, 인간이 마치 기계의 결함처럼 버그에 걸린 듯한 모습이 등장한다. 이런 연출을 실사영화에 활용하면 굉장한 공포감을 줄 수 있겠다고 생각해왔다.
- 그렇다면 게임과 영화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하여 <8번 출구>를 만들었나.
친분이 있는 미야모토 시게루(닌텐도에서 <마리오><젤다의 전설>시리즈 등을 만든 게임 개발자.-편집자)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좋은 게임은 플레이하는 사람도 즐거워야 하지만 플레이어 뒤에서 게임을 보고 있는 사람도 재밌어야 한다”라는 조언이었다. <8번 출구>로 그런 게임적 체험을 선사하고 싶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어느 순간엔 작중 게임의 플레이어가 되어 스스로 생각하고, 어떨 때는 주인공의 뒤에서 이야기에 몰입하며, 그러다가 주인공보다 먼저 이상 현상을 발견하고선 ‘아, 내가 이 게임을 했어야 하는데!’라는 안타움까지 느끼게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최근엔 게임 플레이어가 게임 실황을 틀어놓는 개인 방송 영상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런 영상을 보면 플레이어마다 게임에 임하는 방식과 리액션이 다르다. 시청자는 게임을 보는 동시에 플레이어의 리액션까지 목격한다. 한 게임을 동시에 복합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8번 출구>가 그런 작품이 되길 바랐다.
- <8번 출구> 게임엔 스토리라고 할 만한 이야기나 캐릭터 설정이 없다. 영화로 만들기 위해선 이야기의 틀을 먼저 짜야 했을 텐데.
특정 인물의 서사에 앞서 공간에 대한 해석부터 시작했다. 무한루프가 일어나는 이 하얀 공간(8번 출구로 이어지는 지하도)이 과연 무슨 의미일지를 고민했다. 첫째는 이곳이 마치 일본의 전통 가무극인 노(能)의 무대 같다는 느낌이었다. 보는 이에게 이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상하지 못하게 만드는 여백의 공간이다. 둘째는 이 지하도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연옥 같다는 발상을 했다. 연옥은 우리가 지니고 있던 죄책감이 바깥으로 나와 현시되는 곳이다. 이러한 죄책감이 지하도 속에서 발현되는 이상 현상으로 구현된다면 정말로 무서울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공간 설정 후엔 게임의 룰을 해석하려 했다. 물론 표면적으론 무척이나 간단하다. 이상 현상을 발견하면 앞으로, 발견하지 못했으면 뒤로 가는 규칙이다. 다만 이야기의 시작에 한 인물에게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고민이 깃들어 있다면, 이 공간은 끝없이 두 선택지 중 한쪽을 고민하는 인물의 내면 심리와 같아질 것이라고 구상했다. 고심의 과정을 끝없이 반복하면서 결국 자신의 고민에 대한 답을 찾는 지대를 만들고 싶었다.
- 제작 방식도 독특하다고 들었다. 매일매일 대사와 신을 바꾸는 유동적 현장으로 운영했다고. 이유는.
신선한 작품을 만들기 위한 가장 좋은 길은 신선한 제작 방식을 택하는 쪽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더 독특한 결과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엔 아예 게임을 만드는 방식처럼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우선 시나리오를 쓰고, 그것에 따라 찍는다. 배우가 연기를 마치면 촬영 중에 바로 편집을 하고, 다 함께 장면 촬영이나 전개 등 세부적인 것들에 대해 논의했다. 다시 찍어야겠다 싶으면 시나리오를 수정해서 재촬영에 들어갔다. 하나의 이벤트에 대해 계속하여 테스트 플레이를 하며 발전시키는 게임처럼 기존 영화와 다른 새로운 표현이 나타나길 바랐다.
- 반복되는 촬영을 위해 세트 미술에도 공을 들였을 것 같다. 어떤 방식으로 스튜디오 세트를 만들었나.
