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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조상기가 누군지 아세요? 네이버에 물어보니 <미지왕>이라는 옛 영화가 튀어나온다. 파격적인 정사 장면으로 시작하여 기괴한 B급 유머를 늘어놓는 1996년 컬트코미디가 그의 데뷔작이었다. 사연인즉 이러하다.
당시 미술학도였던 조상기는 <미지왕> 오디션 공고를 본다. 결혼식에 모인 하객을 그린 듯한 일러스트에는 괴상한 인물들이 잔뜩 모여 있었고, 그 위로 ‘개성있는 분들을 찾습니다’라는 문구가 씌어 있었다. 졸업전은 끝났고 군대는 안 갔고 심란하기도 한 차에 추억이나 만들어보자 싶어 문을 두드린다. 오디션으로 뽑힌 27명의 신인 중에 조상기는 주연 ‘왕창한’으로 캐스팅된다.
<미지왕>을 찍으면서 그는 영화에 푹 빠져버렸다. 배고픔도 시공간도 다 잊고, 여러 사람이 한마음로 작업하는 게 너무 좋았다고 했다. 그렇게 <미지왕>은 연기자로서의 길을 열어주었지만, 그 길 참 혹독했다. “다시 영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 너무나도 많이 했었어요.
울고 있어도 웃음이 난다, <구세주>의 조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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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카우보이 영화나 만들걸”
“프랑스 기자들은 질문이라기보다는 답변이 애초에 불가능하도록 과장된 수사학으로 가득한 논평만 던진다. 일본 기자들은 순진하다. 영국 기자들은 지적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적이라는 사실에 너무도 심취한 나머지 자신들의 지성을 망치고 만다. 동유럽 기자들은 철학적이거나 정말 멍청하다. 남미 기자들은 동유럽 기자들과 같다. 독일 기자들은 무개성하다. 미국 기자들은 게으르다. 특별히 나쁜 건 아니지만 정말 게으르다.” 루카스 무디손 감독은 신작 <컨테이너>의 보도자료에 세상의 기자들에 대한 쓴소리를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부끄럽지만 사실일는지도 모른다. 사실 국제영화제의 기자회견장은 1시간여 동안 겨우 대여섯개의 좋은 질문과 답변을 건질 수 있을 뿐, 게스트와 동료 기자들의 어안이 벙벙하게 하는 질문들이 쉴새없이 터져나온다(시간이 한정되어 있는 관계로 기회를 놓친 동료 기자들의 원망 섞인 야유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우문현답들도 분명히
제56회 베를린영화제 중간결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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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슈얼리티와 정치: 인간의 은밀한 상처를 들여다보다
인간의 은밀한 상처를 들여다보며 논의를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시키는 영화들의 공통점은 보는 것이 한없이 불편하다는 사실이다. 감독은 캐릭터의 폐부를 도려내어 관객에게 던지고, 관객은 그것을 받아서 삼켜야만 한다. 올해 베를린은 다만 거대한 정치적 현안을 다루는 작품들 외에 개인적인 고뇌로부터 정치적 발언을 끄집어내는 작품들이 많았다. 특히 덴마크영화 <엔 소프>는 소프 오페라 방식을 차용한 장르적 실험을 바탕으로 윗집 여자와 아래층 트랜스젠더의 기묘한 우정을 그려냈다. 데뷔감독인 페킬레 피셔 크리스텐센은 마치 도그마영화처럼 찍은 이 작품을 통해 섹슈얼리티의 모호함이라는 주제를 잘 버무려내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두 작품은 완벽하게 상반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편은 한 인간으로서 연쇄강간범의 초상을 그리는 작품이고, 다른 한편은 연쇄강간의 씨앗을 키우는 어머니의 가슴저린 고백이다. 하지만 두 영화 모두 인간에 대한 속죄와
제56회 베를린영화제 중간결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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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세상을 들여다보는 창
“현재의 온도를 반영하지 않는 것은 없다. 우리가 생각하고 만드는 것은 저절로 영화속에 반영된다. 어떤 예술이건간에 지금 세상의 감각과 온기를 그대로 지니게 된다. 우리 모두는 세상에 대해 책임감이 있다. 모든 영화는 정치적이다.” 올해 베를린 영화제는 기자회견장에서 갈채를 받아낸 로버트 알트먼의 잠언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듯 하다. 심지어 <버라이어티>로부터 <S 포 쏘리>(S for Sorry)라는 야유를 받는 등 악평에 시달린 <V 포 벤데타>마저도 어떤 면에서는 ‘급진적인 블록버스터’라고 일컬을 수 있을만한 작품이었다. 물론 이 영화를 초청한 집행위의 마음 한구석에는 두가지 생각이 있었을 테지만. 첫째, 나탈리 포트먼을 레드 카펫에 세우고 말겠다는 집념. 