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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어>(Cure)
내 안에 악마가 숨어 있어
나카다 히데오의 <링>과 이토 준지 원작의 공포영화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직도 우리는 일본 공포영화의 입구에서 서성이는 중이다. 고전인 고바야시 마사키의 <괴담>은 1964년 작품이고, 고어영화인 이케다 도시하루의 <이블 데드 트랩>은 너무 잔혹해서 수입할 수 없다면 마지못해 수긍할 수는 있다. 하지만 구로사와 기요시의 1997년 작 <큐어>는 왜? 이미 수입까지 된 상황에서 <큐어>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 짜증나는 일이다.
83년 <간다천 음란전쟁>으로 데뷔한 구로사와 기요시는 누벨바그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장르영화에 무한한 애정을 바쳐온 감독이다. <인간합격> <카리스마>처럼 장르에서 벗어난 걸작들과 함께 <지옥의 경비원>에서 시작하여 <큐어>를 거쳐 <카이로>에 이르는 구로사와 기요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2] - 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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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니스>(Happiness)
신경쇠약직전의 미국으로 오세요
토드 솔론즈의 <해피니스>의 국내 배급사가 있다는 소식은 뜻밖이다. 한국의 영화시장에 대한 내 상상력은 이처럼 배짱이 없다. <해피니스>에는 소아성욕자인 정신분석가, 사정을 못해 안달난 열한살 먹은 남자아이, 폰섹스에 열중하는 비루한 사내가 화면을 들락거린다. 그들의 삶은 어딘가 덧나 있지만, 그걸 알 길이 없다. 고로 이 악몽 같은 영화를 사랑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이 영화를 일단 보고 난 뒤라면 사정은 달라질 것이라고 나는 장담할 수 있다. 이 뒤숭숭한 영화를 잠시 기억에 가둬놓을 수 있겠지만 이 영화를 기억의 휴지통에서 비워줄 ‘삭제’ 키는 어디에도 없다. 당장 내가 그렇다. 이 퍽퍽하고 짜증난 영화를 당분간 잊었다 싶은데, 이 영화는 수시로 악의적인 미소를 띠며 귀환한다.
<해피니스>가 돌아오는 기억의 궤도는 따로 있다. 그것은 외상의 흔적을 타고 흘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3] - 해피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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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므파탈>(Femme Fatale)
히치콕, 누아르에 입맞추다
유럽영화에서 할리우드영화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너의 징후를 즐기라며 핏대를 세우고 의자를 옮겨다니던 슬라보예 지젝은, 여전히 현대 영화이론을 매혹시키고 있는 두 가지 소재를 선언하며 마지막 장의 첫 문단을 시작한다. ‘히치콕의 영화와 필름누아르.’ 이 둘은 한 등에 붙어 있지만, 한 몸통으로 취급받지 않는다. 히치콕은 히치콕이며, 누아르는 누아르이다. 그러므로 세상 어느 영화이론가보다도 히치콕을 잘 알고 있는 히치콕 문하생 브라이언 드 팔마가 필름누아르에 관심을 쏟지 않는다면 ‘히치콕적 누아르’는 그 어디에서도 손쉽게 탄생할 수 없다. 이 희박한 창조적 결합의 순간만으로도 <팜므파탈>의 존재는 희귀하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묻어둔다면 언제 다시 히치콕과 누아르의 대면을 목도하게 될지는 정말 자신할 수 없다.
