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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고 내년에 일본 갈 생각이다.” 농담이 아니라면 큰일날 뻔했다. 내년에 더 열심히 하라고 모신 자리인데, 접고서 훌쩍 떠나겠다는 협박부터 꺼내니 말이다. 일본영화를 적극적으로 소개하겠다고 CQN명동을 차린 지 벌써 1년. 본인은 “일본과 달리 극장 성수기와 비수기의 극심한 차이를 체감하고서 한국영화 시장에 관한 공부를 톡톡히 했다”고 하나 “때론 1일 관객이 20명에 불과한 상황”을 웃으며 견뎌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명동에 CQN이라는 아지트를 차린 뒤, <박치기!>를 비롯해 <린다 린다 린다> <유레루> <디어 평양> 등을 직접 투자·배급한 씨네콰논 이애숙 부사장. 올해를 두고 그는 절반의 성공이라고 평한다. “예전의 명동이 아니더라. (웃음) 극장 오픈하면서 투자한 것을 벌충할 만큼 수익을 거두진 못했다. 기대에 비해 60% 정도 해낸 것 같다. 다만, 새로운 도전이라면서 여기저기서 응원해주고 지지해주고. 주목을 끌어내는
일본영화 투자·배급사 씨네콰논 이애숙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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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결단>의 카메라는 질퍽하고 펄떡거린다. 인물들의 숨소리, 땀, 눈빛이 콘트라스트 강한 조명 아래 하나하나 잡힐 만큼 집요하고 뜨겁다. 최호 감독과 <바이준>을 작업했던 오현제 촬영감독은 최호 감독에게 시나리오를 건네받으며 “장르적으로는 누아르, 그러나 사실감있는 누아르”라는 설명을 들었다고 했다. “섞일 수 없는 두 단어를 듣고 상당히 고민했다. 그러다 어떤 영화를 보고나서 기사를 봤는데 ‘다큐적 누아르’란 말이 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든 게 명확해졌다.” 그리고 오현제 촬영감독은 이 영화를 100% 핸드헬드로 촬영하자고 감독에게 제의했다. 줌인·아웃이 들어간 숏만 빼고 <사생결단>은 처음부터 끝까지 촬영감독이 ARRI LT 기종 카메라를 자신의 어깨 위에 얹고 찍은 영화다. 추운 겨울, 굳어지는 근육의 고통을 못 견뎌 트라이포드에 살짝 얹어놓고 포기할까도 했는데, 러시를 보는 순간 “느낌 자체가 달라서” 4개월 반을 끝까지 갔다. 이상
<사생결단>의 촬영감독 오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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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빌 돌(Devil Doll)이 누구야? 영화 <삼거리극장>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정보를 모은 사람이라면 분명 이런 질문을 떠올렸을 것이다. 여기저기 기사화되기도 했지만 전계수 감독은 <삼거리극장>의 시나리오를 이탈리아 베니스 출신의 아트록밴드 ‘데빌 돌’의 음악을 들으면서 썼고, 김동기 음악감독에게 시나리오를 건네줄 때 “데빌 돌이 컨셉”이라고 했다. “경외의 대상일 뿐 감히 모방도 할 수 없다”고 여겼던 존재의 이름을 대학 선배이자 감독에게서 듣는 순간, 김동기 음악감독은 ‘데빌 돌 흉내냈네’라는 말만 들어도 성공일 거란 생각으로 작업에 뛰어들었다. 저예산 기획영화라는 압박 때문에 결국 <삼거리극장>의 전체 음악은 애초 두 사람이 의도했던 록뮤지컬 스타일은 되지 못했지만 한국영화로서는 요즘 관객이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사운드트랙 감상 기회를 주는 건 확실하다. 경쾌한 인디록 넘버, 고란 브레고비치 곡들을 염두에 두고 쓴 집시음악풍의 넘버 그리
<삼거리극장>의 음악감독 김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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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1학년 때인 1997년 어학연수차 뉴욕에 갔던 하정우는 우연히 한 영화학교 학생들의 영화에 출연하게 됐다. 오전에는 어학 수업, 저녁에는 영화 촬영이라는 바쁜 나날 속에서 삶의 희열을 느끼던 그는 두손 모아 기도했다. “하나님, 저 여기서 제대로 된 영화 한편 찍게 해주세요.” 그리고 9년 뒤 그의 소망은 이뤄졌다. 올 여름 그는 뉴욕에서 촬영된 김진아 감독의 <네버 포에버>에 남자주인공 지하 역으로 출연했다. 그가 2006년을 “믿을 수 없었던” 한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랜 희망이 이뤄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와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 등 지난해 말의 기세를 몰아 올해 김기덕 감독의 <시간>과 이형곤 감독의 <구미호 가족>에 출연했고, 결국 ‘충무로 차세대’ 리스트 최정점에 이름을 올려놓았다.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터무니없을 정도로 리얼한 연기를 펼쳤던 그는 <시간
