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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닮은 기계를 열망하지만 동시에 두려워하는 시대, <프랑켄슈타인> 읽기 딱 좋은 때다. 마침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날, 빅터의 창조물이 처음 등장하는 부분을 학생들과 소리내어 읽었다. 괴물의 외형을 묘사하는 구절을 읽던 중 유독 ‘쭈글쭈글한 얼굴 살갗’이라는 표현이 귀에 들어왔다. 문득 수년 전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분만실에서 처음 만난 아기는 참 쭈글쭈글했었지.
책을 읽기 전 저자인 메리 셸리의 삶을 보여주는 영화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의 탄생>을 훑어봤다. 영화 속 메리의 삶은 단 한순간도 순탄치 않았다. 어머니는 그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시고 이후 그가 어린 나이에 낳은 아이는 병으로 곧 죽어버렸다. 그가 몸소 경험한 탄생과 죽음의 연쇄가 소설 속에서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어머니의 죽음을 겪으며 생명 창조의 꿈을 꾸고 그러한 꿈의 결과로 탄생한 창조물이 여러 사람을 죽이는 괴물이 되어버리는 이야기에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임소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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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품언으로도 알려져 있는 에스더 리우는 2003년 대만의 걸그룹 스위티로 데뷔하며 커리어를 시작했다. 가수로 데뷔한 해에 드라마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통해 연기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선검기협전> <나의 귀여운 시어머니> <미래마마> 등 드라마에서 자기 앞의 생을 명확히 인지하고 힘차게 걸어나가는 여성을 열연한 에스더 리우는 넷플릭스 시리즈 <화등초상>의 ‘하나’ 역으로 대만을 넘어 전세계 시청자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에스더 리우는 올해 영화 <내 사랑 샐리>로 처음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산영화제)를 찾았다. 그간 우수에 젖은 대만 도시 여성을 주로 연기했던 에스더 리우는 이번 작품에서 화장기 없는 얼굴로 시골 양계장 살림에 여념이 없는 30대 후반의 미혼 여성 휘준을 연기한다. 하나뿐인 남동생의 결혼식을 준비하던 휘준은 “범띠 여자는 대가 세 새신랑의 기를 꺾는다”라는 무당의 점지에 따라 동생의 결혼식에
[인터뷰] '내 사랑 샐리' 배우 에스더 리우, 여성의 초상을 그려내는 작업에 사명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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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보스톤>(이하 <보스톤>)은 역사적 실화를 기반으로 하고, <거미집>은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하며,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이하 <천박사>)은 웹툰을 각색했다. 추석 시즌에 개봉한 이 세편의 영화는, 지금의 한국영화가 스토리를 발굴하는 세 경향을 보여준다. 공교롭게도 세 영화의 흥행 스코어를 모두 합해도 300만명에 못 미친다(한주 늦게 개봉한 <30일>과 <크리에이터>를 합해도 400만명이 안된다). 그러니까 추석부터 이어진, 흥행에 꽤 유리한 기간에도 불구하고 이들 영화는 관객을 유혹하지 못했다. 추석영화 모두가 손익분기점을 못 넘긴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에 씁쓸하기는 했지만 그 결과가 의외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지금의 이 흥행 스코어가 극장이나 한국영화의 미래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이들 작품이 지금 한국영화계의 어떤 변화를 미약하게나마 보여주는 것이
[비평] 2023년 추석 시즌, 극장에서 떠올린 상념들, <1947 보스톤> <거미집>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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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멘토링을 들으시면 열에 아홉은 창업을 포기하시게 될 겁니다.”
어쩌다 보니 요즘 팔자에도 없는 멘토링 수업을 하고 있다. 창업을 준비하고 자기만의 언어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 잡지를 만드는 일도, 사진을 찍는 것도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이들은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자신의 세상을 조립하는 일은 생각하는 것만큼 유쾌하지 않다.