아름답고 치명적인 매혹적 요부, ‘팜므파탈’. 때로는 순수함으로, 때로는 요염함으로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4] - 팜므파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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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赤い橋の下のぬるい水)
오늘, 그는 다시 일어선다
한숨을 돌리려 멍하니 하늘을 보다 어떤 영화가 떠올라 혼자 키득거려본 적이 있으신지? 침울하고 피곤해서 만사가 귀찮아질 때 어떤 영화에 대해 떠들다가 기분이 좋아지는 걸 느껴본 적 있으신지? 아마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영화가 <오스틴 파워>인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인지는 달라도. 내겐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이 그렇다. 2년 전에 본, 흐릿한 기억이지만 이 영화를 생각하면 언제나 미소짓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차마 거울을 보며 확인해보지는 않았다. 혹시 음흉한 미소일까 겁이 난다.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의 지워지지 않는 잔상은 섹스를 하면서 물을 뿜어내는 신비한 여인이다. <우나기>를 본 사람이라면 기억하겠지만, 출옥한 뒤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야쿠쇼 고지에게 따뜻한 도시락을 전해주려 다리 위에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5] -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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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 슈슈의 모든 것> (リリイ·シュシュのすべて)
14살 봄, 우리들은 썩기 시작했다
“그녀가 태어난 것은 1980년 12월8일 22시50분 이 날짜는 존 레넌이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에게 살해당한 일시와 완전히 똑같다. 하지만 내게 있어, 이 우연의 일치는 의미가 없다. 내게 중요한 것은, 그날, 그 시각에 그녀가 태어났다는 사실뿐이다. 그녀의 이름, 릴리 슈슈….”
분노의 계절을 잊었던가. 푸른 꿈보다는 살의(殺意)가 더욱 치밀어올랐던 그 시간들을. ‘데미안’마저 부재했던 그 완벽한 고립의 시간들을. 이와이 순지의 최근작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14살의 봄, 유충의 시대를 끝내고 음울한 누에고치에 갇힌 번데기의 계절로 접어든 ‘소년, 소녀들의 모든 것’이며, 의 영상적 화사함과 <스왈로우 테일 버터플라이>의 주제적 어두움을 한 작품 속에서 완벽하게 조율하게 된 감독 ‘이와의 순지의 모든 것’이다.
눈이 시린 초록빛 논 한가운데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6] - 릴리 슈슈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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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링 포 콜럼바인>(Bowling For Colombine)
멍청한 백인들!
<볼링 포 콜럼바인>을 뜻이 통할 만한 제목으로 옮기자면 ‘총질하는 고딩의 볼링’쯤 되지 않을까 싶다. 콜럼바인은 1999년 4월20일 에릭과 딜란이라는 이름의 미국 아이들이 교내에서 총을 마구 쏘아 12명의 학생과 교사 한명을 죽게 했던 그 고등학교 이름이다.
볼링과 총질하는 아이들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을까? 감독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특기 사항은 두 소년이 체육 수업으로 볼링반에 들었고 사건 당일 아침에도 볼링을 했다는 것 정도다. 그런데 볼링을 하면 폭력적이 되나? 물론 이건 마이클 무어 감독의 엉뚱한 유머감각의 소산일 뿐이다. 그가 진정으로 궁금해 하는 것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왜 그토록 많은 총을 가져야 할 만큼 두려움에 휩싸여 있으며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총질을 하고 급기야 어린아이들까지 학살의 주범이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건 나도 궁금하다. 총기 소유에 관한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7] - 볼링 포 콜럼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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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달렌 시스터즈>(The Magdalene Sisters)
주여,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사람들은 괴담을 하나쯤 간직하고 있다. 제도화된 사디즘의 포로가 되어 고생한 기억이 있다. 그것은 많은 경우 학교나 군대와 관계되고, 더러는 가족과 관련되기도 한다. 선택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이 피학의 경험들은 각별히 끔찍하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마치, 헨젤과 그레텔이 마녀집이 있는 숲을 되돌아보는 듯한 말투로 진저리치게 만든다.
