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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는 누구나 사랑에 빠진다.’ 세계적인 감독들이 참여한 옴니버스영화 <사랑해, 파리>는 이처럼 대책없이 낭만적인 문장을 새기며 시작한다. 진짜 파리 사람들이 듣는다면 피식 웃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파리의 여행자들에게 이런 꿈을 꿀 권리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진짜 여행보다 달콤하고 진짜 풍경보다 더 로맨틱한 파리의 영화들을 보며 잠시 사랑에 빠져보는 것도,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는 한 가지 방법!
1. 모든 길은 에펠탑으로 통한다
에펠탑은 파리에 대한 영화에서 일종의 필요조건이자 출발점이다. <파리의 연인들>처럼 파리를 조망하는 영화들의 시작점이고, <섹스 & 시티>의 캐리(사라 제시카 파커)처럼 아침에 눈떠 호텔 창밖으로 에펠탑을 보면서 파리에 도착한 것을 확인하는 여행자들의 출발 지점이다. 또 <파리가 당신을 부를 때>의 미키(빌리 크리스털)가 앨런(데브라 윙거)과 첫 데이트를 하는, 사랑이 시작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파리에서 사랑에 빠지거나, 파리와 사랑에 빠지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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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난니 모레티, 기타노 다케시, 우디 앨런…. 이들은 명감독이기 이전에 자신의 영화에 직접 출연한 배우다. 명감독은 저명한 영화학교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사실 가장 훌륭한 영화학교는 바로 현장이다. 연기해본 이들이 배우들을 조율할 줄 알고, 감독과 함께 일해본 이들이 감독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잘 파악하게 마련이다. 최근 할리우드에선 감독과 배우를 겸하는 이런 움직임이 많아졌다. 왕년의 카우보이가 벌써 30여편의 필모그래피를 구축한 거장이 되었고, 액션 블록버스터의 영웅이었던 한 남자는 논쟁작을 또 한편 내놓았다. 연기의 끈을 놓지 않은 채 메가폰을 잡은 이들. 클린트 이스트우드부터 에단 호크까지, 현재 활발하게 활동 중인 배우 출신 감독 10명을 소개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삶을 꿰뚫는 카우보이
대표작_<용서받지 못한 자>(1992) <퍼펙트 월드>(1993)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
대단한 도전! 연기가 가장 쉬웠어요, 메가폰을 잡은 배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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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없다면 영화도 없다. 극히 소수의 예술영화를 제외하면, 음악이나 노래 없이 영화의 분위기를 그럴듯하게 끌어올리기란 쉽지 않다. <물랑루즈> <삼거리극장>같은 뮤지컬영화나 <도어스> 같은 음악인의 전기영화처럼 아예 노래가 주연급 중요성을 띠는 경우도 있고, <러브레터>처럼 배경에 잔잔하게 깔리는 음악이 영화의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경우도 상당수다. 영화의 주제곡이 울려 퍼지면 영화의 분위기가 곧 러브러브 모드가 되겠구나 추측할 수 있고, 영화의 주제곡이 단조로 변주되면 곧 슬퍼지겠구나 예측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수가 아닌 주인공이 노래하는 장면들은 또 다른 맛이 있다.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에서 카메론 디아즈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기억하는지. 노래를 잘하는 것이 아닌 건 기본이고, 사실상 음치인 그녀가 최선을 다해 노래를 부르는 그 장면은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준다. <후아유>에서 조승우가 이
영화 주인공들이 부르는 노래 명장면, 현실적으로 활용하는 노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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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5일 개봉하는 <록키 발보아>는 <록키5> 이후 16년 만에 만들어지는 속편이다. <록키> 1편이 제작된 해로부터는 30년이 흘렀다. 무명이던 실베스터 스탤론은 1976년 자전적 이야기를 담아 쓴 시나리오로 주연에 데뷔해 전례없는 영화적 히트를 경험했다. 록키는 신드롬이 됐고 스탤론은 아메리칸 드림의 신화가 됐다. 이후 스탤론의 경력은 부침이 심했다. <록키5>와 <람보3>가 각각 흥행과 비평에서 참패한 뒤로 스탤론의 커리어는 내리 하향세였다. 사람들은 그를 록키나 람보로만 기억했고 그렇게 그가 영원하기만 기대했다. (본인의 선택에도 문제가 있었겠지만) 스탤론이 선택하는 새로운 시도들은 대중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록키는 그가 죽을 때까지 벗어나야 할 굴레였다. 스탤론이 돌아온 것은 그 자리다. 그의 몸은 늙고 처졌고, <록키> 시리즈를 동시대에 즐겼던 관객은 극장을 자주 찾지 않는 세대가 됐다. <록키 발
실베스타 스탤론, <록키 발보아>로 다시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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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26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구로사와 기요시와 관객의 만남이 있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학교’란 이름으로 마련된 이 행사에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자신에게 영감을 준 대표적인 영화들을 관객에게 소개했고, 통역을 통해 전해진 그의 영화 이야기는 곧 그 자신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단서이기도 했다. 1시간30분 동안 숨죽여 들었던 구로사와 기요시의 이야기를 여기에 싣는다.
