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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치유할 것인가? 언제까지 눈을 피할 것인가? - 동시대 일본영화의 경향으로 비추어보는 한국영화의 한계
이우빈 2025-05-09

하마구치 류스케미야케 쇼가 유럽의 주요 영화제에서 거둔 성과는 동시대 일본영화의 뚜렷한 결점을 보여주는 표식이기도 하다. 하마구치 류스케로 대표되는 일본의 뉴 제너레이션은 2011년 동일본대지진, 2019년 코로나19 팬데믹 등의 사회적 참사를 자신들의 영화에 직접적으로 내포하지만, 이러한 사태들의 영향을 ‘치유와 극복’이라는 주제 아래에서 일관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서구권의 영화제들은 이러한 그들의 태도에 감복하며, 삶의 향상성을 찬미하는 일본영화의 은밀한 나르시시즘을 미화하고 있다. 이는 마치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 무렵 이와이 슌지고레에다 히로카즈, 가와세 나오미가 등장하여 <러브 레터>나 <환상의 빛> <수자쿠> 같은 작품을 통해 일본 특유의 체념적 정서를 미적으로 승화했던 것과도 비슷한 맥락으로 감지된다.

너무도 선연해진 치유의 감각

<드라이브 마이 카>

치유와 극복이란 주제에 치우친다는 경향만으로 동시대 일본영화의 가시적 성취를 격하하긴 어려울 테다. 다만 하마구치 류스케와 미야케 쇼가 그들의 초기 영화인 <해피 아워> <와일드 투어> 등에서 보여준 워크숍 영화 등의 미학적 활력을 잃은 채 서구권의 입맛에 맞는, 전술한 대로 동양의 ‘신비성’이나 ‘내적 초월성’에 기반한 드라마로 응집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적할 법하다. 김병규 영화평론가가 말했듯이 워크숍 영화는 “임시적인 규칙을 내세워 공동체를 조직하고 그로부터 이탈하는 위반까지도 포착할 수 있는 ‘워크숍 현장의 천재성’”을 드러내는 매개로서 21세기 영화의 지반의 어느 곳보다도 탄력적인 생동을 자아낸 곳이었다. 요컨대 영화의 바깥을 드러내며 영화 매체 본연의 한계와 그 너머 사회의 냄새를 탐색하고, 이어 그 개선을 모색하는 영화적 실천의 장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실천적 시도는 전술한 1990~2000년대의 일본영화에도 유사하게 존재했던 풍광이다. 예컨대 아오야마 신지의 <헬프리스>는 일본의 아름다운 자연을 수직으로 내려다보는 관조적 시선을 통해 일본 사회의 치부를 드러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나 기타노 다케시의 <하나비>, 쓰카모토 신야의 <동경의 주먹> 등은 옴진리교 사건, 버블경제 이후 일본 사회의 고질적 염증이었던 죽음의 충동을, 구수연의 <우연하게도 최악의 소년>과 최양일의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는 재일교포의 여전한 자아분열증을 가시화했다. 동시대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 오토모 가쓰히로의 <아키라>, 안노 히데아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 등의 재패니메이션이 공상과학의 상상력으로 표현했던 파괴적인 시대정신도 유사했다. 그러나 지금 일본영화의 주류 정서는 사회의 상흔을 표면화하여 렌즈로 직시하는 의지적 실천이 아니라, 상흔의 총체를 개인(들)에게 내재하여 그것을 정서적으로 극복하게 하려는 자기 다독임으로 기울어졌다.

이를테면 죽거나 떠난 가족을 그리워하고 잊지 못하는 한 인물이 새로운 일상의 바람과 소통의 가능성으로 회복에 이른다는 일련의 플롯은 <환상의 빛>에 이어 <드라이브 마이 카>, 후카다 고지의 <러브 라이프>에 연결되고 있다. 혹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걸어도 걸어도>가 죽음의 필연성을 ‘나비’라는 자연물의 체념적 뉘앙스로 종합했던 길도 반복되고 있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자연의 무심함 앞에 선 인간의 죽음을 끝내 영구한 미스터리로 봉인한다. 이는 홍성남 영화평론가가 <수자쿠> 등 1990년대 후반의 일본영화를 두고 “체념과 단념의 정서를 체화하는 삶의 태도”를 통해 “개념적이고 이성적인 사유를 도외시한 채 그저 ‘이대로임’이나 ‘저대로임’이란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선(禪)적인 태도”(<필름 컬처> 2호)를 취했다고 분석한 일과 이어진다. 이러한 선택은 치유에 대한 나름의 긍정적인 열망임과 동시에, 치유의 주체와 대상 사이에 있는 근본적 이물감을 외면하는 회피이기도 하다.

<새벽의 모든>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로 일본 사토리 세대의 부유를 표면화했던 미야케 쇼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과 <새벽의 모든>을 통해 계속하여 ‘회복’을 내세운다. <새벽의 모든>의 첫 내레이션, “난 어떤 인간으로 보이고 싶은 걸까?”란 자문은 감독 자신을 포함한 동시대 일본영화의 정체성을 고심하는 비유로도 보인다.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로 사토리 세대의 가난한 혼란을 전면화했던 이시이 유야 역시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 <우리가 말하지 않은 것>으로 타자와의 연대를 극의 중심으로 소환했다. <플랜 75>에서 일본의 고령화사회 문제를 가감 없이 직시했던 하야카와 지에 감독이 11살 소녀의 가족 이야기로 치유의 감각에 몰두한 <르누아르>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일 역시 무관하진 않아 보인다.