잡지 전문공간을 같이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일론에게 처음 받았을 때의 당혹감이란. 잡지 전문공간? 수많은 서점이 책 한권 팔지 못하고 망해가는 처지에 잡지를? 잡지만 다룬다고? 그것도 공간으로? (나는 그가 일론 머스크가 아닐지 의심했다. 선구자 또는 사기꾼. 혹은 둘 다.)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잡지’와 ‘서점’이라는 이 말도 안되는 조합(둘 다 망해간다는 점에서)을 떠올리자마자 헛웃음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밥 먹는데 체할 거 같으니,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일론에게
[김민성의 시네마 디스패치] 예술과 문학섹션: 세상의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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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펴냄
공적인 역사를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그 공적인 역사만 존재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소설가 한정현이 <마고>의 작가의 말에 쓴 문장은 이번 소설집에서도 유효하다. 고리타분하지만 ‘격동의 한국사’를 대체할 표현을 찾기 어려운 과거사에 국가 폭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다친 사람들, 그로 인해 더불어 숨어야 했던 피해자 가족들의 서사를 한정현은 집요하게 추격하고 상상해왔다. 한정현의 소설을 따라왔던 독자라면 역사와 피해자, 퀴어 인물들의 주체화, 여성 연구자가 숨은 퀴어와 여성을 가시화하는 과정을 연상할 수 있다. 두 번째 소설집 <쿄코와 쿄지>에서도 그러한 경향은 두드러진다. 표제작 <쿄코와 쿄지>는 광주를 배경으로 혜숙, 미선, 영성의 우정, 이들이 가부장제하에서 받은 고통과 폭력을 극복하고 서로를 구원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가 서술된다. 다음 세대에 의해 전 세대 여성들의 발자취가 그려지는 방
씨네21 추천도서 - <쿄코와 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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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샌토로 지음 / 황덕호 옮김 / 을유문화사 펴냄
음악가의 전기를 읽으면서 그의 음악을 연속재생하는 것만큼 즐거운 독서법은 없을 것이다. 경계인이었으며, 다면적인 얼굴을 가졌고, 예측 불허의 인물이었던 찰스 밍거스가 밴드 멤버와 불화하며 무대 위에서 기행을 펼치는 장면을 읽을 때 과 같은 곡이 불쑥 재생되고 있으면 문장과 음률이 환상의 합을 이뤄낸다. 밍거스의 음악은 성마른 그의 성격처럼 일정하게 흐르지 않고 전혀 다른 악장으로 튀어가거나 방향을 급선회한다. 경쾌한 베이스가 진행되다가 갑자기 분위기를 미스터리하게 변모시키는 트럼펫이 흐르고 피아노는 밤도둑의 발소리처럼 가만가만 음표를 올려놓는다. 찰스 밍거스의 전기 <찰스 밍거스-소리와 분노>의 번역가인 재즈 칼럼니스트 황덕호는 옮긴이의 글에 밍거스를 구스타프 말러와 비교하며 이렇게 소개한다. “음악적으로 비타협적이었으며 다혈질의 성격으로 오케스트라 혹은 밴드를 지휘했고 오십대에 생을 마감했던 두 사람은 자신들의 음악
씨네21 추천도서 - <찰스 밍거스-소리와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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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리쿠 지음 / 권영주 옮김 / 비채 펴냄
한 가지 장르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기묘한 ‘분위기의 소설’을 잘 쓰는 온다 리쿠의 소설집. <육교 시네마>에는 미스터리, 호러, 판타지, SF, 청춘 소설 등 장르를 넘나드는 18편의 단편이 실렸다. 첫 번째 단편은 호퍼의 그림 <철길 옆 집>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그림은 히치콕의 <사이코>에 등장하는 집의 모델이기도 하다. 온다 리쿠는 “명확히 말해서 이 집에는 출입구가 없다. 완전히 폐쇄된 집. 들어갈 수 없는 집. 나올 수 없는 집이다”라고 그림에 대해 설명한 뒤, 소설 속 화자가 어느 날 그림 속 집을 연상시키는 집과 그 안의 세 사람을 발견한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큰 집의 한방에만 늘 모여 있는 닮지 않은 세 사람의 존재는 어떤 의미일까? 단편 <풍경> 역시 그림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다. 주간지의 표지로 쓰인 그림을 보는데, 그 그림에서 어딘지 모를 광기 어린 분위기를 읽어낸 것이
씨네21 추천도서 - <육교 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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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 포세 지음 /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펴냄
