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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일의 행방불명>이란 영화의 개봉 시점이 다가오니 현재 프로페셔널 좀비로 생계를 꾸리고 있는 나 대신 나의 남자가 극장가 정찰 활동을 벌이고 돌아왔다.
그의 보고: <킹콩>하고 <왕의 남자>보다 <신성일…>이 더 재밌어. 걱정마.
그런데 솔직히 <신성일>이 <쿵푸 허슬>보단 재미없더라.
나: 알았어, 알았어. 다음 편은 그만큼 할게.
그: 그래, 그래
나: 근데 있잖아, 남들 있는 데선 그런 얘기 하지마. 사람들이 욕해.
그: 그래?
더머 앤드 더미스트 같은가? 내가 굉장히 덤하지 않았다면 독립영화라 불리는 사제(私製)영화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제영화, 사제블록버스터의 제작과정을 십분만 돌이켜봐도 내가 영화를 만드는 데는 뭔가 운명적인 사명이 있었음이 분명하고 영화가 인생보다 중요했음이 분명하다. 내가 덤(dumb)하지 않았다면.
다음은 <신성일…>의 제작사인 신재인랜드의 시이오이자 리셉
<신성일의 행방불명> 제작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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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민스키에게는 자신만의 스타일이 없다?
옛날 다큐멘터리의 거침과 우아한 흑백영화의 기품이 함께 느껴지는 <쉰들러 리스트>, 가장 행복한 꿈에 깃든 불길한 정조가 생생한 <A.I.>, 1960년대의 낙천적인 분위기가 충만한 <캐치 미 이프 유 캔>, 공항터미널이라는 모던한 공간에서 어른을 위한 동화의 느낌을 살린 <터미널>…. 야누스 카민스키의 필모그래피를 보면서 일관된 스타일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스필버그와 함께하지 않은 영화라고 해야 <제리 맥과이어> <아메리칸 퀼트> 같은 잔잔한 드라마뿐이다. 멀리는 누벨바그의 스타일을 완성한 라울 쿠타르부터 가까이는 크리스토퍼 도일까지,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촬영감독들은 어떤 식으로든 정리할 수 있는 특징을 지녔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영화를 보고 누가 찍었는지 인지할 수 있는 스타일을 갖는 것이 훌륭한 촬영감독의 조건인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카민스
촬영감독 야누스 카민스키에 관한 오해 혹은 진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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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영화를 ‘본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모든 것은 순수한 영상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촬영감독을 중심으로 영화를 보는 것이 힘든 것은 그 때문이다. 특정 영화를 설명할 때 어떤 배우가 나온다거나 어떤 감독이 연출한다는 사실이 정보로 주어지지 촬영감독의 이름은 웬만해선 언급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가 영화를 접할 때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인물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가장 먼저 잊혀진다. 그것은 비극이 아니라 그저 운명일 뿐이다. 모든 영화에서 촬영감독의 운명을 애도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약간의 주의를 기울여 영화 속에서 촬영감독의 숨결을 느끼는 것은 꽤나 색다른 경험이다. 한편의 영화에 대한 좀더 입체적인 이해는 그런 식으로도 가능하다. 촬영감독 야누스 카민스키는 <쉰들러 리스트> 이후 스티븐 스필버그의 모든 영화를 살펴볼 수 있는 강력한 키워드 중 하나다. 예술가와 장사꾼, 거장과 흥행사 사이에 존재하는 스필버그와 정확히 같은 배를 타야 했던 이
촬영감독 야누스 카민스키에 관한 오해 혹은 진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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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6일/ 아홉은 너무 많아
아홉명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장면을 촬영하는 게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 깨달아가고 있다. 문제는 이 영화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아홉명이 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보다 더 많지 않으면 다행이랄까. 게다가 내가 한번 열이 오르면 열을 식히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것도 문제다. 살을 쪄 보이게 하려고 입은 라텍스 옷 때문에 열이 잘 오르는 것 같은데, 붙인 코가 체열 때문에 흘러내릴 것 같으면 서둘러 어두운 구석으로 가서 잠시 열을 식힌다. 그럴 때는 마치 내가 열 오른 코끼리가 된 것 같다.
