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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과의 대화 자리에서 차이밍량 감독에게 한 관객이 이렇게 물었다. “당신의 영화는 동시대성을 추구하는 영화다. 당신에게 동시대성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게 도대체 무슨 질문인가. 앞 뒤 문장이 연결이라도 되나. 뭘 묻자는 건가. 옆에서 듣고 있다가 은근히 짜증이 나는데, 차이밍량은 의외로 아주 성심껏 꼼꼼하게 답했다.(차이밍량은 관객과의 대화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며 마음이 넓은 사람이다)공동 인터뷰 자리에서 한 기자가 베르트랑 타베르니에 감독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에게 영화란 무엇인가?”. 동석한 기자가 세명 밖에 없는터라 갑자기 등에서 식은 땀이 솟는데(성질 급한 감독들은 질문이 마음이 안들면 인터뷰 자리를 파해버린다), 타베르니에는 “영화는 나의 모든 것”이라고 명쾌하게 답했다.(타베르니에도 마음이 넓은 사람이다.)늘 상대방에게 질문을 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탓에, 나는 이런 질문을 이해한다. 아니, 나도 불쑥 한 적이 있다. 너무 포괄적이며 누구에게나 던질 수
잡스러움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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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행사가 무엇일까요, 라는 싱거운 퀴즈가 있다면, 정답은 국제영화제다. 우리의 오래된 꿈은 관객으로 영화제 구경 가는 것이다. 데일리 만드느라 새벽 두세시에 퇴근해, 아침에 눈비비며 헐레벌떡 인터뷰 장소로 가다보면, 깔깔거리며 극장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이 귀족계급처럼 보인다. 프레스카드라는 걸 차고 있지만 극장에 가는 건 귀한 경험이다. 올해 부산영화제 때는 누군가 여섯편을 봤다고 말하자, 와 그렇게 많이 봤어, 라는 탄성이 터져나왔다.짬을 내 지난 12월7일부터 열렸던 광주국제영상축제에 3일 동안 다녀왔다. 국내의 다른 국제영화제의 열기를 즐겁게 체험한 사람에게라면, 이건 영화제도 아니다. 예산이 다른 영화제의 10% 수준이고, 대학 시험기간과 겹친 일정도 불우하며, 그나마 홍보도 제대로 안 돼, 상영관들은 안쓰러울 정도로 썰렁했다. 몇편 안 되는 한국영화 상영관은 달랐다지만, 내가 간 상영관은 30명 이상 찬 적이 없었다(게다가
태도와 취향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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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영화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서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로 이야기가 옮아갔다.가장 가깝게는, 지난 추석연휴에 이미 새롭고 다양한 한국영화들이 설 땅을 잃는 상황은 예견됐었다. ‘새롭고 다양한’이라는 아주 모호한 형용사를 사용한 것은 그 영화들을 예술영화나 작가주의 영화라는 개념으로 묶어버리기에는 석연치 않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눈 있고 귀 있는 사람은 보고 들으라고 정좌한 채, 관객에게 말걸기를 거부하는 실험실의 영화들도 거기 없었다. 그렇다면 왜 이 영화들이 외면당한 것이냐를 많은 사람들이 다시 생각하게 된 것, 그것이 올 가을 한국영화가 거둔 수확인 성싶다. 배급의 문제가 새삼 재발견됐고, 이같은 영화를 옹호하는 ‘운동’이 발생했다. 인천에서 <고양이를 부탁해>를 재개봉하고, 서울 센트럴6에서 네편의 영화를 다시 틀고, 스카라극장에서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재상영하는 일들. 이 낯선 일들을 반기는 이들에게 문화적 귀족주의의 혐의는 없는지 감시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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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부산국제영화제가 17일 폐막됐다. 출범 이듬해에 이미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제’란 평가가 나라 밖에서 들여온 이 영화제는 이제 ‘세계 최대의 아시아 영화제’라는 호칭조차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부산은 우리들에겐 세계 영화의 오늘을 한자리에서 조망할 수 있는 기회를, 외국의 영화전문가들에겐 아시아 영화의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 독파할 자리를 제공하는 명실공히 ‘아시아 영화의 창’이 되었다. PPP를 통해서 아시아 주요감독들의 새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있으니, ‘미래’란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이 부산에서 한국영화가 모든 상을 휩쓸었다는 소식을 듣고, 올해 우리가 뛰어난 가작을 적잖이 얻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국제영화제인데 주최국을 너무 배려한 건 혹시 아닌지 염려됐다. 