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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자 : 서동진 문화평론가정직한 모더니스트에 건네는 기대<나들이>의 김선경 감독지난 90년대 후반 이후 한국 단편영화가 걸어왔거나 걸어갈 몇 가지 행보를 짐작해보면 어떨까. 먼저 하나는 단편영화가 다시 영화로 돌아가는 것이다. 영화란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이 물음은 해묵은 것이지만 유효하다. 또 미디어가 만든 스펙터클이 곧 세상의 이치가 되어버린 세상이기에 이런 물음은 고쳐 묻고 다시 묻는 물음이 되어야 한다. 영화가 사실상 애니메이션이 되고 CF가 되고 멀티미디어 콘텐츠가 되어버린 시대에 영화에 대한 물음은 다시 기획되어야 한다. 두 번째로 단편영화가 아예 잡담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잡담이란 나쁜 것이 아니다. 영화란 이미 자기 삶에 대한 글쓰기의 일종이 되어버렸고 영화는 고백과 술회와 말건네기의 형식이 된 지 오래이다. 영화가 젊은 날의 앨범이 되어 즐거운 대화가 오가는 동네가 된다면 뭐가 그리 나쁘단 말인가. 세 번째로 단편영화가 포트폴리오가 되는 것
감독 · 평론가 8명이 추천하는 단편감독 8인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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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자 : 김봉석 영화평론가그는 공포를 안다<링반데룽>의 박종영 감독암흑 속에서 세찬 바람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휴대폰 알람이 울린다. 머리 위의 푸른 등불. 도연이 깨어나자 친구들이 반긴다. 벼랑에서 굴렀다가 이틀 만에 깨어난 것이라고 두 친구가 말해준다. 절대 흩어지지 말자고 손목에 끈을 묶어두어, 모두 함께 굴렀다는 것이다. 날이 좋아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친구들의 말. 다정한 친구들은 발가락 탈골을 맞춰주고, 무릎의 고름을 빨아낸다. 고통을 느끼며 다시 잠든 도연.그런데 모든 것이 반복된다. 깨어난 도연에게 친구들은 똑같은 말을 한다. 너 이틀이나 혼수상태였어, 헤어지지 말자고 손목에 끈도 묶고, 밤등산은 위험하다고 했지 않니. 어리둥절해 하고, 화도 내는 도연의 말을 무시하고 친구들은 여전히 지난번과 같은 말을 한다. 화가 난 도연은, 눈감고 누워보라는 친구의 얼굴을 본 순간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다시 발가락을 맞추고, 고름을 빨아대는 친구들을 피해 도
감독 · 평론가 8명이 추천하는 단편감독 8인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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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자 : 허문영 편집장믿을 수 없는 연기 연출, 섬세한 관찰력<안다고 말하지 마라>의 송혜진 감독영화의 열쇠는 결국 인물이며 연기라고 생각한다. 작가영화이건 장르영화이건 그것이 사람을 그리는 한, 프레임 속의 인물에 생기를 부여하는 일이야말로, 연출의 핵심이다. 멀쩡한 자연인에게 조작된 영혼을 주입하는, 혹은 분석적으로 포착되지 않는 아득한 생명력을 불어넣는 능력은 결코 하나의 기술이 아니다. 과장이라는 눈총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그건 신의 조력이거나 천부적 재능이다. 아니면 본능이다. 교과서에서 배울 수 있는 기술로 <생활의 발견>의 경수나 <공공의 적>의 강철중이 태어났다고 믿기 힘들다. 위대한 배우라고 해도 아무 감독이나 그에게서 위대한 연기를 끌어내진 못한다. 그건 불가해한 균형이다. 위대한 연기는 위대한 균형이며, 그 균형의 한축에 배우가 다른 축에 감독이 있다.최근 1년간 내게 가장 인상적인 단편은 실험영화에 가까운 김주호의 <속눈썹&
감독 · 평론가 8명이 추천하는 단편감독 8인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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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제작비를 위한 모델을 찾아라한국영화산업 진단 시리즈 2편 - 제작시스템의 표준형 찾기, 3가지 모델 제안광풍은 지나갔고, 재건(再建)을 위한 움직임이 조용히 시작됐다. 이건 이라크 이야기가 아니다. 2003년 초반 한국 영화계의 풍경에 관한 말이다. 조정기를 통과하고 있는 한국 영화산업의 골간들을 살펴보려는 영화산업 진단 시리즈는 제1탄에서 배우 개런티 문제를 조명한 데 이어 제2탄에서 제작부문을 검토한다.거품과 지방질이 가득한 작품 기획서를 만들던 제작자들은 지금 불필요한 요소를 줄이기 위해 칼을 빼들었다. 영화 제작시스템을 합리화하고 체계화하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합리화’의 핵심은 시장의 수용 한계에 육박하고 있는 제작비 규모를 여하히 절감할 것인가로 모아진다.그런데 합리적인 제작 규모라는 게 어느 정도이고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지는 작품의 성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현재 한국에서 제작되는 영화 유형을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판단했
