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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있다면, 파괴는 없다전수일 감독이 또다시 영화를 만들고 있다. ‘또다시’라면, 이 낯선 감독에게도 전작은 있다는 뜻이다. 그는 단편 하나와 중편 두개를 모은 <내 안에 부는 바람>과 제작한 지 3년 만인 지난해에야 개봉한 장편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를 거의 혼자 힘으로 완성했다. 물론 이 두 영화를 본 사람은 별로 없다. 그리고 이제는 <파괴>다. 김영하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원작인 이 영화는 전작과는 격이 다른 제작비 때문에 여전히 혼자인 전수일을 거의 파괴의 경지로 몰아넣고 있다. 영화를 만드는 9년 동안 단 한순간도 마음놓을 새가 없었을 사람. 그래도 그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삶의 터전인 부산에서, 온갖 걱정거리를 짊어지고, 영화를 만든다. 이 놀랍고도 신기한 고집의 소유자를 만나기 위해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파괴>의 현장을 찾았다. - 편집자강원도 철원 노동당사를 찾은 지난 2
다시,싸움처럼 <파괴> 만드는 전수일 감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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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는 모드철원과 부산 현장을 두번 찾아가서 찍은 꽤 많은 필름 중에 전수일이 웃고 있는 컷은 단 한컷도 없었다. 그의 표정은 무표정하거나 웃거나 딱 두 가지 경우만 확인할 수 있었는데, 후자는 무척 드물었던 것이다. 철원에서 전수일이 처음 웃은 순간은 촬영이 모두 끝나고 “인터뷰 꼭 해야 하나. 너무 불쌍해 보이기만 할 텐데…”라고 말했을 때였다. 지난해에도 그는 한결같은 말투로 비슷한 문장을 말했지만, 이번엔 표정이 달랐다. <새는…>을 호평한 프랑스 언론의 기사를 직접 번역한 문서들을 들고 나타났던 그는 가리는 것이 많았고, 정말 깐깐한 선생님처럼 보였다. 그를 앞에 두고선 결코 <새는…>의 난해함을 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처절하게 영화를 만드는 와중에서도 전수일은 자신의 험난한 경험을 농담처럼 편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익힌 것 같았다.자살안내원 S를 연기하는 정보석과 행위예술가 마라를 연기하는 추상미는 모두 일일드라마 촬영에 몸이 묶여 있는 상
다시,싸움처럼 <파괴> 만드는 전수일 감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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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국제영화제 2월15일 폐막, <이 세상에서> 황금곰상 수상베를린=글 최수임 sooeem@hani.co.kr·사진 손홍주 lightson@hani.co.kr“황금곰상 수상작은 마이클 윈터보텀의 <이 세상에서>로, 심사위원 대상 수상작은 스파이크 존즈의 <어댑테이션>으로 결정됐습니다.” 심사위원장 아톰 에고이얀과 집행위원장 디이터 코슬릭이 하얏트호텔 기자회견장에 서서 수상작 발표를 막 마칠 때쯤, 바로 인접한 포츠다머 슈트라세 대로에는 기자들의 박수소리보다 훨씬 큰 군중의 노래와 외침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2월15일, 전세계 주요도시에서 열린 반전 퍼레이드가 베를린에서는 바로 그때 영화제 주요 상영관 옆을 지나치고 있었던 것이다.“기름을 위해 피를 흘리지 말라”, “슈뢰더, 고마워요”, “아름다운 들판에 폭탄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 “이라크의 무장해제, 좋다. 하지만 미국은 왜 안 하나” 등 여러 가지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든 50만명의 인파는
2월15일 폐막한 제5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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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미 영웅 올리버 스톤를 환대하라이변과 화제1 - 카스트로 다룬 스톤의 다큐 <코만단테>에 열광올리버 스톤은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던, 그러나 가장 뜨겁게 추앙된 영화제 최고의 스타 감독이었다. 이제까지의 카스트로를 ‘미국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라고 까발리는 영화 <코만단테>를 후광처럼 등에 업은 그의 카리스마는 반미 분위기가 뜨거운 베를린에서 아주 순수하고 놀라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코만단테>는 폐막을 하루 앞둔 2월14일, 일정에도 없던 특별 기자시사에서 인터내셔널 프리미어로 상영되었는데, 그러자마자 기자들은 걸출한 이 반미 미국 작가의 다큐 ‘에지테이션’에 흥분하고 말았다. 꽤 많은 외신기자들이 귀국한 뒤 썰렁해졌던 기자회견장은 일거에 다시 많은 카메라로 붐벼 스톤 감독에게 니콜 키드먼 못지않은 플래시 세례를 선사했고, “카스트로를 동정적으로 다루었는데 후세인은 어떻게 생각하냐?”는 어느 미국 기자의 공격적인 질문에 그가 “사담 후세인?