그러나 “눈에 띄는 건 한국영화뿐이었다”는 어느 심사위원의 심사 후일담을 전해듣고 노파심을 조금 덜어냈다. 어쨌든, 이 일은 관객들이 외면한 올해의 저예산 수작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될 수 있을 성 싶
부산국제영화제, 양지와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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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비틀스를 꿈꾸었지만, 이제는 초라한 밴드조차 와해돼 주인공은 고향인 온천도시 단란주점에서 생계를 잇는다. 벌거벗고 ‘광란’하던 취객은 그에게 너도 옷을 벗으라 한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주인공이 체념하듯 벗은 알몸을 기타로 가리고 연주를 계속하는 장면은 이렇게 하면서도 음악을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고등학교 시절 음악을 함께하던 친구로부터 비슷한 질문을 받는다. 생활 속으로 들어간 이 친구의 질문이, 좋아하는 음악을 하고 사니 “너 행복하냐”였다. 거기에는 어린 시절의 꿈에 대한 미련이 묻어 있기는 했다.임순례 감독은 그 질문에 대해 직접적인 답을 하지 않는다. 음악을 하고 싶다는 신세대 웨이터에게 차라리 다른 기술을 배우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떠돌이 밴드 생활이 그 역시 견디기 힘들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지만. 함께하던 밴드의 동료들은 하나둘 떠나고, 어린 시절의 음악스승도 무너져 떠나고, 연주흉내만 겨우 배
“너 행복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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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씨는 자칭 임권택 팬클럽 회장이다. 솔직히, 임권택 감독을 추켜세우는 글은 많이 봤어도, 한사람의 관객으로서, 또 비평가로서 임권택 감독에게 열광하는 사람을 나는 별로 보지 못했다. 나 또한 별로 다를 바 없었다. 별 생각없이 본 <만다라>에 머리를 얻어맞자 한시간인가 무턱대고 길거리를 쏘다닌 기억이 있고, <서편제>를 본 뒤엔 한동안 사운드트랙만 틀면 눈물 콧물이 뒤범벅이되던 경험이 있지만, 모두가 추앙하는 한국의 거장이라니, 내가 굳이 그 대열에 낄 필요는 없겠군, 하는 삐딱한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춘향뎐>이 내 태도를 바꿔놓았다. 영화 자체의 정서적 공명은 덜했을 지 몰라도, <춘향뎐>은 영화라는 매체의 한계와 싸워, 그 싸움의 기록을 영화의 문법으로 다시 끌어안으려는 놀라운 패기와 미학적 야심으로 끓어넘치는 영화였다. 첫대면에서 느낀 당혹감은 점점 경이로움으로 바뀌어갔고, 나는 이 어눌한 말솜씨의 노감독이, 골방에서 익힌 영
어떤 팬클럽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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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판매에 절대 반대하는 사람들도 중국에서 처형된 신 아무개의 일에는 분노하거나 한탄한다. 국가가 재외국민의 인권을 그토록 방치할 수 있느냐는 질책이 쏟아져 나온다. 필로폰 사용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최근의 황수정 사건을 다루는 방식을 한번 생각해볼 법 하다.브라운관의 ‘청순가련’ ‘요조숙녀’가, 더구나 한사람의 ‘공인’이 이럴 수 있느냐는 도덕적 비난 앞에 그는 노출돼 있다. 공인이라면 공직에 있는 사람, 또는 공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분명 공직에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의 텔레비전 드라마 출연은 공적인 일인가. 그의 연기활동은 그 드라마와 함께 대중예술의 영역으로 분류해놓아야 할 것이고, 연기라는 행위는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공적인 일이라 부르기는 어렵다.그러면 왜 그는 필로폰을 함께 마신 이보다 이목을 끄는가.(너무 답이 뻔해서 질문이랄 수도 없다.) 유명인이니까. 기업들이 상품을 팔기위해 그들의 유명함을 거액의 광고모델료를 내고 사듯이, 언론은 상품 그 자체