4월14일/ 표정이 풍부해서 곤란해
애들 아빠 역의 콜린 퍼스와 에반젤린 역의 켈리 맥도널드의 호흡은 환상적이다. 둘이 오랜 친구라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전에 진지한 역을 주로 했던 퍼스는 이번에는 코믹하고 과장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퍼스와 맥도널드는 너무나 편하게 나를 대해주기 때문에 별 노력 없이도 우리는 흥
<내니 맥피: 우리 유모는 마법사> 제작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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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와 동물이 등장하는 영화는 컨트롤하기 쉽지 않다. 그런데 거의 항상 함께 등장해야 하는 일곱 아이들과 심심찮게 튀어나오는 벌레들이 필수적이라면 촬영현장 모습은 어땠을까? 엄마를 잃은 천방지축 일곱 아이들의 삶에 등장한, 마법을 쓸 줄 아는 무서운 유모 이야기를 그린 <내니 맥피: 우리 유모는 마법사>에서 내니 맥피 역을 맡은 (그리고 시나리오를 쓴) 에마 톰슨이 쓴 일기는 정신없는 촬영현장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아역배우 캐스팅에서부터 파이 던지는 장면 촬영에 이르기까지, <내니 맥피…>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1월22일/ 아역은 장난이 아니야
아역배우 캐스팅을 시작했다. 어리고 체구가 작은, 희망에 찬 수백명의 어린이들과 놀이하듯 오디션을 본 뒤, 이제야 우리는 몇명을 선정, 카메라 앞에서 대사를 읽어보게 했다. 매력적이고 똑똑한 동시에 재미있고 현명한 아이들을 찾고 있는데, 아이들 대부분이 우리가 찾는 점들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내니 맥피: 우리 유모는 마법사> 제작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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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연습, 시트콤과 정극연기의 도전
“태규가 나를 무서워하긴 하더라. 일부러 걔만 혼내고 했던 것은 아닌데. 우리 드라마는 남녀주인공 두 사람의 드라마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각자의 스토리를 갖고 가는 드라마였다. 강수(봉태규)도 강수 나름의 스토리를 갖고 있는데 태규의 연기가 그에 비해 성급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친구가 배우로서의 자의식이 굉장히 강해서 기라성 같은 배우들 사이에서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까를 항상 의식하고 연기하는 것 같더라.” _최종수 PD·MBC 드라마국장(<한강수타령>)
첫 촬영날. 압구정동 갤러리아 백화점 앞에서 상대배우 이윤지와 대사를 주고받다 애드리브를 했다. “애드리브라기보다는 대사를 내 입에 맞게 바꿨어요.” 최종수 PD가 그를 불렀다. “태규야, 너 지금 하고 있는 게 60부작 드라마인데, 이제 1부 찍고 있으면서 나중에 드라마 내용이 어떻게 될지 다 아냐.” 배우는 모른다고 답했다. PD는 말을 이었다. “네가 지금 네 입에 맞
오기의 소년, 희귀한 배우 봉태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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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노랑머리 소년이 뾰족한 눈으로 세상을 쏘아볼 때, 많은 사람들은 길거리 캐스팅된 생짜 신인배우의 미래를 별로 궁금해하지 않았다. 가능성을 눈여겨본 사람일지라도 그 소년이 어느 날 무색무취의 단정함과 또렷한 욕망을 오가는 연기를 해보일 줄은 몰랐을 것이다(<바람난 가족>). 봉태규는 여러 오락프로그램의 인기 게스트이기도 한 가수 MC몽과 콤비를 이뤄 친근한 재치도 부렸고(<논스톱4>) 투정과 애교 섞인 순정으로 연상 여인들의 마음도 사로잡았다(<광식이 동생 광태>). 골목 어귀에서 광장 한가운데로 뛰쳐나온 아이. 배우가 가진 살얼음 같은 기운은 곧잘 비딱하고 희귀한 매력으로 탈바꿈한다. 류승범이 그랬고, 그 때문에 초기 시절 봉태규는 비교당하곤 했다. 이제 봉태규는 자기만의 캐릭터 스펙트럼을 갖고 20대 배우 자리에 서 있다. 3월 중순 개봉예정인 학원코미디물 <방과후 옥상>의 이석훈 감독은 허약하고 소심한 고교생 주인공
오기의 소년, 희귀한 배우 봉태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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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성선설이든, 성악설이든 좋다. 하지만 ‘친절한 <ME>씨’는 자신에게 쓰라린 변을 겪게 한 이에게 그에 상응하는 고통을 경험케 해주겠다는 삶을 철학을 지닌 당신들을 사랑한다. 너무너무 착한 사람은 너무너무 지루하지 않은가. 생에 첫 복수를 준비 중인 당신, 너무 떨지 마라. 괜히 ‘친절한 <ME>씨’가 아니다. 첫 복수 혹은 마지막 복수를 하려는 당신을 위해 평소에는 생각지 못했으나 유용한 고문도구가 될 수 있는 생활소품들의 목록을 마련했다. 단, 친절한 <ME>씨라도 당신 복수의 결과로 일어나는 사건·사고까지 책임져주진 않는다. 그러니 주의사항까지 꼼꼼히 읽고 행동에 옮겨라.
