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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정물, 전임 - 홍상수 영화 속 김민희의 의미
이우빈 2024-09-19

*<수유천>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수유천>

<수유천>의 전임(김민희)은 그간 홍상수 감독이 견지해온 특정의 영화적 조건과 구조를 사뿐히 무시하는 이상한 존재다. 전임이 점유하고 있는 이 위치와 정체성을 밝히기 위해 그것을 연기한 김민희의 궤적을 먼저 훑어볼 필요가 있다. 후술하겠지만 홍상수의 영화에서 배우 고유의 특질이란 수개의 영화에서 유지되는 하나의 구체성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김민희가 처음 홍상수의 세계에 들어왔던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희정은 두명의 인물 혹은 세계로 분화하여 영화적 구조의 재미를 이끄는 홍상수 영화의 구체적 전형과도 같은 인물로 배치됐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의 민정(이유영)처럼 두개의 가능성으로 분열하며 진실을 잘 알지도 못하는 상대방에게 일갈을 가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혹은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영희(김민희)는 사랑에 빠졌던 늙은 감독 상원(문성근)에게 피 토하듯 화내며 감정을 토해냈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은 해변에 혼자 누워 잠든 영희의 꿈에 불과했다. <극장전> 에서 사과를 먹는 서양인과 마주한 꿈속의 상원(이기우)처럼, 혹은 <하하하> 속 이순신 장군(김영호)의 어처구니없는 현현처럼 홍상수 영화에서 꿈이란 인물의 어떤 욕심이나 혼란을 투영하는 또 하나의 영화적 시공간이 되어왔고, 영희 역시 그러한 배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더하여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선 <해변의 여인> <여행자의 필요>의 남자들처럼 문득 절을 하며 자신을 돌아보거나(김예솔비 평론가, <씨네21> 1453호), 유령과도 같은 존재(박홍열 촬영감독이 분한 검은 옷의 남자)를 만나며 이순신 장군의 예시처럼 천연덕스러운 상상을 일구어왔다. <풀잎들>의 아름(김민희) 역시 <생활의 발견> 속 경수(김상경)처럼 극의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낭독하면서 인물들의 느슨한 관계도를 일별하는 매개가 되기도 했다.

홍상수 세계의 인물들이란 이처럼 어느 정도 유사한 상황을 부여받는 동시에, 배우마다 어느 정도 특정한 구체성을 지니고 영화 속에 배열된다. 배우 본인이 밝힌 것처럼 권해효 배우는 “감추는 사람” 혹은 “후회하는 인간이나 잘 길들여진 남자”라는 구체적 속박 안에서 움직인다(<씨네21> 1453호). 조윤희 배우는 <그 후>에서 보여준 따귀 장면으로 대표되듯 홍상수 영화에 변칙적이고 즐거운 통속성을 부여하고, 하성국 배우는 초·중기 홍상수식 궁색한 남성상의 계보를 잇는 중이다. 기주봉 배우는 어디에서나 늘 죽음의 암운을 드리우고 다니며 송선미 배우는 ‘좋은 사람’이나 ‘좋은 언니’로서의 넉넉함과 동시에 그 속에 숨긴 태생적인 우울함을 들고 다닌다.

가만히 있어도 되는 사람

<밤의 해변에서 혼자>

그렇다면 김민희에게만 부여된 고유의 특질이란 무엇일까. 그가 본격적으로 자기만의 색을 드러낸 기점은 아마 <밤의 해변에서 혼자>였을 것이다. 해변에 가만히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영화의 운동성을 가볍게 배신하고 그저 찍히는 것만으로도 무언의 긴장감을 벌리는 김민희의 태는 마치 홍상수가 항시 동경한다 말해온 인상주의 화가의 순간적인 템포를 재현한 듯했다. 즉 김민희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영화라는 매체에 배반하는 정물로서의 예외성을 출연한 지 꽤 초기부터 배태하고 있었단 것이다.