2004년에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초청해주셔서 강연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이 두 번째인데,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정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2004년에 이미 제 영화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이야기를 해버렸어요. ‘나의 공포영화론’이란 제목이었죠. 나의 영화와 영화연출론, 그리고 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때 강연했던 원고는 제가 가끔 대학에서 강연을 할 때도 써먹곤 합니다. (웃음) 이번에는 좋아하고 영향을 받은 영화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아까부터 제가 영향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영화들에 대한 구로사와 기요시의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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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는 바다 건너의 친구에게도 손짓을 했다. 지난 2004년, 서울아트시네마가 개최한 회고전을 통해 한국 관객과 만났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첫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부터 멀리서나마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왔던 친구들 중 한명이다. 두 번째 영화제를 맞이해 자신의 신작인 <절규>를 들고 한국을 찾은 그는 2박3일의 짧은 시간 동안에도 관객에게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월26일 열린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학교’에서는 자신의 영화세계에 영향을 끼친 영화들을 소개했는가 하면, 다음날 열린 봉준호 감독과의 대담에서는 서로의 영화에서 느낀 감동과 호기심을 고백했다. 또한 그는 한국의 관객이 <절규>에 보여준 관심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국 관객은 전세계에서 가장 예리한 영화감상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 관객이 감독인 나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해줘서 기쁘다.” 1월의 마지막 주말, 구로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과 봉준호 감독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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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이오지마 전투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오지마 전투는 해병대의 역사에서도 가장 큰 전쟁이었지만 제대로 거론된 적이 없었다. 사진뿐이었다. 그러나 원작에 끌린 이유는 <아버지의 깃발>이 전쟁에 관한 책이 아니라 성조기를 세운 군인들에 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가족에 관한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궁금했었다. 내가 조사를 하면서 만난 참전용사들은 최전선에서 고난을 겪었지만 거의 침묵을 지켜왔다. 만일 누군가가 전쟁터에서 자신이 겪은 일에 관해 떠벌린다면 십중팔구 그는 후방에서 사무직으로 근무했을 것이다. (웃음) 조 로젠탈이 찍은 사진은 이오지마 전투가 시작되고 나서 4, 5일 뒤에 찍은 것이었는데, 그때라면 전투의 1/4이 채 진행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나는 진짜 전투가 궁금했다.
-제임스 브래들리의 원작 <아버지의 깃발>은 무척 방대한 이야기다. 어떻게 시나리오로 옮겼는가.
