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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영화과와 애니메이션 관련학과가 많기로는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대한민국엔 영화사가 없다. 생각해보면 좀 이상한 일이다. 1969년판 이영일의 <한국영화전사>가 아주 오래 유일한 영화사 독본으로 읽혀야 했고, 거기에 수록되지 못한 일제하 좌파 영화운동사는 세대를 두어번쯤 건너 영화평론가 이효인의 <한국영화역사강의1>이 출현하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일제 식민지배 종식 이후부터 지금까지를 아우르는 영화사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초창기, 그러니까 일제 식민지배 아래서 만들어진 극영화들이 단 한편도 남아 있지 않고, 기록과 보존에 둔한 우리 현실과 무척 어울리는 풍경 아니냐고 접어둬야 할까?올초 타계한 고(故) 이영일이 남긴 초창기 영화인 인터뷰 자료는 우리 처지가 그렇기에 더 소중했다. 그들의 기억 속에는 사라진 영화들이 기거하고 있었으므로. 이영일 선생의 30여년 전 녹음 테이프는 <임자없는 나룻배>의 이규환, 나운규의 친구 윤봉춘
어떤 도서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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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제38회 대종상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종상 문제를 다룬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끝부분을 우연히 보게 됐는데, 우리집 텔레비전 수상기는 사랑받아 마땅한 우리의 대종상이 신구세대의 갈등에 희생이 되고 말았다고 단정하고 있었다. 세대간의 화합을 강권하고 있었다.정말 대종상은 세대갈등에 상처입은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보면 대종상의 역사는 온갖 로비설과 음모설이 서식해온 어두운 터널이었다. 오죽하면 당대의 활동성 높은 영화인들이 대종상을 거부하자는 집단적 움직임을 두어번씩 되풀이했을까. 불공정심사 의혹으로 상처입고, 운영비조차 마련 못해 해걸이를 하는 수모까지 당한 상. 철지난 냉전논리로 냉전이데올로기에 찌든 당국의 검열을 통과한 영화조차 빨간 딱지를 붙여 시상대 진출을 막던 상. 빛나는 영화의 싹을 발견할 힘을 잃은(아니면 시력이 애초부터 없었던) 노안을 과시하던 상. 빈사 상태의 대종상을 새숨을 불어넣어 긴급구조해온 건 언제나 영화였다. 대종상은
다시 대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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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일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들 이야기는 언제나 감동적이다. 라면을 먹고 달리는 임춘애에게 온 나라가 감동한다. 날숨이 보얀 입김이 되어버리는 추운 다락방에서 오선지에 악상을 옮기는 슈베르트를 본 적은 없어도, 이야기만으로 가슴이 뭉클해진다. 시대가 열정적으로 흠모하는 영화의 현장에 참여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젊은 날을 통째로 바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그러나 이같은 희생이 언제까지나 미담으로 남아 있지는 못한다. 영화산업의 파이가 그러기엔 너무 커졌다. 분배의 문제가 최근 영화계 스탭들 사이에서 터져나온 것도 그 때문이다. 돈은 영화를 향해 밀려 들어오고, <쉬리>에서 <공동경비구역 JSA>, 그리고 <친구>까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무찌른’ 한국영화들의 명맥이 끊이지 않는데 우리들의 처우는 달라진 것이 없다, 그들은 말한다. 한국영화 80년사에서 처음 들리는 목소리다. 경력 5년에 연봉 150만원, 충무로 ‘조수’들의 생존현
