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항준 감독님은 집행위원장 제안을 한 차례 고사했다고 들었다.
장항준 제의를 받고 주변 영화인들에게 자문을 구하니 6:4 정도로 의견이 갈렸다. 6이 반대였다. 답보 중인 영화제에 지금 가서 무얼 더 하겠느냐는 우려가 컸다. 그런데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전성기에 들어가면 티가 안 난다. (웃음) 부침이 클 때 들어가야 나 같은 초심자가 발로 뛰며 성과를 보일 수 있지 않을까. 제천영화제가 주요한 축제로 자리 잡는 데 내가 힘을 보탤 수 있다면, 잘될 때보다는 어려울 때 도와야 맞다. 내가 원체 새로운 경험을 하길 즐긴다. 가보지 않은 길을 걸어보자는 마음으로 수락했다.
조명진 흔히 제천영화제가 한국의 4대 영화제 중 하나라고 말들은 하는데,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은 이후 유독 침체기가 길었다. 위원장님이 새로 부임하자마자 “4대 영화제에 머무르지 않겠다. 이 타이틀을 넘어서겠다”고 말씀하셨다. 위원장님의 응원이 확실한 동기부여가 됐고, 덕분에 보다 명확한 비전을 세울 수 있었다.
- 제천영화제의 주요 상영관이었던 제천 메가박스가 지지난해 폐업하여 영화 전용 상영관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올해 다시 메가박스 4개관을 임대해 짐프 시네마로 운영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나.
장항준 명색이 영화제인데 영화 전용 극장이 없다는 사실이 치명타였다. 지난해부터 폐업한 메가박스에 지속적인 요청을 넣었는데 매각을 준비 중인 건물이라 합의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사무국이 각고의 노력을 쏟은 끝에 3개월간 건물을 임대하는 사용권을 따냈다. 극장이 적잖은 시간 동안 방치돼 있었기 때문에 좌석, 영사기, 내부 시설이 노후했다. 많은 예산을 들여 시설을 재정비했다. 제천 시민과 멀리서 영화제를 찾은 관객들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부끄럽지 않은 상영관을 만들고자 한다. 영화제가 끝난 뒤로도 극장을 문화공간으로 활용해야 하지 않겠나. 다양한 상업, 독립영화를 영화제 이후에도 틀 수 있는 제천시 고유의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았으면 한다.
조명진 스크린을 새로 구매했고 음향 시설을 전부 다시 손봤다. 좌석 시트도 새로 깔았다. 심지어 극장이 문을 닫은 사이 케이블이 전부 도난을 당했더라. 적은 예산으로 영화관 하나를 새로 지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장항준 모두가 즐길 만한 상업영화는 물론 지역에서 접하기 쉽지 않은 독립, 예술영화도 자주 상영하는 극장이 되었으면 한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안다. 미래세대를 위한 다양한 문화적 기회를 누릴 기회가 마련되어야 하는데, 극장이나 공연장이 지역에 없다는 건 인스턴트 음식만 섭취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기회와 경험 차원에서라도 이번 영화제를 계기로 제천 시내에 극장 문화가 다시 부흥했으면 좋겠다.
음악과 영화가 아름답게 공존하는 작품을
- 그간 제천영화제의 관객들이 상영관과 부대시설이 시내 곳곳에 산발적으로 퍼져 있어 이동 효율을 도모하기 어렵다는 아쉬움을 지적해왔다. 올해 영화제는 동선 재편과 더불어 지역 상생을 염두에 둔 제천 시내 시설과의 협업에 신경 쓴 듯한 인상이다.
장항준 사무국에서 처음부터 집약적 동선 설정을 염두에 두었다. 타지에서 오는 관객들도 많기 때문에 대중교통이나 도보로도 다양한 볼거리를 즐길 수 있는 영화제를 만들고자 한다.
조명진 축제 분위기를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 또한 재편의 주요한 이유다. 제천의 축제를 만들기 위한 지역 커뮤니티의 니즈도 분명했다. 그 점에 있어 영화제와 제천시가 뜻을 같이했다. 영화 공동체만이 제공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지 않나. 영화제 기간 중 제천시의 일상에도 축제의 분위기가 가득할 것이다.
장항준 영화제도 흥행에 성공해야 한다. 올해는 양적 팽창을 우선적으로 도모하고 이후 질적인 승부수를 던져보려 한다. 2년의 임기 동안 대중성 확보에 특히 신경을 기울이겠다.
- 영화인들에게 영화제는 네트워킹의 장이고, 그 역할을 마켓이 수행한다. 제천영화제는 영화음악에 특화된 ‘JIMFF 뮤직필름마켓’을 운영 중이다.