한국영화산업 X-Ray 2 - 제작시스템의 표준형 찾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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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감독 중심형 모델 = 감독 - 기획영화________감독의 능력에 대한 포괄적 신뢰와 프로듀서의 기획 역량이 결합되는 영화. 한마디로 차승재식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감독이 모든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는 가운데 자신의 기획력을 덧붙여 <비트> <봄날은 간다> <무사> <결혼은, 미친 짓이다> 등을 만들었다. 물론 차승재만이 이런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니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이은, 심재명이나 <공공의 적>의 강우석 등은 이런 노선을 관철시킨 경우다. 리스크가 높지만 성공했을 때는 어떤 모델의 영화보다 성취감이 큰 선구적이며 한국적인 모델.승부처 >>시나리오 + 기술적·미학적 완성도________감독-기획영화의 전략은 기획력이나 규모보다는 감독에게 모든 힘을 집중해 이야기, 연기, 미장센, 기술력 등 모든 부문에서 높은 수준의 성취를 달성하고 흥행력도 키운다는 것이다. 당연하
한국영화산업 X-Ray 2 - 제작시스템의 표준형 찾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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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확장형 모델 = 블록버스터영화________해당 영화산업의 모든 역량이 한꺼번에 발휘되는 ‘상업영화의 꽃’. <쉬리> 이후로 한국 블록버스터영화는 대부분 실패해왔지만, 영화산업의 양적, 질적 성장을 비약시켜줄 수 있는 모델이라는 점에서 포기할 수 없는 존재다. 결국 향후의 블록버스터는 그동안의 실패를 극복함으로써 한 단계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승부처 >>공학적 메커니즘의 확립________블록버스터의 논리는 미학이라기보다 공학에 가깝다. 액션과 로맨스를 오가는 긴박한 이야기 구조, 스크린을 꽉 채우는 스펙터클, 관객이 한눈팔지 못하게 하는 속도를 어떻게 꽉 조이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다. 이야기에 강점을 가졌던 <쉬리>와 스펙터클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둔 <유령>이 성공을 거둔 것도 이런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반면 <무사> 등은 이들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으면서도 미진한 구석을 남겨 작은 성공만을 거뒀고, <성냥팔
한국영화산업 X-Ray 2 - 제작시스템의 표준형 찾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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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性)스럽고 성(聖)스러우니, 이 어찌 흥미롭지 않으리오”배용준-전도연의 발칙한 사극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안동 촬영현장 스케치안동=글 이성욱 lewook@hani.co.kr·사진 조석환 sky0105@hani.co.kr<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지금까지 나온 사극 가운데 가장 발칙한 제목을 달고 기묘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 영화의 촬영장을 찾았을 때, 처음 마주친 것은 작은 ‘마찰’이었다.“영화가 하회마을과 맞지 않으면 곤란해요. 내일까지 어떤 영화인지 적어서 제출해주세요.” 옛 풍경이 필요할 때마다 들이닥쳤을 무수한 카메라와의 승강이에 이골이 났을 안동 하회마을 관리사무소 직원들의 다그침이었다. 여기 화재라도 나면 큰일이다, 나무 한 그루 값이 최소 500만원인데 뭔가 보탬이 되면 좋겠다, 저기 대나무들은 누가 잘랐지…. 