영화계에도 분배의 정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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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힘으로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신문을 만든다는 건 80년대 말, 믿기 힘들 만큼 엄청난 창조적인 꿈이었다. ‘6만주주’가 성금을 모아서 정말로 하나의 신문을 만든 사건은 세계언론사에도 없는 일이었다. 프랑스의 <르 몽드>도 시민이 만든 신문은 아니었다. 나치에 협력한 신문사를 정부가 접수하여 양심적 지식인들에게 불하해서 태어난 신문이었고, 스페인의 <엘 파이스>는 프랑코 독재에 저항하던 이들이 만들었다지만 한국과 같은 폭넓은 열망과 지지 위에서 출발하지는 않았다. 알다시피 한국 민주화운동의 결실이라고 해도 과히 틀리지 않는 그 신문이 <씨네21>의 모태이다.출발 때의 목적과 의지가 출발 이후 과정 모두를 물론 합리화하지는 않는다. 다만 어떠한 시행착오를 했더라도 본질을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 이 신문의 하루하루에는 애초 신문을 탄생시킨 우리 사회의 이상을 발전시켜가는 의무와 권리가 새겨져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제는 시민의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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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취재를 마치고 도쿄로 돌아가는 길에 <키네마순보>의 전 편집장 겸 현 사업담당 책임자인 가케오씨가 <씨네21> 사무실에 들렀다. 그는 일본, 중국, 이란 등을 거쳐온 아시아영화열이 앞으로 몇년 동안 한국 위에 머물 거라고 관측하는 영화평론가다. 그는 <쉬리>나 <공동경비구역 JSA>처럼 할 얘기를 하면서 대중을 휘어잡는 영화가 불행하게도 일본에는 없다고 아쉬워해왔다. 그런 그가 진지하게 물었다. 왜 한국에는 허우샤오시엔이나 에드워드 양이 없는 것일까. 사회 자체가 정체돼버려서 영화소재도 빈곤해진 유럽이나 일본과 달리 한국은 아직 천착할 역사적 정치적 사안들이 풍부한데. 통일이 된다면 한국영화의 폭발이 다시 일어나게 될까. 전주에서 <필름컬처> 임재철 주간과 마주 앉아 영화를 논하던 <카이에 뒤 시네마>의 샤를 테송 편집장도 비슷한 질문을 던져왔다. 한국에는 작가영화의 전통이 없는 것 같다, 왜?이들에게 모종의 우월
허우샤오시엔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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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99호에서 <씨네21>은 지나간 영화들에게 늦은 편지를 부쳤다. 그렇게 어제의 서랍을 뒤져, 정리를 하고 나니 창간호부터 시작한 오늘의 그림을 그릴 시간이 됐다. '한국영화산업 파워50'은 처음 등장할 때부터 화제도 많이 불러일으켰고, 영화인을 서열을 매겨 줄세우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많이 받았다.그런 평가와 관계없이 가장 재미있는 건 영화인과 관게자, 영화기자들로 구성된 추천인들의 목소리를 청취해 가감없이 작성하는 이 충무로 조감도가 해를 거듭하며 한국영화산업의 변화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충무로 토착자본들이 대부분 사라진 가운데 극장과 배급을 장악한 곽정환씨나 임권택 감독과 참으로 예술적인 콤비를 이뤄 한국영화의 진정한 세계화에 기여한 명제작자 이태원도 하나의 영화적 상징이라 하겠다. 이 여론조사의 대상이 되는 '영화산업'이 자본과 예술을 두 축으로 하고 있다는 기초상식을 강조하느 듯한 상징말이다. 그래서 산업적 지략과 영화감각을 두루 갖춘 강우석씨가 연속 1위를
한국영화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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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이다. 창간 6주년을 맞으며 <씨네21>은 우리의 발밑에 새로 출발선을 긋는다. 돌아보면 지난 길은 <씨네21> 혼자 만든 것이 아니었다. 영화를 '우리들의 예술'로 채택한 시대가 있었고,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영화가 있었다.그 영화들을 우리는 온전히 읽은 것일까. 그것이 품고 있는 의미와 가치를 놓치지 않고 포착해 독자들에게 제대로 전달한 것일까. 혹시 다가올 시대의 전령을 문전박대하여 거리로 내쫓은 우를 범한 적은 없을까. 출발선에서 우리는 그런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본다.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이다. 지적 유희에 휘말려, 아니며 일시적 환호에 휩쓸려, 감각의 새로움에 미혹되어 안 그래도 좋을 영화에 과도한 찬사를 보냈을 수도 있을 것이다.신발끈을 다시 매며, 우리는 그 답을 찾기로 했다. 298권의 <씨네21>을 거슬러 창간호에 가닿기까지, 예상은 했지만, 작업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영화의 두 주체, 만드는 이와 보는 이의 중간지
