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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휘둘리고 싶지 않았던
언제부터인가 장국영은 “이젠 느긋하다. 이루고 싶은 건 많지만, 당위나 강요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만 하겠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돈과 명예를 모두 얻은 그는 더이상 인형 같은 아이돌 가수나 덜 자란 풋내기에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성 정체성을 의심받았던 그에게 치명타가 될 수도 있었지만, 장국영은 <패왕별희> <해피 투게더>로 위태롭게 뛰어올랐다. 장국영이 자신과의 러브신을 눈앞에 두고 이틀 동안 침대에 파묻혀 괴로워하던 양조위에게 건넨 위로는 잘 알려져 있다. “이봐, 이건 연기야. 내가 그동안 정말 좋아서 여자들하고 키스하고 가슴을 만졌는 줄 알아? 그리고 넌 내 취향이 아니라고.”
짓이겨진 두손을 붕대로 싸매고 밥 먹여줘, 담배 사다줘, 조르는 야멸찬 남자. 그래도 차가운 타일 바닥 위로 연인을 이끌며 탱고를 추고 싶어해서 안쓰럽기만 한 남자 보영. 이 남자의 이야기를 끝으로 장국영은 홍콩을 제외한 나라의 관객에게 잊
장국영(張國榮) 세대에게 바친다 (1956.9.12∼2003.4.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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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성은 영화를 (재)창조했다다섯돌 맞는 서울여성영화제에서 만나는 새로운 여성영화들의 역동성, 그리고 다양성새로운 여성영화들이 온다! 이론으로 시작하여, 육체의 탐구를 넘어, `오늘 · 이곳`의 도발적인 에너지를 한껏 느낄 수 있는 영화들이 펼쳐 보이는 영화사의 새로운 지평에 여러분을 초대한다.“영화는 여성을 촬영한 남성의 역사다.” 좀 거칠기는 해도 여성주의적 자각을 거친 세대라면 공감할 만한 표현이다. 그런데 만약 여성이 카메라를 잡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람들은 이런 문제의식과 호기심을 묶어 ‘여성영화’라는 범주를 만들어냈고, 한국에서도 서울여성영화제가 그 자취를 추적하고 한데 모아 보여주기 시작한 지 벌써 다섯 번째, 햇수로는 7년째를 맞는다.그동안 여성영화는 어떻게 요동치고 있었을까. 이혜경 집행위원장은 “한마디로 무척 다양해졌다. 특히 한국의 여성영화와 서울여성영화제의 에너지가 한창 피어오르는 것을 느낀다”고 했다(<씨네21> 394호, 씨네인터뷰
제5회 서울여성영화제 가이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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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영화가 달라지고 있다. 다양하게 그리고 역동적으로, 그 스펙트럼을 한껏 넓혀가고 있다. ‘자기만의 언어’를 가진 여성 작가들이 그들의 성과 사랑을, 일상과 이상을 이야기한다. 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5인이 추천한 ‘새로운 여성영화’를 만나보자. 눈과 귀가 번쩍 열리는, 머리와 마음이 훤히 트이는, 충격적 만남을 보장한다.비너스 보이즈(Venus Boyz)감독 가브리엘 바우어/ 스위스/ 2001년/ 102분/ 35mm/ 다큐멘터리/ 새로운 물결프로그래머 추천사 _ 성의 경계 자체를 허무는 도발적인 드렉 킹의 에너지여자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가끔씩 혹은 평생 동안 남자 옷을 입고 남자 흉내를 내는 사람들. 보수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도착적이라고 여길 남장 여자들을 <비너스 보이즈>는 돋보이는 존재로 만들어주는 다큐멘터리다.영화 안에는 다양한 이유를 가진 드랙 킹(drag king)들이 나온다.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삶 자체이고 어떤 이에게는 즐거운 이벤트이거나 의식적인
제5회 서울여성영화제 가이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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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느 트리스테>(Anne Trister)감독 레아 풀/ 캐나다/ 1986년/ 103분/ 감독 특별전프로그래머 추천사 _이미지로 말한다. 어머니와의 유대를 통한 새로운 여성의 역사 쓰기침대에 모로 누워 훌쩍이는 여자의 등. 모래 바람이 이는 황량한 사막. 침묵하는 이 두 가지 이미지가 <안느 트리스테>를 열고 닫는다. 다시 침대에서 눈물을 삼키기까지, 다시 사막을 보기까지, 안느에겐 많은 일이 있었다. 아버지의 급작스런 죽음에 충격을 받고 스위스에서 캐나다로 떠나온 안느는 우연히 아동심리학자인 알릭스를 만나 함께 지내게 된다. 지혜롭고 여유로운 알릭스에게 의지하게 된 안느는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사랑이라고 느낀다. 알릭스는 ‘그런 식의 사랑’은 줄 수 없다면서도 안느를 변함없이 아끼고 보살핀다. 안느 또한 “날 사랑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며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충직한 남자친구를 떠나 보내고, 알릭스의 남자친구에게 모욕을 당하고, 오래 공들인 설
