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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관광객의 영화, <그랜드 투어>

19세기 후반 유럽에선 카이저파노라마(Kaiser panorama)라는 기계장치가 발명되었다. 이 새로운 시각 매체는 20명 남짓한 사람들이 원통 주변에 둘러앉아 자기 앞에 뚫려 있는 투명한 유리 입체경을 통해 사진 이미지를 관람하는 장치다. 관람자들은 각자의 관람 기기에 동전을 넣고 정해진 시간마다 연속적으로 전환되는 이미지의 연쇄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예술비평가인 조너선 크래리의 관측에 따르면 카이저파노라마는 “로마에 있는 교황의 아파트 실내에서 중국의 만리장성으로, 다시 이탈리아의 알프스로 120초 간격을 두고 이동”하는 체험을 제공한다.

이국의 낯선 풍경을 볼거리로 삼는 카이저파노라마의 시각 체험은 시공간적인 연속성과 계열의 논리를 파괴한다. 관람자는 나이아가라 폭포,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자들, 런던 거리의 일상 사진을 연달아 보며 파편화된 이미지를 수용한다. 연속된 사진 이미지는 하나의 일관된 세계를 파괴하면서 서로 다른 시공간의 단면으로 채워진 일시적이고 복합적인 세계를 구획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의 지각을 닮은 이 경험 위에서 카메라가 포착한 사진적 이미지, 근대의 식민주의, 그리고 여러 종류의 볼거리를 연속적으로 조망하는 관광객의 파노라마적 시선이 혼합된다. 일본의 비평가인 아즈마 히로키는 철학적 개념으로서의 관광객을 제시하면서 “관광객이 된다는 것은 ‘근대’를 몸에 걸치는 행위의 일환”이라는 말을 인용한다. 그의 말을 풀어 쓴다면 관광객이 된다는 것은 근대의 시각과 구조를 흡수하는 행위다. 다시 말해 영화적 지각을 체화하는 행위다. 그것은 우리의 통합적인 시각을 해체하고 원래의 지표에서 이탈한 현실을 정립한다.

근대, 영화, 관광객

미겔 고메스의 <그랜드 투어>는 영화가 발명되기 전부터 특별한 관계로 결부되어 있던 근대의 식민주의, 영화적 이미지, 그리고 연속적인 파노라마로 이미지를 관측하는 관람자의 시선을 결합한 21세기의 ‘관광객의 영화’이다. 이 영화엔 두 가지 여행이 있다. 하나는 미얀마에 파견된 영국의 공무원 에드워드가 약혼녀인 몰리를 피해 도망치는 여행이고, 다른 하나는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에드워드를 뒤쫓는 몰리의 여행이다. 물론 이것은 표면적 서사에 한정된 진술이다. 다르게 말할 수도 있다. 이 영화가 가리키는 한 가지 여행은 20세기 초입을 배경으로 커플의 발자취를 뒤쫓는 픽션의 여행이고, 다른 하나의 여행은 현재 시점에서 여러 아시아 국가의 풍속을 촬영한 다큐멘터리의 여행이다. 하나는 화면의 빈칸을 채우고 구성하는 시각적 요소들의 여행이고, 다른 하나는 화면에서 끝없이 흩어지는 목소리의 여행이다. 하나는 내러티브의 질서 안에서 벌어지는 도망과 추적이라는 행동의 여행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맥락에서 삽입된 것인지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불규칙한 단면들의 여행이다. 그 단면들에는 인형극과 오페라 무대, 유람선과 기차와 오토바이, 이름 없는 엑스트라들이 부르는 노래와 에드워드가 그리는 자화상, 자꾸만 달아나는 동물과 반복해서 잠드는 인간들이 적혀 있다.

고메스는 “내게 픽션의 기본적인 원칙은 서로 다른 언어와 규칙을 결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한 편의 영화에 담긴 다층적인 관광의 지도를 그리기 위해 스튜디오 촬영과 로케이션 촬영,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진행된 원거리 화상 촬영을 뒤섞는다. <그랜드 투어>는 각자 다른 환경에서 생겨난 이미지와 사운드를 교차해 화면의 위상을 구분 짓는 근거를 흐트러트린다. 이것은 영화를 역동적이고 잠정적인 변수들의 집합으로 다루는 표류 중인 그림엽서다. 미겔 고메스는 후렴구처럼 자신의 모든 영화는 <오즈의 마법사>의 리메이크라고 반복해서 언급한다. 하지만 고메스가 꿈꾸는 도로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는 관광객의 동선을 따라 흩어지는 장면들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한다.