둘째, 지하철을 이용해 런던 국회의사당을 폭파시키는 해피엔딩의 블록버스터라면 영화의 질에 관계없이 욕도 덜 듣고 영화제의 체면치례도 할 것이라는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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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회 베를린영화제 중간결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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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화사해진 베를린의 날씨는 봄이 슬금슬금 기어오고 있다는 예감을 하게 만든다. 강 위를 동동 떠다니던 얼음은 녹은 지 오래이며, 관객은 우중충한 겨울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던 베를린에서 마침내 태양빛을 가진 축제를 즐기기 시작했다. 제56회 베를린국제영화제가 어느덧 중반 레이스에 접어들었다. 영화제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올해 베를린은 개막전의 예상처럼 정치영화들의 독보적인 행보가 계속되고 있으며, 화제작도 이어지고 있다. 베를린영화제의 중간 결과를 점검해보고, 화제작들을 세개의 경향(정치, 섹슈얼리티의 정치, 상상력과 실험)으로 나누어 집중적으로 소개했다.
베를린의 한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정치는 삶이다. 내가 베를린에 있는 이유는 이것이 정치적인 영화제이기 때문”이라는 심사위원장 샬롯 램플링의 선언과 함께 시작한 베를린국제영화제의 기운이 슬슬 끓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세상도 함께 끓어오르고 있다. 덴마크의 마호메트 풍자만
제56회 베를린영화제 중간결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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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영화라면 빼놓지 않고 봐왔던 사람, 특히 ‘건담’ 시리즈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건담~ 건담~ 우주의 보라매~’라는 노래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만화영화 주제가의 대부, 마상원 작곡이 작곡하고 김국환이 부른 노래가 충격적이긴 했지만, MBC에서 10여 년 전 어린이날 특집으로 방영한 <기동전사 건담 0083>(이하 0083)은 국내 방송 사상 최초로 안방극장에서 볼 수 있었던 ‘건담’으로서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이다.
사실 <0083>(1990)은 역사적인 ‘퍼스트 건담’(<기동전사 건담>(1979))과 그 후속작인 <기동전사 Z건담>(1985) 사이의 내용을 담은 OVA 시리즈로서, 건담의 창조자인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 등 오리지널 스탭들이 빠진 대신 건담 마니아들로 구성된 신진 스탭들이 당시 제작을 맡았던 작품이다. 비록 오리지널 시리즈 이상의 독창성을 갖추진 못했으나, <카우보이 비밥&g
<기동전사 건담 0083 5.1ch 박스> 리마스터링의 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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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적 글쓰기에는 분명한 매뉴얼이 있다. 기획안을 작성하는 법 혹은 논문을 쓰는 법에 대해서라면 주변 사람의 가르침이나 관련 서적 한권만 읽어도 요령을 깨칠 수 있다. 실용적 글쓰기를 위해서는 머릿속에 언뜻 떠올랐다가 사라지기 일쑤인 영감을 기다리는 것보다 엑셀이나 파워포인트를 잘 쓰는 게 훨씬 도움이 된다. 창조적인 글쓰기는 어떨까. 불행히도 열 사람에게 물어보면 열 사람 다 다른 말을 하고, 자기 안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면 요령을 알아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탁석산의 글짓는 도서관>은 황석영이 고등학생일 때 <입석부근>으로 <사상계>에서 신인문학상을 받은 예를 들며 대가의 경우는 처음부터 남다르다고 일침을 놓는다. 하지만 창조적 글쓰기를 하는 모든 사람이 황석영이나 셰익스피어를 꿈꾸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은 이야기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공감하기 위해 서투르지만 진심어린 문장을 하나씩 써가는 사람들을 위한 가볍고 즐거운 가이드다. 창조적 글쓰
귀 얇은 이모양의 매뉴얼대로 소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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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루이스 칸은 “도시는 소년이 일생 동안 거닐면서 무엇을 하면 좋을지 교시를 찾는 곳이다”라고 말했다. 건축가 황두진에게 도시는 교시를 찾는 장소이며, 나아가 교시 자체다. 서울이 그의 도시가 된 것은 우연이지만 황두진은 그 우연을 전력을 다해 받아들인다. 건축과 글쓰기, 그의 집 거실에서 열리는 대화의 장(場) ‘영추포럼’이 황두진이 도시와 대화하는 몇 가지 방법이다.