=그 책은
전쟁이 무익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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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달 동안 협상을 한 끝에 이오지마 방문 허가를 받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검은 모래로 덮인 해변에 앉아보았다. “해변에는 자그마한 일본군 분대와 미국인 비행사 몇몇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해변에 앉아 있노라니 섬으로 상륙해오는 군대와 폭력의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이오지마, 한자 발음으로 유황도(硫黃島)는, 1945년 2월16일부터 한달 남짓 제2차 세계대전의 격전지가 되었고 전후(戰後) 일본군 2만명이 묻힌 성지로 여겨지는 섬이었다. 비행기와 전함을 이용해 사전폭격을 퍼부었던 연합군은 상륙만 한다면 며칠 안에 그 섬을 점령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일본군은 거의 모든 병사가 전사하거나 옥쇄할 때까지 저항했고, 전투는 쿠리바야시 중장이 최후의 300명을 이끌고 옥쇄나 마찬가지인 돌격 작전을 감행한 3월26일에야 끝이 났다. 연합군까지 2만8천여명에 달하는 군인이 유황 냄새에 휩싸인 채 전사한 그 섬의 전투.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로부터 온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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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해였던 1945년 일본은 조그만 화산섬 이오지마를 연합군한테 빼앗기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전투는 일본 본토 공략의 시작이 되었고, <AP통신>의 조 로젠탈은 여섯 군인이 이오지마 스리바치산에 성조기를 세우는 사진을 찍어 퓰리처상을 받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만든 두편의 영화 <아버지의 깃발>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는 이 이오지마 전투와 로젠탈의 사진을 출발선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깃발>의 미군들은 일본군이 숨어 총탄을 퍼붓는 이오지마 벼랑을 공포에 질려 바라보지만, 그 동굴 안으로 들어간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는 마실 물도 없이 옥쇄를 강요받는 일본군의 공포를 보여준다. 서로 떨어진 두 가지 이야기이면서, 하나로 더해야만 온전한 기억이 되는 영화들. 허문영 영화평론가가 아직 국내 개봉이 확실하지 않은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를 2월15일 개봉예정
마지막 카우보이, 위대한 전쟁영화를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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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첫인상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포스터. 포스터를 뜯어보면 해당 영화가 어떤 장르를 따르고 어떤 배우를 내세우며 어떤 내용을 담아낼지 짐작할 수 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속담처럼 그러나, 국내용 포스터와 해외용 포스터 사이에는 쉽게 가로지를 수 없는 강줄기가 존재한다. 개봉하는 나라 혹은 그 나라 관객의 성향에 따라 똑같은 영화일지라도 예술영화로, 액션영화로, 멜로영화로, 심지어는 에로영화로도 포장될 수 있기 때문. 과거엔 해외배급사에서 그들의 입맛에 맞게 변형시키곤 했던 해외용 포스터는 한국영화의 위상이 높아지고 해외 개봉 사례도 늘어나면서 해외 마케팅에 있어 중요한 요소로 부상했다. 최근 해외 마켓을 위한 포스터를 별도로 제작하거나 해외용 포스터에 사용할 사진을 따로 촬영하는 일도 있을 정도다. 여기 국내용과 해외용의 차이가 확연한 영화 6편을 불러모았다. 이들을 통해 한국시장과 해외시장의 입맛은 어떻게 다른지 느껴보시길.
