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드보이> 등이 떠오르는 폭력성
유럽적인 분위기로 만든 할리우드 장르영화를 어떤 예술적 눈속임수에 불과하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사실 할리우드는 영화의 공장으로 팔려온 유럽 감독들의 위대한 전통 위에서 세워진 세계다. F. W. 무르나우와 프리츠 랑, 장 르누아르, 그리고 앨프리드 히치콕. 동시에 할리우드 장르의 전통은 유럽으로 건너가서 누벨바그와 장 피에르 멜빌을 창조했다. 미국과 유럽 사이에는 언제나 일종의 영화적 근친혼이 존재했다. 니콜라스 윈딩 레픈은 자신의 영화가 두 대륙의 혼합이라고 스스로 일컫는다. “나는 유러피언이다. 아주 오래된 유럽 동화의 공식을 이용해서 미국의 현대적 신화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 그렇다면 당연히 스토리텔링과 스타일 역시 그 모든 것의 혼합이 될 수밖에 없다.” <드라이브>를 보고 있노라면 박찬욱과 김지운의 할리우드 진출작들이 어떤 결과물을 내놓게 될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도 있다. 박찬욱은 자신만의 감각을 할리우드의 오랜 호
하이브리드 레이스가 시작됐다 (2)
-
올해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인 <드라이브>는 그냥 카체이스 액션영화가 아니다. 간단하게 설명해볼까? <사무라이>의 알랭 들롱과 <블리트>의 스티브 매퀸을 반쯤 섞어놓은 듯한 남자가 반젤리스풍의 음악이 흐르는 <블레이드 러너> 스타일의 LA에서 <펄프 픽션>의 악당들에 <올드보이>식의 광폭한 폭력으로 맞서는 유럽 예술영화와 80년대 비디오용 할리우드 액션영화의 사생아. 그게 말이 되냐고?
신작 영화의 반응을 가장 노골적으로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는 시사회가 끝난 직후의 화장실이다. 묵은 배설의 환희 때문인지 사람들의 입에서는 영화를 다시 곱씹어 음미하기 전에야 튀어나올 수 있을 법한 직설적인 평가가 쏟아져나온다. <드라이브>의 일반 시사회가 끝난 화장실에서는 두 남자가 변기 앞에서 작은 설전을 펼치고 있었다. 한 남자가 말했다. “개폼이네.” 남자의 친구가 대답했다. “개폼이긴 한데 그냥 개폼은 아니
하이브리드 레이스가 시작됐다 (1)
-
<길티 오브 로맨스>와 <두더지> 이후의 소노 시온이 궁금하다면 차기작을 기다리면 된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의 차기작이 될지도 모르는 영어영화 <로드 오브 카오스>는 사실 <두더지> 이전에 만들 예정이었던 작품이다(소노 시온의 완벽하게 새로운 행보를 암시하는 영화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소리다). <로드 오브 카오스>는 실제 살인사건을 다룬 동명의 논픽션(사진)을 각색하는 영화다. 1993년, 노르웨이의 1인 블랙메탈밴드 ‘버줌’의 바르그 비켄네스가 또 다른 블랙메탈 뮤지션을 23차례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경찰은 바르그 비켄네스가 90년대 내내 자행된 교회 방화사건의 주동자라는 사실까지 알아냈고, 결국 바르그는 노르웨이 최고형인 21년형을 받았다. 소노 시온이 이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당연한 일이다. 바르그 비켄네스 사건은 블랙메탈 사탄주의라는 일종의 사이비 종교 때문에 발생했고, 가해자와 희생자
소노 시온의 차기작 <로드 오브 카오스>(Lords of Chaos)
-
일본영화의 변태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미이케 다카시는 지루해졌고 구로사와 기요시는 휴식 중이며 이시이 다카시는 지나치게 나이들었다. 지금 일본 영화계는 내수용 블록버스터와 나긋나긋한 슬로 무비만이 존재하는 듯하다. 그러나 변태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걸 확인하고 싶다면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사랑의 죄>라는 제목으로 공개된 소노 시온 감독의 <길티 오브 로맨스: 욕정의 미스터리>(11월17일 개봉)를 보아야 한다. 지금 일본의 가장 근사한 변태 소노 시온은 일본 영화계의 미래를 짊어진 재능 중 하나로 진화하고 있다. 대체 어떻게?