제5회 서울여성영화제 가이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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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트럭을 타고>(Because There’s You)감독 조이스 버날/ 필리핀/ 1999년/ 117분/ 아시아 특별전프로그래머 추천사 _달라진 필리핀 여성들의 사랑, 결혼에 관한 다양한 생각들을 엿볼 수 있는 영화주로 ‘내수용’으로 제작되고 유통됐던 이방의 영화들을 만나는 건 낯설지만 흥미로운 경험이다. 그것이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특징들이 만들어낸 여성 이슈들을 다양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영화화해내고 있으며 대중적 성공도 거두고 있다”는 필리핀 여성영화라면, 그 의미도 적지 않아 보인다. 그중 로맨틱코미디 <사랑은 트럭을 타고>는 만듦새와 이야기 자체의 새로움은 거의 없으나, 스테레오타입화된 여성 이미지와 가족의 개념을 뒤집어 보이려는 시도가 신선하게 다가온다. 필리핀 여성영화계의 기대주라는 조이스 버날 감독의 작품.누군가 ‘사랑은 교통사고와 같다’고 했다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선 그 표현이 은유가 아니라 직설이다. 명문가 규수와의 결혼을 앞두고
제5회 서울여성영화제 가이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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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여인상의 이단, 혹은 관능의 페르소나현대의 여성주의자들을 열광하게 만든 도금봉, 그 회고전의 의의1960년대 황금기의 한국영화에는 최은희, 황정순, 문정숙, 주증녀 등 훌륭한 여배우들이 많이 나온다. 희고 오동통한 얼굴과 독특한 음색을 지닌 도금봉은 때로는 이들 기라성 같은 스타들의 옆에 서 있는 조연으로, 때로는 틈새를 꿰찬 주연으로 자기만의 자리를 만들었다. 도금봉의 무엇이 오늘날 현대적인 여성주의자로 하여금 쾌재를 부르게 하는지, 여기 그 비밀의 지도를 펼쳐보기로 한다.주유신/ 영화평론가, 서울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cinefemme@hanmail.net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다름 아닌 ‘기억’이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서 스스로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역사를 써내려가기도 하고 자아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런데 20세기를 화려하게 장식하며 대중들을 위무해온 대중문화 속에서도 영화는 이러한 기억의 의미나 역할에 있어서 가장 중심을 차지한다. 영화를 만든다는
제5회 서울여성영화제 가이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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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를 찾아서매진예감! 서울여성영화제 화제작 9편영화제는 관객의 잔치다. 이 영화제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해마다 90%가 넘는 좌석점유율을 자랑한다. 의미도 좋지만, 재미난 작품을, 안전한 작품을 기대하는 관객이여! 그대들을 위한 일급 정보가 있다. 조기 매진이 예상되는, 그래서 예매를 서둘러야 할 작품들을, 여기 은밀히 소개한다. 소문내지 말 것!개막작 <미소>는 시력을 잃어가는 여류 사진작가가 극단적인 불안과 고통에 직면해, 초월과 비상을 꿈꾸게 되는 과정을 담담하게 따라간다. 반가사유상의 미소에서 착안했다는, 그 영화 <미소>를 수식하는 말은 참 많다. 박경희 감독의 연출 데뷔작이자, 임순례 감독의 프로듀서 데뷔작이자, 송일곤 감독의 배우 데뷔작. 이번 여성영화제 개막 상영이 ’월드 프리미어’라는 점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미소>의 제작과정을 지켜본 이들의 증언에도 주목하자. 그들은 <미소>가 제작 공정의 일선에 선
제5회 서울여성영화제 가이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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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지켜라!>는 이야기와 캐릭터 모두 지금까지 한국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아주 괴상한 영화다. 그러나 이건 분명 애니메이션이나 괴수가 나오는 특촬영화, 패러디영화가 아니다. <지구를 지켜라!>는 신랄한 드라마다, 철저하게 비주류 감성으로 무장한.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해줄 수 없는 마지막 반전은 너무 이상해서 오히려 현실적이다. 평론가들은 <지구를 지켜라!>를 어떻게 보는지. 김봉석에게 물었다. <지구를 지켜라!>는 4월4일 개봉한다.