2월15일 폐막한 제5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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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크 리, 상복 없었다이변과 화제2 - 최소한 감독상 예상했지만 수상 못한 <25시>스파이크 리의 <25시>가 상영되었을 때, 이 영화가 황금곰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감독상은 받을 것이라는 추측이 퍼졌다. <25시>는 경쟁부문에서 가장 높은 객석 점유율(계단 점유율이 주로 비교의 대상이 되는데)을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가장 많은 박수를 받으며 엔딩 타이틀을 올린 영화들 중 하나였고, <타게스슈피겔>의 독일 기자들이 주는 별점에서도 1위를 달리는 ‘전도 유망’한 영화였다. 그러나 이 영화는 어떤 상도 받아내지 못하는 ‘이변’을 낳았다. 열렬했던 반응과 차가운 평가. 스파이크 리는 왜 베를린에서 천국과 지옥을 맛봐야 했을까.답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스파이크 리가 옥을 다 갉아먹을 만큼 치명적인 티를 범했거나, 아니면 베를린이 너무 몸을 사리고 그를 오해했거나. ‘티’ 혹은 ‘오해의 대상’이 될 <25시>의 민감한 부분은
2월15일 폐막한 제5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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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영화 100편 상영, 물량공세 성공이변과 화제3 - 독일영화의 부흥?독일영화가 르네상스를 맞았다고, 감히 말해도 될 것 같다. 이번 베를린영화제에 독일영화는 전체 299편 상영작 중 무려 100편이라는 엄청난 비율을 차지했다. 경쟁부문에 3편이 포함된 것을 필두로 파노라마, 포럼, 단편영화, 킨더필름 등 부문마다 대략 ‘다섯 중 하나’는 독일영화였고, 여기에 신인들의 영화를 소개하는 ‘독일영화의 전망’ 섹션, ‘저먼 시네마’ 섹션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 회고전까지. 독일영화만을 모아 상영하는 부문도 3개나 됐다.<늙은 원숭이의 불안><크누트가 잡혔다><데보트>이들 독일영화들은 상영시간대도 비교적 좋은 시간에 배치돼 영화 상영 시간표를 보며 볼 영화를 고르고 있자면 싫어도 볼 수밖에 없게 만들어놓았다(하지만 독일영화들은 빨리 매진돼 보기 힘든 영화이기도 했다). 영화제쪽에서는 친절하게도 영화제의 모든 독일영화들을 모아 소개한, 상당한 두께의 ‘
2월15일 폐막한 제5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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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경쟁작 맞아?베를린의 이변과 화제4 - <마담 브루에트>와 <예스 너스 노 너스>영화가 너무 ‘어처구니 없어서’ 화제가 되었던 영화 2편이 있었다. 아프리카 대륙 대표로 영화제 경쟁부문에 참가한 세네갈 무사 세네 압사 감독의 <마담 브루에트>와 네덜란드 최초의 뮤지컬영화라는 <예스 너스 노 너스>.<마담 브루에트>의 주연 여배우(왼쪽)와 무사 세네 압사 감독<예스 너스 노너스><예스 너스 노 너스>는 네덜란드의 이름 모를 작은 마을의 적십자 구호소를 배경으로 간호사들과 구호소에 머무는 엽기스러운 요양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노래와 춤으로 엮어낸 영화. 간호사는 ‘어머니’처럼, 요양객들은 그녀의 ‘자식들’처럼 구도화되어 있으며, 사고연발인 요양객들을 간호사가 보살피고 다스린다는 이야기다.사사건건 꼬투리를 잡아 구호소를 철거시키려고 법원에 진정서를 내는 구호소의 옆집 남자에게 요양객 중 과학자가 개발한 ‘착해지
2월15일 폐막한 제5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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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알고 싶었다"<이 세상에서>로 황금곰상 받은 마이클 윈터보텀 인터뷰마이클 윈터보텀은 종종 ‘우리’라는 주어를 사용했다. 그에게 영화는 혼자 만드는 무엇이 아니었다. 대여섯명의 스탭이 미니버스를 타고 움직이며 만들어낸, 파키스탄에서 런던에 이르는 길의 영화, <이 세상에서>는 특히나 그에게 ‘함께’한 그 무엇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파키스탄으로 이미 실제로 ‘이주’를 한 ‘자말’(실제 이름과 극중 이름이 같다), 그리고 ‘에니얏’과 함께 육로로 런던까지 갔던 길. 거의 다큐에 가까운 픽션인 이 영화에서 윈터보텀은 아름다운 길이 아닌, 아이를 사람을 다치게 하고 죽이는 길을 고발한다. 그래도 그 길을 가야만 하게 아이의 등을 떠미는 현실을 고발한다.전작 <웰컴 투 사라예보>와 이 작품을 비교한다면.→ 근본적으로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웰컴 투 사라