영화를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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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더위에 때이르게 벚꽃이 피고, 황사 바람에 비까지 찾아들어 또 꽃들이 진다. 에이, 버얼써 졌지요, 출장을 다녀온 동료는 남녁 꽃소식을 묻자 타박을 한다(진짜 타박은 아니고, 웃으면서). 집으로 돌아가려면 여의도를 지나야 하는데, 늦은 밤 꽃가지 아래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쌍쌍의 남녀가 끝없이 줄을 잇는다. 그래, 봄밤나들이구나.<씨네21>도 계절을 못이겨 나들이를 준비했다.길은 두 갈래다. 창간 6주년을 앞두고 여는 씨네21영화제가 그 하나. 지난 해 조선희 창간편집장이 시작한 이 행사의 출발배경은 단순하고 소박했다. 부산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국제영화제들이 생겨났고, <친구>처럼 부산에서 출발해 전국을, 영호남의 경계까지 넘어서 휩쓰는 영화가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도 문화의 서울편중현상은 가시지 않았다. 좀더 단순하게 말하자면, <씨네21>의 독자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영화를 기사로만 읽는다는 얘기다. 독자시사회 같은 소소한 즐거움도 모두 서
봄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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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의 민족주의자 밀로셰비치가 전쟁범죄자로 낙인찍힌 일을 패권주의의 승리라고 말할 생각이 적어도 내게는 조금도 없다. 무자비한 인종청소, 그 과정에서 인종개량의 이름으로 자행된 강간, 그건 어떤 말로도 변명할 수 없다. 오늘 과거를 반성한다한들, 그 잘못을 되풀이하는 바보짓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나마 회복한 ‘건강한 정신’으로 세상과 삶을 일으켜 세우려 안간힘을 쓰는 동안, 우리는 한뼘씩 사람답게 사는 영역을 확장시켜나갈 수 있다.제3회 여성영화제가 ‘쟁점’이라는 부문을 따로 만들어놓고, ‘포화 속의 여성들’을 초청해들였다. 그 ‘여성’들은 때로 남편과 아들을 전쟁에서 잃어버린 아내거나 어머니이다. 직접 싸움터에서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의 슬픔과 비탄은 전쟁의 비극을 정서적으로 환기시키는데 더없이 적절하다. 전쟁은 물론 그러한 상실만 강요하지는 않는다. 아이다처럼, 환향녀들처럼 남자들이 패배하면 그들의 여자들은 승리자의 전리품이
제3회 여성영화제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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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곽경택 감독의 <친구>는 깡패영화다. 소독차가 뿜어대는 모기약 안개 속을 좋아라 쫓아달리던 아이들이 어떤 길을 따라서 조폭이 되나를 밀착 취재한 한국판 갱영화다. 미국에서 영화공부를 하고 돌아온 감독은 성장기를 공유하는 그 친구들의 이야기를 심중에서 꺼내 스크린에 펼쳤다. 소년기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대체로 향수가 묻어 있게 마련.그 아련함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것들은 있다. ‘건달’과 장의사의 아들들은 주먹을 팔고, 중산층의 아들들은 대학에 간다. 선택의 외양을 띠고 있지만, 진정한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누가 모를까. 그래서 일찍이 주인공은 가출하자고 쫓아온 모범생 친구에게 니는 니처럼 살아라, 나는 내처럼 사께, 라고 말한다. 학교는 기회를 분배하는 곳이 아니다. 너는 너처럼 살고, 얘는 얘처럼 살도록 금그어주는 것, <친구>가 보여주는 학교는 그렇다. 어쩌겠는가. 곽경택 감독은 실화라고 말한다.그런 세상조차 먼저 익힌 주인공 친구는 근력으로 치자면 한
친구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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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독립영화라는 이름으로 비제도권의 영화제작 실습교육”을 해온 독립영화협의회의 독립영화 워크숍 10주년 기념행사를 하면서, 이 단체가 <씨네21>에 감사패를 주어도 좋겠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벌써 10년이 됐나.생각해보면, 감사를 해야할 쪽은 분명 ‘우리들’이다. 첫째, 한국영화의 토대를 만들고, 한국사회의 진보에 기여하는 영화의 길을 찾던 젊은이들의 노력에 대한 감사. 그리고, 영화의 당대사를 비평과 보도라는 행위로 기록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으로서의 감사. 기록자라는 직업을 가진 자들에겐, 하나의 흐름이 생성돼 벼랑과 거대한 바위에 부딪히며 급류를 이루고, 거대한 강이 되는 과정까지 지켜볼 수 있다면 그건 행운이다. 기록을 실천으로 삼는 자들에게도 마찬가지.때를 맞춘 듯, 30일부터 ‘한국 독립영화 회고전’이 열린다. 서울에서도 강남, 그 개발기의 낡은 초상이라 불러도 좋을 단편영화 <강의 남쪽>이 ‘매혹의 기억’(회고전의