<시간> <구미호 가족>의 배우 하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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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기대하지 않았다고 했다. 결과적으로도 올해 대한민국영화대상 조연상은 다른 배우에게 갔지만, 진구 본인도 소속사 식구들도 그가 <비열한 거리>로 영화제 조연상 후보에 오를 줄 예상조차 안 했다 한다. 후보에 오른 사실도 (일주일에 한두번씩 해오던 대로) 제 이름 쳐넣어 기사 검색하던 와중에 우연히 발견했다. 회사에는 모른 척했고, 회사 식구들도 지나가는 말인 양 ‘후보에 오른 건 알지?’라고 물은 정도였다. “되게 기분 좋았”으며 시상식장에서 떨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덤덤하려고 애썼다고 한다. <올인>(2003)을 하면서 하루 200통씩 오던 팬레터들이 한달 만에 “누가 훔쳐간 것처럼” 뚝 끊겼던 그때가 지금도 감사하다고 진구는 몇번을 말한다. "상처를 좀 많이 받았죠. 근데 그때 그런 걸 경험 안 했으면 지금쯤 되게 거만해졌을 거예요.” 영화제가 대표작으로 언급한 건 <비열한 거리>라 해도, 그가 올해 보여준 재능은 상두(조인성)에 대한 충
<비열한 거리> <아이스케키> <사랑따윈 필요없어>의 배우 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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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많이 들어오면 됐지, 뭐.” 아들에게 가드 올리라면서 펀치를 날리는 <천하장사 마돈나>의 무지막지한 아버지, 배에 칼이 들어와도 웃을 것만 같은 <타짜>의 무시무시한 아귀. 조연상 하나쯤은 당연히 받아야 할 한해인데 빈손이 웬일이냐고 했더니, “일감 많이 들어오면 된 것 아니냐”라고 허허한다. 어느 때보다 그물코에 고기가 많이 걸리는 대목. 그렇다고 덥석 물진 않는다. 어느 때보다 신중한 선택을 위해 기다리는 중이다. “올해 여름에 두편의 영화 말고도 연극과 드라마까지 겹쳤다. 배우라는 존재는 몸을 도구로 써야 하고, 그러다보니 최선을 다하고 싶지 않아도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근데 스케줄이 빡빡하다 보니까 아무래도 벅차더라. 무대에 섰는데 숨이 턱까지 차오르더라니까.” 현재는 드라마 <있을 때 잘해!>에 전념하고 있다. 일주일에 4, 5일, 드라마 촬영에만 나선다. “주 5일 근무제도 해보니까 힘들다. 푹 쉬는 것도 아니고. 하루는 애
<천하장사 마돈나> <타짜>의 배우 김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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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하다, 멋지다, 기대한다
그들이 있었기에 2006년은 신선했노라. 올해 한국 영화계는 어느 해 못지않게 새로운 얼굴들을 많이 선보였다. 여기 소개하는 9명은 2006년 들어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널리 알린 인물들이다. <시간> <비열한 거리> 등을 통해 ‘차세대 대형 연기자’의 입지를 확고하게 굳힌 하정우와 진구를 비롯해, <천하장사 마돈나>와 <타짜>로 뒤늦게 눈부신 빛을 발한 배우 김윤석, <사이에서>로 한국 다큐멘터리 흥행기록을 세운 이창재 감독, <사생결단>을 통해 빛과 어둠의 격렬한 충돌을 보여준 오현제 촬영감독, 뮤지컬영화 <삼거리극장>의 오묘기묘한 음악을 만들어낸 김동기 음악감독, 충무로 역사를 바꾸는 영화노조를 일궈낸 최진욱 전국영화산업노조 위원장, 일본영화 전용관 CQN을 만든 이애숙 씨네콰논 부사장, <괴물>의 처연한 괴물을 디자인한 장희철씨가 그들이다. 사실, ‘발견’이란
2006년 한국 영화계를 사로잡은 영화인 9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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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관객을 자극하는 에로틱 판타지
“이상한 일이오. 오늘 저녁 내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소. (…)
자 당신에게 말하는 것, 이게 내 운명이오. 마치 처음인 것처럼 당신에게 말하는 것, 다시 또 그 말들, 늘 같은 말들(…)
당신이 적어도 단 한번만이라도 내 말을 들어주었으면… 거짓처럼 들리는 황홀한 말들, 전략적 말들을. 당신은 나의 금지된 꿈, 그게 거짓이어도 내 유일한 내 고통, 내 유일한 희망이오.”