아, 착하게 포장된 인생을 바라는 당신이라면, 다소 소름 돋고 짜증스러워도 당신에게만 있는 착한 유전자를 충분히 활용해 무시하고 넘어가시길.
초급_ ‘손 안 대고 코풀기’ 시추에이션
참고서 목록: <나홀로 집에>, <톰과 제리>
영화에서 배우는 간편하며 잔인한 복수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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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979년 스탠 드라고티 감독의 <드라큐라 도시로 가다>는 흡혈귀 코미디로 대박을 터뜨렸다. 드라큘라 역으로 캐스팅된 조지 해밀턴이 벨라 루고시 흉내를 내며 드라큘라 백작을 코믹하게 패러디했다. 그 상황이 아닌 것은?
① 밖에서 늑대 떼가 울부짖자 드라큘라 왈, “어둠의 자식들이여…, 시끄럽다!!”
② 루마니아에서 관이 도착하지 않아 연미복에 망토 차림으로 할렘을 헤매는 드라큘라. 한 청년이 “어이, 멋쟁이 백인 아저씨 어디 가시나?” 하자 드라큘라 왈, “난 백인이 아니다. 난 루마니아인이다!”
③ 연극 분장실의 드라큘라 여자에게 “내가 그 유명한 뱀파이어다!” 하자… 여자 왈, “알았으니까 화장이나 좀 지워요. 청소도 하고.”
④ 디스코클럽에서 만난 여자를 따라 지저분한 그녀의 아파트에 간 드라큘라. 여자가 뭐 필요한 거 없냐고 묻자 드라큘라 왈, “빗자루.”
정답 ③: 1935년 벨라 루고시 주연의 <마크 오브 더 뱀파이어>에 나오는 상황이다.
퀴즈로 보는, 뱀파이어에 관한 잡식백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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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 백작으로 대변되는 옛 영화 속 뱀파이어들은 사람을 묘하게 불편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남는 건 시간뿐이라는 듯 늘 천천히 다가오며, 느릿느릿 다가오는 동안 심지어 말도 한마디 안 한다. 그저 ‘있다는 것’으로, 그야말로 존재 자체로, 모든 것을 해결하겠다는 듯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뱀파이어들도 변했다. 저마다의 성격을 가진 갖가지 뱀파이어들이 나타났으며, 이들은 주장하고, 수다 떨고, 사람을 웃기기도 하고, 스스로 웃기도 한다. 거대한 무리를 이뤄 인간세상에 버젓이 살고 있는가 하면, 현란한 액션으로 사람을 매료시키고, 심지어 서울 한복판에서 비둘기를 사냥하기도 한다.