2월15일 폐막한 제5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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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관심을 갖는 사물이 비슷하다"<어댑테이션>으로 심사위원 대상 받은 스파이크 존즈(감독), 찰리 카우프만(시나리오) 인터뷰야윈 몸과 금발머리에 잘 어울리는 예쁜 정장 차림을 하고 온 스파이크 존즈 감독, 그리고 니콜라스 케이지가 소화하기엔 훨씬 ‘터프’한 외모를 가진 시나리오 작가 찰리 카우프만, 여기에 니콜라스 케이지까지 가세한 <어댑테이션> 기자회견장은, 영화 <어댑테이션>만큼이나 재미있었다. 바로 자신이 쓴 이야기면서도 찰리 카우프만은 자신이 주인공 캐릭터인 이 영화의 작업이 “너무 복잡했다”며 연신 “모른다”는 말을 반복했는데, 그 모습은 영락없는 <어댑테이션>의 ‘찰리’였다. <어댑테이션>은 작가 찰리가 원작을 시나리오로 각색하는 과정을 다차원적으로 그린 복잡하고도 흥미로운 영화. 스파이크 존즈는, 수줍어하는 듯하면서도 곧잘 기자들을 향해 농담을 날리는 기지를 발휘했다. 영화 속 마약에 대한 질문에 가격을 대며 미
2월15일 폐막한 제5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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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과 死의 외침과 속삭임<무간도> <8마일> <디 아워스>를 보는 세 가지 시선이 영화, 죽입니다, 라고 부르짖는 영화광고들 사이에서, 웅크린 채 조용히 읊조리는 영화들이 있다. 크기와 자극과 속도를 웅변하지 않고, 잠깐 멈춰 귀기울이면 당신과 속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고 수줍게 손 내미는 영화들이 아직 있다. 아마도 지난 주말은 그런 영화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겐 최상의 주말이었을 것이다. 늙음과 상실에 관한 비가 <디 아워스>, 비열한 거리의 음악과 지친 삶에서 길어올린 생의 찬가 , 사라진 시대, 사라진 영웅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만가 <무간도>가 함께 찾아온 까닭이다.여기 세 영화에 대한 세 사람의 에세이를 싣는다. 흥에 겨운 찬사가 아닌 이런 나지막한 독백이 이 영화들에 보내는 우리의 진심어린 박수를 대신하고도 남으리라고 믿는다. - 편집자생이여,김혜리 vermeer@hani.co.kr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버지니아,
세편의 영화,세편의 에세이 - <디 아워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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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는 쓰고 로라는 읽고 클래리사는 책을 만든다. 처음 내가 쓴 글줄들은 일기였던가, 편지였던가. 그러나 어쩌면 회색노트를 나누어 썼을지도 모르는 첫 ‘독자’는 잊지 않는다. 때로 우리는 사랑의 시작을 날짜와 시간까지 공기와 냄새까지 기억한다. 안녕, 나야. 다가오며 인사하는 그애를 둘러싼 하얀 빛의 부챗살이 충충한 학교 복도를 사라지게 했다. 머릿속이 말갛게 비었을 때에도 멍하니 세수를 하고 창을 여는 나의 입술이 멋대로 그의 이름을 소리내어 나를 놀라게 했다. 희열, 고통, 뭐라 부르건 난생처음 의심을 허락지 않는 감정이 날카로운 칼처럼 명치를 뚫고 등 뒤로 빠져나갔다. 난 평생 너의 시선으로 내 삶을 검열하며 살게 되겠지. 시시때때로 네 비웃음의 환청에 소스라치면서. 그러나 흐른 시간이 세월이라 할 만한 두께가 되었을 때, 다시 만난 친구는 우리가 원한 것들이 아직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얼굴을 풀어헤치고 웃고 있었다. 덩달아 미소지으며 나는 겁이 났다