-<Paroles, paroles>(달리다와 알랭 들롱이 함께 부르는 샹송) 중에서
차가운 달콤함, 내면의 절절한 고독이 스며나오는 크리스털 블루 시선, 어느 각도로 카메라를 들이대건 깔끔하게 선이 떨어지는 수려한 윤곽… 그래서 살아 있는 조각상처럼 보이는 알랭 들롱은 신화적 미모의 스타로 기억된다. 그는 당연히 압도적인 미모 덕에 배우로 발탁되었지만, 초기작 <태양은 가득히>(1960)에서 아웃사이더의 깊은 우울과 분열을 차가운 미소와 악마적
처연한 아름다움의 도취경, 배우 알랭 들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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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퍼런 새벽 같은 허무한 운명의 표정
어린 시절, 영화를 보면서 항상 불만이었던 것이 있었다. 총이나 칼을 맞고 죽어가는 주인공들은 자신을 끌어안고 울부짖는 애인이나 친구에게, 앞뒤에서 악당들이 에워싸고 있거나 말거나, 총알이 날아다니고 폭탄이 터지거나 말거나, 사랑한다느니, 용서해달라느니, 여동생을 부탁한다느니, 한 말 또 하고 또 하다가 옆집 삼돌이네 강아지에게 안부는 안 전하나?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할 무렵에 가서야 겨우 죽었다. 그 순간 하얀 손수건을 눈물로 적시며 우는 이모나 고모가 너무나 철없어 보였고, 어린 나를 극장에 데려간 고마운 이모와 고모를 얕잡아보기까지 했었다. 그런 형편은 주말의 명화나 동네 극장에 간간이 들어오는 할리우드영화들도 마찬가지여서, 동네 극장에 들어오기 한달 전부터 어머니에게 조르고 졸라 겨우 돈을 타내서 보러 간 <바이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멋있는 커크 더글러스가 기생오라비 같은 배신자 토니 커티스에게 손가락만한 부러진 칼에
너무 멋지게 죽어버리는 사나이! 배우 알랭 들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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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치 코트 깃을 올리고 걸어갈 때, 푸른 담배연기를 허공에 뿜을 때, 느닷없이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때 알랭 들롱보다 아름답고 알랭 들롱보다 고독하고 알랭 들롱보다 쓸쓸한 배우는 없다. 남자의 아름다움에 대한 환유이기도 하며,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남성적인 것에 대한 은유이기도 한 제일 유명한 프랑스 배우. 알랭 들롱의 회고전이 12월15일부터 24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영화제 시간표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므로 서울아트시네마 홈페이지를 참조하시길). <태양은 가득히> <로코와 그의 형제들> <지하실의 멜로디> <수영장> <암흑가의 세 사람> <형사> <고독한 추적> <암흑가의 두 사람> 등 대표작 10편이다. ‘그보다 더 멋지게 쓰러져 죽은 남자는 없었고 죽을 때 마지막 입김을 극장에서 코로 맡기까지 했다’는 오승욱 감독의 간증, ‘제임스 딘이나 객기를 부리는 장 폴 벨몽도의 반영웅적 이
프랑스 배우 알랭 들롱을 추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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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휘는 좀처럼 바깥나들이를 하지 않는다. 어둑컴컴한 방 안에만 머문다. 식사도 방 안에서 혼자 해결한다. 그의 유일한 대화 상대는 인터넷이다. 그런 제휘에게 장희가 다가온다. 제빵부터 용접까지 모든 자격증을 손에 넣은 독특한 그녀는 제휘에게 관심을 보인다. 처음엔 마다하지만 제휘 또한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제휘가 조금씩 변화를 보이기 시작할 무렵 고등학교 동창인 표와 그의 연인 로미가 나타난다. 표는 과거 제휘를 괴롭히던 덩치. 제휘는 졸업 뒤 만난 표에게 또다시 구타와 모욕을 당한다. 표를 피해다니던 제휘는 장희가 보는 앞에서 체면을 구기게 되고, 결국 인터넷 너머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한다.