물론 가만히 누워 있는 인간의 모양새가 홍상수의 영화에서 처음 등장했던 것은 아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구경남(김태우)처럼 윗도리를 까고 돌 해변 위에 누워 있던 남자가 있었고, <여행자의 필요>에서 커다란 바위 위에서 잠들던 이리스(이자벨 위페르)도 있었다. 그리고 앞선 두개의 사례와 <밤의 해변에서 혼자> 속 영희의 공통점은 누워 있는 사람에게 누군가가 다가와 자꾸만 일어서게 깨운다는 것이다. 구경남의 선배 화가가 그랬고, 이리스의 (아마도) 연인 인국(하성국)이 그랬으며, 영희에겐 상원의 조수인 승희(안재홍) 등이 다가왔다. 그러니 <밤의 해변에서 혼자>까지만 해도 김민희는 아직 정과 동 사이를 헤매며 홍상수 영화의 보편적 인물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은 채 ‘가만히 있는 사람’이란 특질을 조금씩 키워왔던 셈이다.

이후 <그 후>를 경유하며 <수유천>에 이르러 김민희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그래도 영화를 가능케 하는 무언가로 거듭나게 됐다. 당장 <그 후>에서 눈 내리는 날 택시의 창문을 내리고 가만히 바깥을 내다보며 봉완(권해효)의 치정극은 말끔히 잊은 채 미소 지었던 아름(김민희)의 얼굴은 여타의 상황이나 구조나 인물의 특질을 추가하지 않아도 완성될 듯한 인상을 자아내는 일종의 정경이었다. 그 이후 비교적 영화의 형식성을 강조했던 <> <물안에서> <여행자의 필요>에 김민희가 최대한 등장하지 않은 건 우연이 아닐 테다. 그리고 드디어 <수유천>의 전임은 정말 홍상수의 영화가 인물들에게 부여하는 보통의 임무와 조건을 계속하여 배신하며, 끝내 ‘완전히 가만히 있기’에 이른다.

자연으로서의 그녀

<그 후>

‘완전히 가만히 있기’란 어떤 존재와 등치되거나 빗대어 설명될 수 있을까. 물론 어떠한 개념에 집착하여 홍상수의 영화를 보는 일만큼 헐렁해지는 시선은 없겠지만, 김민희라는 배우의 구체성을 개념이 아닌 하나의 현상으로 밝히는 것만은 유효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수유천>의 전임, 지금 홍상수 영화의 김민희는 사람이라기보다 하나의 자연물에 가까운, 그 자체로 언제나 정물화가 될 수 있는 존재가 되어버린 듯하다.

영화의 후반부, 전임은 그간의 김민희가 으레 그랬듯이 카페 옥상에 누워 있다가 불현듯 일어난다. 카메라는 누워 있다가 기상하는 전임을 틸트업으로 따라간다. 그런데 이 컷의 전에는 수유천부터 하늘을 훑는 틸트업의 숏, 그전의 컷은 밤거리를 거닐던 전임으로부터 틸트업하여 하늘의 달을 비추는 장면이 있었다. 밤과 달, 낮과 강, 전임과 산, 즉 세개의 몽타주는 아래에서 위로의 고고한 이상적 시선을 거쳐 거대한 자연물을 직시하는 세번의 반복이자 매치컷이 된다. 전임은 자연물과 같은 자격에서 화면을 채운다.

전임은 베틀을 이용해 세개의 연작을 만들고 있다. 세개의 강을 유심히 보고 스케치하여 그 물결을 본뜬 <Flowing Water, Han(한)>, <Flowing Water, Jungrang(중랑)>, <Flowing Water, Suyoo(수유)> 가 그것들이다. 실제 강의 상·하류를 거꾸로 되짚어가며 기존의 흐름을 거스르려는 새로운 자연의 상을 만든 것이다. <Flowing Water, Suyoo(수유)>와 전임의 의도, <수유천>과 김민희의 존재란 모두 마찬가지로 세번의 반복을 통해 재현된 자연의 형상인 셈이다. 끝없이 동하는 강물의 흐름을 전임이 열흘 동안 베틀로 찍어내듯이, 계속하여 변하고 세월을 마주하는 김민희의 형상을 5일쯤 카메라로 찍어낸 영화가 <수유천>이다.

