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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2 토요일 밤 9시40분93년은 우리나라 범죄재연 및 공개수배 프로그램의 원년으로 기억될 만하다. 71년에 방송을 시작하여 89년에 문을 닫은 MBC의 <수사반장>이매주 일요일 저녁 시청자를 초대하던 수사 현장이 그리워질 무렵이었다. 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식 뒤 곧바로 선포한 ‘범죄와의 전쟁’이기폭제가 되어 그해 5월과 7월에 각각 KBS 1TV의 <사건25시>와 MBC의 <경찰청 사람들>이 잇따라 문을 연다.<수사반장>이 기존의 사건을 바탕으로 ‘쓰여진’ 각본 위에 ‘연기’를 풀어놓은 것에 불과했다면 위의 두 방송은 그런 점에서 확실히신선했고 또한 강렬했다. 생생한 범죄현장을 돌며 실제 있었던 일을 가감없는 재연을 통해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이전에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이 프로그램들은 안방의 시청자를 그저 가만히 앉아서 귀만 열어놓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언젠가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에서 ‘지금어디선가 분명히 벌어진 또는
TV 밖 범죄, TV 속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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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를 쓰게 되었을 때 나 생각은 너무나 당연했다. ‘<지옥의 묵시록>을 쓰게 되겠군.’
마치 누군가 내 대신 답해준 것처럼 그렇게 객관적인 대답을 스스로에게 했다.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은 영화라는 것이 저렇게 위대한 작업이구나 하는 감탄을 금치 못했던, 감수성이 극도로 들떠 있었던 열여섯에 만난 영화에의 첫 경험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맥박이, 호흡이 얼마나 가빴던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정작 컴퓨터를 켜고 앉으니, 어쩌자고 나는 이토록 오랫동안 <지옥의 묵시록>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가 갑자기 궁금증이 일었다. 그리고 조금 시무룩해졌다.
돌아오는 칸영화제에 <지옥의 묵시록> 재편집판이 상영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1979년작이니 벌써 20년도 지난 고전(古典)인데, 코폴라 감독은, 필름을 재인화하고 사운드트랙도 디지털화한 2001년판 <지옥의 묵시록>이라며, 새로이 역작이라도 내놓은
섹시한 가지찜처럼, <포스트맨 블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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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성영화제에서 제가 가장 기다렸던 영화는 레아 풀의 <상실의 시대>(Lost and Delirious)였습니다. 이 아줌마영화를 극장 스크린으로 볼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요. 이 작품이 나중에 상영리스트에 추가되었다는 걸 알고 얼마나 기뻤는지모른답니다.어땠냐고요? 레아 풀의 전작들과는 달리 굉장히 통속적이고 단순한 영화였지만 여전히 재미있었답니다. 제가 억지로 끌고 간 사람들도 모두 이영화의 용맹한 로맨티시즘에 푹 빠진 듯했습니다. 그중 한명은 어떻게든 이 영화를 감독의 경험과 연결하고 싶어하기까지 했습니다. 주인공 폴리를영화 속에 그려진 것처럼 비극적인 어릿광대로 만들 정도로 격렬한 사랑을 저렇게 생생하게 그리려면 마땅히 비슷한 체험을 해야 한다나요?그 추론은 보기만큼 그럴싸하지 않습니다. 우선 그 영화에는 수잔 스완이라는 캐나다 작가가 쓴 원작소설이 있고, 풀은 그런 비싼 사립학교를다닐 만큼 부유한 집안 사람이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누가 알겠습