독립영화, 기억의 매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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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없을지라도, 생각의 실마리는 던질 수는 있다. 일군의 무사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일본영화 두편을 보고나서 하는 얘기다. 같은 제목으로 번역해놔서 김성수 감독의 <무사>와 자꾸 혼동하게 되는 일본판 <무사>와 <올빼미의 성>이 그것이다.<무사>는 이미 소개됐다시피 가정과 개인의 삶을 희생하고 설국의 철도를 지키는 데 평생을 바친, 멸사봉공의 화신이라 부를 만한 산골역장이 등장하는 <철도원>의 후루하타 야스오 감독의 닌자영화다. 특수효과와 액션영화적인 요소들을 듬뿍 섞어 ‘현대화’하기는 했지만, 고갱이까지 바뀐 건 아니다. 주인공은 에도 막부의 군주가 호출한 그 아들을 아버지 앞까지 호위해가는 무사다. 아들이 내 친자일까 끊임없이 의심하는 군주가 먼 여행길에 장치해놓은 갖가지 난관을 뚫고 무사 일행은 달려가는데, 우리가 모두 죽더라도 왕자, 너만 살아남으면 그건 승리라고 무사는 거듭 선언한다. 그리고 영화는 그
닌자들이 던진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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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영화는 아직도 발명중입니다. 우리는 그저 시작을 목격한 것에 불과하죠.” <씨네21>에 보낸 편지에서 빔 벤더스는 말했다. “디지털영화의 도래는 유성영화의 그것에 비할 만한 이행”이라고 그는 디지털을 편들었다. 영화에 소리가 도입될 때, 무성영화가 획득한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을 슬퍼하는 소리가 있었고 드디어 영화가 현실만큼 풍부해지리라고 반기는 선언도 있었는데.민규동 감독이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촌에서 보내온 감동적인 보고서에서도 디지털은 중요한 단어다. 가볍고, 쓰기 쉬운 디지털카메라가 영화창작에 어떤 자유를 부여하는가를 디지털영화 <어둠 속의 댄서>의 감독은 이야기했고, <여고괴담2>의 감독은 공감했다. 디지털이 라스 폰 트리에게 100대의 카메라를 동시에 돌릴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면, 한국의 가난한 감독에게는 35mm 필름으로는 엄두를 낼 수 없는 영화제작을 실현시켜주었다.디지털은 또 영화유통산업에도 당연히 변화를 불러온다. 국
너의 디지털, 나의 디지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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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영화제에 처음 갔을 때, 가장 인상적인 건 포룸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관객과 감독들의 토론이 벌어지는데, 공식경쟁부문의 기자회견 못지않게, 아니 더 깊은 얘기들이 오가고는 했다. 이거 참 재미있다고, 우리도 이런 걸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고 ‘우리’ 영화평론가와 부러워했는데 그 평론가는 한국에서 국제영화제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더니 정말 그런 자리까지 장만했다. 한국의 국제영화제들은 이제 하나같이 관객과의 대화를 주요프로그램으로 잡아놓고 있다. 영화제가 토론문화가 자리잡지 못한 한국에서 꽤 의미있는 토론교육장이 된 셈이다.포룸에서 모방하지 못한 장점은 그 배후, ‘독일키네마테크의 친구들’이란 운영주체다. 포룸은 지난 1971년, 베를린영화제가 이미 경직되어서 새로운 영화를 수용못한다고 판단한 이들이 만든 대안영화제로 시작됐다. 베를린영화제는 곧 자기들의 대안을 포섭해들여 포룸에 독립된 땅을 분양해주었다. 그곳은 정치적으로건 영화적으로건 첨단이나 변방에서 떠오르는 영화들의 포럼이 되
어느 영화의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