소노 시온은 변태다. 잠깐. 사실 일본섬에서 ‘변태 감독’이라는 칭호를 하사받을 예술가가 어디 한두명이겠는가. 1960년대 핑크영화(혹은 로망 포르노) 시대 이후, 일본에서는 와카마쓰 고지와 오시마 나기사 같은 훌륭한 예술적 변태들이 쏟아져나왔다. 거기서 끝이었던가. 핑크영화의 유구한 전통은 이후 구로사와 기요시, 미이케 다
사랑받고 싶어 미움받고 싶어
-
-
무치(無恥).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의 이 단어는 조선시대 왕의 권력을 상징할 때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속뜻을 품는다. 아마도 후궁은 왕의 무치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제도이자 캐릭터일 것이다. 아내 외의 여자에 대한 왕의 욕정은 감출 필요가 없는 승은이다. 하지만 후궁에게도 왕의 간택이 은혜였을까? <혈의 누> <가을로> 등을 연출한 김대승 감독의 신작 <후궁: 제왕의 첩>(이하 <후궁>)은 뜻하지 않게 후궁이 되어 궁궐로 들어간 한 여자의 사랑 이야기다. 왕만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후궁이 왕 외의 다른 남자에게 정을 품었으니, 그 사랑이 순탄할 리 없다. 무엇보다 이미 수많은 사극 드라마를 통해 알고 있듯이, ‘궁’자체가 격렬한 운명의 공간이다.
조선이 배경이지만 <후궁>은 자막으로 명시할 법한 뚜렷한 시기를 설정하지 않는다. 대략 조선 초기, 개국공신들이 왕에게 권력의 지분을 요구하며 권력을 향한 암투를 벌이던
탐욕의 시대, 권력을 향해 쏴라
-
<두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은 ‘퀴어 로맨스’도 ‘해피엔딩’이 가능함을 보여주려는 코미디다. 게이인 민수(김동윤)와 레즈비언인 효진(류현경)은 커밍아웃 대신 위장결혼을 선택하는데, 신혼 첫날부터 별거하는 이 별난 커플의 동거는 그들의 진심을 모르는 가족과 동료들 때문에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다.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 <의뢰인>의 제작자이기도 한 김조광수 감독의 장편 데뷔작. 이미 단편 <소년, 소년을 만나다> <친구 사이?> <사랑은 100°C> 등을 연출하면서 ‘밝은’ 퀴어영화를 모색해왔던 김조광수 감독은 이번엔 성소수자들에 대한 편견을 깨기 위해 웃음의 장치들을 적극적으로 가져왔다. 11월11일부터 촬영에 들어가 크리스마스 전까지 촬영을 끝낼 그는 이미 두 번째 장편 <약속>의 시나리오 작업도 시작한 상태였다.
-실제 인물들을 모델 삼아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들었다.
=게이, 레즈비언
퀴어도 해피엔딩
-
“철저한 상업영화를 만들려 한다.” 박찬경 감독의 다짐이 낯설다. 그의 전작들이 머릿속에서 들어차 쉽사리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박찬욱 감독과 공동 연출한 <파란만장>은 아이폰 촬영이라는 형식적 실험을 한 영화이고, 중편 <신도안>은 무속신앙과 한국 근대사를 접목시킨 실험적 다큐멘터리였다. 첫 장편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안양에>는 다큐멘터리와 픽션, 과거와 현재가 이종 교배된 새로운 형식의 작품이었다. 그의 발언은, 적어도 그를 대중영화에서 벗어나 보이게 했던 이 모든 시도에 대한 ‘No’를 뜻한다. “원래 미술작업을 하다 영화 연출로 전향한 이유가 좀더 많은 대중과 소통을 원해서였다.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상업영화는 내 작품의 지향점이다.”