황두진은 서울 성동구 행당동에서 태어나 성북구 정릉동과 과천을 거쳐 지금은 경복궁 영추문이 건너다보이는 종로구 통의동에 사무실을 겸한 집을 마련해 살고 있다. 재미 건축가 김태수 문하에서 실무를 익혔고, 2000년 황두진 건축사무소를 차렸다. “주택, 기업 사옥, 병원 등 중소 규모의 설계 건물을 수준 높게 설계하는 것에 주력해왔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황두진 건축사무소의 대표작 중에는 서교동 해냄출판사 사옥, 통의동 열린책들 사옥, 재동 ‘나무와 벽돌’, 가회동 한옥 개축 프로젝트 등이 있다. 나는 황두진이
도시의 행간을 읽는 건축가 황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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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줍음을 많이 타는 오달수는 자주 얼굴이 빨개진다. 터울이 크게 지는 큰형과 누나 두명 아래에서 막내로 자란 그는 거칠고 난폭한 영화 속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힘든 사람이다. 동생들을 위해 칼국수를 끓이는 <마파도> 초반의 신 사장이나 다정하고 여성적인 <친절한 금자씨>의 제과점 사장 장씨가 현실의 오달수와 가장 잘 어울리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올드보이>의 사설감옥 주인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한 오달수는 사채업자나 무기밀매상, 도굴꾼 등을 주로 거쳐왔고, 찬찬히 들여다볼 새도 없이 금세 영화에서 사라지곤 했다. 다만 그 순간이 매우 강렬했기에 몇년 사이 수많은 이들이 그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음란서생>은 여러 가지 점에서 지금껏 보지 못했던 오달수를 발견할 수 있는 영화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 오달수가 연기한 음란소설 출판업자 황가는 의리있고 귀여우며 영화 내내 등장한다. 욕설과 주먹으로 저자를 주름잡는 깡패가 아
<음란서생>의 출판업자 황가 역 오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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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수 감독의 신작 <달려라 장미>가 드디어 개봉한다. 지난해부터 영화제를 떠돌며 간간이 소식을 전하던 <달려라 장미>는 오랜 기다림 끝에 일반 관객들과 만나게 됐다. 일단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욕망>처럼 무거운 주제로 일관하던 김 감독이 코미디영화를 만든 점이 이채롭다. 그럼에도 <달려라 장미>는 그의 데뷔작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와 많이 닮았다. 이틀이라는 영화적 시간이나 과거를 되돌아보는 회환을 보여주는 감정의 진폭에서 두 작품은 매우 비슷한 얼굴을 드러낸다. 다만 <달려라 장미>는 김 감독이 살아온 지난 10년의 삶의 더께가 묻어나 <시간의 오래 지속된다>의 모더니즘에 리얼리즘이 더해진 모습이다. 유머와 상처가 공존하는 <달려라 장미>를 김 감독의 음성으로 들여다본다.