“제목만 보면 동물영화 같다. 사실 그 치타가 아니라 타잔의 곁에 따라다니는 치타라는 뜻인데.” 양해훈 감독의 익살스러운 소개와 달리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는 살벌한 성장영화다. 죽을병이 걸렸다면서 병원을 들락거리는 병철은 초라한 치타 꼴이 된 제휘의 사연을 듣고서 표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의 양해훈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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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는 아이의 아빠는 남아도는 빵을 훔칠 권리가 있다.” 빈민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베 피에르 신부의 말이다. 눈물겨운 부정(父情) 앞에서 도덕률은 한낱 종잇조각에 불과하다고? 신부의 말을 오해해선 안 된다. 도둑질을 권리라고까지 못박지 않는가. 이때의 도둑질은 용서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성직자가 하늘이 내린 계율을 어기고 땅의 악행을 부추기는 건 다른 이유에서다. 한쪽은 굶고, 한쪽은 남아돌다니. 잉여에 대한 분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사회, 배고픈 자는 스스로를 구해야 한다. 그게 마땅하다고 일갈하는 것이다. “빈곤층의 주거문제에 대한 사회와 정부의 무관심을 환기시키고 빈민 스스가 해결책을 찾는” 이른바 스쾃(squat: 점거) 운동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남미와 유럽에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스쾃운동은 한국에도 있다. 이현정 감독의 <192-339: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는 한국의 ‘빈민’들이 벌인 ‘최초의’ 스쾃운동
<192-399: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의 이현정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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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왜 선글라스를 안 벗나요?”라는 질문에 “내 얼굴이 노출되면 지구가 멸망한다”고 답하는 이 사람은 누군가. 그러니까 “우리 할머니가 늑대이기 때문에 나는 4분의 1이 늑대다”라고 말하는 이 자는 도대체 누구냔 말이다. 정병길 감독의 <락큰롤에 있어 중요한 세 가지>는 이처럼 해괴한 발언을 상습적으로 일삼는 세이지가 속한 일본 인디밴드 ‘기타 울프’의 한국 체류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여기서 잠깐. 방금 ‘다큐멘터리다’라고 말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락큰롤에…>는 다큐멘터리와 농담의 중간 정도에 서 있는 영화다.
<락큰롤에…>의 도입부, 내레이터는 무덤덤하게 말한다. “드러머 도루는 미야모토 무사시처럼 도장을 하나하나 깨려고 시도했으나 깨지는 도장이 없었다. 두드려다 두들겨 맞은 그는 자신이 두드릴 게 드럼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드러머의 길을 선택했다…. 기타리스트 세이지의 우상은 이소룡이었고 초등학교 시절 도루와 합동공연할 때 부른 노래
<락큰롤에 있어 중요한 세 가지>의 정병길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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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독립영화제2006이 12월7일(목)부터 15일(금)까지 서울 CGV용산에서 열린다. 상영 기회를 얻지 못해 관객과의 만남이 좌절되는 외부적 환경을 돌파하고, 독립영화의 정체성을 다시 되물어야 할 내부적 상황을 공유하는 자리라는 뜻에서 올해는 ‘파고들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8월부터 한달 넘게 진행된 공모를 통해 접수된 602편의 작품 중 경쟁부문에 오른 작품은 모두 47편. 영화제가 열리는 9일 동안 초청작까지 포함해 76편이 상영된다. “지난해에 비해 출품작 수가 87편이나 늘었으며 2004년에 비해서는 곱절이다”라는 게 영화제쪽 얘기다.
경쟁부문 47편 포함, 총 76편 상영
최근 몇년 동안의 추세처럼 올해도 프리미어 상영작이 대거 포진됐다. 단편 27편, 중편 10편, 장편 10편 등 경쟁부문 상영작 47편 중 프리미어 상영작은 30%에 달한다. 인디포럼, 미쟝센단편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인디다큐페스티발 등에서 상영됐던 작품들 외에 처음으로 관객과 마주하는 작품
12월7일 개막하는 서울독립영화제2006 가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