한국형 픽션의 다큐멘터리적 궁핍에 대해

<해피엔드>

하지만 동시대 일본영화는 카메라 바깥의 균열을 명징한 징후로 드러내는 사회에의 비판적 실천이나 여타 형식적 즐거움을 어느 정도 포기한 대신 적어도 시대정신, 시대감각이라는 무형의 감성을 영화적 경향으로 녹여내고는 있다. 이것이 비록 전술한 대로 다소 편향적인 치유의 감수성에 몰두해 있다 해도 모두가 오시마 나기사소마이 신지, 아오야마 신지처럼 날 선 감각을 유지할 필요는 없다. 게다가 아다치 마사오는 아베 전 총리 피살 사건을 즉각적으로 극화한 <레볼루션 +1>을 만들었고, 근래 개봉한 소라 네오의 <해피엔드>도 일본의 1960~70년대를 다분히 현재화하게 만드는 정치적 대범함을 뽐내며 주류영화의 빈곳을 채우고 있다. 사실 이러한 논지를 기반으로 진정 비추고 싶은 바는 동시대 일본영화에 대한 반감이라기보다 그에 비춰 바라본 한국영화의 비판 의식이다.

단적으로, 동일본대지진은 시도 때도 없이 일본영화를 통해 픽션화되나 왜 한국영화는 세월호 참사를 픽션의 영역으로 더 끌어오지 못하는 것일까.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서 일본 청춘의 파괴적 충동을 아름다움으로 승화했던 이와이 지마저 동일본대지진을 극화한 <키리에의 노래>를 내는 시점이니 이는 자연스레 들 수밖에 없는 의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한국영화의 픽션엔 다큐멘터리적인 감각이 부재하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흩뿌리는 시대정신의 뉘앙스는 그가 동일본대지진을 다뤘던 다큐멘터리 <파도의 목소리> 연작에서 읽힐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 동시대 일본 뉴 제너레이션의 틈새 곳곳에는 고모리 하루카와 같이 끝없이 일본의 사회적 재난을 응시하는 다큐멘터리적 시선이 존재한다. 그러나 한국영화는 90년대 코리안뉴웨이브 당시 <바람불어 좋은 날> <고래사냥> <칠수와 만수> <바보사냥>이 그렸던 시대의 잔혹, 혹은 2000년대 무렵 <살인의 추억> <공동경비구역 JSA>가 복기했던 역사의 현재화 작업을 끊어버린 것처럼만 보인다. <서울의 봄>과 <파묘>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이 작품들이 대중의 시선을 끌며 천만 관객을 돌파한 것은 결국 한국적인 것으로 지시할 수 있는 역사적 기반이 픽션의 틀 아래 최소한으로 똬리를 틀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보>

모든 픽션이 다큐멘터리적 시선 아래 사회의 담론을 끌어올 필요는 없다. 그러나 지금 만약 한국영화의 위기를 말하고 싶은 자라면 이러한 문제의식을 등한시할 순 없을 것이다. 영화 매체를 민족주의적인 역사의 수단으로 삼는 일 역시 위험하긴 마찬가지겠지만, 그럼에도 ‘한국영화’란 정체성을 유지하고 그것을 대외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방식은 당연히도 시대정신의 형성, 공동체의식의 장르화에 있다. 2023년 <씨네21>이 당시의 여름영화를 두고 나눴던 대담에서 김소희 영화평론가는 “지금의 한국영화는 모두가 다음을 얘기하는데 아무도 현재를 얘기하진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라고 지적했다. 그의 말을 변주하자면 지금의 한국영화는 현재를 말할 과거의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 가깝다. 이 대담의 기반이 됐던 상업영화 진영에만 국한하는 말은 아니다. 최근 들어 공개되는 대개의 독립영화 역시 사적 경험, 좁은 담론에 기반한 소재주의적 드라마 안팎, 혹은 독립영화라는 이름의 제도에서 벗어나 대안적 형식미를 택하는 가욋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모양새다.

2019년 <벌새>가 (마찬가지로 작품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한국 독립영화에 하나의 분기점이 될 수 있던 이유, 조금 더 돌아가 이강현 감독의 <파산의 기술>이 여전히 한국 다큐멘터리의 자오선이 되는 이유는 이 영화들이 어떠한 시대의 풍취를 사유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풍취란 특정한 사회적 사건을 다루기만 하면 된다는 소재주의적 발상이 아니다. 사건이 풍경으로 다뤄질 수 있는 매개라면, 풍취란 말 그대로 외부의 자극을 주관적 경험으로 수용한 뒤 그것을 언어로써 외부와 공유하는 감각의 복잡다단한 과정이다. 손에 명확히 잡히진 않으나 모두가 순수하게 공유하는 그 분위기의 총체. 동시대 일본영화가 공유하는 바로 그 무형의 시대감각이다. 나아가기 위해선, 그리고 어떠한 ‘파도’를 만들기 위해선 우리가 함께 겪었던 혹은 겪고 있는 시대를 직시한단 집단적 동력이 우선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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