<지구를 지켜라>. 이건 독수리 오형제에게나 어울릴 대사가 아닐까? <지구를 지켜라!>란 제목을 듣는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일 반응이다. 나 역시 그렇다. 스파이더맨과 엑스맨, 헐크까지 지구를 지키겠다고 나서는 판이지만 여전히 <지구를 지켜라!>라는 제목은 촌스럽고 유치하다. 지가 뭔데 지구를 지키겠다는 거야? 게다가 누구한테? 그런데 외계인이란다. 병구가 홀
<지구를 지켜라!> & 백윤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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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한 선배가 있었다. 시도 쓰고, 동화도 쓰던 그 선배. 엄청나게 가난한 탓에 중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채 막노동판을 떠돌았고, 글을 쓰면서도 돈이 떨어지면 여전히 막노동을 하곤 했다. 개인적으로 아주 친하지는 않았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자주 보고 집에 놀러가기도 했다. 한동안 그 선배의 얼굴이 보이지 않다가 아프다는 말을 들었다. 병원에 입원했고, 정신병원이란 말을 들었다. 정신분열증이었다. 얼마 뒤 조금 호전되어 퇴원했다는 말을 듣고는 친구들과 함께 집을 찾았다. 언덕을 올라 집으로 향한 때는, 날선 바람이 불던 연말이었다. 선배의 얼굴은 약간 수척했지만, 약간은 경박하게 느껴지던, 그 맑은 웃음만은 여전했다. 그런데 조금 달랐다. 선배는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엊그제는 지구의 미래가 걱정되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가 이 지구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를 고민하며 밤새 뒤척였다. 선배의 눈에는 밝은 빛이 서려 있었다. 그건 일종의 믿음이었다. 왜 그랬는
<지구를 지켜라!> & 백윤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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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지켜라!>를 절찬하는 이유 하나는 바로 그것이다. 데뷔작이라는 것. 요즘 한국영화의 신인감독들은 너무 물렀다. 좋은 영화를 만들고는 있지만 너무 쉽게 타협한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세련되고, 매끄럽고, 원숙하고, 장르적 규칙을 적절하게 수용하는 작품을 만드는 것은 나중에도 할 수 있다. 잘 다듬어진 데뷔작을 보는 일은 나름대로 좋은 일이지만, 희열을 주지는 못한다. 나는 지금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보았던 날을 잊지 못한다. 허름한 코아아트홀에서, 전혀 낯선 이름의 홍상수 감독이 만든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보고 나오자, 유난히 바람이 몸을 휘감고 돌아가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 세상이 조금 더 회색으로 보였다. <지구를 지켜라!>는 그런 점에서 탁월하다. <지구를 지켜라!>를 보고 나오면서, 주변을 돌아보니 기분이 묘했다. 현실과 비현실이 뒤엉킨 느낌은 이상하게 즐거웠다. <지구를 지켜라!>는
<지구를 지켜라!> & 백윤식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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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랄하고 비굴하고 때론 인간이길 포기했어요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고, 백윤식은 오십에 영화를 만났다. 50여년의 세월 속에서 30년 넘도록 브라운관의 스타로 군림해왔던 그는 <지구를 지켜라!>를 통해 연기인생의 새 장을 열었다. 1970년 KBS 공채로 연기활동을 시작한 이후 뭇 여성의 애간장을 태우는 꽃미남이었고, 특집극에서 나운규, 이중섭 등이나 <TV문학관>의 주연을 단골로 맡는 연기파였으며, <서울의 달> <파랑새는 있다>에선 무표정한 얼굴로 촌철살인의 유머를 구사해 ‘코미디언을 웃기는 연기자’로 불렸던 백윤식이지만 <지구를 지켜라!>의 강 사장 역은 완전히 새로운 도전이었다. TV와 제작 패턴이 크게 다른 영화현장에 적응하는 것에서부터 한국영화사에서 전례가 없을 정도로 황당한 내용의 시나리오를 소화하는 점,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을 표출해야 하는” 강 사장 캐릭터를 체화하는 일까지 그로선 하나같이 난
<지구를 지켜라!> & 백윤식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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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3. ‘찌리리’와 ‘찌지직’을 극복하라 -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살다
“잠깐 스톱. 영화사에서 온 분들 좀 불러줘요.” 백윤식은 등골 저편에서 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아직 촬영을 시작하기도 전인데 벌써 찌리리하다니.’ 백윤식은 걱정이 됐다. 일을 하다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을 맞거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몸 안 깊숙한 곳에서 전류 같은 게 발생하곤 하는데, ‘찌리리하다’는 건 이때 쓰는 그만의 표현이다. 이보다 더한 단계는 ‘찌지직’이라고 하는데, 촬영 도중 이 단계로 진입한 적이 없었던 건 천만다행으로 보인다.