세편의 영화,세편의 에세이 - <디 아워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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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하루 중 저녁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디 아워스>의 하루해가 저물 무렵 댈러웨이 부인과 로라는 살기로 한다. 버지니아와 리처드는 죽기로 한다(“사제이자 예언자인 시인은 나머지 우리가 삶을 더 귀중하게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해 죽어야 한다”고 버지니아는 스스로 예언한다). 현대에 와서 죽음은 어느 시대보다 석연치 않고 불길한 것이 되었다. 죽은 자들은 패배하여 도주한 것일까. 하지만 버지니아는 “삶에서 도망침으로써 평안에 도달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코트 주머니에 돌멩이를 채워넣고 호수로 걸어들어갔다. 그러니까 자살은 삶의 회피일 수 없다. 샐리 포터 감독의 <올란도>에서 버지니아의 분신 올란도였던 틸다 스윈튼은 한 다큐멘터리에서 의구심을 털어놓았다. 현대사회는 진정한 열정은 용인하지 않으면서 지독히 센티멘털한 기묘한 곳이라고. 사랑은 그 안에 거하는 감정이 아니라 동사여야 한다고 틸다 스윈튼은 말했다. 정말 사
세편의 영화,세편의 에세이 - <디 아워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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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정글에는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힙합 카우보이가 산다<8마일>, 어느 경계선의 이름 또는 세상의 법칙을 읊는 랩----------어디서 어떻게 깃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에미넴의 형형한 푸른 눈에는 적의가 품어져 있다. 그 눈은 그가 8마일 저쪽의 다운타운 출신이 아니라 8마일 이쪽의 슬럼가 출신임을 말해준다. 그는 결코 쉽게 꺾이지 않을 것이다. 그의 눈이 그렇게 말한다. 나는 꺾이지 않아. 그렇다고 해서 그 눈이 공격적인 것은 아니다. 단지 자신을 남들로부터 오랫동안 지켜온 사람의 눈이다. 그의 눈은 그가 부끄러움 없는 시인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는 결백하다. 적어도 그렇게 믿는다. 그가 부끄러움 없고 떳떳한 것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 쓰레기 더미 속에서 자기 자신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그는 두눈 똑바로 뜨고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온 것이다. 그의 눈이 그렇게 말한다.----------백인 힙합 스타에 대한 수많은 냉소와 소문에도 불구
세편의 영화,세편의 에세이 - <8 마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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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 가지고는 조금 부족하다. 간과하고 있는 것들도 있고 구조도 조금 덜 힙합적이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할리우드영화다.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 아마도 에미넴 자신은 이런 말을 싫어하겠지만, 영화 속의 그는 힙합 카우보이이다. 카우보이는 법도 질서도 없는 서부의 척박한 땅에서 자기 자신을 지킨다. 외롭게 투쟁하는 그는 결국 악의 유혹을 떨쳐버리고 정의의 씨앗을 심는다. 에미넴 역시 아무도 그를 지켜주지 않는 게토의 정글에서 외롭게 자기 자신을 지키며 살아간다. 여자친구는 힙합 제작자와 놀아나고 엄마는 아들의 동창놈과 놀아나며 여기저기 폭력이 난무하지만 주인공은 그 모든 손쉬운 유혹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우정을, 힙합의 기본 정신을 지킨다. 그래서 그는 역시 정의의 씨앗을 심는다. 이 영화는 힙합 서부영화다. 서부영화의 코드들이 힙합이라는 하위문화 코드의 옷을 입고 있다. 카우보이영화는 늘 정의의 사나이인 카우보이와 ‘악의 축’의 대표자와의 결투에서 끝난다.
세편의 영화,세편의 에세이 - <8 마일>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