감정으로 기억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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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모토 쇼웨이의 <기린>은 ‘라이더’의 부나방 같은 삶을 그린 만화다. 자동차 대신 오토바이를 고집하는, 극단적인 스피드와 자유를 꿈꾸는 자들. 세상 사람들은 흔히 나이 30이 넘어서도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이들을 ‘또라이’라고 생각한다. 맞다. 극단적인 자유는, 끝까지 돌진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무모함은 젊은 시절에나 가능한 특권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 특권을 놓지 않으려는 이들은, 바보 아니면 아웃사이더다. 아주 드물게 천재거나.나 역시 20대에는, 서른살 이후의 삶을 생각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서른 즈음에>를 부를 때에도 거기에는 현실감이 없었다. 언젠가는 30대를 넘어서고 중년이라는 고개에 접어들겠지. 숨을 헐떡이며, 연신 뒤를 돌아보며. 하지만 아직 오지 않은 미래였을 뿐이다.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언젠가 발 아래를 내려다보면 이미 진창에 빠져 있을 테지만 그 시절에는 알 수 없다. 그 시절의 우상은, 현명한 노인이 아니라 요절한 짐 모리슨이나
서른, 공평한 비극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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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하 | 대중문화평론가 oheunha@hotmail.com● 나는 <파이란>을 보면서 한 가지 사실에 매우 놀랐다. 강재라는 인물이 조금도낯설지 않았던 것이다. 강재는 내가 아기 때부터 십몇년을 살았던 청량리에서 흔히 보아온 동네 청년들과 한마디로 똑같았다. 물론 그 청년들이강재처럼 직업 깡패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고 다니는 행태나 입고 다니는 옷, 매일매일을 소일하는 방식이 너무나 비슷했다.이들의 특징은 “어디에나 있음”과 혹여 없다가도 “홀연히 나타남”이었다. 어둑시근한 만화가게, 등나무 밑 뽑기 좌판, 하교길의 골목, 약장수패의공연현장 등 이들은 사람이 아니라 마치 길거리에 박혀 있는 나무나 간판처럼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듯했다. 이들의 또다른 특징은 애들한테말을 잘 건다는 거였다. 그리고 애들이 관심있어 하는 건 애들보다도 더 좋아했다. 싸움구경, 개잡는 거 구경, 전파상 앞의 프로레슬링 구경,거지나 미친여자 구경 등 아이들이 몰려 있는 곳에는 언제나
강재씨, 오겡끼데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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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뜻함 속에서조차 긴장감과 단호함이 느껴지는 줄리아 로버츠는 자족의 이미지를 풍기는여배우다. 최근 들어 그녀가 맡은 로맨틱한 배역 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것은, 자신을 우러러 마지않는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휴 그랜트의 상대역으로등장했던 <노팅힐>에서의 ‘스타’였다. 다른 건 몰라도, <멕시칸>은 맞지 않는 배우들이 상대역으로 출연할 때 어떤 문제가발생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가끔 가다 매력적이지만 기본적으로는 기능장애 상태인 커플에 관한, 가끔 가다 매력적이지만 기본적으로는 기능장애인이 액션코미디는 사실상 두개의 전혀 다른 영화이거나, 아니면 평행선상을 달리는 두개의 스타 영화이다.첫 장면에서, 한 침대에서 눈을 뜬 샘(줄리아 로버츠)과 제리(브래드 피트)는, 발코니 위아래에서 사랑의 밀어 대신 귀따가운 고성방가와 놀라자빠질연극적 몸짓들을 주고받은 뒤 잽싸게 갈라선다. 그리고 그뒤 90분 남짓, 이 영화는 전적으로 ‘그의 영화’이거나 아니면 ‘그녀의 영화’다.피트