이날의 ‘찌리리’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 쌀쌀하던 어느 날 신체의 틀을 뜨기 위해 미사리 부근의 특수분장 업체를 찾았을 때 발생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특수분장 직원이 그에게 “혹시 감기 걸리지 않으셨어요?”라고 물었다. 난데없는 질문에 도리질을 치며 맥락을 파악하려는데 갑자기 콧구멍만 남겨두고 머리 전체에 실리콘을 칠하는 게 아닌가.
<지구를 지켜라!> & 백윤식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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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5. 세대를 넘어 부산을 넘어 - 행운과 불운의 쌍곡선
따지고 보면 운이 좋은 거였다. 천재인지는 몰라도 특별한 것만큼은 확실한 장준환 감독이나 개성이 진한 홍경표 촬영감독, 집요할 정도로 자기 세계를 추구하는 장근영 미술감독을 굳이 거명하지 않더라도 그의 영화작업에 함께한 스탭들은 모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일벌레들이었으니까. 백윤식에게 2002년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단지 만족스런 영화 한편에 출연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대부분 20년 이상 어리지만 마음만은 어울릴 수 있는 ‘동료’들과 함께 보냈다고 추억하기 때문이다. 이건 스탭들이 그를 배려했던 만큼, 그 또한 그들의 젊음 안으로 들어가려 무던히 노력한결과이기도 하다. 장준환 감독에 따르면 백윤식은 촬영장의 활력소였다. 그는 김 형사 역의 이주현을 보면서 “쟤는 칙칙이(백윤식은 땀을 표현하기 위해 물을 분사하는 기구를 그렇게 불렀다)만 뿌려주면 좋아하더라” 식으로 엉뚱한 말을 툭툭 던져 촬영장의 긴장감
<지구를 지켜라!> & 백윤식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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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反戰)과 반전(反轉), 어두웠던 파티장전쟁과 쇼 사이에서 갈등했던 75회 오스카, 작품상은 <시카고>몇몇 스타들이 이라크 전쟁을 이유로 불참할 것을 밝혔을 때, 이번 오스카에서 반전의 목소리가 적지 않게 터져 나올 것은 이미 예상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지상 최대의 쇼'는, 세계 최고의 각본 없는 드라마답게 또 다른 반전을 준비하고 있었다.제75회 아카데미 영화상 주요 부문 수상 결과작품상 <시카고>(미라맥스 제작) | 감독상 로만 폴란스키 <피아니스트> | 여우주연상 니콜 키드먼 <디 아워스> | 남우주연상 에이드리언 브로디 <피아니스트> | 여우조연상 캐서린 제타 존스 <시카고> | 남우조연상 크리스 쿠퍼 <어댑테이션> | 각본상 페드로 알모도바르 <그녀에게> | 촬영상 콘래드 L. 홀 <로드 투 퍼디션> | 각색상 로널드 하우드 <피아니스트> | 의상상 콜린 애
제75회 아카데미 영화상 The 75th Annual Academy Award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