영화 속의 관광객은 고메스가 설정한 특수한 좌표에 놓여 있다. 에드워드와 몰리는 어린아이들처럼 도망치고 뒤쫓는 충동으로 움직이지만, 그들의 여행이 도망과 추적이라는 목적에만 충실한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의 동선은 관광객의 시각이 전제하는 산만한 눈짓과 일탈적인 움직임에 노출되어 있다. <그랜드 투어>의 장면들은 도망과 추격이라는 여정의 목적과 관광객적인 여행의 형식 사이에서 경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에드워드는 가면을 쓰고 이동하는 일본 승려들의 행렬을 따라간다. 그는 누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낯선 행렬에서 평온한 안식을 느낀다. 그가 탑승한 열차가 느닷없이 전복되는 것처럼 관광객은 하나뿐인 규칙에 맞춰 정해진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하는 종족이 아니다. 관광객들은 길을 잃고 주변을 곁눈질하다 생각지 못한 곳으로 향한다. 다른 장소에 침입해 다른 규칙을 수행하고 다른 것들을 바라본다.

관광객(Traveller)의 숏

20세기 영화의 두 가지 운동은 한발 앞선 도망과 한발 늦은 도착에 있다. 알프레도 히치콕의 주인공들은 누구보다 먼저 도망쳤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추격자들보다 앞서 베이츠 모텔(<싸이코>), 수녀원의 종탑(<현기증>)에 도착한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사건이 준비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이 사건(살인, 혹은 위장된 살인)을 실행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도착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히치콕의 인물들이 그 사실을 깨닫고 붕괴하는 순간에 영화는 한발 늦게 도착하는 매체의 운명을 자각한다. 알랭 레네의 <밤과 안개>가 강제수용소였던 장소에 늦게 도착하던 것처럼, 크리스 마커의 <태양 없이>가 전쟁과 혁명이 끝난 국가에 뒤늦게 도착하던 것처럼, 호세 루이스 게린의 <이니스프리>가 존 포드 영화의 촬영지에 뒤늦게 도착하는 것처럼, <그랜드 투어>의 몰리는 에드워드가 도망친 곳에 뒤늦게 도착한다. 그리고 도망과 도착 사이의 모호한 간극이 이 영화의 관광객적 형식을 가능케 한다.

“트래블링은 도덕의 문제”라는 저명한 주장을 전유하자면, 트래블링은 관광의 문제다. <밤과 안개>가 폐허가 된 수용소의 흔적에 뒤늦게 도착했을 때부터 관광객(Traveller)의 숏은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한 채로 끝없이 이어진다. 그것은 바라보는 대상에 깊이 관여하거나 심층에 도달하지 않는다. 대신 유람선과 기차에 탑승해 수평적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지켜보고 소형 택시나 오토바이에 올라타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는 거리의 전경을 바라본다. 무한한 공간으로 이어진 파노라마의 한 단면에 있는 관광객은 특정한 장소에 정박하지 않는다. 그들은 눈앞에 주어진 세계의 외양에 집중하면서 그전까지 인식하던 세계의 단면을 잊어버린다. 에드워드와 몰리는 순간마다 다가오는 관광지의 생경한 자극에 반응하는데, 직전 장면에서 주어진 자극은 다음 장면으로 지속되지 않는다. 유람선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와 춤을 추던 몰리는 문득 주변을 돌아보며 말한다. “다들 어디로 갔죠?” 영화는 단기 기억상실에 걸린 것처럼 관광객들의 주변에서 잠시 나타나고 순식간에 다음 장소로 향한다. 미얀마에서 출발해 싱가폴, 방콕, 사이공, 일본과 중국을 가로지르는 <그랜드 투어>의 여정은 내러티브의 인과율에 의존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러티브를 완전히 해체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단지 관광의 논리를 따른다. 두 연인은 다음 장소로 이동할 수 있는 탈출구를 찾을 뿐이다.

몰리를 피해 양쯔강 상류행 배에 탑승한 에드워드를 비추는 대목에서 영화의 내레이션은 난데없이 마작을 즐기는 중국인 가족을 묘사한다. “배에서 중국인 가족이 마작을 즐기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규칙을 알 듯해서 노인의 자리에서 엉망으로 게임을 했다. 노인은 웃었다.” 이 내레이션이 장면에 입혀지는 동안 카메라는 어느 노인이 담배를 피우며 무표정으로 마작을 하는 모습을 비춘다. 화면에는 에드워드가 없고, 노인은 웃지도 않는다. 노인과 함께 마작을 즐기는 사람들이 그의 가족인지도, 그들이 중국인인지도 확증할 수 없다. 화면의 노인이 에드워드와 같은 허구적 세계에 속하는 존재인지, 연출자의 통제 바깥에서 카메라가 포착한 현실 속의 피사체인지도 알 수 없다. 다만 화면과 내레이션 모두 노인과 마작이라는 요소를 공유하고 지시한다. 그것으로 인해 장면은 해결되지 않는 모호함으로 흔들린다.