얼마 전 아내를 떠나보낸 노르웨이의 어부 요한네스의 아침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다. 침대에서 애써 몸을 일으켜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끓이고 빵에 치즈를 곁들여 먹은 다음 바다와 바람이 기다리는 집 밖으로 나선다. 산책할까 아니면 배를 타고 나가 낚시할까 생각하며 흐린 날씨를 배경으로 한 노인이 느리게 움직이는 고요한 풍경이, 마침표 없이 이어지며 밀어붙이는 문장으로 어딘지 불안하게 다가온다. 모든 것이 어제와 같고 그저께와도 같은데 요한네스는 무언가 다르다고 느낀다. 그 이유는 요한네스 본인이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것도 안다. 이미 죽은 줄 알았던 친구 페테르를 만나 배를 타기도 하고, 게를 잡아 시내로 가서 젊은 시절의 데이트를 반복하기도 한다. 온 세상 사물이 너무나 무거우면서도 한편으로 가볍게 느껴지는 이 기이한 감각과 무언가에 홀린 듯한 경험이 어떤 저녁으로 향하는지는, 사실 소설의 시작이 알려주었다. 모든 아기가 그렇듯 요한
씨네21 추천도서 - <아침 그리고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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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지음 / 창비 펴냄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중 3권에 달하는 교토편의 핵심 내용을 추려 <여행자를 위한 교토 답사기> 한권으로 출간되었다. ‘여행자를 위한’이라는 말에 걸맞게 주요 관광지 중심으로 목차가 구성되었는데, 유명 여행지를 문화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돕는 유홍준의 설명이 든든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건 일본에서도, 교토에서도 마찬가지다. 교토 여행은 유명한 절과 정원을 빼놓을 수 없는데 정원이 왜 유명한지를 짚고 넘어가는 대목이 3장에서 나온다. 한국 여행자들이 자주 찾는 절 중에서 정원으로 유명한 천룡사(덴류지), 용안사(료안지), 계리궁(가쓰라 이궁)을 비롯한 장소가 소개된다. 아라시야마의 명소 천룡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사찰로 일본 특별명승 및 사적 제1호로 지정된 정원이 있는 곳이다. 몽창 국사는 이름난 정원 설계가(작정가, 作庭家)인데, 그는 천룡사 준공에서도 큰 역할을 했으며 창건 후 줄곧 주지로
씨네21 추천도서 - <여행자를 위한 교토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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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를 위한 교토 답사기> - 유홍준 지음
<아침 그리고 저녁> - 욘 포세 지음
<육교 시네마> - 온다 리쿠 지음
<찰스 밍거스-소리와 분노> - 진 샌토로 지음
<쿄코와 쿄지> - 한정현 지음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10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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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비둘기에 평화를 떠올리듯, 장바구니 밖으로 비쭉 솟은 대파는 일상과 집밥의 기호였다. 하지만 온갖 식재료의 타격감을 궁리하는 한국 드라마에서 대파라고 예외가 아니었으니, 줄기가 으스러지도록 후드려 패는 ‘싸대기’의 도구로 전락한 대파가 정해연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ENA <유괴의 날>에선 모처럼 찬거리의 입지를 회복했다. 가파른 언덕을 급하게 뛰어오느라 숨이 턱에 닿은 남자는 비닐봉지와 대파를 쥔 손을 흔들며 딸의 이름을 외치고, 그를 기다리던 아이는 평상에 쓰러져 헐떡거리는 남자에게 쏘아붙인다. “밭에서 캐온 거야?” 김명준(윤계상)은 유괴를 실행하기도 전에 자신의 차 앞에서 기절한 아이의 보호자가 되어버린 어설픈 유괴범이고 기억을 잃은 11살 천재 소녀 최로희(유나)는 정황상 아빠 같은데 영 미덥지 못한 명준을 관찰하는 중이었다. 너를 혼자 집에 둬서 미안하다고 여기 반찬거리가 간다고 대파를 홰홰 흔들던 명준의 모습은 로희에게 한심하면서도 안심되는 이로
[유선주의 드라마톡] ‘유괴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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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이트 어텐던트>
웨이브 플레이지수 ▶▶▷
항공사 승무원인 캐시 바우든(케일리 쿼코)은 비행 중에도 술을 몰래 마실 정도로 알코올 의존증세가 심각하다. 방콕행 비행 노선 운항의 승객인 앨릭스 소콜로프(미힐 하위스만)에게서 연락처를 받은 캐시는 그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술에 취해 기억을 잃고 눈을 떠보니 침실은 살인 현장으로 변해 있다. 앨릭스를 죽인 것이 자신인지 아닌지조차도 확신할 수 없는 캐시는 보는 이가 가장 바라지 않는 방향의 선택과 행동으로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따라간다. 매혹적인 남녀의 연애사에 살인이 뒤얽히며 언뜻 히치콕의 영향 아래에 있는 듯 보이는 킬링타임용 <HBO> 드라마 시리즈다.