조명진 지난해 신설된 아시아 유일의 뮤직 마켓이다. 감독과 제작사 혹은 배급사끼리 연결해주는 영화제의 마켓과 달리 JIMFF 뮤직필름마켓은 영화음악감독을 중점에 두는 플랫폼이다. 국제영화제 중에선 칸영화제가 이같은 플랫폼을 유지 중인 것으로 안다. 올해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는 알렉산드라 자카르첸코가 칸영화제의 뮤직 마켓을 이끄는 분이다. 칸의 뮤직 마켓이 참고 사례인 만큼 자카르첸코가 단순히 심사만 하는 게 아니라 한국의 영화음악 마켓의 진흥 가능성을 타진했으면 한다. 올해는 100명 안팎의 음악가들이 마켓을 찾을 예정이다. 수년 내로 제천영화제에서 발굴한 음악감독들이 해외 각국의 영화제에 사절단으로 떠나는 방안까지 모색 중이다. 마켓 내부에서도 음악가와 네트워크를 구축하고자 한다. 올해 JIMFF 뮤직필름마켓은 오프라인 마켓뿐만 아니라 온라인 미팅까지 주선한다. 전세계의 음악가들이 자신의 창작물을 플랫폼에 업로드할 수 있고, 각 작품에 어울릴 법한 장르를 카테고리화할 수도 있다. 제작자들은 자신들이 만들려는 영화 장르에 어울리는 음악가를 손쉽게 검색할 수 있다. JIMFF 뮤직필름마켓의 온라인 웹사이트는 9월5일 공식 오픈 예정이다.
- 제천영화제의 본령은 ‘음악영화’와 ‘영화음악’에 있다. 올해 상영작의 경향성을 포함해 제천영화제가 추구하는 음악영화의 정의가 궁금하다.
조명진 올해 국제경쟁의 경우 8편 중 6편이 베니스, 베를린 등 유수의 영화제에서 이미 눈독을 들인 작품들이다. 검증된 영화들이니 기대해달라. ‘음악영화풍경’ 섹션에선 제천영화제에 떠올릴 법한 전설적인 뮤지션에 관한 영화를 마련했다. 다큐멘터리의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는 섹션인데 올해는 극영화의 비중을 높였다.
장항준 음악영화를 장르로 구분하기 참 애매하지 않나. 뮤지컬이나 <원스>처럼 음악이 주요한 작품을 주로 떠올리겠지만 음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영화가 음악영화가 아닐까 싶다. 근래 이 정의에 부합하는 작품은 <콘클라베>였다고 본다. 음악이 아무도 모르게 화면 아래 스며들어 있는데, 저절로 영화 속 음악에 젖어들게 만들더라. 이처럼 제천영화제가 초대하는 음악영화는 영화 속 음악의 개수가 기준이 아닌, 음악과 영화가 아름답게 공존하는 작품이면 좋겠다. 음악을 음미할 수도 있고, 공연도 감상할 수 있는 그런 영화제가 되길 바란다.
조명진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만 해도 그렇다. 샌드라 불럭이 캄캄한 우주를 유영하다가 지구에서 온 연락을 받은 이후 우주를 응시하는 숏이 있다. 그때 우주 자체를 체현한 음악이 흐른다. 그게 영화음악의 본질이라고 본다. 그런 역할을 해내는 작품을 영화제에서 자주 소개하면 좋겠다. 올해 영화제의 홍보대사인 강하늘 배우가 공식 기자회견 때 “모든 영화는 결국 음악영화가 아니냐”는 말을 전했는데 마음이 통했다 싶더라. <재즈싱어>(1927)가 등장하기 이전의 무성영화조차 음악만큼은 무조건 동반했다. 결국 음악영화의 범주는 한없이 넓고, 모두에게 열려 있다.
- 감독님은 영화감독으로서 음악감독과 어떤 방식으로 협업하나.
장항준 편집 단계에서 장면에 어울리는 가이드 음악을 깔아둔 채 음악감독에게 보낸다. 이 방법만큼 확실한 소통이 없다. 이후 음악감독과 만나 장면에 대한 논의를 만들어간다. 영화음악의 존재감은 음악의 존재 유무에 따라 결정된다. 음악의 인 그리고 아웃, 이에 따른 변주가 장면과 음악 모두의 아름다움을 구성한다. 대개 할리우드영화는 음악으로 꽉 차 있지 않나. 하지만 소리가 빌 때 만들어내는 찰나의 여운이야말로 영화음악의 존재감을 오히려 극대화한다. 한창 후반작업 중인 차기작 <왕과 사는 남자>의 경우 달파란 음악감독과 협업 중인데 감독님도 이 방식을 마음에 들어 한다.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으니까. 음식으로 비유하자면 영화에서 영화음악은… 미원, 다시다다. (웃음) 아무리 맛집이어도 MSG를 조금씩 넣는다. 한끗이 만들어내는 감칠맛이야말로 영화음악을 통해 완성된다.
하나부터 열까지 대중성과 흥행을 고심한다
- 올해 영화제엔 영화인은 물론 영화와 거리가 멀어 보였던 인사들도 힘을 보탤 예정이다. 이준혁 배우와 코미디언 장도연이 개막식 사회자로 서고, 권일용 프로파일러, 김상욱 물리학자 등이 토크 프로그램의 연사로 선다. 게스트 섭외에 특히 공을 들인 것으로 아는데, 이들에게 영화제의 필요성을 주지했나.