그가 던진 승부수는 ‘공포’다. <신은 번개처럼 내린다>(가제)는 진짜 무서운 게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한 카드다. 신-신도시에 사는 하급 여경찰 연희. 잇단 투신자살 사건을 목격하게 된 그녀는 물
이번엔 철저하게 상업영화에요
-
류승완 감독에게 베를린을 무대로 남북한 요원들의 첩보액션을 그릴 <베를린 파일>에 관한 얘기를 듣고 있자니, 그가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묘하게 존 르 카레의 첩보소설들이 떠올랐다. 유럽에서 위장요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아시아인, 아랍인, 아프리카인 등 온갖 인종의 난민들이 범람하는 독일 함부르크 기차역이 겹쳐졌고(<원티드 맨>), 독일에서의 첩보활동 중에 요원들을 전부 잃고 이중스파이 같은 잠입 명령을 수행하며 정부와 개인이라는 경계에서 갈등하는 알렉 리머스의 모습도 스쳐 지나갔다(<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어쨌건 북한이 남한보다 추울 테니 당연히 그들을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존 르 카레는 세월이 흘러 고백하길, 실제 베를린에 파견되어 영국의 스파이로 활동했었으며 당시의 경험은 작품 집필에 큰 영감을 줬다고 한다.
류승완 감독은 <부당거래>를 끝내자마자 <베를린 파
남북 요원들의 다찌마와리
-
“도대체 이 작가, 어쩌려고 이걸 쓴 건가 싶더라.” 감독 박정우가 작가 박정우의 시나리오를 읽어보고 든 생각이란다. 변종 기생충 연가시의 출현, 사망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 재난 사태. <연가시>는 이 아비규환 속에 가족을 살리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한 남자(김명민)의 이야기다. 바이러스의 출몰로 인한 재난영화, 충무로엔 분명 없던 얘기가 온다.
-<연가시>는 어떻게 시작된 이야기인가.
=3년 전쯤 KBS에서 아마추어 시나리오작가들의 작품을 선정하는 프로그램에 심사위원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그때 참가한 출연자에게 연가시를 소재로 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템이 좋아 책으로 발전시켜봤지만 그게 전부였다. 최근 연출을 오래 쉬다보니 쫓기는 마음이 생기더라. 내 아이에게도 아버지의 대표작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때 이 작품이 떠오르더라.
-<바람의 전설>과 <쏜다>가 장르는 다르나 모두 일탈에 대한 주제의식으로 연결된다면 이번 작품은
<28주 후> 그러나 한국형으로
-
“<다크 나이트>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더니 투자자들이 웃더라.” 인터뷰 말미, 정병길 감독은 농담처럼 이 말을 불쑥 건넸다. 하지만 인터뷰를 끝내고 내내 이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비록 영화의 톤과 제작 규모는 차이가 있겠지만 정병길 감독의 ‘다크 나이트’ 발언은 <내가 살인범이다>의 밑그림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힌트다. 그동안 한국 범죄영화에서 주인공은 어두운 뒷골목을 거닐며 범죄자를 쫓는 흑기사들이었다. <내가 살인범이다>는 다르다. <다크 나이트>의 또 다른 주인공 조커처럼 연쇄살인범 이두석(박시후)은 자신의 살인을 만방에 공표하고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기다린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공소시효가 만료된 뒤 세상에 나타나 살인 참회록 <내가 살인범이다>를 출간하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발칵 뒤집히지만 이두석의 완벽한 외모와 진심으로 죄를 회개하는 듯한 태도에 현혹되는 사람들도 생긴다. 공소시효는 지났고, 살인범은
공소시효 만료 그리고 살인 고백
-
지난 9월1일 크랭크인한 <스토커>는 최근 촬영을 끝마치고 후반작업에 돌입했다. <스토커>는 지난 10월17일 미국 뉴멕시코에서 크랭크인한 김지운 감독, 아놀드 슈워제네거 주연의 <라스트 스탠드>와 더불어 한국 감독들의 본격적인 할리우드 진출작이라 할 수 있다. 두 영화의 개성은 사뭇 다르다. <라스트 스탠드>가 스피디한 장르적 재미로 충만한 액션 스릴러라면, 현지에서 ‘호러 스릴러’ 혹은 ‘다크 스릴러’로 분류되는 <스토커>는 보다 박찬욱 감독 개인의 취향이 담길 것으로 보인다.
