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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냥공장을 만들고 싶어요.” 아주 오래된 신문인터뷰에 실렸던 어느 나라 ‘퍼스트 레이디’의 말이 문득 생각났다. 누구였는지는 고사하고 얼마나 오래된 기사였는지, 어느 나라였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성냥이라는 품목만 이상하게 머릿속에 남은 걸 보면, 한국이 일정 정도 2차산업을 일궈낸 다음이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그런데 왜 그 성냥이 떠오른 걸까.<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에서 설경구씨가 친구 진희경씨가 개업한 가게에 축하선물로 들고간 팔각성냥통들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저런 선물을 갖고 가는 사람도 있네, 싶었다. 그러니 주변머리 없고 유행에 뒤진 주인공의 됨됨이를 보여주는 소품으로서 성공했구나, 그건 다음 생각이었다. 그래도 꼭 그 영화 때문만은 아닌 듯싶다.한국영화의 최신유행 탓이 더 컸다. 블록버스터, SF, 그런 표제어로 지칭되는 유행 말이다. 약속이나 한듯, 큐브릭의 미래였던 2001년 벽두 충무로에는 대형 공상과학영화 프로젝트들이 일시에 떴다
SF영화는 나의 성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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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철, 저 사람들을 1세대 영화광이라고 할 수 있어?” 마감을 끝내고 나서 두어 시간 ‘대화와 맥주’로 목을 축이고 돌아온 허문영이 던진 질문. “영화를 좋아한 사람들이 그 전에도 있기야 했죠. 그렇지만, 세대라고 부를 만큼 많은 수가 일제히 영화에 탐닉하지는 않았으니까….” “시네마테크는 없었어도, 프랑스문화원이니 독일문화원에서 고전과 걸작들을 열정적으로 찾아보며 집단적으로 환호하고 토론하고 고민하기 시작한 사람들이기도 하고.” 그러고보니, 정말 시네마테크는 없었어도 이들이 모여 자신들의 영화와 성장하던 그때부터 한국영화의 새물결은 준비되고 있었던 것 아닌가. 잡담인 척, 몇마디 주고받다가 <씨네21>은 290호 특집의 주인공들을, 아니 그들의 무리를 ‘1세대 영화광’이라 부르기로 한다. 2월 두 번째 주말, 토요일 새벽 5시.영화감독 김홍준씨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집행위원장으로 결정된 뒤, <씨네21>은 김 감독이 정성일 전주국제영화제의 초대프로그래머와
전주영화제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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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에서 프로듀서라는 존재를 처음 알린 제1세대가 이태원, 황기성씨를 꼽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에서 영화를 시작한 황기성씨는 ‘황기성 사단’이란 자신의 영화사를 만든 뒤, <안개기둥>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같은 초창기 여성주의 영화에서부터 멜로, 로맨틱 코미디 등의 장르영화들을 매만져 왔다.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대표는 이제 임권택 감독, 하면 맨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되었다. 배급과 극장업에서 먼저 자리를 잡았지만, 임권택 감독과 만난 뒤로 상업적 목표보다 작가와 동행하는 명예를 선택했다. 영화가 어느새 새로운 자본증식의 수단인 ‘콘텐츠’가 된 벤처의 시대, 문화‘산업’의 시대에 이건 참 아름답고 낭만적인 시대착오라 할 밖에.프로듀서의 전문성이 영화의 기획부터 배급까지, 모든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하다는데 생각이 미친 건 겨우 10년 남짓한 일이다. 연출과 시나리오, 촬영 등과 함께 영화교육 과정에 독립적 영
낭만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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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분명 놀라운 변화다. 2001년 탄생할 신인감독들 속에 서 있는 여성감독이 무려 7명. 1997년, 제1회 서울여성영화제가 시작될 때 78년 한국영화사 속 여성영화감독이 겨우 7명이었다. ‘현역’감독은 <낮은 목소리>의 변영주, 휴식기간이 꽤 길어진 이미례 감독 둘뿐이었다. 좀 우습지만 7인의 등장주기를 평균해서 잡자면, 11년을 좀 웃돈다.오는 봄, 격년제 서울여성영화제가 세 번째로 열린다. 그동안 임순례, 이정향, 이서군 등 세명의 장편 여성감독이 나타났고, 임순례 감독은 두 번째 작품 <와이키키 브러더스>의 후반작업을 하고 있다. 특히 임순례 감독은 여성 후배들의 교사와도 같다. 작업에 들어가기 전, 시간을 쪼개 여성영화지망생들의 교육에 열성을 보이던 그는 그 수업을 영화제작과정까지 연장한 듯하다. <와이키키 브러더스>의 스탭 중엔 젊은 여성들이 유난히 많다. 또 있다. 여성영화제의 99년 새로운 발견이던 장희선 감독의 16mm영화 <