집주인의 허락을 받았다고, 대나무와 화단의 꽃들은 서울에서 가지고 온 거라고 제작부에서 고분고분 설명한다. 사극 제작현장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촬영현장 스케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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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 막론한 욕망의 모습“다시 현대물을 한다면 펄펄 날 것 같아요.” 이재용 감독은 사극 연출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고 한다. 움직임의 제약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꼼꼼함과 섬세함을 포기하지 않는다. 주연배우들에게는 대사의 톤까지, 단역에게는 화면에 들고나는 위치와 타이밍을 정확히 짚어준다.“사람 사는 거나 인간의 욕망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어떻게 내 식으로 펼쳐볼까 하는 게 관건이지. 양반집 깊숙한 곳에서 춘화를 돌려보고 또 조씨부인을 주인공으로 한 춘화가 문제를 일으키는 건 ㅇ양 비디오 사건과 다를 게 없고, 당시에 집 한채 값이라는 가채에 사대부 아녀자들이 관심을 보이는 건 이탈리아 가구를 갖고 싶어하는 지금의 욕망과 다를 게 있겠어요?”감독뿐만이 아니다. 전도연과 배용준은 이구동성으로 <발몽>이나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감독 로저 컴블, 1998)보다 <위험한 관계>가 확실히 인상적이라며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촬영현장 스케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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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대신 작가를, 잠 대신 다큐를전주 아가씨 김현정 기자의 `작가`들과의 同居同樂 무박8일장 외스타슈의 다큐멘터리 을 20분 정도 보고 있던 젊은 관객이 가방을 움켜쥐었다. “오빠, 이게 뭐야. 도저히 못 보겠어. 나 먼저 갈게.” 평범한 할머니가 한번 했던 이야기를 자꾸만 다시 하는 은 감독이 친한 친구들에게만 보여준 영화라고 했다. 그가 그렇게 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함께 나갔고, 기자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파란색 ID카드를 내밀고 들어왔던 나는 차마 나가지 못했다. 처음도 아니었다. 거장에게 바치는 오마주와 밤인지 낮인지 분간이 안 가는 흑백 무성영화, ‘작가’라고 불리는 감독들의 다큐멘터리를 견뎌온 일주일 동안, 자꾸 선배 H가 떠올랐다. 지난해에 그는 파졸리니의 <테오레마>를 보고 돌아온 내게 눈을 최대한 크게 뜨면서 “너, 왜 그랬니?”라고 물었다. 사실은 너무 심하게 잠든 나머지 꿈도 꿨다고는 절대 말 못했지만, 그는 사람 보
현정이의 전주 다이어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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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이어 감독님, 죄송합니다전주 시내 한가운데 펼쳐진 `마당`의 전경. 매표소들과 안내데스크뿐 아니라 저녁 6시부터는 밴드들의 공연이 잔치의 흥을 돋우는 자리가 되기도 했다.전주영화제 일반 상영작은 입장료가 5천원이지만, 심야상영과 음악을 연주하는 ‘소니마주’는 1만원이다. ID카드로 무료 티켓을 끊어 상영장 겸 연주회장에 들어가면서 유료관객에게 부끄럽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영화는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무성영화 <잔다르크의 수난>이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라고 알고 있는 <잔다르크의 수난>은 잔다르크의 짧은 생애 중에서 재판과 화형만을 뽑아낸 영화였다. 어마어마한 클로즈업이 쉬지 않고 나오는 이 영화에 멜로디를 넣을 부분이 마땅치 않았는지, 네명으로 이루어진 연주팀은 계속 붕붕거리거나 끼익거리기만 했다. 언제쯤 음악이 시작될까 궁금해하다가, 잠시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긴 영화는 중간에 한번 자줘야 중요한 결말을 놓치지 않아”라고 위안삼던 평