영화를 이긴 정물

<소설가의 영화>

<수유천>에 이르러 김민희란 정물화는 어느 정도 홍상수의 영화를 이긴 듯하다. 전임은 외삼촌 시언(권해효)에게 반복하여 묻는다. 은열(조윤희)의 집 2층에서 함께 잤는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이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 <도망친 여자>에서도 김민희는 각각 지인 집의 2층에 무엇이 있는지를 궁금해했으나 끝내 그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애매모호한 틈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번엔 시언이 정말 그날엔 잔 적이 없다고, 대신 다른 날 함께 있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고백을 들은 전임은 돌연 장어집 아래에 있는 어느 계곡가로 혼자 산책을 나선다. 그렇게 홀연히 산책을 떠난 전임은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고 계곡가로 떠난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힘찬 부름이 있고 나서야 얕은 냇가에 있는 계단 위의 2층에서 웃으며 뒤뚱뒤뚱, 그러나 빠르게 내려온다. 그러고서 위에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화면이 프리즈프레임으로 멈춘다. 전임은 그렇게 하나의 자연으로,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되는 것’의 존재로 거듭난다. 영화는 그 정물을 포착한 순간으로 마무리된다.

홍상수는 한결같이 자신의 영화적 아이디어를 이미 ‘주어진 것’에서만 허락한다고 말해왔다. 주어진 것이란 이를테면 그날의 날씨, 갑자기 내린 눈과 불현듯 눈에 들어온 어떠한 장소, 강변의 호텔이나 어떤 배우의 집 같은 곳처럼 이미 세상에 있는 것이다. 그 주어진 것들에 자기만의 영화적 조건을 부여해 유체와 고체 사이의 덩어리로 뭉쳐낸 결과가 그간의 홍상수 영화였다. 1996년 이후 쉼 없는 영화 찍기의 변주와 무수한 일상의 포착과 구조 짓기 끝에서, 김민희의 천진난만한 걸음걸이를 순간적으로 멈춘 <수유천>의 마지막은 비로소 ‘영화’라는 것을 “아, 찾았다!”라며 감탄하는 감독의 상쾌한 멈칫거림으로까지 느껴진다. 찰랑이는 소주에서 조금의 덩어리가 가라앉아 있는 막걸리로 홍상수 영화의 주종이 바뀌어오듯이, 홍상수의 영화에 김민희라는 독자적 불순물이자 정물이 완전히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수유천>은 김민희란 자연이자 정물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는 실험의 장이다. <소설가의 영화>에서 영화를 보며 영화 속에 있는 길수(김민희)의 모습처럼 김민희는 영화의 인위에 완전히 편입되지 않는 자연물로서의 긴장감을 내뿜으면서, 동시에 영화의 테두리를 형성하는 경계의 싸움꾼이자 파수꾼으로 존재하며 영화를 가능케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배우의 역할이란 모순, <수유천>의 촌극처럼 별다른 구성도 이야기도 없어 설령 대학 총장에게 혼나더라도 괜찮은 그 모순의 아름다움이 김민희에게 맡겨진 책무이자 자유인 셈이다. 감독 자신이 관철하던 영화적 조건이나 ‘움직임’이라는 영화의 넓은 제약에서 자꾸만 벗어나더라도, 설사 끝내 숨기려 했던 그 2층의 공간에 “아무것도 없었음”을 들켰더라도 그녀가 이미 세계에 있는 자연으로서, ‘주어진 것’으로서 영화에 똑똑히 존재할 수 있다는 확증의 이미지가 <수유천>의 전임으로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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