이 장면은 <그랜드 투어>의 이미지와 목소리가 놓인 구역을 미묘하게 연결 지으면서 동시에 떨어뜨려 놓는다. 내레이션의 목소리가 설명하는 상황과 화면 속의 상황은 언뜻 유사한 요소를 공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명확하게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그랜드 투어>라는 영화 전체에 걸쳐 있는 불확정적인 증상이다. 픽션으로 촬영된 장면과 다큐멘터리로 포착된 장면, 20세기 초입의 배경과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두 가지 시제, 인물의 정념을 설명하는 내레이션과 불투명한 화면 속 인물의 행위, 그리고 에드워드의 여정과 몰리의 여정 사이에는 과연 얼마만큼의 물리적 격차가 존재하는 것일까? 두 세계는 서로 부딪칠 만큼 가까이 있으면서도 끝내 만날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다.

전염의 몽타주

<그랜드 투어>에서 미겔 고메스의 관광객들이 수행하는 것은 이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로 무관해 보이는 세계의 단면들을 연속적으로 지나치는 것이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이 파솔리니의 영화를 두고 사용한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영화 속의 모든 요소가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분리 불가능한 관계로 존재한다는 “전염의 몽타주”를 증언하는 자들이다. 디디 위베르만은 파솔리니의 영화에서 함께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양상을 전염의 몽타주라 부른다. <그랜드 투어>에서 중국의 숲속에서 잠든 에드워드의 머리맡엔 뜬금없이 불상이 놓여 있다. 그것은 중국에 도착한 몰리가 목격하는 거대한 불상으로 뒤늦게 되돌아온다. 이 순간에 두 인물이 거주하는 평행한 장면은 서로의 영역에 무심코 침식되고 만다.

미겔 고메스는 <그랜드 투어>의 토대를 이루는 참조대상으로 고전기 할리우드의 스크루볼 코미디를 제시한다. 영화평론가 데니스 림아다치 마사오의 <약칭: 연쇄살인마>로 대표되는 일본의 풍경영화 이론을 언급하기도 한다. 이 영화는 무성영화 시기의 아시아 국가를 배경에 두면서 생각지 못한 문화와 양식에 전염되어 있다. 고메스는 스크루볼 코미디의 소란스러운 활력과 유머, 풍경영화의 이완된 공백과 침묵을 혼란스럽게 배열한다. 이 배열은 장면들을 접속하고 연결하는 논리에 혼선을 일으킨다. <그랜드 투어>는 연인들의 활력으로 가득한 스크루볼 코미디에 온전히 속하지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풍경의 잠재력을 침묵하는 이미지로 환기하는 풍경영화가 되지도 않는다. 거듭 말하지만 이 영화는 관광객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관광객들은 연인들이 주고받는 스크루볼 코미디의 활력에, 인물의 궤적과 정적인 풍경을 느슨하게 접속하는 풍경영화의 엄습하는 감각에 잠시 매혹되고 그저 지나칠 뿐이다. 이런 점에서 <그랜드 투어>는 만나지 않는 커플의 스크루볼 코미디이며 인물과 풍경의 느슨한 접촉면조차 희박해진 풍경영화다.

몰리는 에드워드가 보낸 편지를 읽거나 그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트린다. 고메스의 말에 따르면 이는 1940년대 캐서린 헵번이 출연한 스크루볼 코미디에서 빌려온 특유의 제스처이지만, <그랜드 투어>에선 조금 더 특별한 영화의 습관이 된다. 몰리는 멀리 떨어진 에드워드의 세계가 가까이 다가와 관광을 중단시키고 연인의 결합이라는 목적을 환기하려고 할 때마다 가까워지는 거리감과 연결 가능성을 차단하는 몸짓으로 발작적인 웃음을 터트린다. 장면이 찢어질 듯 그녀가 웃고 나면 에드워드는 화제에서 사라진다. 웃음은 커플의 만남을 영원히 유예하는 장치이자 관광객의 산만한 여행을 가속하는 제스처로 활성화된다.

이동 수단과 탑승객

장 뤽 고다르는 조너선 로젠봄과의 대화에서 독특한 비유로 자신을 빗댄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역이나 터미널이라고 즐겨 생각한다. 기차나 공항들 사이를 오가는 비행기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내 자신을 공항이 아니라 비행기로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고다르가 사망한 이후 로젠봄은 이 말을 인용해 영화는 관객을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이동 수단이며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경로와 이동 수단을 이용하는 사람의 경로는 일치할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고 적는다. 언젠가 우리는 고유한 얼굴과 이름을 가지고 출발지와 목적지를 구분할 수 있는 영화의 탑승객이었다. <그랜드 투어>는 어디에서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는 영화의 관광객 가운데 한 명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첫 장면에서 카메라는 놀이공원에 세워진 자그마한 원형 관람차를 비춘다. 관광객인 우리는 정해진 이동 수단을 타고 목적지에 도착하는 대신 원으로 천천히 움직이면서 거듭해서 변하고 있는 세계의 속도를 겪는다. 우리는 모습을 감추고 잠시 머물러 주변을 둘러본 뒤 사라진다. 미겔 고메스는 19세기와 20세기, 그리고 지극히 동시대적인 픽션의 기억을 조합해 관광객의 지각을 구체화한다.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는 세계의 조각들을 관통하는 관광객의 눈으로 영화와 접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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