그의 영화냐 그녀의 영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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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마음을, 당신의 마음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인간의 마음은 카오스다. 선과악 어느 하나로 규정짓거나, 자신의 의지로 올곧게 움직일 수 없는 혼돈. 누군가를 사랑한다거나 미워한다는 마음 역시, 하나의 방향으로 일관되게흘러가지 않는다. 애증이 들끓고 믿음과 배신이 자연스레 공존하는 곳. 이 세상이고, 곧 우리의 마음이다.<카오스>는 우리의 마음처럼 종잡을 수 없게,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호흡법과 스텝으로 흘러간다. 시작은 가정주부의 유괴사건.남편인 고미야마와 점심식사를 한 뒤 아내인 사오리는 종적을 감췄다. 협박전화가 걸려와 고미야마가 돈을 가져가지만, 범인은 나타나지 않았다.유괴사건은 자작극이었다. 사오리는 남편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하여, 심부름센터를 운영하는 구로다에게 부탁을 한다. 조금 머뭇거렸지만 구로다는성실하게 고객의 부탁을 들어준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은신장소로 돌아온 구로다는 사오리의 시신을 발견한다. 그곳으로 걸려온 낯선 남자의전화. ‘시체를 좀
그들의 카오스, 침묵 속의 울부짖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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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yKids제작엘리자베스 애블린,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각본 로버트 로드리게즈 출연 안토니오 반데라스, 칼라 구기노,알렉사 베가, 대릴 사바라, 알렌 쿠밍, 태리 해쳐 수입 태원엔터테인먼트 배급 시네마서비스 개봉예정7월 말로버트 로드리게즈가 가족영화를 찍었다구? 설마. <엘 마리아치>의 피튀기는 총탄전이나 <황혼에서 새벽까지>의엽기적인 뱀파이어 공습이나 <패컬티>의 발칙한 마약 찬양론을 기억한다면 고개를 갸우뚱할 일이다. 그러나 로드리게즈는 <패컬티>의첫선을 보이던 수년 전의 베니스영화제에서 “내 아이들과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한 터였다. 올 봄, 그는 가족영화<스파이 키드>를 내놓으며 그 약속을 지켰다. 액션, 호러, 판타지가 뒤섞인 성인용 오락물을 만들어온 로드리게즈는 자신의 장기를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아이들의 눈높이를 고려한 매혹적인 가족영화를 선보이는 데 성공했다. <스파이 키드>는 전
부모님을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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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25일 제38회 대종상영화제 시상식이 열린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앞. 붉은 카펫 위 스타들의 걸음이 놓일 때마다 어지러운 인파또한 일제히 들썩거렸다. 어찌하다보니 사람들에 묻혀 직각 대열을 이루게 된 아저씨나 일찌감치 캠코더를 챙겨들고 배우 사냥에 나선 노란머리아이나,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줄서는 데 여념이 없는 아줌마 부대나 다들 축제를 만끽할 의지는 충분해 보였다. 이상 열기는 시상식장으로계속되어, 후보자가 거명될 때마다 고성으로 뿜어져나왔다. 그러나 엉성한 진행과 공정성이 의심되는 심사결과가 이들의 착한 흥을 깨고 말았다.한국영화인협회와 한국영화인회의가 처음으로 공동 주최한 이번 영화제 시상식에서는 <공동경비구역 JSA> <리베라 메><하루> 등이 나란히 4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감독상과 심사위원 특별상 등 <하루>의 예기치 않은 수상과 <친구>푸대접이 네티즌들의 '대종상 무용론'을 불러일으켜 기대되던 화합의 영화인
대종상영화제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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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니발살인마 한니발 렉터 박사가 사라지고 10년 뒤. 베테랑이 된 클라리스 스탈링 요원은 작전중에 곤경에 처한다. 그리고 한니발렉터 박사에게서 연락을 받는다. 리들리 스콧 감독, 앤서니 홉킨스, 줄리언 무어, 게리 올드먼 출연, UIP코리아 수입·배급, 상영시간 131분김봉석 전편과는 무관한, ‘평범한’ 범죄영화 ★★박평식 이보다 더 끔찍한 저녁식사는 없으리 ★★☆심영섭 조디, 내 골을 돌려줘 ★★☆유지나 지적 파워로 무장한 닥터 렉터, 그러나 스탈링은 둔했다. ★★★■ 프린스 앤 프린세스어둠이 내린 낡은 영화관. 변신 마술 기계를 가진 늙은 영사기사와 소년, 소녀는 여섯개의 짧은 동화를 짓고, ‘다이아몬드와공주’부터 ‘왕자와 공주’까지 직접 그 이야기 속 인물이 된다. 미셸 오슬로 감독, 백두대간 수입·배급, 상영시간 70분박평식 신기하고 흥겨워라, 그림자가 이토록 영롱하다니 ★★★☆심영섭 이순간 한장의 종이는 더이상 종이가 아닙니다 ★★★★홍성남 결코 끝나지 않을 매혹적인