-<달려라 장미>는 개봉이 많이 늦어졌다. 배급과 관련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텐데…
<달려라 장미>의 김응수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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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과 전쟁이라는 시대를 배경 삼아 모더니티의 황폐한 자화상을 그려낸 장르인 누아르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아직도 유효하다. 많은 감독들은 영화적 영감으로서의 고전 누아르를 부정하지 않으며, 영화 포스터에 툭하면 등장하는 '누아르'라는 관용구도 그 단어가 품고 있는 상업적 효용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하지만 이런 범람 앞에서 하드고어 누아르 팬들은 오히려 야릇한 소외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아르라는 단어만큼 원의미에서 벗어나 변주되고 왜곡되고 자의적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누아르에 대한 오해의 배경에는 아마도 단어의 대중성만큼 실제 작품을 접할 기회를 갖지 못할 수밖에 없었던 소비구조에 기인한 바가 클 텐데, 여기에는 마니아 위주로 형성되어 온 시장구조와 B급이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상업적 가능성을 간과하였던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무관심이 큰 몫을 하기도 했다. 할리우드의 스튜디오 중 누아르에 대한 판권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곳은 워너, 유니버설,
[해외 타이틀] 고전 누아르의 향기, <폭스 필름 누아르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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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장기 복역 정치범 김선명의 삶을 그린 영화 <선택>. 오랜 세월 묻혀 있던 비전향 장기수들의 이야기를 용기있게 발굴하여 영화화한 제작진의 선택은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따랐던 그들의 고집과 통하는 바가 있다. 소재상 영화의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는 역시 감옥 그 자체. 한 사람당 0.75평의 좁디좁은 공간만이 주어지는 억압의 공간을 표현하기 위해 제작진은 폐교를 개조한 세트와 김선명이 복역했던 실제 장소인 대전 교도소, 서대문 형무소 등지를 활용하였다. 극중 정치범들에 대한 교화작업이 본격적으로 실시됨을 알리는 강당 시퀀스는 실제 서대문 형무소의 강당에서 촬영되었는데 붕괴 위험으로 늘 조마조마했으며, 화재를 막기 위해 난로조차 들여놓을 수 없었기 때문에 김선명 역을 맡았던 배우 김중기는 가장 어려웠던 촬영으로 회고한다. 여기에 정해진 시간 내에 가능한 한 많은 분량을 찍어야 했기 때문에 제작진은 그 어떤 영화보다도 고된 작업을 견뎌야만 했다. 세트는 세트대로 골치였는
[코멘터리] 0.75평 촬영장의 고통,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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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반 짐 자무시는 니콜라스 레이와 빔 벤더스의 도움으로 두편의 영화를 만들 수 있었고, 그 사이에 장 외스타슈는 자살했다. 그들의 흔적이 유난히 역력한 <브로큰 플라워>에서 20년 전으로 떠나는 돈의 발걸음은 자무시의 데뷔와 외스타슈의 자살이 벌어진 시간으로 향하고 있다. 중년의 시기를 통과하는 남자의 이야기는 <러스티 맨>의 제프를, <시간의 흐름 속에서>라는 영화제목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자무시는 자신이 막 지나온 사십대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떠난 외스타슈에게 <브로큰 플라워>를 바친다. 벤더스가 공간의 의미로 길 위를 떠돈다면, 자무시는 시간의 길 위에서 부유한다. 신세계의 막막함에 방황하던 청년(<천국보다 낯선>)과 세 갈래 길과 마주했던 청년도 중년도 아닌 세 남자(<다운 바이 로>)를 지나 한 중년 남자가 도착하는데, 그는 네 갈래 길의 교차점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길 위에서
[명예의 전당] 짐 자무시, 길 위에서 시간을 묻다, <브로큰 플라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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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매개체로 시공간을 초월한 감성적 멜로영화 <시월애>가 ‘리에디션’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나왔다. <시월애>는 유난히 아름다운 영상과 음악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이번 DVD 타이틀은 화질 부분에서는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 하지만 <시월애>의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에겐 세 번째 디스크로 제공되는 O.S.T가 큰 선물이 되겠다. 스페셜피처로는 이현승 감독의 음성해설, 제작과정, KBS에서 방영된 ‘영화 속으로’, 뮤직비디오 등이 제공된다.
사랑하는 그에게 전하세요, <시월애 리에디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