7, 그리고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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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숙이라고 영화배우 있지요? 그 언니가 문정복이라고 유명한 배우였는데, 북으로 갔어요. 문정복에 반해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영화에 대한 사랑은 그렇게 평범하게 소년기에 시작됐다 했다. 소년 영화팬의 스타숭배는 언젠가 영화 자체에 관한 관심으로 심화됐을 것이고, 언젠가 ‘영화사료’가 될 영화자료와 ‘증언’이 될 영화인들의 인터뷰 테이프로 전환됐을 것이다. 배우 문정복 이야기는 이영일 선생이 한국영화사 강의 동안 처음으로, 또 마지막으로 제공한 ‘쉬어가는 페이지’였다고 기억한다. 그나마 그는, 학생 여러분도 영화를 보거든 개인적 감상일지라도 반드시 기억을 남겨라, 그것이 훗날 귀중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라는 말로 휴식을 마무리하고 강의를 계속했었다.최초의 한국영화통사라 할 이영일의 <한국영화전사>의 밑바탕에는 그런 소박하고, 근본적인 애정이 깔려 있었다. 해석과 재해석의 대상이 되어야 할 영화들이 사라지고, 초창기 영화의 제작, 상영, 관람의 경험이 기록으로 남아
어떤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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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인스포팅>으로 상종가를 치던 시절, 대니 보일은 켄 로치의 시대는 갔다는 식으로 말했었다. 대처 시절, 영국에서 양심의 소리 역할을 해온 그 감독에겐 자기들을 설득하거나, 사로잡을 어휘나 힘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대니 보일에게서 형식주의자, 스타일만 번쩍거리는 스타일리스트를 발견한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한 나라안에서도 지역차이를 고스란히 빈부격차로 떠안은 스코틀랜드의 젊은이들의 끝모를 방황과 추락을 재현하는 그 영화에 매력을 느낀 축에 들었다. 어디서도 출구를 찾지 못하는 이들이 출입하는 화장실의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화장실’ 따위의 낙서, 뜻없는 질주에서도 쾌락을 낚지 못한 채 황량한 하늘을 이고 이곳은 스코틀랜드(어쩔 수 없는, 저주받은 땅)라던 이들의 자조에 가끔씩 감전되곤 했다. 켄 로치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법을 저 사람이 발명해낼 수 있을까, 그런 기대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할리우드로 이적한 뒤, 완전히 착오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처를 배우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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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문화창달을 위해 한국문예진흥원을 설립한 뒤, 유신운동자금 조성방안으로 당시 박정희 정권은 문예진흥기금을 영화관과 고궁과 각종 공연장을 찾는 사람들에게서 거두기로 했다. 지난 73년부터 입장료에서 6.5%씩 떼낸 이 돈은 유신시대도 한참 지난 뒤로는 예산이 부족한 문화부나 문화체육부의 행사비로 전용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중요한 쌈짓돈으로 활용됐다.독특한 점은 이게 대부분 잘 알려졌다시피 영화관에서 걷혔다는 것. 지난해만 해도 245억원 가운데 179억원을 영화관객들이 냈다. 그 가운데 90억원이 영화쪽으로 다시 흘러왔다. 모은 돈의 절반을 다른 문화예술의 형제자매들에게 내주었으니, 영화는, 영화관객은 돈벌어 형제를 가르치던 개발기의 젊은 누이들과 닮은꼴이다. 그나마 영화쪽 환원이 이정도 된 것도 미국영화 직배로 영화토착자본이 말라가면서 시작된 일이다. 이런 사정을 언뜻 살피면, 2004년까지 걷기로 한 문예진흥기금을 2년 앞당겨 폐지하겠다는 기획예산처
문예진흥기금을 영화진흥기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