한니발 / 프린스 앤 프린세스 / 인디안 썸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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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시절부터 시를 읽고 또 쓰기를 좋아했던나는, 급기야 영화의 주제가 가사를 직접 짓기에 이른다. <청춘사업>의 주제가 역시 가슴속에오래도록 담겨진 한편의 시가 저절로 흘러나온 것이었다. 노래를 불러준 심성호의 목소리도 좋았다. <청춘사업>과 <주책바가지>가잇달아 흥행에 성공하면서 나는 새로운 코미디 형식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뮤지컬과 코미디와의 배합이 그것이었다. <청춘사업>의김문엽이 다시 펜을 잡고 <폭발 일초전>이라는 이름으로 각본을 쓰기 시작했다. 사실 각본이 끝나기 전부터 제목이 검열에 걸리지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존재해왔다. 아니나 다를까 촬영을 마치고 심의를 받는데 영화이름이 문제가 되었다. 결국 <즐거운 청춘>이라는이름으로 바꿔 극장에 걸 수밖에 없었다. 단지 ‘폭발’이라는 말이 들어간 이유로 영화가 심의를 통과하지 못한다는 건 지금은 상상도 못할일이다.<즐거운 청춘>(1968)은 또다른신기록의
배고픈 민중, 웃음의 배를 불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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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아들이라면 누구나 어머니의 생일선물을 고르는 데 고심하는 법. 대만의 리안은 한번의 포옹과 케이크, 그리고 오스카 트로피를 준비했다. 리안은 최초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대만인. 그는 수상 이후 처음으로 지난 23일 가족과 재회했다. “생신 축하드려요, 어머니. 오늘은 어머니가 제 주연배우예요.” 트로피를 건네며 리안이 한 말이다. “영광스럽구나.” 리안 감독의 어머니 리양시 여사는 트로피를 껴안으며 답례했다. 배낭에 오스카 트로피를 넣고 귀국한 리안은 6일간의 체류기간 동안 대통령을 만나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을 예정이다.
최고의 생일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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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마다 만돌린을 연주하는 니콜라스 케이지. 케이지가 신작인 캡틴 코렐리 감독의 <만돌린>을 위해 난생처음 악기 연습을 하고 있다고 아나노바가 보도했다. “난 이제껏 음악교육을 받은 적이 없지만 우리 집안에는 음악에 재능있는 사람들이 많지요. 매일 밤 몇 시간씩 연습하면서 어딘가 숨어 있을 재능이 튀어나오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동명소설을 바탕으로 하는 이 작품에서, 케이지는 그리스 섬에 주둔하고 있는 이탈리아 장교로 나온다. 아직 그의 실력은 “카메라 앞에 서기 두려운” 수준이라고 자평.
재능아, 제발 나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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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선생을 TV강의가 아니라 스크린에서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얼굴과 목소리가 아니라 글로 말이다. 김용옥 교수가 임권택 감독의 <오원 장승업>의 시나리오를 맡게 되었다. 김용옥 교수는 현재 임 감독과 연출부가 만들고 있는 초안을 바탕으로 5월부터 본격적인 시나리오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88년 <깜동>의 각본을 쓰기도 했던 김용옥 교수는 임권택 감독과 90년 <장군의 아들>의 구성작업을 함께한 이후로 91년 <개벽>의 시나리오를 맡기도 했다.
도올과 장승업의 만남?