우리는 얼마나 작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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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부산 시네마테크. 기다리던 영화는 자막과 함께 시작됐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15만명의 북한군 포로가 수용되었다. 이 영화는 한국전쟁으로 반세기 동안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삶을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다.1952년의 거제도. 북으로 보낼 포로와 남에 남기 원하는 포로를 가르는 송환심사가 진행되던 중 거기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나던 때, 포로들 사이에서도 남과 북의 전쟁이 치열하게 진행되던 곳으로 가기 위해 영화는 스릴러의 호흡과 속도를 취한다. 스릴러라는 장르에 대한 매혹을 감독은 여러 차례 밝혔지만, 그때의 일에 무심한 오늘의 관객을 거제도로 유인하기 위한 작전 또는 배려처럼 보이기도 한다.이념과 인간에 환멸을 느낀 장용학의 누혜가 자살을 택한 곳도, 남도 북도 아닌 제3국을 택한 최인훈의 명준이 갇혀 있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4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고, 세기가 바뀌었다. <흑수선>의 주인공들은 우선 살아남았다.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삶’이라는 단서가 처음부
역사, 그 인력과 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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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창궐한 벽화그리기 운동의 흔적이 도시 곳곳에 남아 있다. 일종의 애교어린 관제운동의 유적일 텐데, 그 그림들을 그려넣기 한 10년 전쯤만 해도 벽화운동은 아주 불온한 행동으로 간주됐다. 그 불령미술 2세대쯤 되는, ‘가는패’라는 이름의 미술패도 시골마을의 담벼락에 벽화를 그려주러 찾아가곤 했다. 따라가본 적은 없다. 다녀온 분의 이야기를 듣고, 사진을 보았을 뿐. 20대 젊은 ‘화백’들을 초청한 분들은 마을의 농민들이었는데, 고추가 특산물인 고장이라서 그림의 소재도 고추였다. ‘민중 속으로!’를 외치던 시대의 미술정신을 소박단순한 형식에 담아낸 그림이었다. 수성페인트가 벗겨지고 색이 날아가서 수복을 해주러 다시 찾아간다는 얘기도 들었다.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그림을 그려주러 가는 화가들. 시간적 거리를 두고 그려보는 그 화면에 어쩐지 낭만적 정취가 채색된다. 이건 그때의 치열함을 배제해버린 감상인데, 하는 미안함을 밀어내고.감독은 두드러진 메시지를 배달하지 않았지만(그는
그의 손, 그의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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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가 급히 글을 보내주었다. <고양이를 부탁해>와 <나비>가 개봉 이틀만에 스크린에서 퇴장당한 요즘의 사태를 ‘좌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영화가 그동안 외부를 향해 ‘문화적 종 다양성’을 지키는 데 스크린쿼터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설득해왔는데, 내부적으로는 그 다양성을 추구할 수 없다는 그의 비판과 절망은 최근 여러 자리에서 산발적으로 들려왔었다. 이른바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이 한국영화 관객의 수를 늘려놓는 동안, 대안영화 또는 예술영화가 디디고 설 좁은 땅이 어느새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흥행폭발을 일으킨 <조폭마누라>와 <고양이를 부탁해>의 참담한 현실이 보여준 극단적 대비는 그러한 한국영화의 경향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당신들의 근심은 문화적 특권의식의 발로일 뿐이라는 역비판도 있다. 대중이 옹호하는 영화에는 그럴만한 이유와 미덕이 있는 법이니 그것을 발견하는 노