피터 멀랜 감독의 <막달렌 시스터즈>는 그처럼 널리 퍼져 있는 악몽의 선정적인 원형을 관객의 면전에 똑바로 내던진다. <막달렌 시스터즈>가 고발하는 ‘감옥’은 가톨릭 교회다. 그래서 지난해 가톨릭 국가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화제와 후유증을 낳았다. 1960년대 아일랜드에는 ‘막달렌 세탁소’라고 불리는, 교회가 후원하는 수용시설이 있었다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8] - 막달렌 시스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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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Le Fils)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소년이 묻는다. “올리비에라고 불러도 돼요?” 흠칫 놀란 남자가 되받아친다. “왜지?” “다른 애들도 모두 그렇게 부르니까요.” 이 아이 프랜시스, 재목 하나 가뿐히 들지 못하는 이 왜소한 열여섯 소년은 아직 모른다. 그가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프랜시스는 5년 전 올리비에의 다섯살 난 아들을 살해했다. 사람을 잊는 일은 사람을 기억하는 일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어서, 아내마저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올리비에는 아직도 단 한번 웃지를 못한다. 그런 올리비에에게, 아들의 살인자는 이름을 불러도 괜찮은지, 보호자가 돼줄 수 있는지, 천진하게 부탁한다. 얼마나 참혹한 심정일까. 그러나 올리비에는 무심히 대답한다. “네가 원한다면….” 하얀 빛으로 가득 찬 두꺼운 안경 렌즈에 가려, 올리비에의 눈동자는 어떤 표정을 띠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영화 <아들>은 실화를 단서 삼아 시작됐다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9] -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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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맨스 랜드> (No Man’s Land)
누구나 본성의 포로라네
“쯔즛, 르완다는 정말 끔찍한 난장판이군.” <노 맨스 랜드>에서 신문을 보던 한 보스니아 군인이 이렇게 말한다. 세르비아와 전쟁 중인 그가 아프리카 르완다의 내전을 개탄하는 이 장면은 보는 이의 혀를 차게 만든다. 외부의 시각으로 보면 르완다나 보스니아나 오십배 백보일 텐데 전쟁에 참가하는 당사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인간의 생명을 빼앗을 용기를 주는 것은 자신이 참가한 전쟁이 성전이요 정당방위라는 믿음이다. 지금 부시가 획책하는 전쟁에서도 다르지 않다. 후세인과 오사마 빈 라덴을 동일한 악마로 규정하는 이 선동은 제3자의 눈에 너무 뻔한 거짓말인데 미국인의 전쟁지지율은 반전의 목소리보다 높다. 이성을 믿는 근대의 정신도 이런 사태 앞에 속수무책이다. 전쟁과 홀로코스트의 역사에서 인류는 이성적으로는 화해와 평화의 교훈을 배웠지만 감정적으로는 반목과 적대감만을 키웠는지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10] - 노 맨스 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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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감독, 정말 헷갈리게 하는 군<패왕별희>의 첸카이거가 <투게더>로 돌아왔다. 한국영화 제작문제로 재작년에 잠시 방한한 적이 있을 뿐, 그는 실패한 <풍월> 이후 7년 동안 한국 관객과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세계의 관객의 뇌리에서도 조금씩 잊혀져갔다. 장이모는 그나마 간혹 대중적 성공이라도 거뒀지만, 동세대인 그는 제대로 거론조초 되지않았다. 그는 그래도 괜찮을만큼 조락한 감독인가? <투게더>는 헷갈리는 영화다. 퇴행과 부활의 가능성 모두를 품고 있다.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그의 근작들을 다시 훑어보며, 미완의 첸카이거론을 다시 쓴다. - 편집자첸카이거가 찍은 <황토지>는 내 고향과 비슷했고,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내가 왜 그렇게 감동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영화를 보고 난 뒤 결심했다. “영화를 찍을거야, 딴 건 필요없어.” -<지아장커, 중국영화의 미래 중에서>-첸카이거는
<투게더>로 돌아온 첸카이거의 진실 혹은 모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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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능가하는 <황제와 암살자>한국에서 첸카이거는 시네마테크의 보물에서 예술영화의 거장으로 상승하고 있었다. 국제화의 시작을 알린 <현 위의 인생> 이후 첸카이거는 칸에서 <패왕별희>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영화에 관한 평가들은 엇갈리기 시작했다. 다시 보아도 분명한 건(내 입장에서) <패왕별희>에서의 역사적 지표들은 이 영화를 알레고리적으로 읽도록 유혹하고 있는 함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황토지> <대열병> <해자왕>에 들어 있는 내셔널 알레고리, 또는 미학적 창조력을 어떻게 포장해야 서구의 관심권 안으로 더 진입할 수 있는지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던 셈이다.<황토지><패왕별희>영화 속 주인공인 샬로와 데이의 동성애적 애증의 소사는 마치 중국 현대사의 분기점들과 다면적으로 얽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만 평행할 뿐이며, 비스듬히 지나치고 있다.