우선 완전히 똑같은 모양의 세트를 두개 만들었다. 촬영 중에는 어디에서 이 장면이 끊길지 모르게끔 두개의 공간이 계속 이어지게 되어 있다. 만약 A 세트에서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면, 동시에 B 세트에선 제작진들이 통로 내의 각종 오브제 등 서사적으로 바뀌어야 할 미술 요소를 다 조정한다. 그렇게 굉장히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찍었다. CG의 표현으로는 구현하기 어려운, 생생한 질감의 두려움을 살려내고 싶었다. 다만 세트 두개가 똑같다 보니 구별할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하나는 히치콕, 하나는 큐브릭이라고 불렀다. 두 세트 사이의 통로는 미조구치였다.
- 계속하여 영화를 더 ‘무섭게’ 만드는 방식을 고민했다고 말하고 있다. <8번 출구>에는 ‘도시’라는 공간의 두려움도 내포된 것 같다.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무서웠던 부분은 사람이 꽉 차 있지만, 아무도 살아 있지 않은 것 같은 지하철의 풍경이었다.
나도 만원 지하철이 가장 무서운 곳이라고 생각한다. (웃음)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고 난리를 치는 사람도 있고, 무언가를 예상하기가 어려운 장소다. 도쿄뿐 아니라 전세계 지하철은 비슷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더 무서운 요소는 그런 기행이 일어났을 때 모두가 못 본 척하고 자신의 스마트폰만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두려움을 영화 안에 시각적으로 구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모두가 한 공간에 있으나 사실은 각자의 세계에 빠져 있는, 다른 사람의 곤경을 외면하는 세계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두려움을 주는 공간, 소리, 현실
- 오프닝 장면에서 주인공 ‘헤매는 남자’가 그런 지하철 속에 있다. 타인의 세계를 무시하려는 것처럼 이어폰을 끼고 커다란 볼륨으로 음악을 듣는데,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Boléro)다. <괴물의 아이><용과 주근깨 공주>제작으로 협업했던 호소다 마모루 감독이 <디지몬 어드벤처>시리즈에서 활용했던 음악이란 사실이 바로 떠올랐다.
맞다. 클래식 음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방식은 오랫동안 같이 일한 호소다 마모루 감독님의 영향이 크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도 클래식 음악을 활용하지 않았나. 우선 클래식 음악은 전세계인에게 별다른 설명 없이도 그 감성을 전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특히 <볼레로>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루프 뮤직’이다. 이 음악이 나오는 순간 관객들은 이미 ‘아, 이제부터 내가 어떤 루프의 영화를 보게 되겠구나’라고 짐작할 수밖에 없다. 지하도 포스터에 붙어 있는 에스허르의 그림도 무한의 착시를 주는 작품으로, 관객에게 무의식적으로라도 루프의 감각을 안기게 한다. 개인적으로 인간의 감정은 시각보다 청각에 의해 더 크게 좌우된다고 생각한다. <8번 출구>의 사운드디자인에도 굉장히 철저하게 임했고, 소리로 시간과 감정을 조절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 애니메이션과 영화, 게임과 영화 사이의 관계, 도전적인 제작 방식 등이 겹친 작품이다. 다만 한편으로 <8번 출구>의 서사적 주제는 전작 <백화>처럼 가족에 관한 드라마로 여겨졌다. 어떤 가족이 만들어지고 붕괴하는 과정처럼 보였다. 이러한 주제에 천착하는 이유는.
방금 이 지하도 공간을 연옥이라고 표현했는데, 또 다르게는 태아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통로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어쩌면 이 <8번 출구>의 주요 공간은 인간이 태어나고 죽어가는 장소일 수 있겠다고 느꼈다. 사람의 생사는 결국 가족에 얽힌 이야기로 연결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흐름을 통해 자연스럽게 가족드라마가 작품에 가미된 것 같다. 가장 좋아하는 공포영화인 <샤이닝>이나 <우게츠 이야기>도 결국 가족을 다루고 있지 않나. 이 작품들을 오마주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 마지막으로, 제작했던 인기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의 실사영화 제작도 진행 중인 것으로 안다. 진척 상황이 어떤지.
아, 지금 구체적으로 말하긴 조금 어렵다. 우선 천천히, 잘 진행 중이라는 정도로 답해야 할 것 같다. (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