장항준 ‘플래시백 1990’에 참여하는 세 게스트에게 섹션의 주제인 ‘내가 좋아하는 90년대 한국영화’를 언급했더니 모두 흥미를 가졌고, 곧바로 수락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주유소 습격사건> <8월의 크리스마스>가 상영된다. 젊은 관객들에겐 말로만 듣던 한국영화의 전설 같은 작품을 극장에서 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 시니어 관객들에겐 추억 속에 자리한 영화를 좋은 음향과 영사 시설을 갖춘 극장에서 다시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이 프로그램이 영화제의 대중적 외연을 확장하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
조명진 세분의 게스트가 세 영화를 직접 골랐다. 선정의 변이 궁금하다. 가령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권일용 프로파일러와 어울린다. 그런데 김상욱 물리학자와 <주유소 습격사건>의 조합은 여러모로 생경하다. 우리가 아는 영화를 다른 시각으로 해석해줄 것 같다. 기존의 영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망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영화제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위원장님이 그리는 여러 청사진이 있는데, 올해와 내년 그 계획이 어떻게 실현될지 나 역시 궁금하다.
장항준 앞서 말한 것처럼 지금 영화제가 고려할 과제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대중성과 흥행이다. 모두가 즐기는 영화축제가 되려면 우선 관심이 필요하고 참여도가 높아야 한다. 안정성을 다져야 영화제만의 개성을 확보하고 새로운 시도를 해갈 수 있다. 매스미디어와 수많은 이벤트의 틈바구니 속에 생존하려면 영화제 또한 흔쾌히 방문 후 SNS에 인증하고픈 대중적 축제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더더욱 글자 그대로 호객 행위에 집중하게 된다. 식당에 와야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우선 오시라. 메뉴는 다양하게 준비해뒀다.
- 두분의 영화제 추천작이 있나.
장항준 개막작 <뮤지션>이다. 음악가 4인을 소재로 했다는 점도 매력적이지만 장르가 코미디라는 점이 신선하다. 고매하고 엄숙한 영화가 아니라서 좋다.
조명진 참고로 <뮤지션>의 그레고리 마뉴 감독의 장편 데뷔작도 과거 제천영화제에서 선보인 바 있다. 제천의 감독님이라고 할 수 있다. (웃음) 딱 한 작품을 꼽자면 <DJ 아흐멧>을 추천한다. 아주 재밌는 영화다. 올해 선댄스영화제 월드시네마 부문에서 심사위원 특별상과 관객상을 수상했는데 음악의 힘이 무엇인지를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영화다.
트리뷰트 - 에릭 세라와 데이비드 린치
올해 제천영화제의 ‘제천영화음악상’ 수상자는 에릭 세라다. 그의 이름이 익숙지 않을지 몰라도 <니키타> <그랑 부르> <레옹> 등 뤼크 베송의 영화에 흐르던 선율을 기억한다면 이번 영화제를 통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는 에릭 세라와의 만남을 놓치지 않길 권한다. “에릭 세라가 그의 밴드인 RXRA와 함께 영화제를 찾는다. 라이브 콘서트를 통해 세라와 RXRA가 추구하는 생생한 선율을 느껴보라. 그가 음악감독으로 참여한 <그랑 부르> <레옹> 그리고 <007 골든 아이>의 상영 또한 준비 중이다. 세 작품을 연속해서 본다면 음악가 에릭 세라의 통시적 궤적을 체험할 수 있다. 이를테면 기존 ‘007 시리즈’의 필름 스코어와 달라 개봉 당시 평이 갈렸던 <007 골든 아이>의 음악은, 전자음악을 기반으로 한 세라의 정수로 형형하다.”(조명진) 한편 올해 초 타계한 데이비드 린치를 돌아보는 기획도 마련돼 있다. ‘데이비드 린치, 뮤지션’ 섹션에서는 데이비드 린치가 지닌 뮤지션의 일면을 만날 수 있다. <이레이저 헤드> <블루 벨벳> 등 음악이 긴요한 역할을 했던 린치의 대표작은 물론 국내 인지도가 적은 그의 단편 7편이 관객을 기다린다. “린치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음악 작업을 했던 걸 알고 있나. 이번 ‘데이비드 린치, 뮤지션’은 우리가 간과했던 뮤지션으로서 린치를 부각하고자 한다. 프로그램팀 직원들이 단편을 미리 본 후 ‘이게 음악인가요?’라며 되묻더라. 그만큼 멜로디의 차원과는 거리가 먼, 신선한 음악들이다. 이 노이즈가 음악적으로 어떤 가치를 갖는지, 린치의 오랜 팬인 김태용 작가가 ‘청각적-보기의 영화 체험’을 주제로 강의한다.”(조명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