가족 사투극이냐, 괴
첨보는 포스터라구? 나 외국 물 먹어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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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맛깔스러운 조연이 아니면 덜 불러주는 터라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무엇보다 성실하고 진지하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원래 악역을 하기로 했던 배우가 갑자기 출연을 못하게 돼서 부탁했다. 부담이 큰 촬영 초반이라 적임자를 찾기도, 누군가에게 선뜻 말을 꺼내기도 쉽지 않았다. 나 역시 그에게 제안하면서 주저하기도 했다. 워낙 선한 인상과 성격의 소유자라서. 근데 독특한 양아치를 보여주더라.”(노동석 감독)
인터뷰에 응하기까지 최성진(37)은 꽤 망설였다. “내가 아직 배우를 꿈꾸고 있나”라고 수십번 자문했다고 한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이후 출연작이 없는 게 먼저 마음에 걸렸다. 족발집 배달부터 광고전단 납품까지, 다른 일로 생계를 꾸리느라 그는 ‘1년 넘게’ 오디션조차 보지 못했다. “연기는 엄두조차 나지 않더라.” 배우로서의 삶을 잠시 접어둔 동안 ‘연기의 맛’을 뒤쫓았던 오랜 시간들은 유령처럼 되살아나 괴롭혔을 것이다. “세상을 바
팍팍한 일상에서 건진 연기의 맛, 최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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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강의를 하다가 알게 됐다. 그 친구가 나온 단편영화를 여러 편 봤는데 보면서 재밌다고 생각했다. 매력있게 생각하는 점이라면 마스크도 그렇고 연기하는 패턴도 그렇고 굉장히 다르다. 기존 배우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스타일이다. 목소리, 표정, 연기가 다 그렇다. 그 특이함이 인상적이어서 그런지 영화과 교수들 몇몇이 그 친구를 아주 좋아한다. (웃음)”(김성수 감독)
몇분인가 대화를 나누다 고향을 묻자 그가 되묻는다. “티 나요?” 경상도 억양을 겨우 고쳤는데 요즘 연습 때문에 도졌다며, 억울해한다. “최근에나 사투리 연기가 받아들여지는 거지 과거엔 안 그랬어요. 하도 안 고쳐져서 울기까지 했어요. 사투리 쓰는 햄릿을 할 순 없잖아요.” 이희준은 영남대 화공과 출신이다. 군 입대 한달 앞두고 선배들과 술을 마시다 4차로 자리를 옮기던 중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얼떨결에 군면제를 받고 방황하던 중이었다. “술을 엄청 먹고 길가에서 구토를 하고 있는데 전단지가 보였어요. ‘연극
밀양 연극촌과 예술종합학교가 낳은 독종, 이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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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몸을 잘 쓰는 배우 같다. 유연성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손이나 얼굴 등의 움직임을 이용해서 정확하게 자기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배우란 생각이 든다. 몸짓이 아주 훌륭한 배우다. <마법사들> 작업하면서 느낀 건데 하는 연기마다 대본이 원하는 것 이상을 주는 사람인 것 같다. 내가 상상한 이상의 것들을 연기로 묘사해줬다. 영화쪽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남자배우들 중엔 연극계에서 옮겨온 사람들이 많은데 여배우쪽은 드물다. 이승비는 <갈매기>나 <이발사 박봉구>, 최근에 공연했던 <마리화나>도 그렇고, 연극쪽에서 강한 역들을 많이 해왔다. 탄탄한 기본기와 열정을 다진 사람이다. 그런 것이 영화쪽으로 옮겨져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송일곤 감독)
유독 뒤늦은 수배다. 송일곤 감독의 <마법사들>(2005) 여주인공으로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을 때 이미 그는 연극계에서 신인상 두개를 탄 뒤였다. 2002년 최우진 연출의 &
무대에서 싹을 틔운 망울, 이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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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는 1999년 단편영화 <동면> 때 처음 만나 친해졌고, 이후 <말아톤>과 <좋지 아니한가>에서도 함께 일하게 됐다. 그는 외면이 번쩍거리는 배우는 아니다. 하지만 나이보다 훨씬 깊이있는 연기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선 굵은 연기가 가능하면서도 여성적인 느낌이 있어 디테일한 연기에도 능하다. <좋지 아니한가>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큰 비중이 아니지만, 기홍이는 관객의 기억에 남을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이제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 ‘스위치’를 찾아내기만 한다면 그는 훨씬 더 큰 배우가 될 것이다. 그는 가공하기에 따라 좋은 보석이 될 수 있는 원석이다.”(정윤철 감독)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대기업에서 재무를 담당하던 우기홍이 1998년의 어느 날 갑자기 회사를 그만둔 것은 “서로 눈치보고 뒤돌아서면 욕을 하는” 생활이 견디기 힘들어서이기도 했지만, 고등학생 때부터 열정을 담아온 밴드 활동을 계속하고픈 욕망이
동면 끝, 좋지 아니한가? 우기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