<투게더>로 돌아온 첸카이거의 진실 혹은 모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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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첸카이거는 다시 <투게더>로 돌아왔다. <황제와 암살자> <킬링 미 소프틀리> <투게더>는 그 의미상의 위치가 서로 다르다. 오히려 <황제와 암살자>는 알레고리화의 속임수를 덜어낸 첸카이거의 솔직함을 보는 것에 반갑다. <킬링 미 소프틀리>는 철저한 실패작이지만, 그 실패의 의미를 장르에 대한 인식부족과 시스템에 대한 역부족으로 충분히 이해가능하다. 그러나 <투게더>는 그 둘 모두와 다르다. <투게더>는 테크니컬한 면에서 결코 뒤처지는 영화가 아니다. 또 <황제와 암살자>에서 보여준 인성에 대한 연구는 이제 이 영화에서 소박한 믿음의 차원으로 승화되어 있다. 때문에, 이 영화를 기술적으로 훌륭하다고 말할 때 입을 막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첸카이거가 다시 한번 외국소설 중 하나를 골라 취향에 기대어 휴머니즘을 말했더라도 모순은 별로 커보이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첸카이거는 이
<투게더>로 돌아온 첸카이거의 진실 혹은 모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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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라> 보러가자!! 3월20일부터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일본영화 거장 15인전우리에게 1950년대는 암흑의 시대였다. 빈곤과 민족분단의 역사로 기록되는 것이다. 대조적으로 일본의 1950년대, 특히 일본영화는 새로운 ‘황금기’를 누렸다. 연합군 총사령부, 즉 GHO는 일본영화에 대한 검열을 철폐했으며 영화작가들은 숨통을 틔웠다. 영화산업 역시 전성기를 누려 1958년 일본의 영화관람객은 11억이라는 천문학적 수치에 달했다. 패전의 쓰라린 기억을 간직한 대중을 위로하는 영화에서 각종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하는 작가영화까지 일본영화의 스펙트럼은 전쟁 이전보다 다양해졌다. ‘일본영화의 황금기 1950년대 거장 15인전’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고전영화가 특별상영된다. 이번 행사는 영상자료원과 일본국제교류기금, 도쿄국립근대미술관 필름센터가 공동주최하는 행사이며 3월20일부터 30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 특유의 댄디즘을 구현하는 청춘영화에서 특촬물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l
일본영화의 황금기 1950년대 거장 15인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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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 | 鍵 1959년 감독 이치가와 곤 출연 교 마치코 상영시간 107분 컬러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원작을 영화화한 것. 일본영화의 ‘스타일리스트’ 이치가와 곤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겐모치는 부인에게 비밀로 한 채 정력증진을 위해 병원을 다닌다. 겐모치는 병원 인턴인 기무라와 절친한 사이다. 기무라가 겐모치의 집을 방문해 술을 마시는 도중 부인이 벌거벗은 채 욕실에서 잠이 들자 겐모치는 부인을 기무라에게 맡긴다. 한편 기무라는 겐모치의 딸과 비밀스런 만남을 갖는 중이다. 시노다 마사히로 감독은 이치가와 곤의 영화에 대해 “순수한 쾌락의 세계”라고 표현한 적 있다. 탐미적 영상을 만드는 것에 일가견이 있다는 의미. <열쇠>는 어느 중년 부부, 그리고 그들의 딸과 한 의사에 관한 영화다. 네 사람은 성적으로 서로 복잡한 관계에 놓이게 되고 관능의 세계에 몸을 맡긴다. 영화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원작에 비해 관능의 분위기는 다소 퇴보한 듯하지만 인물의 심리묘사는 더 치밀하다. 이
일본영화의 황금기 1950년대 거장 15인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