고양이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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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뉴욕통신원은 테러 이후의 뉴욕필름페스티벌 취재기(32쪽 현지보고2)를 전해왔다. 시절이 시절인지라 말미에 적어보낸 특별포럼 소식에 귀가 쏠렸다. 주제가 ‘의미있는 영화 만들기: 국가적 논쟁의 시점에서 영화의 역할’이었다는데 올리버 스톤, 뉴라인 시네마의 CEO, <소년은 울지않는다>를 만든 인디영화 제작자 등이 토론자로 나선 이 자리에 청중이 무려 1천여명 가까이 몰렸다는 것이다. 영화의 운명이 그렇게 궁금하단 말인가. 그것 참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스턴트 식품을 찾듯 인터넷을 뒤적거렸다.<알제리 전투>처럼 테러리즘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 참 쉽지는 않을 거야. 아이스너나 루퍼트 머독 같은 자들이 사상과 문화를 통제하고 있거든. 올리버 스톤은 우울하게 말했던 모양이다. 이전에도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었지만, 9월11일 이후 그나마 더 줄어들었어. 그래도 올리버 같은 작가는 변하지 않겠지. 정치적인 영화로
영화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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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가을 한국의 영화글쟁이들은 행복해야 마땅하다. 가공의 흔적조차 찾기 힘든, 그래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람처럼 생명으로 태어난 듯한 허진호의 가작 <봄날이 간다>가 곁에 있다. 이 영화는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라 선하고 지혜롭다. 저 먼 유행가의 봄날처럼 느닷없이 왔던 사랑이 다시 가는 과정을 보여주되, 집착에서 풀려나 소생하는 젊음의 생명력도 선사해준다. 바람소리, 정선아리리, 풍경소리, 아우라지의 물소리에 정결하게 귀를 기울이는 주인공들처럼 보는 이들은 사랑과 상실이 이들의 시간을 통과하는 소리, 마침내 성장의 매듭을 짓는 소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의 속에서도 그 소리가 흐르는 것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영화 속 그 사람이 아름다우면, 우리 사람도 아름답다.정재은 감독의 첫 장편 <고양이를 부탁해>도 그 옆에 있다. 서울의 변두리 인천(전국토가 서울공화국의 변두리지만)에서 스무살에 대학 대신 사회에 첫발을 디딘 여자애들이 거기 있다.
내 이름, 샌드위치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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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에는 법정 드라마가 많다. 부터 <알라바마에서 생긴 일> <허리케인 카터>까지 각종 편견에 몰려 누명쓴 사람들이 구원되는 곳으로 그려낸 영화들이 한켠에 있다. <데블스 에드버킷>처럼 정의는 돈으로 사고 파는 것이라고 냉소하기도 하고, <데드맨 워킹>처럼 사람이 사람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것이 온당한 거냐고 문제를 제기하는 쪽도 있다. 그래도, 통계를 내보지는 않았지만 어림짐작하기에 정의에 자기들의 희망을 거는 영화들이 많아 보인다. 누명쓴 사나이를 구해내는 청년 링컨의 무용담이 그 먼바다를 건너 이곳까지 전파된 걸 보면, 영화가 희망을 창작해낸 것은 아닌 게 분명하다. 이 남자가 살인을 했다는 걸 어떻게 아느냐? 달빛에 얼굴을 봤다. 이보쇼, 그날은 그믐밤이었소. 위인전 속에서 변호사 링컨의 활약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던가.적잖은 법정 드라마들은 현실에서 소재를 따왔다. 도색잡지 발행인의 권리를 보호함으로써 표현의 자유의 영토를 넓
법정 드라마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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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320호는 지면개편호다.김지운 감독과 문화평론가 정윤수씨, 김봉석 기자가 각각 ‘고별사’를 발표했기 때문에 뭔가 바뀌는가보다, 짐작하신 분들도 계실 것이다. 칼럼 ‘숏컷’을 끝내고, 김봉석 기자는 소설가 김영하씨와 격주로 ‘이창’을 통해 독자 여러분을 만나게 된다. 민동현 감독과 제도교육의 틀을 스스로 깨고 나와 이제는 영화학도가 된 김현진씨의 발랄한 비디오체험기를 부활한 ‘오! 컬트’에서 들려준다. 영화의 뿌리를 비춰보는 자리를, 흔한 말로 급격한 매체환경의 변화를 겪고 있는 지금, 조금 넓혔다. 촬영감독열전이 그것이다. 영화를 영화이게 만드는 첫번째 기본요소 영상을 포착하는 카메라의 역할을 우리는 너무 소홀히 하지 않았나하고 반성했다.세기의 카메라 그 첫번째로 코폴라와 베르톨루치, 사우라의 세계를 함께 축조해온 비토리오 스토라로로 이 순례의 문을 연다. 영화읽기의 새연재 ‘거장 예감 신세기 시네아스트’는 미래를 향해 낸 창이라고 생각해주시기 바란다. 시대정
숫자에서 사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