마침 모기에 물려 흡혈귀가 됐다는 코믹한 형사 뱀파이어가 개봉을 기다리고 있기에, 뱀파이어에 관한 잡지식들을 모아 퀴즈로 만들어보았다. 그야말로 잡식의 응결체이니, 평소 관심있으신 이들은 슬슬 풀어보고, 평소 관심없으신 이라면 슬슬 읽어보시라. 혹여 80점 이상 얻었다면 당신은 뱀파이어 전문가로
퀴즈로 보는, 뱀파이어에 관한 잡식백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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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원 대상
다큐멘터리
<신은 우리를 싫증내기 시작했다>(God Grew Tired of Us)(크리스토퍼 퀸)
극영화
<퀸시아네라>(Quinceanera)(워시 웨스트모어랜드, 리처드 글레이저)
월드시네마 심사위원상
다큐멘터리
<구멍 속에서>(In the Pit)(주앙 카를로스 룰포)
극영화
<13>(13 Tzameti)(젤라 바블루아니)
관객상
다큐멘터리
<신은 우리를 싫증내기 시작했다>(God Grew Tired of Us)(크리스토퍼 퀸)
극영화
<퀸시아네라>(Quinceanere)(워시 웨스트모어랜드, 리처드 글레이저)
월드시네마 관객상
다큐멘터리
<드 나디>(De Nadie)(틴 디르다말)
극영화
<넘버2>(No.2)(토아 프레이저)
감독상
다큐멘터리
제임스 롱리 <파편 속의 이라크>(IRAQ in Fragments)
극영화
디토 몬티엘 <너의
2006 선댄스 영화제 [3] - 수상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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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과 저곳, 경계 위의 영화들
“이 영화는 새로운 미국 독립영화의 한 경향을 보여준다. 서로 다른 세계가 만나 새로운 미국을 만드는 과정. 이것은 올해 선댄스 영화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프로그래머 캐롤라인 리브래스코가 일반 상영관에서 관객에게 <인 비트윈 데이즈>(In Between Days)를 소개한 말이다. 올해의 선댄스는 다양한 섹션에 걸친 열편의 영화를 통해 나고 자란 땅과 익숙한 문화를 등지고 새로운 땅에서 삶을 개척하려는 이들의 여러 얼굴을 조망했다. 미국영화들이 어깨를 겨루는 극영화 경쟁부문에는 미국으로 이민온 한국 소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인 비트윈 데이즈>를 포함하여 자국 언어로 이루어진 두편의 영화가 포진해 있다. 이중 멕시코계 이민자 가족을 배경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 <퀸시아네라>는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인 비트윈 데이즈>와 함께, 재일교포 부녀의 대립과 화해를 그린 다큐멘터리 <안녕
2006 선댄스 영화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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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경험한 해외영화제는 작년 베니스 국제영화제였다. 영화제의 주인공은 레드카펫 위의 거장과 스타였고, 언론과 평론가들은 이들의 권위를 재확인했다. 그것은 발견이나 즐김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반년 뒤, 선댄스 영화제를 찾았다. 지난 1월19일부터 26일까지, 솔트레이크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마을 파크시티. 영화를 만든 이들과 관객이 주인이 되는 그곳은 축제의 장이었다. 관객은 어떤 영화를 보거나 보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 곳곳에서 토론은 벌였다. 황혼이 깃들면 관객과 감독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파티가 줄을 이었다. 그곳에서 ‘저널리스트’는 별다른 소용이 없어 보였다. 공항에서 숙소로 향하는 택시 안. 출품영화의 스탭이거나, 배급업자이거나, 필름메이커를 대상으로 포럼을 진행하는 후반작업 회사의 직원 틈에 합승한 이국 땅의 기자는 왠지 모르게 외로웠다. 이를 부추기는 것은 선댄스가 엄연한 미국 영화제라는 사실. 월드시네마 경쟁부문이 지난해에 신설되었다지만, 선댄스의 주력 부문은
2006 선댄스 영화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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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낳은 비디오아트의 창시자 백남준이 지난 1월29일(한국시각 1월30일) 미국 마이애미에서 숨을 거뒀다. 예술가로서는 한창 나이라 할 수 있는 일흔네살에 ‘아리랑’과 ‘엄마’를 흥얼거리며 먼 이국에서 눈을 감았다. 십대 후반에 조국을 떠나 일본과 독일과 미국을 떠돌며 지구적 예술가(글로벌 아티스트)로 살았던 그는 말년에 고향을 그리워하며 한국에 돌아가기를 원했다. 경기도 용인에 자신을 위해 세워질 백남준 미술관이 일종의 종착역이었으나 아쉽게도 개관이 늦어지고 말았다.
백남준은 전세계에 통하는 브랜드를 지닌 거의 유일한 한국 출신 예술가였다. ‘비디오 예술의 선구자’, ‘전위 음악가’, ‘행위 예술가’라는 소개 뒤에 따라붙던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라는 과격한 별명은 그에겐 훈장이자 별점이었다. 서구예술의 우월주의에 맞서 뚝심으로 ‘백남준표 예술’을 밀고 나간 그는 아시아 또는 한국 문화의 가능성을 낙관하고 있었다. 그가 1995년에 쓴 다음 글은 이런 믿음을 잘 보여준
[추모기획] 비디오아트의 창시자 백남준을 추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