현정이의 전주 다이어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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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상영관인 전북대 문화관 앞은 늘 관객으로 북적댔다. 4월 27일부터 29일까지는 `희망시장`이라는 이름의 아트벼룩시장이 열리기도 했다.<일곱 명의 발레리나> <야간 경비원의 시선> <첫사랑> 세편을 묶은 키에슬로프스키의 다큐멘터리는 부문을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극영화로 착각했을지도 모를 영화들이었다. <첫사랑>은 임신 때문에 서둘러 결혼한 열일곱살 소녀와 스무살 청년의 1년 가까운 시간을 관찰한다. 학교에 다니면서 돈을 벌고, 어린 나이에 누군가를 책임져야 하는 부부에겐 일상이 드라마다. 사회주의 국가에선 허가를 받지 않으면 할머니집 빈방 한칸도 마음대로 쓸 수 없다. 혼인신고를 기다리는 부부가 많아서 빈틈이 날 때까진 결혼도 못한다. 그래도 씩씩하게 살길을 찾아다니는 두 사람은 귀여운 딸을 낳지만, “이 아이는 우리보다 현명할 테니까 우리처럼 되진 않을 거야”라고 다짐한다. 신기했던 것은 결혼식장에 온 부모가 “너는 나보다 행복할 거야
현정이의 전주 다이어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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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남자배우들의 다양성과 퀄리티에 있어서 2003년 충무로는 세계 어느 나라 영화판이 부럽지 않을 것이다. 존재만으로 힘이 되는 안성기, 문성근 같은 배우가 뿌리에서 든든하게 자리잡은 위로, 설경구, 송강호, 최민식, 한석규, 유오성 등이 단단하게 허리춤을 잇고 있고, 그 위로 신하균, 류승범, 양동근, 차태현, 조승우, 박해일 같은 배우들이 하루 볕이 무섭게 쑥쑥 푸른 빛을 틔워낸다. 이들은 작가와 비주류, 장르영화를 유연하게 오고갈 뿐 아니라, 장르 안에서도 코미디와 액션, 멜로를 가리지 않고 특유의 독특한 빛을 뿜어내고 있다. 충무로에 유독 남자배우들을 위한 시나리오가 넘쳐나는 것 역시 이들의 존재가 빚어낸 결과물일 것이다. 하여 <씨네21>은 창간 8주년을 맞아 이 ‘행복한 충무로’의 바로미터가 될 세명의 남자배우들을 불러모았다.
설경구, 류승범, 양동근. 한 사람은 연극으로, 한 사람은 영화로, 또 한 사람은 TV드라마를 통해 연기를 시작한 이들은 흔히
설경구 · 류승범 · 양동근,배우로 산다는 것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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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 별건가요?
류승범 | 여기 다 연기 잘하는 형들만 있는데, 전 사실 아무것도 모르고 연기하는 거예요. 누가 가르쳐준 적도 없고, 한번도 선배가 와서 연기 이렇게 하는 거라고 이야기해준 적도 없어요. 그런데 연기를 하고 있잖아요. 언젠가 사석에서 ‘지금 이 앞에서 카메라를 한번 돌려봐요. 이게 바로 영화지’란 말을 한 적 있는데 정말 그런 생각을 해요. 우리가 살면서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사람들 많이 만나잖아요. 가령 내가 좋아하는 ‘크라잉 너트’ 형들하고 이야기하고 있다보면 ‘이게 바로 영화지 별게 영화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구요. 전 그냥 그런 느낌으로 연기하는 거예요. 내가 사는 모습처럼.
설경구 | 당연하다고 봐요. 류승범이 무슨 역을 하든지 류승범 냄새가 나야 하는 거죠. <살인의 추억>을 봐도 송강호의 일상이 있어요. 사실 적나라하게 있지. (웃음) 내 영화를 봐도, 내가 아무리 용을 쓰고 또 다른 인물을 만들어낸다고 해도 그게 어떻게 내가 아
설경구 · 류승범 · 양동근,배우로 산다는 것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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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로 산다는 것?
설경구 | 바닥이 드러날까 하는 초조감은 없어요. 그저 매일 연기하는 게 다 부담이죠. 오히려 한 배우의 바닥에 대한 부담은 내가 느끼는 게 아니라 보는 사람이 느끼는 것 같아요. 그러다가 보는 사람들이 날 포기하면 할 수 없는 직업이죠, 이 직업이. 찾아주는 이가 없으면 못하는 직업이라구요. 어떻게 보면 복받은 직업이기도 하면서 우울한 직업이죠. 그렇다고 딴 사람 구미에만 맞춰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고.
류승범 | 외롭다는 생각은 많이 해요.
양동근 | 외롭다는 거… 연기할 때는 잘 모르겠고, 평소 생활에서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설경구 | 중훈이 형이 늘 하는 말이 외로운 사람들끼리 한달에 한번씩 만나서 운동도 하고 이야기도 하자고 하거든요. 물론 나는 동근이랑 다르게, 생활뿐 아니라 일하면서도 외로울 때가 있어요. 코너에 몰릴 때, 감독님은 나에게 숙제를 다 줬고 이제 내가 숙제를 해야 하는데, 잘 모르겠을 때 속타는 건 결국 배우죠.
설경구 · 류승범 · 양동근,배우로 산다는 것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