<실종>
티빙, 웨이브, 왓챠, 넷플릭스 플레이지수 ▶▶▶▷
아버지(사토 지로)가 사라졌다. 카에데(이토 아오이)는 수배된 살인범을 찾아 현상금을 타겠다고 들떠 있던 지난밤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휴대전화에 찍힌 아버지의 사진과 이름
[OTT 추천작] ‘플라이트 어텐던트’ ‘실종’ ‘히트’ ‘데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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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브 / 감독 이정곤 / 출연 유승호, 김동휘, 유수빈, 이주영 / 플레이지수 ▶▶▶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던 준성(유승호)은 아는 형이 알려준 스포츠 토토를 하다 거액의 빚을 진다. 도망치듯 군에 입대하지만 사채업자에게 준성의 알량한 방법은 통하지 않는다. 쌓인 이자로 불어난 막대한 금액을 갚느냐, 아니면 장기를 적출당할 것이냐는 위협 앞에서 준성은 돈을 갚기로 약속하지만 해결 방법이 없어 막막하기만 하다. 의대생인 재효(김동휘)는 교내 시험에서 부정행위가 발각되어 퇴학당할 위기에 처해 있지만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속앓이를 하는 중이다. 준성이 전역하고 난 뒤 재효와 가진 술자리에 고등학교 동창인 민우(유수빈)가 동석하는데 누가 보아도 민우는 준성, 재효와 섞일 수 없는 부류의 친구다. 민우에게 걸려온 전화 한통으로 준성과 재효는 한순간 친구에서 범죄의 공범이 되어버린다. 아무도 모를 것 같았던 재효의 집에서 일어나는 일을 같은 건물에 사는 수안(이주영)이
[OTT 리뷰] ‘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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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와 함께 제61회 뉴욕영화제가 열렸다. 9월29일부터 10월15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영화제에는 ‘있는 것’과 ‘없는 것’들이 유난히 도드라졌다. 있는 것으로는, 시간당 최고 76mm ~152mm가량 쏟아진 폭우다. 도로 침수는 물론 일부 지역에서 대중교통 운행이 중단되거나 심한 정체를 겪었고, 공항 터미널도 일부 폐쇄됐다. 에릭 애덤스 뉴욕시장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하지만 이같은 악천후에도 뉴욕영화제의 페스티벌 패스와 예매율은 지난해에 비해 50%나 상승하는 등 성황을 이뤘다. 2022년 영화제 역시 기록적인 박스오피스 결과를 얻었던 터라 더욱 고무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친근한 감독들 역시 뉴욕영화제에 귀환했다. 오프닝 작품은 내털리 포트먼, 줄리앤 무어 등이 출연하는 토드 헤인스 감독의 <메이 디셈버>다. <프리실라>의 소피아 코폴라 감독, <가여운 것들>의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히트맨>의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 <스트
[뉴욕] 제61회 뉴욕영화제 폭우 속에서도 성황, 토드 헤인스 신작 개막작에 젊은 시네필들이 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