올해 초 서울아트시네마의 ‘아트시네마의 친구들 영화제’에 참석한 김지운 감독은 <라스트 스탠드>에 대한 질문에 답하며 “내 영화가 할리우드에서 직접 제안한 기성품 같은 영화라면 박찬욱 감독님의 <스토커>는 자신의 색깔이 온전하게 담길 매력적인 작품”이라며 “그런데 박 감독님이 시간도 부족하고 제작비가 많지 않다고 투덜댄다”는 농
올드보이와 석호필이 만났을 때
-
<건축학개론>은 <불신지옥>의 이용주 감독이 데뷔작으로 준비했던 시나리오다. 서른다섯살의 건축가인 남자에게 어느 날 첫사랑의 여자가 찾아와 집을 고쳐달라는 부탁을 하고, 남자는 그녀의 집을 지으며 스무살, 그때의 사랑을 추억한다. 엄태웅과 한가인이 현재의 인물들을, 이제훈과 미쓰에이의 수지가 과거의 인물을 연기한다. “서른살 때 쓰면서 20대를 정리하려 했다”는 이용주 감독은 “결국 40대인 지금 30대를 정리하는 기분이 됐다”고 말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9년 전에 쓴 시나리오다. 쓰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나.
=멜로영화를 좋아했었다. 구체적인 아이디어로 말한다면 서른이었던 당시 10년 전의 내가 가진 기억이었던 것 같다. 사실 그때는 멜로라는 장르보다도 건축과 관계된 영화를 해보면 어떨까 생각했었다. 집을 짓는 과정이 멜로와 접합될 수 있는 게 많다. 건축가는 건축주를 이해해야만 좋은 집이 나온다. 그와 친해지면서 그가 처한 상황과 취향을 소통해야 하는데,
집 짓는 과정과 사랑하는 과정은 닮았다
-
동네 이름부터 물었다. 시실리, 삼매리에 이어 이번에는 어디? “울진리다. 경상도와 전라도 중간 즈음, 바다를 낀 어촌이라고 보면 된다.” <시실리 2km> <차우>를 연출한 신정원 감독이 신작 <점쟁이들>을 통해 상상한 새로운 마을은 전작의 동네보다 더 심각한 곳이다. 시실리에 다소 무서운 사람들과 어리바리한 귀신이 살았고, 삼매리에 포악한 괴물돼지가 있었다면 울진리는 몇 십년 묵은 악령이 지배하는 곳이다. 의문의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아 개발도 늦춰진 이곳에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는 다종다양의 점쟁이들이 한판 굿을 벌이러 모인다. 물론 이 점쟁이들은 그냥 점쟁이들이 아니다.
전작들과 달리 <점쟁이들>은 신정원 감독이 처음부터 상상한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 그는 ‘점’에 대해 오히려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누가 내 운명을 예측해준다는 게 불쾌하더라. 아내는 이사를 갈 때도 어느 쪽 방향의 집이 좋다, 나쁘다, 이런 걸 알아오는데,
홈즈도 울고갈 능력자들
-
봉준호 감독은 인터뷰를 끝내고 지난 10월 중순 체코로 떠났다. ‘봉준호의 신작’이라는 거대한 기대와 맞물려 막연히 ‘2011년 크랭크인 목표’ 정도로만 알려져 있던 <설국열차>가 드디어 본격적인 프로덕션 준비에 들어간 것이다. 프랑스 만화 원작의 <설국열차>는 기상이변으로 지구에 혹독한 추위가 찾아와 많은 사람들이 죽음으로 내몰리게 되는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물과 식량을 갖춘 설국열차에 올라 이동을 시작하는데, 자연스레 생존에 필요한 것들이 고갈되면서 열차는 무법천지로 변해간다. 여기서 기차는 마치 노아의 방주 같은 존재다. 박찬욱 감독이 제작자로도 참여하는 <설국열차>는 예산이 약 400억원 규모로 알려져 있으며 80% 이상 영어권 배우가 출연하여 영어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다.
봉준호 감독이 <설국열차>를 처음 접한 것은 2005년이었다. 한달에 한번씩 만화 쇼핑을 하던 그는 평소처럼 신간들을 살펴봤고 우연히
폭주하는 미스터리 트레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